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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녹턴>으로 나를 사로잡은 작가다. 그 이전 그의 원작으로 만든 영화 <남아 있는 나날>을 아주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 한 집사의 감정을 그렇게 섬세하게 잡아낸 영화는 그때가 처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안소니 홉킨스의 그 연기와 감독의 연출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 곳에서 진한 울림을 전해준다. 영화의 감동 때문에 원작을 읽지 않았는데 요즘은 그것을 후회한다. 작가에 대해 잘 몰랐기에 원작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영화의 이미지가 살짝 흐려지면 소설로 그 이미지를 다시 되살리고 싶다.

 

가즈오 이시구로. 사실 처음에는 단순히 일본 작가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부커 상을 받은 아주 대단한 작가다. 이런 나의 착각 혹은 오해가 좋은 작가의 작품을 많이 놓쳤다. 한국계 작가들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조금씩 성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취향도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새롭게 만든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를 기억하기 때문에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떨까? 그래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내 삶의 한 단면을 잊고, 그로 인한 왜곡으로 나를 기억할 것이다. 그러다 이것들이 다시 떠오른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책 소개도 읽었지만 쉽게 이야기를 가름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니다. 처음 몇 장을 읽었을 때는 원시 부족의 삶이 떠올랐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뭔가를 잊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액슬의 생각이 조금씩 호기심을 불러왔다.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이 노부부가 집을 떠나 살고 있는 아들을 찾아갈 것이라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집을 떠나 아들을 찾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사건들이 아주 거대한 담론을 담고 있다. 그 실체를 조금씩 보여주다가 민족과 개인의 문제로 나눠 보여줄 때 나도 모르게 깊은 생각에 빠지고, 현실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대입하게 된다.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가 망각된 기억을 찾아 떠나는 과정에서 보여준 몇 가지 행동은 아주 재미있다. 아내가 앞서고, 남편이 뒤에 이어 가면서 끊임없이 서로를 확인한다. 이들의 유대는 읽는 내내 부러움과 동시에 불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서로 너무 밀착되어 있고, 남편에 기대는 아내의 모습에서 왜 이런 관계가 만들어졌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리고 과연 그들이 찾아가는 아들이 존재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이런 이야기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비오는 날 오래된 로마식 건물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서부터다. 단순히 하나의 에피소드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것이 이 부부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이들의 과거와 미래를 풀어내는 역할을 한다.

 

여행은 언제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한다. 처음으로 간 색슨족 마을에서 이들은 하나의 소동을 경험한다. 그것은 도깨비들에게 납치된 소년 에드윈과 그 소년을 구해온 전사 위스턴이다. 액슬 부부는 브리튼족이다. 안개의 영향으로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 지역에서 이 두 민족은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다. 말은 제대로 통하지 않지만 서로 교역하고, 방문객을 잘 대우한다. 하지만 이 망각의 시기에는 아주 끔찍한 학살의 기억이 가려져 있다. 이 기억이 하나씩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전설의 아서왕 조카인 가웨인 경을 만나면서부터다. 그 이전에 위스턴은 액슬을 보고 누군가를 연상하는데 이것이 그와 이 노부부가 동행하게 되는 이유다.

 

소설을 읽으면서 원시성을 가장 먼저 느꼈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전설과 판타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위스턴이 수도원에서 보여준 고성의 기능적인 부분은 아주 과학적이다. 또 전사가 검술을 펼치기 전에 담긴 의미를 하나씩 풀어낼 때는 무협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암용 케리그가 망각의 안개를 만들어낸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도깨비와 괴물들이 나오면서 영국 고대 전설이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이 이야기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이야기의 재미와 깊이를 더하기 위해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고 있는 작가란 점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잘 읽히지만 후반부까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이라도 알게 된 것은 가웨인 경이 과거의 학살을 말할 때다. 브리튼족과 색슨족의 평화가 이 학살로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암용의 안개가 이것을 잊게 만들었다.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망각 속으로 밀어넣은 것이다. 암용이 죽게 되면 이 잊혀진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너무나도 뻔하다. 오랫동안 피와 복수의 순환 고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정면에서 용서와 화해를 구하지 않고 빗겨가려고 한 결과는 결코 좋을 수 없다. 우리의 과거사 청산 문제가 늘 반복되는 것이 떠오른다.

 

두 민족의 문제가 하나의 축이라면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 사이의 사연도 한 축을 맡는다. 아들을 찾아 떠난 여행이 망각의 안개 속에서 헤매면서 위스턴과 가웨인 경이 액슬과 만났을 때 과거의 관계와 사연이 이어진다. 그리고 비어트리스의 과도한 남편 의존 및 집착은 단순한 불안감의 표현이라고 하기엔 너무 과하다. 중간중간 잊혀진 기억이 되돌아오고 있을 수 있는 문제를 말할 때 몇 가지 예상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대부분 예상을 빗나갔다. 마지막 장면은 이들 사이에 있었던 사건이나 사랑을 아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아주 강한 인상과 여운을 남긴다. 마지막 대사와 액슬이 향한 방향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계속 맴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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