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하우에서 온 편지
앤 부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책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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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시간은 나라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나라는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고 윤색하기 바쁘다. 어떤 나라는 잘 숙성시킨 와인처럼 역사의 진실을 더 강하게 드러낸다. 청산되지 못한 과거가 새로운 옷을 갈아입었다고 화장을 했다고 뻔뻔하게 진실을 왜곡한 채 자기 목소리를 내세운다. 이들이 하는 일들 중 하나가 바로 역사를 왜곡하고, 역사 교과서를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바꾼다. 밖으로는 화려한 말로 열심히 자신들이 진실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포장하지만 실제 하는 것은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과거사와 더불어 항상 같이 말해지는 단어가 있다. 용서다. 웃기는 것은 용서란 단어를 피해자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같은 부류끼리 모여 돈을 주고받은 것을 가지고 청산되었다니 이제 과거는 잊고 용서하자니 미래를 위해 나아가야할 때라는 등의 말을 한다. 가장 중요한 피해자의 감정은 하나도 감안하지 않고 말이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례는 바로 한국과 일본일 것이고, 유럽으로 넘어가면 유대인과 독일인이 될 것이다. 한일 사이는 제대로 청산된 것이 없다면 유럽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물론 미흡한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거창하게 역사를 끄집어낸 것은 이 소설이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수용소가 있었던 곳이 바로 다하우다. 제목처럼 다하우에서 온 편지가 한 가족의 숨겨진 비밀을 현실에 드러나게 만든다. 무대가 되는 곳은 영국이고, 주인공은 이제 중학생이 된 여학생 제시다. 여기에 외국 이주 노동자 문제를 같이 넣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킨다. 그리고 이야기를 과격한 장면이나 상황을 넣지 않고 일상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로 가득하게 풀어내고 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일상의 모습과 실수를 제시에게 투영해서 잘못된 편견과 행동의 심리를 보여주고, 왜 그런 변명을 하게 되는지 알려준다.

 

과거 독일의 유대인과 현재 영국의 외국 노동자들은 왜곡된 정보와 편견 등으로 각 나라의 국민들에게 나쁜 이미지가 쌓인다. 이 이미지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거나 증오의 배출구로 이용된다. 제시의 경우도 아버지가 파산한 후 프랑스로 일을 하러 간 것이 이 외국 노동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닉을 밀어 다치게 한 사건에서도 가장 먼저 외국 노동자라는 편견을 드러낸다. 이것은 바로 잡히지만 그녀가 외국 노동자에게 질타를 했던 것과 자기 친척과 그 친구들이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행동에서 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다른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행동을 이해라고 하지 않고 누군가가 주입해준 이미지에 휘둘리면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았다고 해도 바로 잡는 되는 용기가 필요하다.

 

제시에게는 좋은 친구가 한 명 있다. 케이트다. 그녀는 장애가 있다. 하지만 탁월한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장애인 배구 청소년 대표로 뽑힐 정도다. 이런 그녀를 깔보고 비하하는 무리가 있다. 그 중 한 명이 제시의 친척인 프란체스카다. 그녀가 케이트에게 내뱉는 말과 행동은 솔직히 유치한 수준이다. 그렇지만 어린 케이트에게는 비수와도 같다. 그녀의 감성을 마구 헤집어놓는다. 케이트는 세상의 편견과 부당함에 대항해서 열심히 싸운다. 대단한 의지와 용기인데 그녀가 이것을 즐겨서 그런 것은 아니다. 자신도 잠깐 동안 내려놓고 쉽지만 현실이 그녀를 그렇게 몰고 간다. 제시와 케이트 사이에 일어나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갈등 몇 가지는 이 소설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진실과 사실은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왜곡된 안경을 통해 역사를 보면 제대로 볼 수 없다. 제시가 할머니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서 만나게 되는 진실은 그 과정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 자신이 그렇게 많이 사랑했던 할머니였기에 역사의 한 시기에 그녀가 저지른 잘못을 받아들이는데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이 용기가 과거에 받지 못했던 용서를 가져다준다. 어떻게 보면 작위적인 구성이지만 이 만남이 우리 삶에는 필요하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잘 짜인 구성과 내용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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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6일간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민경욱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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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산행을 둘러싼 연작소설이다. 산악소설하면 선이 굵은 작품이 먼저 떠오르는데 이 작품은 그런 종류의 소설이 아니다. 마흔 살 즈음의 여성이자 문예지 부편집장을 내세워 등산의 즐거움과 그녀의 삶을 무겁지 않게 다룬다. 제목인 <8월의 6일간>은 마지막 단편이자 그녀가 8월에 6일간 등산한 것을 요약해서 알려주는 정보다. 다섯 편의 단편이 모두 이런 식의 제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읽으면서 그녀의 일정과 시간을 대충 예상할 수 있다. 각 단편 앞에 코스가 나와 있어 만약 이 책을 읽고 그곳에 가보고 싶다면 참고할 수도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한 가지 아쉬운 일이 생각났다. 그것은 대학생일 때 지리산 종주를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 당시 친구가 한 번 가자고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때 갔다면 이 책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곳곳에 들었다. 물론 그때 며칠 간 종주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 소설과 완전히 다르다. 그녀처럼 온천은 고사하고 늘 산장에서 자는 것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텐트와 침낭에서 자면서 며칠을 걸었다고 하는데 해보지 못한 경험이라 그런지 지금은 왠지 그것이 조금 부럽다. 그 후 다녀온 한국 산들은 모두 당일치기였으니 작가가 보여주는 몇 박 며칠의 등산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각 단편이 그렇게 분량이 많지 않다 보니 등산에 대한 섬세하고 치밀한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화자가 본 풍경의 아름다움과 등반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먹은 음식 등이 반복되고, 그 사이사이를 자신의 이야기를 채워놓는다. 짧은 기간의 등산이 아니다 보니 잡지 부편집장 일을 마무리한 후 휴가를 내어 갔다와야 한다. 그래서 등산을 하기 전에 있었던 몇 가지 일들도 같이 나온다. 이것이 등산하는 중간에 단상처럼 흘러가고, 산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과거의 인연들이 불쑥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혼자 하는 등산이다 보니 같은 코스를 갈 때만 잠깐 같이 가고 분기점에서 자신들의 길을 간다. 인생의 한 모습과 아주 닮아 있다.

 

소설에 나오는 산들이나 봉우리 등은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다. 아마도 다른 소설들을 읽으면서 한두 번 정도는 본 적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몇 명의 중요한 인물들이 있는데 그 관계도 재미있다. 일상에서 그녀와 친밀한 후지와라 씨나 한때 연인이었던 하라다나 혼자 등산하다 만난 사향노루란 별명을 붙인 무나가타 미치코 등이 바로 그들이다. 각각 현재와 과거와 등산의 인연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현실 속에서 뒤섞이면서 소소한 재미를 만든다. 몇 년 전에 헤어진 하라다의 결혼 소식이나 낯선 곳에서 만났을 때 감정의 흐름은 아주 묘하게 달랐다.

 

며칠 동안 하는 등산을 해본 적이 없다 보니 소설 속에서 그녀가 싸는 짐을 보면 약간 놀란다. 아주 철저한 준비를 한 후 산을 올라가기 때문이다. 배낭의 크기나 간식이나 비상식량이나 물 등은 아주 현실적이다. 크게 공감하는 것은 오며 가며 읽으려고 들고 가는 책들이다. 내가 며칠 동안 여행을 갈 때 늘 이렇게 챙겨 가기 때문이다. 이전에 하루짜리 등산을 홀로 할 때 나의 호흡과 발걸음을 맞추면서 힘들게 산을 올라갔다왔다. 고개를 지나 능선을 걸을 때 느낌이나 정상에 섰을 때 바라 본 산의 풍경은 나도 모르게 산으로 발걸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물론 이것은 얼마 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의 경험은 아직도 나의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가끔 마음이 복잡하면 이 등산이 생각난다.

 

스릴 넘치고 박진감 있는 등산을 기대한 사람에게는 밋밋할 것이다. 하지만 등산에 약간이나마 관심이 있거나 삶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털어버리고자 하는 독자라면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많이 하고 읽는다면 오히려 낯선 지명과 밋밋한 등산 때문에 지루할 수도 있다. 작가가 곳곳에 드러내고 있는 섬세한 감정과 무리하지 않는 산행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잘 드러내어준다. 선이 굵은 산악소설들이 도전과 모험으로 긴장과 스릴을 가득 채웠다면 이 책은 그것을 벗어나 안정적이고 여성적인 감성으로 가득하다. 언제나처럼 이런 종류의 책들은 나로 하여금 잠시나마 등산에 대한 열망에 불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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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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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녹턴>으로 나를 사로잡은 작가다. 그 이전 그의 원작으로 만든 영화 <남아 있는 나날>을 아주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 한 집사의 감정을 그렇게 섬세하게 잡아낸 영화는 그때가 처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안소니 홉킨스의 그 연기와 감독의 연출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 곳에서 진한 울림을 전해준다. 영화의 감동 때문에 원작을 읽지 않았는데 요즘은 그것을 후회한다. 작가에 대해 잘 몰랐기에 원작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영화의 이미지가 살짝 흐려지면 소설로 그 이미지를 다시 되살리고 싶다.

 

가즈오 이시구로. 사실 처음에는 단순히 일본 작가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부커 상을 받은 아주 대단한 작가다. 이런 나의 착각 혹은 오해가 좋은 작가의 작품을 많이 놓쳤다. 한국계 작가들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조금씩 성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취향도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새롭게 만든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를 기억하기 때문에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떨까? 그래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내 삶의 한 단면을 잊고, 그로 인한 왜곡으로 나를 기억할 것이다. 그러다 이것들이 다시 떠오른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책 소개도 읽었지만 쉽게 이야기를 가름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니다. 처음 몇 장을 읽었을 때는 원시 부족의 삶이 떠올랐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뭔가를 잊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액슬의 생각이 조금씩 호기심을 불러왔다.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이 노부부가 집을 떠나 살고 있는 아들을 찾아갈 것이라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집을 떠나 아들을 찾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사건들이 아주 거대한 담론을 담고 있다. 그 실체를 조금씩 보여주다가 민족과 개인의 문제로 나눠 보여줄 때 나도 모르게 깊은 생각에 빠지고, 현실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대입하게 된다.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가 망각된 기억을 찾아 떠나는 과정에서 보여준 몇 가지 행동은 아주 재미있다. 아내가 앞서고, 남편이 뒤에 이어 가면서 끊임없이 서로를 확인한다. 이들의 유대는 읽는 내내 부러움과 동시에 불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서로 너무 밀착되어 있고, 남편에 기대는 아내의 모습에서 왜 이런 관계가 만들어졌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리고 과연 그들이 찾아가는 아들이 존재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이런 이야기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비오는 날 오래된 로마식 건물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서부터다. 단순히 하나의 에피소드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것이 이 부부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이들의 과거와 미래를 풀어내는 역할을 한다.

 

여행은 언제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한다. 처음으로 간 색슨족 마을에서 이들은 하나의 소동을 경험한다. 그것은 도깨비들에게 납치된 소년 에드윈과 그 소년을 구해온 전사 위스턴이다. 액슬 부부는 브리튼족이다. 안개의 영향으로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 지역에서 이 두 민족은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다. 말은 제대로 통하지 않지만 서로 교역하고, 방문객을 잘 대우한다. 하지만 이 망각의 시기에는 아주 끔찍한 학살의 기억이 가려져 있다. 이 기억이 하나씩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전설의 아서왕 조카인 가웨인 경을 만나면서부터다. 그 이전에 위스턴은 액슬을 보고 누군가를 연상하는데 이것이 그와 이 노부부가 동행하게 되는 이유다.

 

소설을 읽으면서 원시성을 가장 먼저 느꼈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전설과 판타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위스턴이 수도원에서 보여준 고성의 기능적인 부분은 아주 과학적이다. 또 전사가 검술을 펼치기 전에 담긴 의미를 하나씩 풀어낼 때는 무협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암용 케리그가 망각의 안개를 만들어낸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도깨비와 괴물들이 나오면서 영국 고대 전설이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이 이야기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이야기의 재미와 깊이를 더하기 위해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고 있는 작가란 점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잘 읽히지만 후반부까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이라도 알게 된 것은 가웨인 경이 과거의 학살을 말할 때다. 브리튼족과 색슨족의 평화가 이 학살로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암용의 안개가 이것을 잊게 만들었다.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망각 속으로 밀어넣은 것이다. 암용이 죽게 되면 이 잊혀진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너무나도 뻔하다. 오랫동안 피와 복수의 순환 고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정면에서 용서와 화해를 구하지 않고 빗겨가려고 한 결과는 결코 좋을 수 없다. 우리의 과거사 청산 문제가 늘 반복되는 것이 떠오른다.

 

두 민족의 문제가 하나의 축이라면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 사이의 사연도 한 축을 맡는다. 아들을 찾아 떠난 여행이 망각의 안개 속에서 헤매면서 위스턴과 가웨인 경이 액슬과 만났을 때 과거의 관계와 사연이 이어진다. 그리고 비어트리스의 과도한 남편 의존 및 집착은 단순한 불안감의 표현이라고 하기엔 너무 과하다. 중간중간 잊혀진 기억이 되돌아오고 있을 수 있는 문제를 말할 때 몇 가지 예상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대부분 예상을 빗나갔다. 마지막 장면은 이들 사이에 있었던 사건이나 사랑을 아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아주 강한 인상과 여운을 남긴다. 마지막 대사와 액슬이 향한 방향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계속 맴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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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바람의 시간
김희곤 지음 / 쌤앤파커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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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네 살에 그는 처자식을 한국에 두고 홀로 무작정 스페인 마드리드로 갔다. 잘 다니던 건축회사를 그만 두고. 스페인어도 모르는 그가 낯선 곳으로 갔다. 처음 이 글을 읽으면서 서머셋 모음의 <달과 6펜스>가 떠올랐다. 그 소설 속 주인공도 아내를 두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떠났지 않은가. 하지만 저자는 그 정도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그렇게 길지 않은 공부를 마친 후 한국에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이 유학이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안정되어 가는 일과 자라는 자식들을 두고 언어도 모르는 먼 타국으로 간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무모하기 그지없거나.

 

저자 김희곤은 불과 한두 해 전의 이야기를 이 책에 풀어내지 않았다. 2천 년대 초에 그곳에 머물면서 자신이 경험했던 일을 기록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하나의 사건이나 일에 따라 구분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 풀려나온다. 그래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낯선 나라에서 자신이 좌충우돌하면서 경험했던 것을 적나라하게 들려준다.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흔하게 만나게 되는 여행 에세이나 재미 위주의 외국 체류기와 완전히 다르다. 글 속에 묵직함이 담겨 있어 어느 순간에는 굉장히 집중하면서 의미를 곱씹어야 한다. 단순히 스페인 체류기나 여행기를 기대했다면 잘못된 선택이다.

 

저자가 머물던 시기와 지금은 분명히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여행의 정보나 도시 등의 정보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해졌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이 있다. 스페인어를 모르는 중년의 남자가 맨몸으로 현지에 적응하고 자신이 공부하고자 하는 것을 열정적으로 배우는 것의 어려움이다. 이렇게 적고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실제 생활에서 이것보다 힘든 것이 없다. 맨몸으로 부딪히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고, 이것을 즐기는 젊은이도 많다. 하지만 중년이라면 어떨까? 언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대학원 등록까지 한다면? 비록 자신이 전공했던 분야고, 유창한 언어가 덜 필요하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읽는 내내 나의 현재와 계속해서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건축가다. 이 직업은 이 책을 쓰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나온다. 그가 이전에 낸 책들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하다. 이런 직업병이 이 책 속에도 적지 않게 나온다. 개인적으로 이런 글을 읽을 때 건축가들이 부럽다. 건축물을 보는 시각이나 방법이 나와 다르기 때문이다. 단순히 아름답다거나 웅장하다 등의 수식을 넘어선 표현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뭐 이런 것은 다른 분야 전문가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반복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간단하게 들려주는 가우디나 몇 명 건축가와 건축물에 대한 감탄과 그 의미 등은 나중에 스페인 여행을 할 때 하나의 안내도가 될 것 같다.

 

그의 글에서 가장 아슬아슬하면서 밋밋한 부분은 바로 열정적인 여자들과의 만남이다. 만약 그가 이혼을 하고 홀로 산다면 과연 여기에서 멈추었을까 하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중년이라고 하지만 아직 성욕과 열정이 남아 있는 나이를 감안하면 길지는 않다고 해도 잠시 동안 불꽃은 있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낭만적 추측일 뿐이다. 그가 묘사한 수많은 여인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아내의 편지와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는 글을 넣어 이런 위험을 피해간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조금 아쉽다.

 

무모하다고 해도 좋을 것 같은 그의 용기는 대단하다는 감탄을 먼저 자아내게 한다. 그가 스페인에 머물면서 돌아다닌 곳과 경험한 것들은 계속해서 나로 하여금 부러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단지 며칠 동안 그곳을 머물다 혹은 지나간 것을 가지고 책 한 권을 만들어내는데 그는 살면서 느끼고 경험하고 생각하고 배운 것 등을 함께 녹여내었다. 여기에 자신이 삶의 철학도 같이 곁들여 이야기에 무게감을 더했다. 육신은 중늙은이지만 그의 열정과 삶을 대하는 자세는 청년과 비교해도 절대 부족하지 않다. 어쩌면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그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안주하려고 하는 나 자신과 비교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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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스트레인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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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워터스를 기억하는 것은 오래 전에 사놓은 <핑거스미스>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작가보다 소설 제목을 기억하고 있다. <핑거스미스>라는 소설은 기억하지만 작가는 잘 몰랐다. 인터넷으로 제목을 검색하다 작가의 이력을 보고 아! 하고 감탄하고, 위시리스트에 책을 집어넣는다. 이 책도 그런 종류 중 하나다. 자주 말하는 몇 명의 작가를 제외하면, 특히 많이 나오지 않는 미국과 유럽작가들의 경우 대부분 작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것은 실제 나의 생활에서도 자주 있는 일이다. 그러니 제목만 기억하고 한 번도 읽지 않은 작가 이름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세라 워터스에 대한 몇 가지 기억은 늘 다른 독자의 서평이나 책 소개글을 통해 얻은 것이다. 미스터리와 동성애라는 두 개의 코드가 나에게 강하게 인식되었다. 여기에 워낙 좋은 평을 받은 것 때문에 단숨에 이 두꺼운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착각을 했다. 실제로 앞부분을 조금 읽었을 때는 자신감과 그 어떤 기대감으로 예상한 시간 안에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 예상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가 풀려나가면서 적응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거의 3분의 2정도를 지나면서 그 재미를 더 깊이 알게 되었고, 읽는 속도가 올라갔다.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화자는 워릭셔의 대저택 헌드레즈홀에서 유모로 일했던 엄마를 둔 닥터 패러데이다. 그는 열 살 때 처음 헌드레즈홀을 보고 반한다. 소설의 첫 문장도 바로 이것이다. 그는 부모의 헌신적인 도움과 자신의 능력으로 의사가 된다. 하지만 이 시대 평민들을 대상으로 한 주치의는 그렇게 부자가 아니다. 그러다 그에게 이 헌드레즈홀을 방문할 기회가 생긴다. 원래 이 집의 주치의가 아파 대신 가게 된 것이다. 환자는 어린 하녀 베티다. 베티는 아픈 것이 아니라 이 집의 기이한 분위기에 놀라 꾀병을 부린 것이다. 이 꾀병이 그로 하여금 어릴 때부터 그렇게 원했던 헌드레즈홀에 들어오게 만든다.

 

이 거대한 저택에는 단 세 명의 에어즈 가문 사람들이 살고 있다. 엄마와 딸 하나와 아들 한 명이 전부다. 거부의 젠트리 계급이었던 이 가문은 어느 순간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헌드레즈홀 전성기에 수십 명의 하녀들을 두었던 것과 비교하면 너무 초라한 수준이다. 2차 대전 후 물자가 부족한 시대를 감안한다고 해도 이들의 삶은 결코 풍요롭지 못하다. 거대한 영지를 운영할 능력도 없고, 돈도 없다 보니 집의 보수는 꿈도 꾸지 못한다. 나중에 장례식 때문에 온 친척이 이 집을 공포영화에 나오는 집이라고 말할 정도다. 거기다 유일한 남자인 로더릭은 전쟁 기간 동안 부상을 입은 상태다. 다리를 절면서 이 대저택을 힘겹게 꾸려나가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에게 가장 먼저 문제가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큰딸 캐럴라인은 예쁜 얼굴이 아니다. 키도 크다. 그 시대 기준으로 보면 결혼적령기를 지났다.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동생의 부상이 그녀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렇다고 집이나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집의 몰락과 함께 그녀 자신도 조금씩 가라앉는 중이다. 그러다 패러데이와 엮인다. 소설 끝까지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이성을 유지하는 존재이자 다 읽은 후 이 소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의문을 던져주는 역할을 한다. 후반부에 나로 하여금 책 속에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물론 작가는 명확한 답을 내려놓지 않지만.

 

에어즈 부인은 이 집의 영광을 마지막으로 누린 사람이다. 그녀에게는 이전에 수전이라는 딸이 있었다. 수전은 죽었고, 그 후에 캐럴라인과 로더릭이 태어났다. 만약 이 소설을 고딕풍 호러 소설로 이해한다면 제목의 작은 이방인은 이 수전일 가능성이 높다. 에어즈 부인이 환상에 사로잡혀 말할 때나 집에서 발견된 몇 가지 낙서는 이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 또한 분명하지 않다. 작가가 이 존재를 아주 가끔 드러내고, 화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경험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등골이 서늘한 공포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한 존재인데 작가는 이것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약간 늘어지는 느낌이 강하다.

 

1인칭 시점 때문에 이야기는 어느 한곳으로 기울지 않는다. 그가 이 모든 이야기를 자신의 입장에서 풀어내었다면 하나의 미스터리가 될 것이고, 실제 사건을 의사의 입장으로 이해하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호러물이 될 것이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처음부터 몰입하는데 방해했다. 패러데이의 방문과 헌드레즈홀의 일상이 약간은 지루하게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간에 나오는 화자와 로더릭의 존칭과 평대가 뒤섞인 대화를 읽으면서 원문도 과연 이런 식인지 의문이 생겼다. 충분히 가능한 대화방식이지만 눈에 살짝 거슬렸다.

 

후반부에 노골적으로 패러데이가 헌드레즈홀에 대한 집착을 드러낸다. 에어즈 부인이 죽은 후 그가 보여준 몇 가지 행동과 반응은 이 리틀 스트레인저를 다르게 해석하게 만든다. 작가는 이것 또한 모호하게 처리한다. 하지만 이때 몰입도는 최고조에 도달했다. 그 어떤 파국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하게 만들었다. 딱 거기에서 멈추면서 나의 기대도 멈추었다. 앞에서 말한 이 1인칭 시점이 진실을 파악하는데 장애물이 된다. 믿을 수 없는 화자란 말에 동의한다. 마지막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독자의 경험에 따라 이것은 바뀔 것이다. 전체적으로 미친 듯한 몰입감을 주지 못했지만 후반부의 몇 가지 이야기가 아주 긴 여운을 남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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