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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바람의 시간
김희곤 지음 / 쌤앤파커스 / 2015년 10월
평점 :
마흔네 살에 그는 처자식을 한국에 두고 홀로 무작정 스페인 마드리드로 갔다. 잘 다니던 건축회사를 그만 두고. 스페인어도 모르는 그가 낯선 곳으로 갔다. 처음 이 글을 읽으면서 서머셋 모음의 <달과 6펜스>가 떠올랐다. 그 소설 속 주인공도 아내를 두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떠났지 않은가. 하지만 저자는 그 정도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그렇게 길지 않은 공부를 마친 후 한국에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이 유학이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안정되어 가는 일과 자라는 자식들을 두고 언어도 모르는 먼 타국으로 간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무모하기 그지없거나.
저자 김희곤은 불과 한두 해 전의 이야기를 이 책에 풀어내지 않았다. 2천 년대 초에 그곳에 머물면서 자신이 경험했던 일을 기록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하나의 사건이나 일에 따라 구분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 풀려나온다. 그래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낯선 나라에서 자신이 좌충우돌하면서 경험했던 것을 적나라하게 들려준다.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흔하게 만나게 되는 여행 에세이나 재미 위주의 외국 체류기와 완전히 다르다. 글 속에 묵직함이 담겨 있어 어느 순간에는 굉장히 집중하면서 의미를 곱씹어야 한다. 단순히 스페인 체류기나 여행기를 기대했다면 잘못된 선택이다.
저자가 머물던 시기와 지금은 분명히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여행의 정보나 도시 등의 정보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해졌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이 있다. 스페인어를 모르는 중년의 남자가 맨몸으로 현지에 적응하고 자신이 공부하고자 하는 것을 열정적으로 배우는 것의 어려움이다. 이렇게 적고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실제 생활에서 이것보다 힘든 것이 없다. 맨몸으로 부딪히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고, 이것을 즐기는 젊은이도 많다. 하지만 중년이라면 어떨까? 언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대학원 등록까지 한다면? 비록 자신이 전공했던 분야고, 유창한 언어가 덜 필요하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읽는 내내 나의 현재와 계속해서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건축가다. 이 직업은 이 책을 쓰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나온다. 그가 이전에 낸 책들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하다. 이런 직업병이 이 책 속에도 적지 않게 나온다. 개인적으로 이런 글을 읽을 때 건축가들이 부럽다. 건축물을 보는 시각이나 방법이 나와 다르기 때문이다. 단순히 아름답다거나 웅장하다 등의 수식을 넘어선 표현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뭐 이런 것은 다른 분야 전문가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반복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간단하게 들려주는 가우디나 몇 명 건축가와 건축물에 대한 감탄과 그 의미 등은 나중에 스페인 여행을 할 때 하나의 안내도가 될 것 같다.
그의 글에서 가장 아슬아슬하면서 밋밋한 부분은 바로 열정적인 여자들과의 만남이다. 만약 그가 이혼을 하고 홀로 산다면 과연 여기에서 멈추었을까 하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중년이라고 하지만 아직 성욕과 열정이 남아 있는 나이를 감안하면 길지는 않다고 해도 잠시 동안 불꽃은 있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낭만적 추측일 뿐이다. 그가 묘사한 수많은 여인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아내의 편지와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는 글을 넣어 이런 위험을 피해간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조금 아쉽다.
무모하다고 해도 좋을 것 같은 그의 용기는 대단하다는 감탄을 먼저 자아내게 한다. 그가 스페인에 머물면서 돌아다닌 곳과 경험한 것들은 계속해서 나로 하여금 부러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단지 며칠 동안 그곳을 머물다 혹은 지나간 것을 가지고 책 한 권을 만들어내는데 그는 살면서 느끼고 경험하고 생각하고 배운 것 등을 함께 녹여내었다. 여기에 자신이 삶의 철학도 같이 곁들여 이야기에 무게감을 더했다. 육신은 중늙은이지만 그의 열정과 삶을 대하는 자세는 청년과 비교해도 절대 부족하지 않다. 어쩌면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그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안주하려고 하는 나 자신과 비교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