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보물창고 > 직장맘 수유이야기

2003년 3월 이날 우리 성현이가 태어나서 두돌간 모유수유를 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완모수를 하기까지 참으로 힘들고도 뿌듯한 일들이 많았다.
직장을 다니지 않는 전업주부라도 이렇게 오랜기간 분유를 먹이지 않고 완모수를 한 엄마가 있을 까 싶을 정도로 내가 대견하기도 하다.
더구나 주위에 그렇게 한 사람은 눈씻고 찾아 볼수도 없었던 터라.. 어디에서도 정보를 얻을 수도 없었고.. 시댁식구들과 출산을 앞두고.. "회사다녀도 꼭 먹일꺼에요~~"라는 나의 반응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시고, 그게 무슨 소리냐, 어떻게 먹이려고 하냐에.."짜가지고 오면 돼요"라고 했더니 거의 외계인 취급을 받았다. 당연히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지도 않았고 짜서 먹인다는 건 들어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만 해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2년간의 완모수에 성공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나 혼자만의 노력 이외에도 매일같이 10여개의 젖병, 8개의 깔대기를 닦고 소독한 우리 신랑과 이렇게 무리하게 강행한 며느리의 의견을 존중해 주시고 성현이에게 젖을 먹여 주신 우리 어머니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지 모른다.
이제 부터는 그동안 어떻게 회사 다니면서 수유를 했는지 그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정말이지.. 내가 수유를 할때만 해도 너무나 정보가 없었기에.. 조언을 얻을 때가 없는 것이 제일 아쉬웠다.


1. 첫번째 젖 물리기

병원에서 성현이 태어 날 때.. 의사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태어나서 젖 물리고 신생아실로 데리고 가 달라고.. 그랬는데 의사선생님이 잊어서 "선생님.. 젖 물리게 해 주세요~~" 하고 이야기 했다.
태명인 "둥이야~"하고 부르고.. 젖을 물리는데.. 왠지 감격스러워서..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그후 열흘간의 산후조리원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첫 4주동안 분유를 안먹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서 얼마나 악착같이 수유실에 갔는지 모른다. 거의 수유실에 앉아 있던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 비록 순산을 했지만 절개한 회음부 이외 한군데가 더 찢어져서 회복이 상당히 더디고 통증도 많았지만 무조건 참았다.
밤이고 새벽이고 성현이가 젖을 먹겠다고 하면 무조건 알려달라고 했는 데 일주일째인가 거의 노이로제 상태까지 갔나 보다.. 자다가 분명히 전화를 받고 수유실로 갔는데 아무도 없어서 신생아실을 갔더니 간호사가 전화 한 적이 없다는 거다.. 꿈속에서 조차 전화벨을 기다리고 수유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결국 열흘 째.. 어머니와 신랑이.. 이러다 병나겠다고 강제로 데리고 나오셨다. 


2. 3개월간의 육아 휴직

성현이 낳고 3달 동안은 열심히 젖 먹이고 매번 남은 젖을 짰다.. 남은 젖은 한방울이라도 안버리고 얼렸다. 회사 복직 할 무렵은 냉동고가 꽉~ 찰 정도로 모았다.
이정도면.. 내 취미 생활은 "젖 모으기" 라고 해도 될 정도.. ^^
이 당시.. 얼마나 열심히 젖먹이고 남은 젖 짰던지...
지금 생각해 보면 이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오직 얼마 안되는 정보로 시작했기 때문에 낮이고 밤이고 하루 열번도 넘게 남은 젖을 악착같이 짰다.. 손도 아프고, 잠도 부족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약간의 우울증도 생기려고 했던거 같다..
게다가 유달리 젖을 찾는 아이다 보니.. 하루의 대부분은 젖을 물리고 살았다.. 꼭 젖소가 된거 같은 기분이었다.. ^^;;

3. 유축기

복직을 앞두고 메델라 직장여성용 유축기를 구입했다. 당시 금액 45만원.. 지금은 환율로 60만원대라고 한다. 무진장 고가이지만 더블형이라 회사에서 짤때는 필수이다. 시간을 절반이상 단축하고 소음도 없고 부드럽게 짜져서 정말 너무너무 고마운 유축기다. 처음 살때는 비싸서 부담이 갔지만 지금 생각 하면 분유값에 비해 난 정말이지 절반이상 아낀것 같다.
만약 1개짜리 깔데기로 된 유축기였다면... 나도 회사에서 유축하는 것을 포기 했을 거 같다..
보냉가방도 따로 있고 분리도 가능하며, 전원/건전지 다 가능하고 일단 소음이 적다.

 

4. 보틀워머

메델라 보틀워머를 샀다. 
회사에서 짠 젖은 다음날 먹이는데 애가 먹는 시간 맞추기가 만만치 않은데다 영양을 파괴하지 않으려면 중탕을 해야 한다. 그런데 중탕을 해서 먹이기가 이만저만 어려운게 아니다.
온도 맞추기도 어렵고, 성현이가 갑자기 젖을 찾기도 하고 해서 정말 먹이는 것이 더 문제였고, 어머니의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어서 구입했다.
정말 잘 산 물건 중 하나다. 너무 편한 제품인데다 어른들 한약 데울때도 사용할 수 있어서 좋았다.



5. 회사에서 젖 짜기

(유축 장소)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 본사는 외국인 회사다 보니 쾌적한 유축장소가 있지만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일반 기업에 가기 마련이다. 덕분에 화장실에서 짰는데 이젠 이력이 붙어서 아무렇지도 않다.
사실 처음엔 화장실에서 짜는 것이 영 찜찜하고 불편했는데, 그건 기분상인거 뿐이고 위생상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쩌면 면역이 되었을 지도..)

(유축 시간과 사출)
더블형 유축기로 짜면 시간이 많이 단축된다. 많으면 20분정도 소요된다고 해야 하나? 사출시키는 것이 중요한데.. 사출은 대부분이 모르는 내용이기 때문에 설명이 좀 필요 한데, 유두끝을 손가락으로 자극을 잠시 주면 아이가 빠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난다. 그런 느낌이 들때 더블형 유축기를 이용하면 시간이 배 이상 단축되어 짤 수 있다.

(회사에서 유축횟수)
복귀하고 처음엔 4회, 돌전까진 3회, 돌지나서 2회, 몇달 후 지금은 1회 짰다.
아무래도 업무에 지장을 주면 안되기 때문에 출근을 좀 일찍해서 출근하자마자 점심식사 후.. 이렇게 default로 짜고, 오후 4시 경 또 한번 더 짠 후 7시에 짰다.. 양은 처음엔 하루 1리터 이상 짜다가 갈수록 줄어서 나중엔 400ml 정도로 가져갔나 보다.


6. 보관 방법과 깔대기

내 기억이 맞다면 실온에서 7시간, 냉장 일주일, 냉동 3개월정도가 보관주기였던거 같다.
오늘 짠 젖 중 내일 먹을 분을 우유병에 나눠서 냉동으로 보관하고 남은 젖은 비사용으로 얼렸다.
그리고 회사에서 깔대기 소독문제가 있었는데, 냉동실에 넣으면 세균번식을 막을 수도 있다고 하고 뜨거운 생수를 써도 될것 같지만, 난 그냥 회사에서 3번 유축을 한다는 가정이면 깔대기 6개를 가지고 갔다.
차라리 위생면에서 이게 더 나을거 같아서.. 물론 매일같이 이걸 닦는 부담은 있지만 위생이 우선이라..^^



7. 우유병 젖꼭지

보통 2달을 수유하고 마지막 1달을 우유병 물리는 연습을 하는데 엄마 젖만 열심히 문 아이들은 십중 팔구 우유병을 거부한다. 나도 마찬가지 였다. 처음엔 수유 양이 작아서 걱정, 나중엔 우유병을 안빨아서 걱정.. 점점 복귀 시기는 다가 오는데 우유병을 거부하니..
그랬다가 젖꼭지를 다양한 회사 제품으로 계속 테스트를 해 봤다.
드디어, 기호에 맞는 젖꼭지 발견. 성현이의 경우는 피존의 "모유실감 젖꼭지"였다.
아주 말랑말랑해서 우유병 싫어 하는 아이들 대부분이 이걸 쓰면 성공을 한다.


8. 엄마 먹거리

성현이 돌 전까진 먹는데 신경 많이 썼다. 엄마가 뭘 먹냐에 따라 젖 맛이 틀려지고, 기껏 모유를 먹이는 데 내가 이상한 걸 먹으면 아토피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래 못하기도 했지만 술은 입에도 안댔고 카페인있는 음료, 탄산음료도 자제했다. 가능하면 수유에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했다.  특히 수유에 도움을 주는 미역국, 사골, 콩탕 등.. 많이 먹었고 두유도 수시로 마셨다.


9. 엄마의 의지

수유는.. 아무래도 엄마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사실 참 힘들고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같이 직장을 다니면서 먹이기에는 너무 힘든 제약사항이 많다. 유축시간을 잘 맞춰야 하는데 회의가 있거나 교육을 가면 제대로 맞추기도 어렵고.. 출장이나 교육을 갔을 때는 난감한 상황이 많이 닥친다.
하지만 너무나 맛있게 젖을 빠는 성현이 얼굴을 보면 모든 것이 잊혀진다.
누군가 말했듯이.. 수유는.. 엄마의 선택이 아니라 아이의 기본 권리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유니세프에서도 수유는 최소 2년간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IQ 도 훨씬 높아 지고.. ^^


10. 유선염

상당히 많은 수유부가 걸리는 병이다. 유선염은..젖몸살이 가장 심해져서 곪을 때 생기는 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난 8개월 무렵 걸렸는데 응급실에 실려갔다고 해야 하나.. 암튼.. 어찌나 아프던지 고생 무지 했다.
이때 수유의 위기에 한번 봉착을 했었다.  그 당시 담당 의사는 이제 젖을 끊어야 한다고 했다. 아직도 우리나라 의사들은 수유에 대해 적극 권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오히려 소아과 의사는 "괜찮아요. 고름을 먹어도 괜찮아요. 아이가 자꾸 빨아줘야 유선염도 빨리 낳아요.." 이랬다.
그래도 일주일간 약을 복용하면서 회사에서 짠 젖은 다 버리고 그동안 얼려뒀던 모유를 먹였다. 집에서는 어쩔수 없이 빨리고..
유선염에 걸리면 유방이 딱딱해지고 열이 나서 아이가 빨지 않으면 젖이 잘 짜지지 않는다.
(평소의 10% 밖에 나오지 않았나 보다.)
애보랴, 회사 다니랴 너무 힘들어서 몸이 약해진 탓인지 애기 입에 있는 병균이 쉽게 침투를 했었던거 같다.
일주일간의 투병 생활 끝에 다시 수유를 할 수 있었다..


11. 젖 떼기

수유에 성공한 사람들의 마지막 관문.. 젖떼기다.. 젖에 대한 애들의 애착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어서 젖떼기도 참 힘든 과정이다. 하지만 오래 먹이면 오래 먹일수록 오히려 젖떼기가 좋은 것이 말귀를 다 알아 듣기 때문에 어느정도 이성에 호소할 수 도 있고, 나름대로 아이가 자제를 할 수도 있다.
성현이는 마침 두돌때 감기가 걸렸다. 이때 먹기만 하면 토를 했는데 이유를 "쭈쭈"로 돌렸다. 아프니까 더 젖을 찾았는데 그러면 바로 토하니까 "쭈쭈먹으면 토해.. 이제 아기가 아니라서 쭈쭈먹으면 토하는 거야"라고 했더니.. 잘 참아 줬다.
난 서서히 젖을 말렸는데 식혜를 좀 먹어주고, 하루 1번 짜던걸 이틀에 한번, 그러다 3일에 한번 이런식으로 서서히 짜는 간격을 넓혔다. 더 강제적인 방법이 있지만 부작용이 있을 거 같아서 이 방법을 썼고, 이 와중에 또 유선염이 올뻔 했는데 양배추 잎을 매일 밤 부치고 잤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아침이 되면 몽우리가 다 풀렸다.


12. 수유의 장점

- 아이의 건강 : 면역성이 높아져서 정말 건강하게 잘 자란다.
- 아이의 정서적 안정 : 엄마와의 정신적 교감이 형성되어서 정말 안정적으로 자란다. 
  우리 성현이도 맨날 야근하는 엄마를 뒀지만 어느 전업주부 엄마 부럽지 않게 엄마를 좋아 한다.
  성현이를 보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를 자기의 분신으로 여기는 거 같다.
- 아이의 IQ : 이것도 진짜 같다. 우리 성현이 보면.. ^^  (아.. 고슴도치 엄마)
- 다이어트 : 아무리 먹어도 안찐다.. 오히려 더 빠지는 사람이 더 많다.. 나도 쉽게 뺀거 같다.. 
  3달 후 복귀하고 다들 원래 모습 찾았다고 했고 수유를 한 참 할때는 오히려 더 빠진거 같다. 
  특히 임신 후 아랫배는 수유를 통하지 않으면 절대 빠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원래대로 완전히 돌아 왔다.
  (늘어진 살은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수유를 하는데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수유는 엄마의 선택이 아닌 아이의 권리다.." 라는 말이다.
대부분은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가 해 주는 모든 것을 "배푼다"라고 생각한다. 나조차도 은연중에 그런거 같다.. 하지만 수유건 사랑이건.. 아이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성현이를 위해 하는 모든 일들은 밥먹는거나 화장실 가는 거와 다를 바 없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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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보물창고 > 거꾸로 사는 엄마의 행복한 자녀교육

[거꾸로 사는 엄마의 행복한 자녀교육 - 서 형 숙]


이 땅에서 우리 아이와 천국처럼 살며 지.덕.체를 겸비한 최고의 아이로 키우기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엄마들은 누구나 내 아이가 남에게 칭찬 받고 좋은 대우를 받기를 원합니다. 아이는 세상에 나가면 유치원에서는 20대 1, 학교에선 40대 1입니다. 아무리 칭찬을 받아도 엄마처럼 일대 일은 아닙니다, 남에게 기대하는 것 엄마 먼저 하다보니 절로 잘 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스무 살, 열여덟 살 우리 아이들이 지덕체를 겸비했다고 합니다. 서울 강남에서 살고 있는 두 아이는 전인교육으로 학생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론대로 만끽하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자란 아이들은 스스로 행복하고 부모를 기쁘게 하고 선생님들이 감탄하고 이웃에서 감동하며 친구, 선후배들에게 인기가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한국청소년의 이상인 심신이 건강한 청소년이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풍부한 문화감성을 갖추었으며 다양성과 전문성 및 자기 주도적 생활태도를 갖춘 청소년입니다.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청소년이며 공동체적 질서와 예절을 존중하고 인권을 중시하는 청소년입니다. 또 통일을 준비하며 동북아시대와 세계화를 지향하는 청소년으로 자랐습니다.

새 학년이 되면 전 담임선생님이 문제집을 싸들고 집을 찾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마주하는 선생님들마다 우리 아이들의 엄마가 누구냐며 거꾸로 절 찾으시고 궁금해 합니다. ‘태경이가 선생님하고 제가 학생 해야 되겠어요.’ 라는 큰 아이의 윤리 선생님에 ‘홍원이 엄마는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어요. 아이가 이렇게 잘 크는데요.’ 라는 작은 아이 담임선생님도 계십니다. 열쇠고리에 우리 홍원이 사진을 달고 계신 아이의 6년 전 담임선생님도 계십니다.

한번은 서초구 사랑의 편지쓰기대회에서 금상을 받은 편지가 제게 날아왔습니다. 큰 아이의 친구가 쓴 편지였습니다. 천사가 이 땅에 내려오더라도 태경이 만큼 착할 순 없다며 그런 좋은 친구를 자신에게 준 어머니께 감사드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학년 초가 되면 저를 따라다니는 엄마들도 있습니다. 그간 지켜봐왔는데 어떻게 하면 아이들 하고 싶은 것 다 하게 할 수 있으며 아이들이 잘 노는데 공부와 부대활동을 이상적으로 꾸려 유학생도 부러워하는 생활을 하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더구나 온 가족이 날마다 천국처럼 사는 비밀은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 합니다.

딸인 큰 아이는 2004년 성적우수자, 수시입학으로 수능시험은 물론 면접도 치르지 않고 원하는 학교 원하는 과에 들어갔습니다. 아이는 예비 고3일 때, 태국에서 열린 제20회 세계잼버리 대회에 가서 ist(international service team) 즉, 운영요원으로 19일간 봉사하고 왔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나이 어린 요원이었습니다. 고 3 입시기간에도 그간과 별 다르지 않게 일상을 즐기고 봉사하며 공부하여 입시기간도 힘들지 않게 잘 지냈습니다.

아이는 9년간 스카우트 활동을 하였고 스카우트 최고 영예인 범 대원(tiger scout)입니다. 청소년협의회 청소년위원으로, 문화관광부 청소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제1회 한 일 유-스 포럼에서 부의장으로 결의문을 낭독하고 제2회 세계 청소년 문화축전에서는 청소년 대표로 대회개막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세계의 평화를 꿈꾸는 청소년이 이제 통일을 생각하는 어엿한 젊은이가 되어 대학 신입생으로 북한대학생들과 금강산에서 만났으며 학기 중에는 중국에서 열린 [유엔환경센터] 수자원 탐사계획에 한국대표로 참가했으며 여름에는 아태잼버리 국제부운영요원으로 일했으며 일본, 아시아 태평양 스카우트 포럼에서 한국을 대표하여 발표를 했습니다.

아들인, 작은 아이는 현대고등학교 2학년으로 초등학교, 중학교에 이어 학생회장을 하고 있습니다. 제28회 전국소년체전, 800m 금메달리스트(서울에서 딴 유일한 육상부문 금메달)이며 서울 소년 체전 대회신기록 보유자입니다. 육상선수가 아닌 놀며 체력을 다진 어린이였습니다. 운동장에서 잘 놀더니 운동도 다 잘 하는 것은 물론 다른 교과목도 모두 흥미로워하며 아주 잘 합니다. 중학교에서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학생들끼리 축제를 꾸려 전교생이 하나가 되게 했습니다. 축제사회를 보고 노래와 춤을 공연했으며 중3 때 스카우트에서 배운 사물놀이를 친구들에게 전수하여 ‘안홍원 사물놀이패’를 만들어 학교 축제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중1 때는 여수에서 서울까지 국토 종단을, 고1,2 때는 연천에서 강화까지, 다시 강화에서 당진까지 국토 횡단을 했습니다. 이번 교내 체육대회에서는 1학년 축구시합의 주심으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지금은 제 2회까지 진행된 ‘현대고 안홍원 배’ 교내축구대회를 열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를 사육하지 않고 교육이론대로, 자연 그대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많은 엄마들이 옷 살 때 혼용율 살피고, 좋은 학원 고르느라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저는 우리 아이의 행복이 무엇일까를 꼼꼼히 살피는 데 시간을 썼습니다. 아이의 행복이 그 무엇보다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며 무엇이든 아이 스스로 하도록 오래도록 기다려주고 칭찬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먹을거리를 찾아 제대로 먹였습니다. 그렇게 하니 엄마도 편하고 아이도 편하여 이 땅에서 천국에서처럼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첫째 다정한 엄마가 되려했습니다.

내 곁에서 숨쉬고 있는 아이에 늘 감사했습니다. 심신이 건강하게 잘 크는 것만으로 만족했고 그 이상은 덤이라 여겼습니다. 엄마를 보면,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엄마 생각만으로도 온갖 시름이 다 사라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엄마가 되려했습니다.

1. 언제나 아이를 웃으며 맞았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만나더라도 함박웃음으로 두 팔 펴고 아이를 환하게 맞았습니다. 잠에서 깰 때, 집에 들고 날 때, 전화를 할 때도 아이를 처음이며 마지막 맞는 듯 정성으로 맞았습니다.

아침에는 아이에게 볼을 비비며 ‘잘 잤어?’ 하고 귓속말을 하여 깨웁니다. 뭐든 스스로 하지만 아이 기르는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그리 했는데 아이들 역시 행복한 미소를 띠우며 눈뜹니다. 이렇게 시작한 아이들의 하루는 행복할 것이고 한달이 되고 일년이 되며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이제 처녀 총각이 다된 두 아이지만 아직도 제게 처음 왔던 신비한 작은 생명체의 모습이 보입니다. 저 역시 아주 행복한 시간입니다.

2. 아이가 원하는 것은 다 하게 해주었습니다.

남을 해코지 하는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다 하게 해주었습니다. 화장대에서 화장품을 살피고 찬장 그릇을 다 꺼내 탑을 쌓고 성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놀고 이불장에 들어가 잠을 자도 그대로 두었습니다. 싱크대를 잠그고 화장품을 위로 옮기는 대신 무엇이든 만지게 하여 일상생활용품이 장난감이 되게 했습니다. 아이가 늘어놓은 그릇에 물을 담아 다양한 색을 보게 하고 나무 막대기로 또는 쇠 젓가락으로 두드려 서로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을 즐기게 했습니다. 화장품 향기를 맡아보고 색을 칠해보게 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느 정도 호기심이 충족되면 더 이상 만지지 않아서 우리 집은 어린 아이와 함께 살아도 서랍이나 싱크대를 묶어놓거나 화장품등이 다른 곳으로 피신가는 경우와 다르게 뭐든 다 제자리에 놓고 살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이런 경험을 하며 호기심이 늘 충족되었으므로 뭐를 빨거나 껴안고 사는 집착이 없었습니다.

아들은 누나 원피스 입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도 맘껏 누리게 두었습니다. 그러고 할아버지 댁에 가면 어른들께서 ‘사내를 계집애로 키운다’며 혀를 차도 ‘커서도 저러겠어요?’ 하며 아이편이 되어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었습니다. 간혹 벌레를 가지고 놀아도 그도 그대로 두었습니다. 다 놀고 난 후에 꼼꼼히 손을 씻기는 일은 신경을 썼습니다.

걸레질 하는 엄마에게 ‘말이다’ 하며 달려와 등에 타면 저는 아이들의 말이 되었습니다. 집을 깨끗이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달리다가 폭신한 데가 나타나면 히힝 하며 아이를 바닥에 떨어뜨리기도 하며 작은 방에서 말 한필을 키우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아이가 신이 나서 ‘이랴이랴’ 하면 더욱 속도를 내어 달리기도 했습니다. 두 아이는 엄마와 승마장에 있는 듯 즐겼지요.

전철에서 아이가 잠이 들면 더 멀리 갔다가 되돌아왔습니다. 아이는 달콤한 잠을 자고 천국에 있는 듯한 아이를 보는 엄마의 마음 역시 천국이었습니다. 약속이 있어 아이를 꼭 깨워야한다면 함께 일어나서 전철 문이 몇 개인지 살피던지 머리 위 손잡이에 아이를 달아주면 잠이 달아났습니다. 전철 안이 놀이터가 아니므로 조용히 그런 일을 하면 아이는 기뻐하고 그것을 보는 주변 어른들도 이해하여 아이에게 미소를 보냈습니다. 눈을 반짝 뜨게 된 아이 역시 행복해 했습니다. 아무데서나 잠이 드는 아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다정하게 풀어냈습니다.

학교 안 가려고 울던 아이, 운동장에만 세우면 축구 싫다고 도망가던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축구 재미에 빠져 온갖 시합장을 두루 다녔습니다. 대회비를 지원하고 짐 싸들고 따라가서 하루 종일 응원하였습니다. 뾰족한 골 맛도 보여주진 않았지만 공부엔 관심도 없었지만 아들이 즐기는 경기라 열심히 함께 했습니다.

예비 고1 딸은 한 달 동안 고교 학업 준비는 않고 털 천을 끊어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린 토끼모양 옷을 손으로 꿰매 날마다 조금씩 만들었습니다. 저는 동대문 시장에 같이 가고 재단을 해주고 지퍼를 달아 마무리를 도왔습니다. 예비 고3 소녀는 태국, 세계잼버리에 가서 봉사하고 돌아왔습니다. 다들 정신 나갔다고 혀를 찼지만 아이가 원하는 일이라 보냈습니다.

두 아이 다 월드컵 때는 지방 경기장에 축구를 보러 다녔습니다. 평생에 한 번 밖에 없는 세계축제에 빠질 수 없다며 학교를 결석하고 갔습니다. 세계적인 축구 선수들과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을 만나 즐거움을 만끽하며 지내게 했습니다.

3. 아이를 원 없이 놀게 했습니다.

아이들은 노는 것이 일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원 없이 충분히 놀았기 때문에 무슨 일에나 흥미를 갖게 되었고 활력과 창의력이 넘치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엄마로서 여유를 갖고 언제나 노는 것 자체를 칭찬했습니다.
아들은 유치원도 한 학기를 다녔을 뿐 학원 한 번 다니지 않고 초등학교 내내 운동장을 지키는 아이였습니다. 학원 다니며 사이사이 짬을 내서 운동장에 나오는 아이들과 잘 놀기 위해 있는 머리를 다 짜냈습니다. 지금 놀고 있는 아이들과도 잘 놀아야 하고 새로 온 아이와도 놀이의 맥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논다고 눈감고 귀 닫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머리가 쌩쌩 돌아가 누구와도 잘 놀고 어디서도 장난감을 찾아내며 훗날 어떤 행사기획도 다 할 수 있게되었습니다.

고교생이 되어서야 가끔 학원을 찾았던 딸 역시 초등학교, 중학교 내내 노는 시간이 넘치는 아이였습니다. 5학년 때 이정향 영화감독(집으로)께 한 달간 무료 연극 지도를 받았는데 학원 때문에 빠지는 보통 아이들과 다르게 매일 출석하는 아이는 감독의 칭찬과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제가 오히려 감독께 감사인사전화를 받는 처지가 되었고 훗날 아이는 여러 큰 행사를 기획하며 발표를 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많으니 책도 많이 보았고 중3 때는 컴퓨터로 혼자 수화와 점자를 배워 친구들에게 전파시키기도 했습니다.


둘째 영리한 엄마가 되려했습니다.

늘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했습니다. 어린 아이는 병원이 싫고 무섭습니다. 이비인후과에서 입 소독을 안 하려는 아이 곁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면 아이는 노는 줄 알고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자연스레 소독 액이 아이의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아이에게 강요하지도 않으면서 일을 잘 풀었습니다. 좁은 의자에서 예닐곱 시간을 보내며 여러 선생님을 시간 마다 맞아야하는 아이들, 많은 친구들과도 안테나를 일일이 맞춰야하는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면 웃음으로 반겨 맞았습니다. 그런 것들이 숨쉬듯 자연스럽겠지만 긴 시간을 밖에서 보낸 아이는 집에 들어오면 무조건 쉬게 했습니다.

1. 칭찬을 하며 아이 스스로하게 기다렸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탯줄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숨을 쉬어야 아이가 살 수 있듯이 스스로 하게 했습니다. 아이는 성취감을 맛보고 저는 자녀가 자라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네 살 아이를 혼자 신발 끈을 묶게 하면 기다림의 진수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어디를 가려고 길을 나서다가 현관에 앉아 느리고 어설프기 그지없는 신발 끈 묶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아이도 처음 하는 일이고 엄마도 처음 보는 일이니 보잘 것 없는 성과에도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되면 자연스레 제 책가방은 스스로 싸게 하였습니다. 숙제 역시 스스로 하게 했습니다. 좀 부족해서 당장은 선생님께 꾸중을 들어도 그건 자기의 일이라는 것을 인식시켰습니다. 엄마는 오후 9시가 되면 퇴근한다며 더 이상은 집안에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이는 어려운 숙제가 있으면 초저녁에 들고 와서 봐달라고 했습니다. 아이의 책가방과 숙제로 엄마가 골머리 앓을 일은 없었습니다. 학교 환경미화도 스스로 하게 했습니다. 좀 못해도 스스로 하게 하여 시간이 지나니 어떤 장식도 다 할줄 알게 되었습니다. 미술과외 따로 시키지 않아도 아이가 실력을 갖추게 되어 수행평가며 옷 입는 감각까지 뛰어나 아이에게 손 갈 것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하는 아이의 수행평가를 참견할 일도 없었고 시험 때라도 매달릴 일도 없었습니다. 아이가 시험 중이라도 우리 부부는 어버이 날이라면 부산 시댁에 가는 등 보통 때처럼 지낼 수 있습니다.
칭찬만큼 좋은 묘약은 없습니다. 조그만 일에도 칭찬을 했는데 5학년이 되도록 공부에 취미가 없던 아들에게는 공부가 아닌 다른 것들을 찾아내 늘 칭찬했습니다. 축구공을 잘 몬다든지 하다못해 대변을 아주 잘 보는 것도 칭찬을 했습니다. 해서 아들은 자신이 못하는 아이란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감 이 넘쳐 밝고 명랑하게 잘 자랄 수 있었습니다.

2. 공교육을 우선한 적기 교육을 시켰습니다.

6월 15일은 콩을 심는 날입니다. 빨리 수확하려 그 이전에 심으면 덩굴은 무성한데 콩이 열리지 않습니다. 제 날에 심은 콩은 풍성하게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또 제철 음식을 먹이면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랍니다. 제철음식이 양분도 많지만 철에 맞게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름에 보리를 먹으면 몸이 시원해져서 더위가 겁나지 않습니다. 선풍기 아니라 부채를 쓰지 않고도 여름을 잘 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적기교육을 하여 최고의 효과를 보았습니다.

글자를 늦게 깨치게 했습니다. 글자는 일종의 기호입니다. 약속으로 익히는 것이기 때문에 글자를 미리 익히지 않은 아이들은 그만큼 창의력이 뛰어납니다. 일곱 살이 되도록 글자를 못 익힌 아들은 제 이름의 홍자를 히읗이 두개라는 것을 찾아내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영어 교육 역시 학교에서 배우기 때문에 미리 가르쳐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내 나라 말을 잘 하면 내 나라 문화를 잘 알면 나중에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딸은 영어는 중학교에 가서야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그래도 중1에 처음만나 6개월 만에 미국으로 돌아간 원어민 선생님과 아직까지 교류하며 영어를 즐겨합니다. 중 2에야 사설학원에 다니며 회화를 배웠습니다. 얼마 후에 본 미국 8학년 교과서에 한국의 공용어가 영어와 한국어인 오류를 보고 그 출판사로 메일을 보내 그런 그릇된 정보를 얻게 된 이유와 사과메일을 받았습니다. 영어를 배우기보다는 그 안에 채울 것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2,3년간의 영어회화를 제외하곤 학교교육만으로 아이들은 다른 나라 사람과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아들은 언어에는 관심이 적지만 아쉽지 않습니다.

유치원을 다니지 않은 두 아이는 처음 학교에 가서 발표력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아이가 발표만 시키면 모깃소리를 낸다고 하셨습니다만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말하기를 배우므로 자연히 하게 된다고 아이도 선생님도 안심시켰으며 이제부터 시작하자고 부탁했습니다. 닦달하지 않아도 칭찬하며 긴 시간 기다려주니 세계청소년 축제에서 개막선언을 하고 전교생을 데리고 축제 사회를 보는 아이들로 자랐습니다.

뭐든 아이가 절실히 필요로 할 때 가르쳤습니다. 큰 아이의 수영은 효과만점이었습니다. 물을 무서워하던 큰 아이는 중 2 때 여름 바다 캠프를 가기 전 수영을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한 달간 개인교수를 했는데 자유형까지 배웠고 주변 사람들이 구경 할 정도로 수영 틀이 잡혔습니다. 특히 선행학습을 하지 않아 선생님들께 인기있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듣는 아이 앞에 와서 수업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학원 등 사교육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시간이 많아 충분히 쉬었으므로 새로 운 것을 알게 하는 수업시간이 흥미진진한 놀이 자체였습니다.

3. 갈등은 오래 끌지 않았습니다.

적당한 갈등은 삶의 보약입니다. 그것이 해소되었을 때 성취감, 해방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되면 아이가 짜증스러워집니다.

동생이 태어나자 누나는 열병을 앓았습니다. 혼자만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엄마의 보살핌을 받는 낯모르는 아이가 고울 리 없습니다. 뭐든지 혼자 해내는 누나를 칭찬하고 아무것도 못하는 6개월짜리 작은 아이를 거짓으로 꾸짖었습니다. ‘누나는 옷도 혼자서 잘 입는데 너는 못 입는구나. 누나는 화장실에서 일보는데 너는 기저귀에 다 싸고 누나처럼 예쁘게 말로 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네.’ 그랬더니 오래지 않아 누나가 오히려 ‘엄마, 얘가 아기라서 그래요.’ 하며 동생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20년이 다 되가는 지금까지 두 아이는 연인처럼 사이가 좋습니다.

장난감에 흥미를 갖게 되면 길가다가도 그것 사려는 아이와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인형, 자동차 같은 장남감은 아이와 의논하여 얼마 만에 한 개를 살지 미리 결정하여 참고 지켜나갔습니다.

4. 일상에서 동기유발을 하여 재미있게 가르쳤습니다.

보고 배우게 했습니다. 아이는 어른 등을 보고 자랍니다. 도덕공부를 10여년씩 해도 도덕적인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것은 말로만 배우기 때문입니다. 제가 행할 뿐입니다. 인사를 잘 했습니다. 택시를 타며, 버스를 타며 ‘안녕하세요?’ 하고 늘 인사를 하니 아이가 따라 해서 우리 아이들은 어디를 가도 어리지만 대접받고 살게 되었습니다.

바른 말을 썼습니다. 지지, 찌찌, 빠방 같은 아기가 쓰는 말 대신 완벽한 표준말을 썼으며, ‘~하면 안돼’ 같은 부정적인 어휘 대신 긍정적인 말을 썼습니다. 어른답게 행동하며 빈말은 안했습니다. 전철에서 잠들려는 아이에게 ‘잠들면 두고 내릴 거야’ 같은 협박성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또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길에서 떼쓰는 아이에게 ‘저 아저씨가 혼내준다.’ ‘의사가 주사 놓는다.’같은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잠깐이면 지나칠 그 사람이 뭐 무섭나요. 또 이유 없이 다른 사람에게 적의를 갖게 하면 아이 정신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의사가 주사 준다는 것은 거짓이지요. 주사는 간호사가 놓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의사는 떼쓴다고 주는 게 아니라 치료를 위해 꼭 필요한 때 주사를 놓습니다. 저는 아이가 열린 마음으로 살게 했습니다.

생명성을 알게 했습니다. 두 아이가 두 돌, 네 돌 때부터 먹기 시작한 유기농산물에 무당벌레가 따라오자 책을 가져다가 함께 살폈습니다. 진딧물을 먹는 무당벌레는 새끼를 위해 진딧물이 많은 곳에 알을 낳는답니다. 아이들은 그럽니다. ‘무당벌레도 엄마처럼 아기를 사랑해.’ 그 무당벌레를 위해 장미나무에 데려다 주고 기뻐하는 아이들이 점점 다른 벌레들을 살피며 모든 생명체는 나처럼 귀한 존재라 여기게 되었습니다. 만지면 아플 수도 있어 함부로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화단 밖으로 나온 지렁이를 흙으로 돌려보내는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사이가 나쁠 수가 없습니다. 전교생과 세계의 어린이들과 자연스레 함께 하나가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는 분을 알게 했습니다. 기차역에 일찍 도착하면 역무원에게 부탁하여 기차 기관실을 보게 했습니다. 객실이 따로 되어 있어서 저절로 가는 줄 아는데 아이들은 이런 살피기를 통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는 누군가의 노력으로 편안하게 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아이들은 집 앞 경비 아저씨와 청소 아주머니께도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유기농 생산지에 가서 일손 돕기를 하며 아이들은 농부의 고마움을 알게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먹다가 생산자에게 고맙다며 전화를 하자고도 하고 선물을 하기도 하고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직접 해보게 했습니다. 아이들이 대 여섯 살 때 함께 식혜를 만들었습니다. 재료를 사며 방앗간에서 떡만 파는 줄 알았는데 보리가 싹을 낸 엿기름도 파는 것을 알게 되면 어느 가게에서나 생각지 않았던 다른 무엇을 파나 살피게 됩니다. 만들면서 엿기름물이 가라앉는 것을 본 아이들은 기다릴 줄 알게 됩니다. 빨리 가라앉으라고 소리쳐도 두드려도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들이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잘 기다리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현금자동인출기는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자료 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면 아이들에게 번호를 하나씩 눌러서 작동시키게 합니다. 가정 경제를 이해하고 기계를 다루는 법을 알게 됩니다. 기계는 소리 지른다고 서 두른다고 빨리 처리해주지 않습니다. 사람은 기계가 원하는 속도로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아이들은 남의 말에도 귀를 잘 기울이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어떤 친구, 어느 나라 아이와도 눈높이를 맞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술관, 박물관에서는 쓰지 않고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게 했습니다. 욕심내서 많은 것을 보게 하는 대신 한 두개만 집중해서 즐기게 했습니다. 시립 미술관에 가면 그림을 보다가 지루해지면 아예 뜰에 나가 그림을 직접그리기도 하였습니다. 고1 아들은 수학여행에서 울주 반구대 암각화를 만지며 전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청동기 시대에 그것을 새겼을 사람과 같은 곳에 손을 대고 있다는 것이 가슴 터지는 감동이었다고 합니다. 시간은 다르나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여. 작품을 오래 즐기더니 이제는 시공을 초월한 대화를 하게도 된 것입니다.

5. 옳지 않은 것은 단호하게 혼냈습니다.

떼란 제 생각이 생겼다는 증거이므로 귀하게 여겼습니다. 떼쓰면 껴안고 소곤 거려 아이의 마음을 가라 앉혔습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말로 하지 않거나 억지를 쓰는 떼는 단호하게 바로 잡았습니다. 길가다가 예정에 없던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쓰면 낮은 말로 ‘살 날짜가 아직 안되었는데’ 하고는 지나옵니다. 아무리 우겨도 엄마는 그 이상 말을 않기 때문에 아이는 따라오기 마련이지요.

어렸을 때 다른 아이를 꼬집기에 똑같이 해주며 ‘아퍼’ 했더니 몇 번 하다가 다시는 않더군요. 그래서 아이들은 별로 손가지 않고 잘 자랐습니다. 그래도 정 안 되면 회초리를 든 적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은 혼자 이기지 못해 울그락 불그락 화를 내곤 했습니다. 사춘긴가 보다 하고 좀 두었으나 문을 거세게 닫는 등 주변을 불편하게 하기에 말로 하라고 했습니다. 개선되지 않자 회초리를 구해와 아이를 때리고는 잘 못 가르친 저도 책임이 있다며 함께 맞았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셋째 대범한 엄마가 되려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멋있어지려 노력했습니다. 큰 문제가 생겨도 대범하게 행동하다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습관이 되어 나 자신이 되어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통 큰 엄마가 아니었는데 지금은 통 큰 엄마, 연구대상 엄마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한 엄마가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 집 아이 꼴등이랑 노는 것 알지요?” 저는 ‘그 아이가 우리 아이와 놀아 좀 나아지겠네요.’ 하고 받아넘겼습니다. 그 아이는 이제 아주 공부 잘 하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작은 딱지로 엄청나게 큰 딱지를 땄다며 아들이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르며 집에 들어왔습니다. 함께 무척 기뻐했는데 다음날 아침 학교에 가려고 보니 자전거가 없었습니다. 딱지 딴 것이 너무 기쁜 나머지 자전거는 놀이터에 두고 온 것입니다. 새 자전거가 무척 아까웠으나 기쁨을 엄마와 나누고자 달려온 아이의 마음을 우선에 두었습니다. “너 마음이 아프지? 그래도 홍원이가 엄마한테 제일 먼저 딱지 들고 와서 엄마는 기뻐”라며 자전거 아까운 마음을 뒤로 했습니다.

1. 아이를 온전히 믿었습니다.

저는 제 아이를 온전히 다 믿고 무슨 말이든 그대로 받아주었습니다. 어렸을 때 아이들에게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나를 속일 수는 없다. 내가 거짓말을 했는지 나는 알기 때문에.’라며 거짓말을 해서 나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 말을 이해해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밖에 나가면 엄마에게 전화하려고 애쓰지 말고 있는 곳에서 잘 하라고 했더니 어느 곳에서나 최선을 다하고 옵니다. 믿음이 있어서 두 아이는 고2, 중3에야 휴대전화를 마련하였습니다.

중 3딸은 친구 싸움을 말리다가 거꾸로 뺨을 흠씬 맞고 왔습니다. 발단이 되었던 아이 엄마와 아빠는 당장 학교에 가자며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매 한번 들지 않고 귀하게 기른 딸이 아까운데 아이는 ‘그 아이는 나쁜 아이가 아니라 좀 노는 아이인데 오늘 뭔가 오해가 있은 것 같아요. 제가 반장이니 한번 풀어볼게요.’ 해서 기다려주었습니다. 훗날 그 아이는 오히려 미안해하고 서로 잘 지내게 되었습니다. 속은 상했지만 뺨은 이미 맞은 것이고 그 아이를 혼낸다고 맞지 않은 상태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어서 그리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요.

2. 세상의 아이들을 돌보았습니다.

아이 친구들이 집으로 전화하면 내 아이에게 하듯 사랑스럽게 받았습니다. 아이 친구들은 하소연을 제게 하기도 합니다. 또 아무 때나 자녀처럼 우리 집에 와서 잡니다. 저는 제 아이처럼 밥그릇에 남긴 밥풀도 긁어 먹이며 돌봅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다 제 아이 같습니다. 필리핀의 한 소년은 어머니날이면 제게 편지를 보내기도 합니다.

길에서 만나는 욕하는 아이들을 타일렀습니다. 20여년을 했는데 한번도 사나운 아이를 본적이 없습니다. 집에서 칭찬 못 받는 아이, 밖에서도 그러니 욕밖에 더 나올게 있나싶기도 합니다. ‘잘 생긴 사람이 왜 욕을 하니? 너 얘에게 욕했으나 그건 네 거다. 네 입에서 나왔으니까. 자신은 자기가 깎는 조각상이야, 이렇게 멋진데 함부로 다루면 너무 아깝잖아’ 칭찬과 사랑으로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참견을 들은 욕쟁이 길가 아이들은 다 제게 선의로 다가와 인사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아이들을 내 아이로 여기는 부모가 많아진다면 내 아이도 어디를 가도 많은 다른 낯모를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 행복할 것입니다.내 아이가 살 터전, 내 아이와 같이 살아갈 모든 아이가 행복하게 잘 살아가게 가꿉니다. 마치 전철에서 내릴 때 빨리 타기위해 내릴 사람에게 길을 잘 터주듯이 말입니다. 내 아이만 기를 살려 키워내면 훗날 잘 자라 지도자가 되었을 때 내 아이가 기죽었던 다른 사람 이끄느라 고될 것입니다. 또 내 아이보다 잘난 아이는 훗날 어느 나라 지도자가 되건 내 아이가 앞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존재이므로 더 잘 자라도록 칭찬해주었습니다. 그것은 그 아이를 위한 것이지만 내 아이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3. 내가 크는 만큼 아이가 크므로 저 자신을 키웠습니다.

어른 되는 법을 익히고 화가 나도 참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아이가 어떤 문제를 일으키든 아이를 잃는 것보단 좋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제가 생겨도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또 아이는 아이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제가 원해서 낳았습니다. 아이는 충분히 사랑받고 자랄 권리가 있고 엄마에게는 그럴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질없는 말은 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아침에 학교로 가는 아이에게 ‘공부 잘해’, 용돈을 주며 ‘아껴 써’, 시험보고 온 아이에게 ‘잘 봤니?’ 등입니다. 아이가 공부하러 학교에 가고 용돈은 아껴 써야 한다는 것을 더욱 잘 압니다. 시험도 학생인 본인이 더 잘 보고 싶습니다. 해서 시험을 보고 오면 ‘긴 시간 애 썼네. 좀 쉬어야겠다.’, 학교에 온 아이에게 ‘오늘 즐거웠니?’ 라고 말합니다. 아이는 하루 종일 있었던 재미있는 일을 봇물 터뜨리듯 말합니다.

16년 째 도시에서 농업운동을 하며 세상 키우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처음엔 먹을거리만 알았는데 차차 농업문제 환경과 생산의 분배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의 사고 폭이 넓어질수록 아이를 기르기가 수월했습니다. 엄마가 열심히 사니 자연 아이들도 보고 배웁니다.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의 중요한 행사는 빠짐없이 챙겼습니다. 낮에 아이들 작품 전시회에 가지 못하면 오후에라도 학교에 들러 선생님께 잠긴 전시장 문을 열어 달라 부탁하여 살피곤 했습니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여 한살림 일 이외의 다른 일을 하지 않았으며 동창회도 가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한살림 일에 매달리고 밤에는 아이들과 지내야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이 스스로 뭐든 하기 때문에 손 갈 일은 없었으나 아이가 자라는 것을 지켜봐 주는 게 엄마의 역할이라 그 일에 충실했습니다. 유일하게 밤늦게까지 머문 날은 쌀값 결정회의 날 정도였습니다.

남편을 정말 사랑하며 천국에 버금가는 행복 넘치는 가정을 만들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에서 행복한 아이가 자라므로 있는 힘을 다해 행복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행복은 넘쳐나면 이웃으로 전염이 됩니다.

어떤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미래도 중요하지만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현재를 망치는 일은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입시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인 오늘이 소중하여 날마다 즐겁고 의미 있게 살도록 했습니다. 언제나 천국에 사는 우리 가족, 돈도 명예도 학식도 부럽지 않습니다.

사실, 많은 것을 갖춘 남들이 부러워하는 아이로 기르기,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냥 좋은 음식 먹이고 아이 스스로 하게 두어 작은 일에 칭찬하며 아이와 행복한 오늘을 지내면 되었습니다. 아이와 이 땅에서 천국처럼 살기,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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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김장을 내가 담는건 아니지만

오늘 어머니가 꽁치 한박스를 사셨다.

생선가게 아저씨랑 친하셔서, 한박스 가져다 달라고 하셨던것.
아저씨는 생물이 있다고하시며 가져다 주셨다.

꽁치들이 아주그냥 깨끗하니 파랗게 반짝반짝해서

마치 바다로 도로 돌아갈것 처럼 이뻤다.

한 50 마리. 장만을 해서 지금 소금에 절여놓으셨단다.

소금이랑 생강물에 절여놓으셧다가 올 김장 석박지 김치에 넣으신단다

만세~~  울매나 맛날까

올가을에도 멸치강젖(생멸치 통째로 담은 젖갈)을 넣고 김치 담그셔서 거의 몇주를 그거하고만 밥먹었는데

으흐흐~ 그 김치도 다떨어져 가는참에 기뿌당~~

올김장이 기대된다 냠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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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11-24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꽁치 넣으시는군요. 저희는 오징어랑 갈치넣어요^^ 맛나겠어요~

水巖 2005-11-24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회사에 나가시는지 아니면 휴직중인지 궁금하군요. 모쪼록 건강에 유의하시기를.......

토토랑 2005-11-25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앗 저희집도 가끔은 갈치를 ^^;; 근데 어무니 친구분이 꽁치도 맛나다 그러시길래 새로운 시도를 해본답니다. ^^;;

수암님~ 안녕하세요.. 녜 아직까지 회사나가구 있어요. 나올수 있을때까진 나오려구요 ^^;; 걱정해주신 덕분으로 건강하답니다. 아가두 건강하구요 ~~

ceylontea 2005-11-25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 꽁치..--;
전 비린내를 참지 못해서... 젖갈만 조금 많이 넣어도 못먹어요... --;
 
 전출처 : 보물창고 > 2004_뜨게질 옷 모음



뜨게질은 나도 임신 전까진 목도리 3개 떠본게 다였습니다.
그러다, 임신하고 태교한다고 시작된 성현이 옷 뜨게질이 한동안 갔나 봐요..
사실 요즘은 안하고 있지만.. ^^  그동안 뜨게질 한 거 정리를 좀 했어요..

대바늘 아기 옷

너무 이뻐 사둔 책인데요.. 특별한 기교는 필요 없고 이쁜 색상의 실만으로도 훌륭한 작품들이 나와요.
첨엔.. 동대문 시장에 가서 실을 사서 떴었는데 그러다 보니.. 확실히 옷이 금방 망가지더라구요. 그래서 전 패키지 상품을 만이 주문했어요. 비록 수입실이라 비싼 편이지만 그만큼 Quality가 있어서요.


김정란 - 니트디자이너 김정란의 꼭 뜨고싶은 니트 78

요책이 참 이쁜 옷이 많고 뜨기도 쉬워요..태교할때 사본 책이었는데 정말 목도리만 2개 떠본 실력에서 이책으로 옷을 여러벌 만들었어요.
http://www.jrkim.co.kr/ 요기 가시면 옷별로 패키지로 재료를 팔아요. 실이나 단추요.
실사러 가기도 힘든 직장맘이잖아요. 전 비싸도 그냥 주문해서 만들었어요.
수입실을 써서 동대문 시장 같은데서 파는 실보다 비싼데 역시 비싼 만큼 값어치를 해요.


송영예 - 엄마사랑 아이옷 손뜨게..

이것도 이쁜 옷이 많죠. 여긴 애들 옷말고 다른것도 같이 있어요.
http://www.banul.co.kr/
마찬가지로 책에 나오는 재료를 여기서 주문하셔도 되요.

 

코바늘 소품

삼성출판사 - 내 아이를 위한 행복 손뜨게..
여긴 소품이 죽여 주는 책이에요.. 얼마나 이쁜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당나귀를 이 책 보고 만들었죠..
http://www.funknit.co.kr/index.html

 

 

1. 임신 때..
먼저 임신때 뜬 옷을 소개 할께요.. ^^
워낙 성격이 급해서 하나 시작을 하면 끝장을 봐야 해서요.. 이케 많이 만들었어요.
이중 입혀 본건 얼마 안됩니다..T.T



이중 입혀본 옷 사진 몇장만 소개 할께요.. 돌 전이네요.. 딱 1번 입혔어요.. 이미 작아져서 똥꼬가 끼어서..T.T



하핫.. 자다 깨서 얼굴 빨게 진것 좀봐.. 요것도 돌 전.. 이옷이 참 이쁜 옷이었는데, 좋지 않은 실로 만들었더니 나중에 틀어 지더라구요..



요것도 돌전.. ^^ 이 세라복은 좀 자주 입혔어요..



2. 하늘색 가디건 set
제가 너무 좋아 하는 옷이에요. 모자, 가디건, 바지가 다 set구요, 양말도 있는데 한짝 밖에 안떴어요..








3. 회색 가디건
단추가 참 이뻐요. 포크, 스푼으로 되어 있구요, 회색이라 그런지 깔끔한 느낌이에요..
요거 입히고 삼성어린이 박물관 다녀왔는데 넘 이쁘더군요.. 성현이 32개월 모습이네요..



4. 주황색 가디건
이건 가디건보다 수 놓는데 더 오래 걸렸어요. 면사로 만든건데 실제 보면 광택이 좀 있죠.. 너무 크게 떠서 좀 더 있다 입혀야 하지 않나 싶어요..


5. 하늘색 오버롤 set
이것도 모자랑 set에요. 이 옷은 실제 입은 모습이 훨~~ 이쁜데, 아직 못입혀 봤네요. 입히고 나면 사진 업뎃해야지.. ^^


6. 쥐돌이 가디건 set
미완성이에요. 작년(2004) 에 만들고 팔을 뜨기 싫어서 아직 저 모양이네요..


7. 양말
성현이 돌전.. 신발대용으로 신겼던 양말이에요.. 지금 봐도 앙증맞네요.. 참으로 유용하게 잘 쓴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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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보물창고 > 2004-이야기 보드 만들기

이때가 2004년 설날로 기억해요.
설날 전날... 낮에 일하고  밤을 세서 만들었나 봐요.. 설날 당연히 7시 부터 시댁가서 또 일하구요..
진짜 힘이 남아 돌았나.. 암튼..부직포랑 우드락을 미리 사서 준비를 해 두고..
밤새 또 깡지공장 가동했습니다.

준비물:우드락, 양면테이프, 부직포, 두꺼운 종이(박스 종이도 괜찮음), 벨크로(일명 찍찍이), 기타 개인의 취향에 따라 사인펜이나 실과 바늘

이때만해도 디카가 없어서 성현이가 가지고 논 사진도 없고 이 이야기보드도 다 망가져 버린게 안타깝네요.. 사이즈는 4절지 수준이었어요..

만드는 방법은 뭐 간단해요. 부직포를 대충 오려서 부쳐서 이쁘게 케릭터를 만들구요, 약하기 때문에 뒤에 두꺼운 종이를 대어서 단단하게 하면 됩니다. 전 박스를 잘라서 사용했죠. 풀은.. 양면테입이 더 나았을 텐데, 공업용 본드를 사용했더니 말리는 시간이 좀 걸리더군요.. 그리고 뒷면에 벨크로를 부치면 되요.

우리 성현이 아침에 깨자 마자 얼마나 좋아했던지.. 정말 한동안 잘 가지고 놀았어요. 그당시 돌 전이어서 소근육 발달에 참 좋았어요. 태양의 볼 잡는 것도 좋아 했죠..
아래 달님의 모자도 따로 떼어 지구요, 사과도 따로 떼어 져서 다 먹고 남은 모양도 되요. 크리스 마스 트리 장식도 따로 다 떼어지구요..

이 중 제일 오래 걸린게 "뛰어가는 개"인데.. 이유인즉은.. 저 개는 수를 놓아서 만들었어요..만들면서.. 제 정신 상태를 점검했어요..

올 겨울.. 하나 더 만들어 볼까 싶기도 해요.. 지금 만들어 줘도 좋아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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