어느 철학과 자퇴생의 나날 - 2015년 제11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김의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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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왠지 철학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 조금 묵직한 소설 같다. 묵직한 것은 맞지만 철학을 다루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살고 있는 한 가족의 삶이 나온다. 물론 이들보다 더 낮은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트랜스젠더고, 이것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운 한 나약한 대학생이 고등학생의 먹이처럼 다루어지는 이야기라면 다르다. 읽으면서 답답하고 불편함을 느낀 것은 그를 괴롭히는 악마같은 고등학생 때문이 아니고 바로 인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무력하고 겁에 질려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것을 하나씩 풀어내면서 인우와 그의 엄마의 삶을 보여준다.

 

인우와 같이 살고 있는 엄마는 사실 아빠였었다. 여성의 영혼에 남자의 피부를 덧씌운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런 성향이 있었지만 그 당시 어느 부모가 이것을 인정했겠는가. 여자와 결혼하고, 아들까지 낳았지만 자신 속에 숨겨져 있던 여성을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 이혼한다. 아들을 자신이 키운다. 다섯 살 아들을 대학까지 보내지만 그 삶이 결코 평탄하지 않다. 완벽한 여자가 되고 싶지만 수술에 필요한 돈이 없다. 태국에서 하는 수술도 쉬운 것이 아니다. 여성 호르몬 주사를 맞고, 가슴 수술도 해서 옷 밖으로 여성처럼 보이지만 아직 성기까지 변한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그를 아직 우리 사회가 제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근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등이 방송에 나온다고 하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현실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을 밝히는 것은 아직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인우는 정상적으로 잘 자란 것 같아 보이지만 늘 불안감을 품고 있다. 하나는 자신도 아버지였던 엄마처럼 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엄마의 정체가 드러나 엄마와 자신의 삶이 엉망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다. 첫 번째 부분은 어느 정도 해결되었지만 두 번째는 아직도 그의 삶을 뒤흔들고 있다. 이 소설 속에 일어나는 많은 위악적이고 혐오스러운 일들이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자신이 나약하고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는 이유 대신 핑계를 되는 것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1505호 고등학교 퇴학생에게 강간을 당하고, 돈을 빼앗기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과 1504호 아줌마의 놀라운 공격이 대조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트랜스젠더에 나이까지 많은 엄마는 그렇게 많은 돈을 벌지 못한다. 해바라기라는 성 소수자 카페에서 일하지만 겨우 임대아파트에 살면서 여성 호르몬 주사를 맞을 정도 밖에 벌지 못한다. 하지만 아들을 대학에 보낼 정도의 노력은 한다. 다만 아들에게 일어난 한 사건 때문에 자퇴생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아들인 인우는 보신탕집에서 죽은 개를 태우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죽기 직전의 개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개를 데리고 오면 보신탕집 주인이 죽이고, 그는 개털을 태워 식당에 가져다준다. 이 일로 한 달에 버는 돈은 겨우 70만 원 정도다. 왜 이런 일을 할까? 의문이 들었다. 다른 알바도 많은데 하고. 나중에 작가는 그가 했던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나열하면서 도시 생태계 최하층민의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알려준다.

 

읽으면서 욕이 나오고 분노했다. 1505호 악마가 보여준 행동이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보여줄 때나 인우가 너무 쉽게 무너질 때 그랬다. 그는 진심으로 사람들을 대하지 않는다. 자신의 실체를 밖으로 드러내지도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엄마의 문제로 뒤덮으면서 스스로 위로한다. 아주 연약한 초식동물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외모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곱상함이 있는 모양이다. 악마와 그 무리들이 뒤에서 덮칠 정도다. 읽으면서 환경과 조건만 맞다면 꽃미남 연예인이 될 외모가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작가는 그의 외모에 대해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의 주변에서 그를 노리는 여자들만 보여줄 뿐이다.

 

연약하고 예쁜 초식동물은 언제나 포식자들의 좋은 먹잇감이다. 1505호 악마가 바로 그 포식자다. 그를 피해 다니지만 항상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등학생을 악마라고 부르게 된 이유를 들려줄 때 그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지만 당사자에게는 그 일말의 가능성이 무서운 모양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은 의외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인지 아니면 더 내려갈 바닥이 없다는 절망감의 표현인지 모르겠다. 인우의 삶이 힘겹고 무겁고 달아나고 싶을 때 읽는 나도 같은 감정의 깊이를 살짝 느낀다. 모두 읽은 뒤에도 불편함과 불쾌함이 여운처럼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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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나라 - 제5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이광재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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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다. 이 문학상 수상작을 처음 읽는다. 이전 수상작들을 찾아보니 제목을 아는 소설이 몇 편 있다. 딱 그 정도다. 소설 <혼불>을 읽어보지 못한 관계로 이 문학상이 추구하는 바를 정확하게는 모른다. 다만 <혼불>이 재간되기 전 절판되어 많은 독자들이 읽기를 원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장르 소설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대하장편소설을 읽은 적이 없는 것을 감안하면 당연할 수도 있다. 진득하게 작품을 읽기에는 끈기가 너무 없어진 것이다. 그래도 늘 좋은 대하장편소설을 욕심내고 형편이 되면 산다.

 

구한말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했다. 요즘처럼 국정교과서로 역사 문제가 시끄러운 이때, 이 소설은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웠던 동학농민혁명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한다. 단순히 동학도가 남도에서 흥기하여 무작정 한성으로 진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그 당시 조선과 조선을 둘러싼 나라들 사이의 역학관계를 간결하게 다루었다. 실제 다루고 있는 내용이나 인물 등을 생각하면 한 권으로 압축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작가는 많은 가지를 쳐내고, 핵심 되는 내용과 인물을 통해 그 시대를 재현해내었다. 그 속에는 동학농민군을 무식하고 미신에 휩싸인 무리였다는 속설을 뒤집는 것도 적지 않다. 아니 새로운 시대를 열려는 의지가 더 굳건하게 담겨 있다.

 

지금까지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상상력의 부산물인지 알 수 없지만 전봉준과 대원군의 만남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상대와 힘을 합치고, 권력을 잡은 후 다시 내부적으로 싸우려는 의도가 나올 때 병법의 기본 원칙이 느껴졌다. 이렇게 소설은 조선 조정과 그곳을 둘러싼 권력의 관계자들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고, 다른 한 축은 전봉준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삶이 내용을 가득 채운다. 개인적으로 나의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전봉준 측이 아닌 일본의 힘을 이용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김교진 등의 세력이다. 역사의 결과를 알고 있는 독자의 시점에서 본다면 그들의 노력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있다.

 

솔직히 말해 소설을 조금 힘겹게 읽었다. 문체나 문장이 그렇게 가독성이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취향에 맞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문장에 호흡을 맞추다 보면 읽는 속도가 떨어진다. 최근 나의 독서가 이런 종류와 동떨어져 있다 보니 더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여기에 적지 않은 인물들이 주연 및 조연으로 등장하는데 어느 순간 한두 명씩 사라졌다.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는데 그들이 개인이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해도 소설 속에서 비중 있게 나왔다면 그 어떤 흔적이라도 남았으면 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소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통찰력 있는 인물이었던 이철래가 너무 힘없이 사라졌기에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 당시 힘의 역학 관계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자신의 양심 때문에 고뇌하던 그는 시대를 앞선 모습이었다.

 

녹두장군, 전봉준. 민요로도 남아 있는 그를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그의 모습은 아주 인간적이다. 동학 접주들을 만나 세를 규합하고, 그들을 이끌고 봉기하지만 현실 속에서 그는 아주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것은 전봉준을 한양까지 끌고 가는 과정을 다룬 한승원의 <겨울잠 봄꿈>이었다. 이번 소설에서는 아주 짧게 다루지만 두 작품 속 전봉준과 그들 둘러싼 사건들이 조금은 다르게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아쉬운 대목이 있다. 바로 그들의 의지와 노력과 혁명이 역사에 의해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결과를 아는 작가의 의지가 너무 노골적으로 개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큰 아쉬움은 분량이 적어 충분한 내용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가 한국근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머어마한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역사와 작가의 상상력으로 세밀하게 채워 넣을 이야기가 너무 많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친일로 돌아선 사람들의 심리와 그 당시의 역학관계를 제대로 다루었다면 아주 멋진 정치 소설이 등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너무 방대한 이야기의 많은 가지를 쳐내면서 적절하게 풀어낸 것에는 박수를 치지만 말이다.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고, 비교하고, 분석한다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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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화를 내봤자 - 만년 노벨문학상 후보자의 나답게 사는 즐거움
엔도 슈사쿠 지음, 장은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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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 소설을 좋아해 많은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 최근에는 액션이나 추리 등의 장르물에 더 눈길을 두지만 그 이전에는 문학상을 받은 작품을 중심으로 읽었었다. 물론 지금처럼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 많은 소설을 읽었다. 영화로 만들어져서 읽었고, 유명한 작가라서 읽었고, 재미있다고 해서 읽었었다. 그 당시에 엔도 슈사쿠의 소설 중 한 편 정도는 읽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보지만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다. 설마 한 편도 읽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 하고 약간 의심도 해본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침묵>도 나 스스로 자신할 수 없다. 몇 번이나 살 기회가 있었지만 처음에는 읽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 다음은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란 점 때문에 사지 않았다. 읽은 것에 대한 진실은 아직도 미궁 속에 있다.

 

이 에세이는 엔도 슈사쿠가 다양한 지면을 통해 발표한 것을 묶어서 내놓은 것이다. 지면 사정이나 그 당시 요청에 따라 분량이 모두 달랐던 모양이다. 긴 것은 몇 쪽에 달하고 짧은 것은 두세 쪽에 불과하다. 이 분량 차이가 가끔 예측하지 못한 부분에서 끝난 듯한 느낌을 주지만 그래도 지금부터 2~30년 전 작가의 생각과 문화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때와 지금의 문화나 사회 분위기 차이가 느껴지는 대목들이 상당히 있는데 이것도 상당히 재미있다.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는 나의 아련한 추억을 되살려주기도 한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가볍게 풀어내었다. 병으로 힘들게 산 듯한데 글은 그 무게를 대부분 지워내고 유쾌하고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다. 그 중에서 몇 편은 읽다가 크게 웃었다.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그 중 한두 가지만 소개하자. 한 잡지의 어떤 학생이 원고 청탁을 가면서 먼저 전화를 해주지 않았다고 타박하는 작가에게 집 앞 쌀가게에서 전화를 하면서 원고를 부탁한다. 황당하고 기가 막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작가가 이 요청을 수락하고, 그 잡지는 다 팔린다. 이 보다 더 황당한 이야기는 소변 검사용 컵에 똥을 담아온 친구에 대한 것이다. 왜, 어떤 생각에서 이런 일을 한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아주 즐겁게 웃게 만든다.

 

노작가가 들려주는 삶의 지혜는 곳곳에 드러난다. 변화하는 세태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부분도 있고, 자신의 경험담을 진솔하게 풀어낸 부분도 있다. 개인적으로 후자가 더 재미있지만 전자도 유념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다. 그것이 비록 2~30년 전에 일본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현재 우리의 삶과 겹쳐지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도쿄 대학 진학에 힘쓰는 모교에 대한 글이나 빛바랜 경로의 날 등이 대표적이다. 다양성이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기념일 등이 본질을 왜곡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속에서도 그가 보여주는 자신답게 살고자 하는 노력과 즐거움은 눈길을 끈다.

 

소설가라서 받게 되는 편지나 영어 실수담으로 경쾌하게 시작한 글은 마지막에 병문안과 인생관으로 마무리된다. 앞이 유쾌하고 쉽게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뒤의 글은 곱씹어 읽을 필요가 있다. 특히 병문안에 대한 이 글은 잘 몰랐던 부분이다. 나의 욕심이 환자를 힘들게 한 적이 적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마지막 이야기의 제목이 ‘괴로운 즐거움’인데 이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한 작가 나름의 표현방식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도 이 길을 가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그의 이 표현은 개인적으로 삼하게 공감대를 형성한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즐겁고 유쾌하게 읽었다. 엔도 슈사쿠의 다른 책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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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적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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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적이었던 놈과 함께 1주기 기일에 그녀의 유골함을 들고 튄다는 설정이 시선을 끌었다. 이 설정을 읽고 머릿속에서 시나리오 한두 개가 스쳐지나갔다. 소설과 비슷한 것조차 없었지만 이런 상상이 재미있었다. 그런데 연적이라고 하면 보통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했던 남자가 먼저 떠오른다. 이 둘이 서로에 대해 잘 알고, 그녀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연적은 그런 식이 아니다. 한 명이 먼저 사귀고, 다음 남자와 새롭게 사귄다. 연적보다는 오히려 이전 남자 친구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 둘 다 그녀가 죽기 전에 차였으니 말이다.

 

소설을 끌고 나가는 주인공은 출판사 편집자이자 죽기 전에 재연과 헤어진 고민중이다. 그는 어느 날 한 통의 문자를 받는다. 죽은 그녀의 번호로 부고장이 온 것이다. 운전을 못하는 그는 힘겹게 빈소를 찾아간다. 그녀와 헤어진 이유 중 하나로 결정 장애를 꼽는데 이름처럼 그는 생각이 많고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리고 1주기 때 그녀의 납골당을 힘들게 찾아간다. 시외에 있고, 차가 없으면 찾아가기 힘든 곳이다. 이곳에서 그는 재연의 또 다른 남자 친구 앤디를 만난다. 그녀를 추억하고 애도하기 위해 온 것이다. 앤디의 차를 타고 오는데 앤디가 우발적인 제안을 한다. 그녀의 유골을 그렇게 좁은 납골당 속에 놓아둘 수 없다는 것이다. 민중도 동의한다. 함께 간단한 작전을 짜고 유골을 훔친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한다.

 

앤디의 본명은 병균이다. 성은 강 씨다. 그는 재연이 일했던 헬스클럽 사장이었다. 몸 좋고, 허세가 가득하다. 머리가 좋지 않지만 행동 하나는 재빠르다. 그런데 허술한 구석이 많다. 그와 함께 유골을 훔친 민중은 약한 체격에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는 비루한 식자다. 앤디의 등치를 보고 약간 겁을 먹지만 나름 머리를 써 위기를 넘어간다. 왠지 모르게 이 둘이 어느 순간 잘 어울리기 시작한다. 앤디가 첫날 재연의 유골함을 들고 도망가려고 할 때 약간의 갈등이 있지만. 그리고 이때 유골함이 깨어진다. 그녀의 유골함이 단백질 통으로 바뀐 것도 이때다. 무작정 훔친 유골을 그녀가 바라는 곳으로 데리고 가자고 서로 동의한다. 그렇게 처음 간 곳이 남해다.

 

그녀가 좋아했던 소요 해변은 개발로 변했다. 민중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둘은 술을 진탕 마시고, 앤디가 새로운 지역으로 제주를 말한다. 둘이 합의하고 여수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려고 한다. 여수는 앤디의 고향이다. 여기서 생긴 조그만 에피소드는 작은 재미를 준다. 허세 가득한 앤디는 중고 BMW를 팔아 여행 경비를 마련한다. 앤디의 멋진 몸과 붙임성 있는 말투는 여기저기에서 여자를 끌어당긴다. 재연 이전에 단 한 명의 여자도 사귀지 못했던 민중에게는 부러운 일이다. 괜히 트집을 잡는다. 재연을 위한 여행이란 핑계를 댄다. 제주로 날아갔지만 그녀가 좋아했던 오름을 찾지 못한다. 하지만 앤디는 재연의 페이스북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 이 번호는 새로운 사건을 여는 열쇠가 된다.

 

한 여자의 추억을 둘러싼 두 남자의 여행이 그렇게 긴장감 넘치고 재밌는 장면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지만 소소한 재미로 몰입하게 만든다. 남들이 볼 때는 홀쭉이와 뚱뚱이처럼 보일 정도로 극과 극의 외형과 성격을 가진 둘이다. 서로의 기억을 말하고, 비교하고, 자신들의 삶을 늘어놓기 시작하면 둘의 사이는 가까워진다. 그러다 재연이 쓴 소설이 왜 출간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앤디가 제기한다. 소설 출간을 거부한 것은 사실 그녀가 먼저다. 명확한 이유를 민중조차 몰랐다. 하지만 앤디가 보여준 비밀번호가 이 답을 찾게 만들었다. 그리고 드러나는 사실은 추악한 문화계의 모습이다. 작가가 이미 경험한 것을 각색한 것이다. 인간의 비열함이 묻어나는 것도 이 부분이다.

 

그렇게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작가는 곳곳에 아주 현실적인 장면들을 넣어 놓았다. 운동권 출신 아버지가 학원장이 되면서 보수골통의 모습을 보여주거나 유체이탈 화법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에서 우리의 현실의 살짝 비틀었다.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 이면에 도사린 문화적 폭력 또한 현실의 한 모습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나약하고 결정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민중을 등장시켜 우리의 민낯을 보여준다. 이것을 그대로 깨트리는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앤디다. 말보다 행동이다. 소설 곳곳에 이런 것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어떻게 보면 뻔한 설정과 전개일 수도 있지만 이런 장면들이 균형을 잡아주면서 살짝 웃게 만든다. 소설 속 몇 곳은 바로 달려가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물론 소요 해변은 개발로 엉망이 되었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꾼 한 명이 또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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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 - 처음 만나는 스페인의 역사와 전설
서희석.호세 안토니오 팔마 지음 / 을유문화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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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공저로 쓴 스페인 역사 이야기다. 스페인에 정착한 한국인과 스페인 역사학과를 졸업한 여행 가이드가 힘을 합쳐 썼기 때문이다. 모두 일곱 장으로 나누었는데 전설의 헤라클레스부터 대항해 시절까지의 스페인 역사를 다룬다. 구성에서 알 수 있듯이 책은 역사와 전설과 야사를 적절하게 섞어 상대적으로 딱딱할 수 있는 역사를 부드럽게 풀어내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역사고, 낯선 이름들이 나오면서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읽는 속도가 떨어졌다. 그렇지만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몇 가지 사실을 새롭게 하면서 이베리아 반도 이야기에 조금씩 젖어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스페인에 관심이 생겼다. 아마도 가우디의 건축물을 본 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전에 스페인 영화를 볼 때 강한 끌림을 받은 영화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장면들 때문에 봤다. 투우를 둘러싼 논쟁과 그것에 강하게 끌린 작가들의 글들을 읽으면서 단편적인 지식을 쌓았지만 거기에서 항상 멈추었다. 여행에 관심을 두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려고 계획을 짤 때도 그렇게 가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지중해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가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스페인이라고는 가우디와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 등이 전부였는데 말이다, 그 궁금점을 이 책이 채워주길 약간은 바랐는데 나의 무지와 엮이면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머리말에서 내가 알고 있던 스페인의 이미지를 산산조각내었다. 그것은 스페인이 수많은 이민족의 침략을 받으면서 그들의 조상이 누군지 알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 부분 때문이다.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스페인의 이미지는 보통 이슬람이 기독교 세력에게 쫓겨난 이후와 그 유명한 무적함대 정도였다. 하지만 그 이전과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헤라클레스까지 자신들의 역사에 끌고 들어왔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 다음이 바로 로마 시대였는데 왜 이 반도가 중요했는지 알려줄 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대에 이베리아 반도의 은광과 대항해 시대 아메리카 대륙의 금광이 묘하게 연결되면서 역사의 한 장면들이 겹쳐보였다.

 

서고트 왕국을 지나 이슬람 시대로 넘어오면서 몇몇 낯익은 이름이 나오고, 몇 장의 지도를 보면서 내가 알고 있는 지명과 그 의미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하지만 어려웠다. 처음 접하는 스페인의 역사이다 보니 너무 낯설었다. 단편적인 지식으로 그 틈을 메우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비슷한 왕 이름과 몇 세라는 단어가 붙게 되면서 더 어려워졌다. 외국 소설이나 역사를 읽을 때 늘 고전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한국이나 중국 역사를 읽을 때도 물론 이런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익숙해지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되고 난 후의 역사도 내가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단순한 분리주의 요구와 너무 달랐다. 스페인의 통일 이전에 왜 세비아가 중요한 도시였는지 알려주고, 이 작은 반도 안에서 어떤 왕국들이 대결하면서 권력을 잡았는지 보여줄 때 동북아시아의 그것과 너무 비교가 되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구축되지 않음으로서 일어난 수많은 반란과 전쟁은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리고 이 지역을 두고 주변 국가들이 보여준 대결 구도는 짧게 나오지만 그 시절 유럽사를 공부할 때 아주 재밌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권력을 잡기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몰아내고, 형이나 동생을 죽이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 역사를 보면서 권력의 비정함을 다시 한 번 더 느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콜럼버스가 식민지에서 어떤 악행을 펼쳤는지 다시 보여줄 때 우리가 배운 역사란 것이 얼마나 단편적이고 왜곡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요즘 정부가 추진하는 국정화가 역사를 얼마나 왜곡할 수 있는지 생각하면 끔찍하다. 이 책에서도 수많은 정사와 함께 야사와 전설이 같이 다루어지는데 정확한 사료가 없다보니 해석에 따라, 혹은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바뀐다. 전설과 함께 다루어진 역사 이야기이다 보니 딱딱함은 덜하지만 약간 산만한 부분이 곳곳에서 보인다. 스페인 역사에 관심 있는 독자가 입문용으로 차분하게 읽는다면 나쁘지 않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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