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적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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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적이었던 놈과 함께 1주기 기일에 그녀의 유골함을 들고 튄다는 설정이 시선을 끌었다. 이 설정을 읽고 머릿속에서 시나리오 한두 개가 스쳐지나갔다. 소설과 비슷한 것조차 없었지만 이런 상상이 재미있었다. 그런데 연적이라고 하면 보통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했던 남자가 먼저 떠오른다. 이 둘이 서로에 대해 잘 알고, 그녀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연적은 그런 식이 아니다. 한 명이 먼저 사귀고, 다음 남자와 새롭게 사귄다. 연적보다는 오히려 이전 남자 친구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 둘 다 그녀가 죽기 전에 차였으니 말이다.

 

소설을 끌고 나가는 주인공은 출판사 편집자이자 죽기 전에 재연과 헤어진 고민중이다. 그는 어느 날 한 통의 문자를 받는다. 죽은 그녀의 번호로 부고장이 온 것이다. 운전을 못하는 그는 힘겹게 빈소를 찾아간다. 그녀와 헤어진 이유 중 하나로 결정 장애를 꼽는데 이름처럼 그는 생각이 많고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리고 1주기 때 그녀의 납골당을 힘들게 찾아간다. 시외에 있고, 차가 없으면 찾아가기 힘든 곳이다. 이곳에서 그는 재연의 또 다른 남자 친구 앤디를 만난다. 그녀를 추억하고 애도하기 위해 온 것이다. 앤디의 차를 타고 오는데 앤디가 우발적인 제안을 한다. 그녀의 유골을 그렇게 좁은 납골당 속에 놓아둘 수 없다는 것이다. 민중도 동의한다. 함께 간단한 작전을 짜고 유골을 훔친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한다.

 

앤디의 본명은 병균이다. 성은 강 씨다. 그는 재연이 일했던 헬스클럽 사장이었다. 몸 좋고, 허세가 가득하다. 머리가 좋지 않지만 행동 하나는 재빠르다. 그런데 허술한 구석이 많다. 그와 함께 유골을 훔친 민중은 약한 체격에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는 비루한 식자다. 앤디의 등치를 보고 약간 겁을 먹지만 나름 머리를 써 위기를 넘어간다. 왠지 모르게 이 둘이 어느 순간 잘 어울리기 시작한다. 앤디가 첫날 재연의 유골함을 들고 도망가려고 할 때 약간의 갈등이 있지만. 그리고 이때 유골함이 깨어진다. 그녀의 유골함이 단백질 통으로 바뀐 것도 이때다. 무작정 훔친 유골을 그녀가 바라는 곳으로 데리고 가자고 서로 동의한다. 그렇게 처음 간 곳이 남해다.

 

그녀가 좋아했던 소요 해변은 개발로 변했다. 민중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둘은 술을 진탕 마시고, 앤디가 새로운 지역으로 제주를 말한다. 둘이 합의하고 여수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려고 한다. 여수는 앤디의 고향이다. 여기서 생긴 조그만 에피소드는 작은 재미를 준다. 허세 가득한 앤디는 중고 BMW를 팔아 여행 경비를 마련한다. 앤디의 멋진 몸과 붙임성 있는 말투는 여기저기에서 여자를 끌어당긴다. 재연 이전에 단 한 명의 여자도 사귀지 못했던 민중에게는 부러운 일이다. 괜히 트집을 잡는다. 재연을 위한 여행이란 핑계를 댄다. 제주로 날아갔지만 그녀가 좋아했던 오름을 찾지 못한다. 하지만 앤디는 재연의 페이스북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 이 번호는 새로운 사건을 여는 열쇠가 된다.

 

한 여자의 추억을 둘러싼 두 남자의 여행이 그렇게 긴장감 넘치고 재밌는 장면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지만 소소한 재미로 몰입하게 만든다. 남들이 볼 때는 홀쭉이와 뚱뚱이처럼 보일 정도로 극과 극의 외형과 성격을 가진 둘이다. 서로의 기억을 말하고, 비교하고, 자신들의 삶을 늘어놓기 시작하면 둘의 사이는 가까워진다. 그러다 재연이 쓴 소설이 왜 출간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앤디가 제기한다. 소설 출간을 거부한 것은 사실 그녀가 먼저다. 명확한 이유를 민중조차 몰랐다. 하지만 앤디가 보여준 비밀번호가 이 답을 찾게 만들었다. 그리고 드러나는 사실은 추악한 문화계의 모습이다. 작가가 이미 경험한 것을 각색한 것이다. 인간의 비열함이 묻어나는 것도 이 부분이다.

 

그렇게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작가는 곳곳에 아주 현실적인 장면들을 넣어 놓았다. 운동권 출신 아버지가 학원장이 되면서 보수골통의 모습을 보여주거나 유체이탈 화법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에서 우리의 현실의 살짝 비틀었다.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 이면에 도사린 문화적 폭력 또한 현실의 한 모습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나약하고 결정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민중을 등장시켜 우리의 민낯을 보여준다. 이것을 그대로 깨트리는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앤디다. 말보다 행동이다. 소설 곳곳에 이런 것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어떻게 보면 뻔한 설정과 전개일 수도 있지만 이런 장면들이 균형을 잡아주면서 살짝 웃게 만든다. 소설 속 몇 곳은 바로 달려가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물론 소요 해변은 개발로 엉망이 되었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꾼 한 명이 또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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