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영성 - 영광스러운 추구
게리 토마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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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애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기보다는 그 형상이 가려진채 살아갈 때가 많음도 사실이다. 왜 그럴까? 저자인 게리 토마스는 우리의 일상의 삶 속에 영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라 말한다. 영성을 선택한 삶을 살기보다는 오히려 악덕을 행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란다. 저자는 말한다. 악덕을 행하는 것은 결국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고. 마치 사사시대 말 성경의 시궁창과 같은 악취 나는 일들이 벌어졌던 이유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즉 자기 멋대로 살았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의 형상을 드러내는 삶이다. 어쩌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멋대로 살며, 자신의 형상만을 세우는 악덕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반면, 영성의 삶이란 우리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삶을 가리키는데,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바로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시며 보이셨던 그분의 성품과 그분의 행동을 우리가 닮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주님의 성품을 닮기 위한 내적 성품들을 이야기한다. 그러한 내적 성품들로 겸손, 내어드림, 초연함, 사랑, 순결, 베풂, 주의력, 인내, 감사, 온유함, 분별력, 견고함, 순종, 회개 등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내용들을 살펴보고 실제 삶 속에서 그러한 내적 성품들을 갖게 됨으로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이처럼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저자는 점진적 변화, 다른 말로 말하면 성화의 길을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영성이란 우리가 성화의 길을 걷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흔히 우리가 영성이라고 생각할 때, 언뜻 떠오르는 금욕적인 삶이라거나, 어떤 신앙적인 행위가 영성의 삶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인간편에서의 의도적 노력을 경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우리의 삶을 친히 다듬으시고,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영성이란 우리를 그 아들의 형상으로 다듬어 가시는 하나님의 조각칼이다.(33쪽)

 

즉,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성품과 행동을 다듬어 가신다. 문제는 그 하나님의 손길에 우리의 삶을 내어 맡겨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영성은 공로주의도, 금욕주의도 아니다. 하나님께 맡겨드림으로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성품과 행동을 닮아가는 것을 저자는 말한다. 우리의 삶이 진정 그리스도를 닮는 삶이 되길 소망한다. 그렇기에 오늘도 하나님의 손길에 맡겨드린다. 물론, 여기에 내가 그리스도를 닮길 원하는 의지적 결단도 대단히 중요하리라 여겨진다. 삶 속에서 실천되어지는 모습, 즉 실천적 삶을 통한 영성을 오늘도 꿈 꿔 본다. 그럼으로 나의 성품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내 지길 소망해본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감에 있어, 그리스도의 내적 성품과 행동을 닮아감에 있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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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시간 하늘의 시간
조정민 지음 / 두란노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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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어느 누구도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 그리고 모두에게 주어진 하루의 시간은 동일하다. 부자라고 해서, 힘이 세다고 해서,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하루에 25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두 동일하게 24시간이 주어진다. 하지만, 어떤 이는 24시간을 마치 48시간처럼 사용하는 반면, 어떤 이는 24시간을 12시간처럼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이 시간의 상대적 개념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시간의 개념이 나온다. 바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다. 크로노스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절대적 시간이며,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시간이다. 즉 연대기적 시간이 크로노스이다. 반면 카이로스는 연대기적 시간이 아닌, 어떤 순간, 어떤 사건이란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어떤 순간, 때가 카이로스다. 그리고 이 시간은 느낌의 시간이기도 하다. 예를 든다면, 똑같은 한 시간(크로노스)을 보낼 때, 사랑하는 연인과 보낸다면, 이 시간은 마치 몇 분처럼 여겨질 것이며, 정말 함께 있고 싶지 않은 사람과의 1시간의 시간은 마치 천년과 같이 느껴질 것이다. 이 시간이 바로 카이로스다.

 

이렇게 구분되어지는 시간을 신앙 안에서는 또한 이렇게 정의한다. 크로노스는 세상의 시간이며,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시간이다. 크로노스는 땅의 시간이며, 카이로스는 하늘의 시간이다. 그렇기에 특히 카이로스는 하나님과의 관계 아래서 정의되어지는 시간이다.

조정민 목사의 신작 『땅의 시간 하늘의 시간』은 바로 이 시간,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에 대해 말한다. 아마도 저자가 신앙공동체 안에서 행한 설교를 정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강조하는 바를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다.

구원이라는 것은 땅의 시간에서 하늘의 시간으로의 초대, 인간의 시간에서 하나님의 시간으로의 초대,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의 초대다. 물론, 우리는 땅의 시간인 크로노스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린 여전히 크로노스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안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구원이란 내 시간이 끝나고 하나님의 시간이 시작되는 사건이다. 이렇게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의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시간의 우선순위를 바로 알아야 하며, 영원이라는 하나님의 시간을 알고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크로노스)은 언젠가 끝이 있음을 기억하며, 종말론적인 시간을 살아가야 하며, 시간을 아끼며 사명의 부지런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크로노스의 시간, 즉 인간의 시간 속에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일이 주어졌다는 것이고, 그 일을 해야 할 책임과 소명이 주어졌다는 뜻이기에, 우리는 인간의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지만, 매 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아가야 한다. 저자는 이처럼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말한다. 맞다. 하지만, 옮겨가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시간이 내 시간 속으로 찾아오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내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닌, 내 시간 위에 하나님의 시간이 덧입혀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옮겨간다고 하면 자칫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릴 하나님의 시간을 오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각자 개인의 시간이 끝났을 때, 온전히 하나님의 시간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구원은 장차 죽어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역시 누리는 것이다(물론 저자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시간을 살아내야 함을 말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저자 역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저자의 말이 틀리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옮겨감이란 어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 땅의 시간에 하늘의 시간이 덧입혀져서, 이곳에서 하나님의 시간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구원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시간을 누리는 사람들은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관점이 바뀌게 되고, 시간을 아끼며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제 우리 땅의 시간 속에서 하늘의 시간을 살아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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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의 인생엔 어떤 예수가 계십니까? - 첫 번째 이야기, 시몬과 예수의 만남
김건주 지음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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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가까이 하며 읽고 묵상하곤 한다. 더 나아가 성경공부에도 많은 열의를 보이며 참여하곤 한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의 삶에 변화가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앎을 위한 수단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성경은 앎을 위한 이야기가 아닌 삶을 위한 이야기임을 강조한다.

 

물론 저자가 이 책, 『지금 당신의 인생엔 어떤 예수가 계십니까?』를 통해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제1장을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이란 제목으로 시작하며, 이처럼 성경은 삶을 위한 이야기임을 전제하며 본격적인 이야기로 돌입한다. 그렇다. 성경은 내 지적 욕구를 채워주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성경은 내 삶의 변화를 목적으로 한다.

 

아울러 저자는 “현재의 우리와 성경 속 이야기가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면 읽는 우리를 바꾸어야지 성경 속 이야기를 우리의 필요에 따라 이런저런 모양으로 편집해서는 안 된다.(50쪽)”고 말한다. 그렇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필요에 따라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를 읽고, 우리 삶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내 필요와 다를지라도 성경이 주시는 그 말씀이 내 삶에 도전을 주고, 내 필요를 바꾸며, 내 삶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저자는 건강한 견해를 가지고 성경을 접근한다. 그리고 이렇게 건강한 시선으로 이 책에서 다루는 본문은 바로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만남의 장면이다. 밤새 수고하며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이상한 날, 베드로가 실패를 철저하게 경험한 그 날, 예수님은 베드로의 빈 배에 오르신다. 그리고 이 만남은 베드로의 인생에 있어 전환점이 되어 베드로는 이제 어부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투신하는 자가 된다. 바로 이 사건을 통해 저자는 우리에게 때론 위로를 주기도 하며, 때론 신앙을 향한 도전과 결단을 촉구한다.

 

저자는 말한다. 예수님은 왜 굳이 베드로가 실패한 그 날, 절망으로 가득한 빈 배의 순간 찾아오셨을까? 굳이 빈 배여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까? 빈 배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 만약 빈 배가 아니었다면, 시몬은 예수님을 그 배에 오르도록 허락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설령 예수님이 오르셔서 무리들을 향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에 시몬은 집중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 왜냐하면, 잡은 고기를 손질하는 일에 집중해야 하니까. 이처럼 시몬의 실패, 시몬의 절망이 도리어 시몬의 인생 가운데 가장 소중한 만남을 갖게 한다. 빈 배여야 예수님이 그 배에 오를 수 있고, 빈 배여야 예수님이 그 배를 채울 수 있다. 이제 이 만남을 통해, 시몬의 절망의 아침은 새로운 희망을 품는 아침이 된다. 물론, 이는 예수님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삶이 빈 배 인생처럼 여겨질 때, 한없는 절망으로 가득한 순간 예수님은 우릴 찾아오시고, 우리 빈 배에 오르신다. 그리고 그 빈 배를 채우시며, 우리에게 새로운 인생,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신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절망의 아침이 희망의 아침으로 변하며, 빈 배 인생이 가득 찬 인생으로 변하는 축복이 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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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추장님! -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세요
원천희 지음 / 대성닷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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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님 추장님!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세요』는 ‘안전지대’를 떠나, ‘믿음지대’로 가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원천희 선교사님의 선교보고와 같은 책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바누아투라는 나라는 밀림의 나라, 21세기 문명과는 거리가 먼 원시부족들의 나라, 미전도 부족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사실 ‘미전도 종족’이란 용어로 주로 사용하지만, 이 책에서는 ‘미전도 부족’이란 용어로 써서 그래도 적었다. 미전도 부족이란 아직 한 번도 복음에 대해 접해보지 못한 곳을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해 들어는 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전혀 그런 접촉조차 하지 않은 그런 종족들을 가리킨다) 이 책은 바로 그런 곳에서의 선교사역에 대한 보고이다.

 

물론 바누아투 전역이 미전도 부족은 아니다. 바누아투 인구의 70%가량은 사실 기독교인이다(이들 중 분포도는 장로교, 성공회, 가톨릭, 그리스도의 교회 순이다). 아마도 1980년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영향일 것이다. 이처럼 전국민의 다수가 기독교인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깊은 산속의 부족들은 원시적인 생활습관과 종교를 가지고 있다. 바로 이런 곳으로 복음을 들고 가 선교사역을 감당한 저자의 사역이기에 대단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철저한 자기희생과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 없이는 할 수 없는 사역, 그렇기에 때론 오늘 편안하고 점잖은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생각하는 신앙관과는 다소 거리가 먼 듯 보이는 모습들 역시 없진 않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그런 사역이기에,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작은 것 하나까지 하나님께 의지해야만 할 절박한 상황일 테니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몇 가지 생각을 해본다.

 

먼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한다 하면서도 안전지대에 거하길 원하는 모습을 반성해본다. 얼마나 많은 사역자들이 안전지대에 안주하고 있는가? 우리나라 신학대학원들이 높은 경쟁률을 자랑하는 이면에는 소명의식보다는 목회자의 자리가 안전지대라는 인식이 없지 않을 것이다(물론 오해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신대원에 들어가는 분들이 더 많으니까).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우리의 자리가 믿음지대가 되길 소망해본다.

 

둘째, 바누아투라는 잘 알려지지도 않은 그곳의 깊은 산 속의 부족들 가운데는 원선교사의 나라가 대한민국임을 알고 더 환영해준 부족들도 있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100여 년 전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왔던 맥켄지 선교사가 그곳에서 사역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맥켄지 선교사를 저자는 몰랐다고 했는데, 사실, 맥켄지 선교사는 우리한국초기교회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아주 유명한 선교사 가운데 한 분이다. 물론 같은 이름의 또 다른, 어쩌면 더 유명한 선교사가 계셔서 혼동할 수 있는데, 여기 맥켄지 선교사는 호주사람으로 부산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한센병 환자들을 돌봤던 분이다(유명한 손양원목사님도 이 맥켄지 선교사에게 영향을 받았다). 아무튼 이처럼 100여 년 전에 자신들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리다 아내를 잃고 호주에 돌아갔다가 다시 조선이란 나라에 복음을 전하러 갔던 그 일들이 이들 부족민들에게도 알려졌었고, 100여년 후, 바로 그 나라에서 선교사가 자신들에게로 다시 와 복음을 전함이 그네들에게는 특별한 의미였을 것이다. 이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님, 여호와 이레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아무튼 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하찮게 여겨지는 일들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그것들을 통해, 훗날 더 큰 일을 행하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감춰져 있음을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이었다.

 

무엇보다 살아 계셔서 친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된다. 원 선교사님을 통해, 원 선교사님이 많은 복음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순간순간이 물론, 원 선교사님의 헌신과 땀 흘림이 담보되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일하심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 많았음을 보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릴 위해 일하고 계심에 위로가 된다. 원 선교사님의 앞으로의 사역 위에 언제나 하나님의 일하심이 함께 하시길 축복해 본다.

 

평신도가 읽어도 좋은 내용이며, 아울러 선교사역에 꿈을 품고 있는 분들이 읽으면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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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조정민 지음 / 두란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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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신앙의 출발도 목적도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종교는 내 뜻을 이루어 줄 신을 찾지만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내가 되는 것이라 말한다(물론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내가 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굳이 세상의 종교와 대조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여기 ‘세상의 종교’를 ‘미숙한 신앙인’으로 ‘기독교 신앙’을 ‘성숙한 신앙인’으로 바꿨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기독교 외에도 자신들의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종교가 없진 않기에). 그렇기에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저자는 9가지를 이야기한다. 거룩하라. 돌이키라. 하나님을 알라. 사랑하라. 하나 되라.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 증인되라. 이상 9가지는 저자가 본인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9주일간에 걸쳐 성도들과 함께 나눈 설교말씀이기도 하다.

 

이 9가지 가르침은 사실 새롭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 힘이 있다. 저자의 설교가 힘이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설교자치고 성경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말씀이 어디에 있나? 아니다. 성경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말씀이 사실 적지 않다. 누군가에게 성경말씀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자료로 사용되어진다. 그래서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필요한 구절만을 뽑아서 자신의 설교에 이용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설교법은 한국교회의 오랜 습관이기도 하다. 주로 이단단체들이 이렇게 하며 정통교단의 목회자들이 이를 비난하지만, 실상은 정통교단의 수많은 목회자들도 여전히 이렇게 설교하고 있다. 문맥을 고려하지 않는 뽑아 쓰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목회자의 소리가 될 수 있다. 언제나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메시지를 위해 성경전체에서 이것저것 성경본문을 짜깁기할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성경본문이 말씀하는 바를 풀어 설명해주는 것이 목회자의 역할이다.

 

또한 본문 따로 설교 따로 역시 없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성경본문이 말씀하는 내용을 풀어 전하고 있다. 그래서 힘이 있다. 물론, 아쉬움이 없진 않다. 분명 주어진 본문, 즉 정한 본문이 있을 텐데, 그 본문을 각 단락에서 제시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본 내용을 읽어가는 가운데 주 본문이 어디인지는 알 수 있지만 말이다.

 

또 하나 저자가 설명해나가는 내용들이 힘이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듣기 좋은 소리만을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책을 읽는 가운데 은혜가 되고 힘이 되며 위로가 되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부분들도 많다. 저자의 말처럼 은혜는 듣고 기분 좋은 것만이 아니다. 듣기 싫어 귀를 닫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 은혜다. 오늘 우리의 귀가 편안한 말에만 익숙해져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공자는 이런 말을 했다. “듣기 좋은 말과 보기 좋은 얼굴로 꾸며 대는 사람 중에는 어진 이가 드물다.” 그렇다. 듣기 좋은 설교만 가득하다면, 진정으로 어진 목회자인지 의심해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듣기 좋은 설교만 찾는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또 하나 저자의 글이 힘이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나’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병든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품지 못한다. 언제나 ‘안’에 머무는 것을 최선으로 안다. 하지만, 아니다. ‘밖’으로 눈을 돌리지 않고, ‘밖’으로 나가 우리의 손을 펼치지 않는다면 병들 수밖에 없다.

 

저자는 거룩을 말하며, 화목을 말하며,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을 말한다. 거룩은 정직이며, 거룩은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거룩은 이웃사랑으로 완성된다. 물론, 이는 레위기 19장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렇다. 우리는 교회의 역량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사실 하나님의 뜻은 아는데 있지 않다. 실천하는데 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 그러니, 실천함이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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