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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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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 대한민국에는 자발적 노예들이 많다.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어도 엄연한 사실이다. 자발적 노예들은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자처한다. 옆집의 자그마한 행복에는 무시무시한 증오와 질투를 퍼붓다가도 거대한 부정에는 노예근성이 자연스럽게 발동해 주인님들의 편을 들어준다. 최저임금을 30원 올리는 것에는 치를 떨면서도 대기업이나 정치인의 부패에는 국가 경제에 해가 된다며 눈을 돌린다. 세상은 이렇게 대물림되었다. 젊은이들의 고통을 너희의 노력 부족 때문이라고 당연한 듯이 이야기 한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뒤따라오는 말 ‘우리 때는 안 그랬어’ 그래, 그 때는 노력하면 조금 더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라도 있었겠지. 일본에 사토리 세대라는 것이 있다. ‘깨달음’의 세대라는 것인데 자동차는 운전하지 않고, 브랜드품은 관심이 없고, 연애에 대해서는 담백한 요즘의 젊은이들을 말한다. 한국에는 삼포세대라고 한다.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를 말한다. 아버지 세대들처럼 열심히 살면 그만큼 보상을 해주는 사회는 끝나고 무얼 해도 더 나아질게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냥 하루하루를 버티자는 깨달음을 얻은 젊은이들, 그런 세대.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을 떠나 호주로 간 주인공 계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대화 형식으로 들려주는 소설이다. 종합금융회사 신용카드팀 승인실에서 일을 하던 계나는 의미를 찾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전쟁과 같은 삶처럼 사는 현실에 절망하고 사표를 제출한다. 나름 좋은 학교를 나와 나름대로 대기업에서 일하며, 오래도록 만나온 남자친구까지 있는 삶이다. 그런 그녀는 왜 떠날 결심을 했을까. 스스로 한국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추운 날씨는 물론이거나와 치열한 삶으로 포장되는 경쟁구도, 그만큼 모든 것을 참아야 하는 사회를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반대를 무릎 쓰고 오히려 미래가 더 불안할 수도 있는 호주로 향한다. 가족과 남자친구는 눈물로 만류했고 주위의 사람들은 외국병이라며 비아냥거렸다.  국수 가게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학원을 수료했고 방학기간 동안 남자친구에게 청혼에 가까운 고백을 들었지만 계나는 다시 호주행을 택한다. 첫 번째 호주행이 한국이 싫어서였다면 두 번째의 출국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였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자기 손에 움켜쥐고 싶어서 한국을 떠났다.

계나는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성공한 삶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계나 정도만 되어도 살만하겠다라고 생각할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주인공 계나의 삶은 사토리 세대의 삶이나 삼포세대의 삶과도 다르다. 이런 젊은이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지쳐 온전히 떠날 생각조차 못한다. 낭만적으로만 보이는 호주의 삶 역시 사회의 톱니바퀴의 일부분일 뿐이고 낙원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저 ‘이민가고 싶다’를 내뱉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이 사토리 세대의 삶이고 한국의 삶이다. 그저 꿈만 꾸고 있을 뿐인 매일 똑같은 삶. 수많은 젊은 세대들은 이런 노예의 삶에서 자신의 반짝이는 족쇄를 자랑하는 지경까지 왔다. 대기업 직원은 중소기업 직원을 깔보고 더 나은 사람을 질투한다. 기성세대를 욕하면서 닮아가는 세대, 욕하면서 닮아가는 사회. 하지만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꼭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삶이야말로 행복한 삶이다. 최소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면 미래가 두렵지 않은 나라를 바라는 것이 그렇게 큰 것일까. 그저 최소한의 희망을 원하고 있을 뿐인데?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 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는 있는 거잖아.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됐어? <p.10>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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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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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에 조그마한 관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탐정이라는 말을 듣고 이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셜록 홈즈’ 미스터리 쪽에서 불멸의 단어가 된 홈즈를 창조해 낸 코난 도일이지만 그의 이야기는 홈즈만큼 알려져 있지는 않다. 불멸의 캐릭터를 창조한 작가였지만 피상적으로만 알려진 그의 삶은 실제로는 어떤 것이었을까? 줄리언 반스는 『용감한 친구들』을 통해 홈즈의 작가인 코난 도일과 그가 실제로 무죄를 입증했던 사건인 조지 에달지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야기는 아서와 조지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1장과 2장에서는 아서와 조지의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주는 구성으로 유년 시절과 성장 과정, 가족 관계, 성인이 되어 소설가와 사무변호사로 살아가기까지 각자의 삶이 어떻게 달랐으며 서로 다른 모습으로 자라온 과정을 비교하여 보여준다. 어머니의 마법처럼 들려주던 이야기를 들으며 관찰력과 상상력을 키웠던 아서는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고 목사인 아버지의 말을 진리처럼 듣고 자란 조지는 부족함을 느꼈던 아버지의 말을 대신해 간결하고 명료한 법의 체계에 관심을 갖게 되고 사무변호사로 살아간다. 게다가 조지는 인도계 혼혈이었다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으며 가족 역시 피해를 입는다. 성인이 된 후 조용하고 소박하게 사무변호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레이트 웨얼리 잔학 행위’라는 가축에 대한 도살 범죄로 조지가 지목되고 조지의 삶은 경찰, 검찰과 배심원들의 혼혈이라는 이유 없는 증오심 때문에 유죄를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조지는 형기를 마치고 출감했지만 그의 지위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억울하게 감옥생활을 했음에도 조지는 자신의 삶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한편 아서는 셜록 홈즈라는 사상 초유의 탐정을 만들어 낸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다. 독자들은 아서와 홈즈를 동일하게 여겨 아서에게 온갖 의뢰 편지를 보내게 된다. 그런 아서에게 도착한 조지의 편지를 보고 그를 만나게 된다. 그를 본 순간 조지가 근시라는 것을 보고 그가 무죄임을 직감하게 되고 그가 창조해낸 홈즈처럼 자신이 직접 수사를 시작하게 된다.

아서와 조지의 삶은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된 후에도 크게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타인에 의한 비난을 받았다는 것이다. 조지는 어린 시절부터 타인에게 삶을 배척당했고 성인이 된 후에는 사법 체제마저 타인의 시선으로 그를 심판했다. 아서는 홈즈를 창조한 후 타인에 의해 끊임없는 참견과 비난을 들었다. 실제로도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를 죽게 한 후 엄청난 편지로 타인의 비난을 들었다고 하니 이 이야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타인에게 간섭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 것일까. 과거의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도대체 우리의 삶이 과거에 비해 나아진 것은 편리함 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19세기 말의 영국의 이야기는 현재 우리의 삶과 다를 것이 무얼까. 네트워크의 발달은 타인에 대한 편견과 악의, 광기로 가득찬 비난을 더욱 쉽게 만들어주고 비난의 당사자는 구체적인 사실을 알지도 못한다. 현재의 우리의 삶이라고 다를까. 혼혈뿐만이 아니라 지역으로도 타인을 비하하고 악의에 찬 말들을 한다. 정당한 비판은 악의로 가득 차 있거나 목적을 가진 비난에 의해 묻혀버린다. 삶은 다채로워진 것처럼 보이고 편안함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지만 인간의 본질은 과거에 비해 더 드러나기 쉬워졌고 변한 것도 없다. 줄리언 반스는 이 이야기를 통해 현대의 삶을 재조명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끔 번역서를 보다 보면 궁금한 점이 있는데 책의 번역 제목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아서와 조지 Arthur & George’인데 번역본의 제목은 ‘용감한 친구들’이다. 일단 두 제목 간의 개연성이 없을뿐더러 실제 책 내용과도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출판사의 여러 사정도 있겠지만 이런 제목을 볼 때마다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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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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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결백하거든. 반면에 저 친구는 유죄야.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체포되었겠지. 그런 희생자들, 그렇게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을 때는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 (…) 그러다가 그들이 죽으면 그들에 관한 말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해.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에게 더 관심이 많다는 느낌이 들 정도야.” (2권, p.465)

가끔 소설이나 영화 등을 보게 될 때 제목이 현재의 상황을 너무나도 잘 반영하는 경우가 있어 놀랄 때가 있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의 제목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야기, 현실의 삶과는 다르다. 삶을 위협하는 현실 속에서 낙천주의자가 되기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낙천주의자란 무언가 희망이 보일 때나 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은 이야기처럼 극적이진 않지만 이야기보다 훨씬 가혹할 때가 많다. 삶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도 별일 없이 낙관적이 되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글프게도 우스운 것은 이런 강요된 낙관주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가난을 면하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현실에 감사하면 사람은 낙관적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알제리 전쟁이 한창이던 프랑스 사회는 시끄러웠다. 전쟁이 격렬해지고 잔혹해지자 전통적인 좌우의 대립구도마저 무너졌다. 국회의원은 여전히 자기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았고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미셸의 집안은 가난한 친가와 부자인 외가가 뒤섞여 서로를 조롱했다. 하지만 미셸은 이런 어른들의 언쟁과 소동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저 로큰롤, 문학, 사진, 테이블 풋볼에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테이블 풋볼을 하러 간 비스트로 (작은 규모의 카페 겸 식당) 발토의 녹색 커튼이 쳐진 문으로 레인코트를 입은 사람이 사라졌다. 폐쇄된 공간, 호기심에 이끌린 미셸은 커튼을 젖혔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이라는 글귀 뒤로 보인 것은 체스클럽이었다. 미셸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텔레비전에서나 보았던 장폴 사르트르와 조제프 케셀이 체스를 두고 있었다는 것. 미셸은 호기심 덕분에 클럽에 계속 가게 되고 클럽의 최연소 회원이 되고 서로를 알아가게 된다. 회원들의 대부분은 동구권 국가에서 망명해온 사람들로 가족을 떠나 온 사람, 공산주의에 회의를 느낀 사람, 고국에서 누리던 명예와 지위를 잃은 사람들이다. 미셸은 이들과 어울리며 체스를 배우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아간다. 미셸의 삶은 록 음반을 빌려주던 친구의 전사와 살인사건과 관련된 형의 행방불명, 부모의 이혼으로 큰 변화를 맞게 되고 체스클럽의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게 된다. 미셸은 클럽에서 말없이 왔다가 가는 환영받지 못하는 사샤를 만나게 되고 가까워진다. 그와의 우정이 계속되지만 그는 결국 클럽의 한 복판에서 목을 매단 채 발견된다. 미셸에게 주는 유서와 선물을 남기고 간 사샤의 죽음으로 그가 간직했던 비밀도 밝혀진다. 비가 오던 사샤의 장례식이 끝나고 날씨는 다시 좋아졌고 여름이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좌우 대립과 알제리 전쟁을 둘러싼 프랑스의 혼란스러운 상황은 미셸 집안의 모습이기도 하다. 프롤레타리아-부르주아의 대립은 친가-외가의 대립구도 그대로이며 중재를 택한 아버지 폴과는 달리 형인 프랑크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외가와 대립하게 된다. 체스클럽에서의 미셸의 어린시절, 사샤와의 만남, 사샤의 죽음과 미셸에게 남겨진 편지는 고통 속에 남겨 있던 역사의 종언과 동시에 희망을 보려는 몸짓이다. 우리에게도 현재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겨질 수 있을까?

“내가 너를 선택한 것은 네가 새로운 세대의 일원이기 때문이야. 너희 세대는 우리가 겪은 끔찍한 일들을 경험하지 않았어. 우리는 끔찍한 일들을 피할지 몰랐고, 그것들을 겪으며 죄를 지었지만 너는 달라. 망각에서 구원될 가치가 있는 사람들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너는 알아낼 거야. 아름다운 것은 기억 밖에 없어. 나머지는 먼지고 바람이야.” (2권, p.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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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와 가나코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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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직장인’이라는 신분에 ‘학생’이라는 신분을 보탠 지 3년째, 평소처럼 책을 사들였지만 좀처럼 읽지는 못했다. 두 신분에 필요한 책들만 겨우 읽었음을 고백한다. 오쿠다 히데오의 『나오미와 가나코』는 그동안 목적 없이 순전한 재미로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은, 거의 유일한 소설이다. 이런 몰입은 정말 오랜만인지라 흥분감이 가시지 않아 짧은 인상을 먼저 남겼는데 제대로 기록해 두고 싶어졌다.

육체적인 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휘두르는 폭력은 십중팔구 지독히 나쁘다. 대개는 남성이 여성에게, 성인이 아이에게 가하기 쉽다. 내 동거인인 남자는 남자치고 그리 힘센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 잠결에도 온 힘을 다하는 나를 간단히 제압한다. 다행히도 문제적인 폭력성을 보인 적은 딱히 없지만, 언젠가 그가 내 서랍장에 화풀이를 해댔을 때 나는 완전히 겁먹어서 한동안 그의 행동이 잘못됐음을 지적하지도 못했다. 그때 그는 어떤 일로 나에게 잔뜩 화가 났는데 애먼 서랍장을 쾅쾅 닫았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그가 처음으로 무섭고 낯설었다. 나는 소리쳤다. 내 서랍장에 손끝 하나 대지 말라고, 내 서랍장을 치는 건 나를 때리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내 서랍장은 내 분신이라고. 내가 직접적으로 당하지 않아도 그의 행동은 분명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폭력이었다.

가나코가 남편 핫토리 다쓰로에게 당한 폭력의 수위는 내가 겪은 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쓰로는 냉장고에 넣지 않아 과일이 상했다는 이유 따위가 사람도 똑같이 상해야 마땅하다는 데 충분한 근거가 되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가나코는 머리칼을 잡힌 채 마구잡이로 손찌검은 물론 발길질까지 당하며 두들겨 맞아 온몸이 시커먼 멍으로 물드는 것은 기본이고 갈비뼈까지 다쳐야 했다. ‘반달에 한 번꼴’이라지만 언제 무슨 이유로 예고도 가차도 없이 남편의 폭력이 무자비하게 날아들지 모른다. 단 한순간인들 숨조차 마음대로 쉴 수 있었겠는가. 남편의 심사가 무엇에 뒤틀릴지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데 말이다. 다쓰로의 폭력에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지배당한 채, 가나코는 자기 목숨이 언제 치명적인 위협에 놓일지 암담한 상황인데도 저항의 몸짓도, 도움의 손짓도 한 번 하지 못한다.

누구도 가나코를 도와주지 않는다. 시어머니는 아들의 폭력성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며느리의 입맛과는 상관없이 아들 입맛의 된장국을 끓이는 법만 알려줄 뿐 아무런 언질도 해주지 않는다. 가나코가 남편의 폭력에 대해 말했어도, 시어머니는 아들의 역성을 들며 ‘맞을 만한 짓’을 하지 말라고 가나코를 탓했을 것이다. 시누이 핫토리 요코도 오빠의 폭력을 진작에 눈치챘지만 “다음에 만나면”이라고 외면했다(요코는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이다. 오빠의 실종을 파헤치는 유일한 인물인데 “아무리 용서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어도 하나뿐인 오빠니까”라고 놀라운 행동력과 실행력과 추진력 등등의 근거를 밝혔지만 나중에는 “왜 내 인생에 오점을 남겨야 하는데?”라고 울부짖는다). 지금 당장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다음’은 없다. “당하는 쪽은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

가나코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친구 나오미가 유일하다. 나오미의 적극적인 제안을 ‘도움’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약하다. 그것은 살인이었으니까! 친구를 위해 살인까지 불사하다니 얼핏 개연성이 떨어지는 행동이다. 그러나 조금만 이해하려 들면 전혀 이해되지 않는 행동도 아니다. 나오미는 아버지의 상습적인 폭력을 피해 고향을 떠나 지금 이곳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기껏 도망쳐 온 자리에서도 똑같은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에게. 광기 어린 아버지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어머니를 보면서도 속수무책으로 숨어서 공포에 떠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나오미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잠재되어 있었다. 나오미는 친구라도 구해야 했다. 그때부터 다쓰로는 가나코에게뿐만 아니라 나오미에게도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폭력이라는 이름의 끔찍한 괴물일 뿐이었다. 그러니 다쓰로를 살해하는 일은 ‘살인’이 아니라 ‘제거’였다. 당연히 후회도 가책도 망설임도 없을 수밖에, 괴물을 제거하는 일에 양심 따위가 끼어들지 않도록 노력할 수밖에.

하지만 나오미와 가나코는 평범한 여자들이다. 다쓰로를 제거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방법을 찾고 도구를 준비하고 알리바이를 조작하고…… 나오미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그 과정은 나름대로 치밀하게 준비되는 듯 보이지만, 그들은 전문적인 킬러가 아니다. 일단은 다쓰로를 무사히 살해하고 암매장하여 단순 실종으로 처리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 한계가 분명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나오미가 ‘신이 기회를 준, 완벽한 계획’이라고 믿어도 평범한 여자들이 저지르는 살인이 허술하지 않다면 그야말로 판타지가 아닌가. 오쿠다 히데오는 일부러 마련해 둔 허술한 구멍들에서 본격적인 스퍼트를 내기 시작한다. 나오미와 가나코에게는 ‘괴물을 제거하는 일’이었어도 어쨌든 살인, 그에 뒤따르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나오미와 가나코에게 그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구성원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경찰 같은 사회가 아니다. 경찰은 가나코를 지켜주지 못했듯이 다쓰로의 죽음도 방관한다. 다쓰로가 겉으로는 모범적인 ‘훈남’ 냄새 폴폴 풍기며 잘 다니던 회사도 불미스러운 스캔들로 피해를 입을까 봐 직원의 실종을 은폐하려 든다. 오로지 오빠의 실종에 의문을 품은 여동생 요코만이 집요하게 나오미와 가나코의 숨통을 조여온다. 폭력이 한 개인의 몸과 정신에 어떤 상처로 각인되어 어떻게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게 되는지 그 미묘한 심리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가다가, 이제 오쿠다 히데오의 이야기는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분출하며 끈질기게 추적하는 요코, 그리고 그 추적을 따돌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나오미와 가나코가 긴박하게 쫓고 쫓기는 데 집중한다. 이야기는 한순간에 절정, 절정, 절정…… 끝없는 절정으로 이어지는 궤도를 따라 내달리는데 한숨을 돌릴 틈조차 없다. 단연 압도적인 흡인력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글자 그대로 손가락이 책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나오미와 가나코의 첫 행보는 델마와 루이스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확연히 다르다. 죽음은 자유의 쟁취가 아니다. 델마와 루이스의 저항은 거기서 끝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무엇이든 하는 편이 훨씬 나으므로, 일단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므로 나는 나오미와 가나코의 선택을 지지한다.

나오미와 가나코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느라 ‘리아케미’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빠트렸다. 이 소설에는 중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불편한 편견이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중국인인 리아케미도 처음에는 그런 편견에 기대어 그려지므로 오쿠다 히데오의 생각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그러나 큰언니처럼 나오미와 가나코를 지지하고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쳐 생의 의지를 불사르는 리아케미이다. 오쿠다 히데오가 중국인에 대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리아케미라는 멋진 여성 캐릭터도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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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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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이 시는 사람은 과거나 어느 지역에서나 비슷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준다. 어디 개인 뿐일까.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 역시 과거와 다를 것이 없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과거 나치가 지배하던 시절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착각일까. 사람들은 죽어가도 책임을 지는 시스템과 사람은 전무하며 타인은 망자에 대해 오지랖을 떤다. 끔찍한 세상이다.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에서는 이런 재난 같은 삶 속의 우리의 모습을 그려낸다.

구병모가 그려내는 세계는 과거 신화나 전래동화에서 차용한 것에서부터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까지 다양하지만 그 속에서 보여주는 이야기는 시간을 초월해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된다. 「파르마코스」는 저수지가 되어버린 한 마을에 대해 이야기한다. 심한 가뭄이 든 마을의 두 소녀, 수와 루. 우물을 배급받아 오는 도중 수는 한 여인에게 친절을 베풀어 우물을 나눠주고 입에서 보석과 꽃을 토해내게 된다. 값진 보물이지만 가뭄이 든 마을에서는 쓸모가 없고 운반할 수가 없어서 도시로 갈 수 없는 가족들. 수를 가두지만 마을에 온 의원이 선거에 쓰기 위해 수를 데려간다. 루 역시 한 여인을 만나고 보석 대신 벌레와 개구리를 토해낸다. 하늘은 개구리와 벌레를 위해 비를 내리고 루는 계속 토해야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자신을 구해준 루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마을의 외딴 곳으로 내쫒는다.

「이창裏窓」은 현대인의 삶을 드러낸다. 창으로 보이는 옆집의 부모 자식의 모습을 보고 아이를 학대하는 것이라 생각에 신고를 한다. 사실 확인도 없이 상상만으로 타인의 삶에 간섭하고 오지랖을 떠는 현대인의 모습 중 하나인 오지라퍼다. 오지라퍼들은 뒷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특히 인터넷의 오지라퍼들은 타인의 삶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짧은 글로 악랄한 글을 남기지만 문제가 생기면 변명 몇 마디로 끝낸다. 나는 결국 나쁘지 않다. 「이창裏窓」의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이야기 전개를 위해 선택한 소재가 너무 극단적인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카페에서 타인을 뒷담화하는 오지라퍼와 수상한 옆집의 모습을 보고 신고하는 오지라퍼가 그렇게 다른 것일까. 타인에 대한 관심과 오지랖을 구분할 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사람은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악하게 태어나 교육으로 인한 최소한의 이성과 법률 같은 규제로 자신을 억누르며 살아가지만 위기상황이 닥치면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물론 천사의 마음을 가진 듯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진다. 꼭 위기의 상황이 아니어도 사람은 여전히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만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살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억울하게 죽어도 대책이 없는 사회에서 어떤 개인이 이기적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피해를 입지 않거나 나 자신이 안전할 때 다른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사람은 환경에 쉽게 적응하는 존재다. 나치의 세상에서는 조용히 있는 것이 삶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치에 부역하는 것이 뒤탈 없이 나중의 삶까지 보장해 줄 수 있는 사회라면 대부분의 사람은 정의를 포기한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끔찍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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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4 14: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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