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쟁이 남자들의 이야기 댄디즘 - 최초의 멋쟁이 조지 브러멀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
쥘 바르베 도르비이 지음, 고봉만 옮김, 이주은 그림 해설 / 이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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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멀지도 않은 과거, 잘 생긴 외모에 반항아 기질을 물씬 풍기던 제임스 딘에 열광했던 것이나, 말보로 광고 간판처럼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쓰고 담배를 문 거친 모습은 남자들의 이상향이자 거친 마초의 세계였다. 특히 이 마초의 세계는 가꾸지 않는 원시적인 야생의 모습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어떨까. 남자들이 화장을 하고 연약한 모습에 깔끔하고 멋스러운 옷을 즐겨 입는다. 댄디의 사전적인 의미는 '멋을 많이 부리는 남자'일 뿐이며 현재의 남성의 모습은 댄디일 것이다. 이들-특히 어릴수록-은 옷을 사는데 드는 돈을 아끼려 하지 않고 유행에 뒤쳐지지 않으려 하며 남들의 시선에 크게 신경을 쓴다. 이것이 댄디(dandy)일까? 또한 문학에서 댄디는 세련된 문화취향을 가지고 기존의 사회와 모럴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 정치에 대한 무관심, 나르시즘 등으로 일컬어진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댄디일까? 댄디가 패션에 국한된다면 우리는 젊은 댄디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일 테고, 문학으로 이야기한다고 해도 자칭 댄디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댄디의 나라인가? 쥘 바르베 도르비이 <멋쟁이 남자들의 이야기 댄디즘: 최초의 멋쟁이 조지 브러멀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는 댄디의 시작과 삶을 통해 실체적인 이해를 하려 한다. 특히 이 책은 <댄디즘과 조지 브러멀>을 번역하고 고봉만의 해설과 이주은의 그림 해설을 덧붙인 것으로 글만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는 부분을 그림이 이해를 도와준다. 

댄디의 탄생 배경을 본다면 댄디를 하나의 모습-특히 패션으로만 본다는 것이 얼마나 무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댄디는 산업혁명과 계급혁명 시절의 서구의 시민사회가 낳은 독특한 산물이다. 당시 영국의 상류 사회의 젊은이들에게는 독특하면서 사치스러운 스타일이 유행했는데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고 잠깐의 우스꽝스러운 현상으로 치부하게 되었다. 베르베는 이 시기의 젊은이들이야말로 댄디의 원류이며 핵심이고 그 태도와 심리에 담긴 사회학적 현상을 읽어내려 했다. 급격한 사회의 변화는 그들 자신을 스스로 고립되게 만들었다. 신 부르주아의 속물근성, 전통과 권위를 내세우던 귀족들의 몰락, 유행만 따르는 몰개성의 대중들, 댄디들은 이들 어디에서 섞일 수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무례함과 냉담함으로 무장하고 자신들을 세상에서 분리했다. 저자는 댄디의 원조인 조지 브러멀의삶을 통해 댄디를 조명한다.

어떤 것이라도 유행의 영역에 들어서게 되면 실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게 된다. 댄디의 껍데기는 패션이다. 유행에 민감하지만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돈이 많으면 명품으로 치장을 한다. 이것이 댄디인가? 댄디는 옷을 잘 입는 남자가 아니다. 후줄근한 옷을 입고 있어도 댄디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댄디즘이 존재하지 않는 댄디는 껍데기일 뿐이며 댄디즘은 삶의 방식에 대한 총체적인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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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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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그리 낭만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가능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우리가 첫눈에 볼 수 있는 것은 고작 외모뿐이다. 외모에 이끌려 어떤 감정이 순간적으로 들끓는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 자체에 대한 사랑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감정이 상대가 가진 외모로 필연코 품게 마련인 착각 혹은 환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오해는 위태롭다. 환상 속 그대는 언제든 실망스러운 현실로 추락할 수 있다. 내가 그대를 세워놓은 환상과 그대가 진짜 서 있는 현실의 간극이 적을수록 일시적인 감정은 ‘추락’ 속도를 늦춰 진정한 사랑으로 견고하게 ‘안착’할 수 있다. 외모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려면 시간을 들여 그가 어떤 인격과 성품과 취향 등등을 가진 사람인지 알고 그에 민감하게 조응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설령 그 시작이 외모였더라도 외모는 상관없어져야 사랑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스 에리히 노삭은 『늦어도 11월에는』(1955년)에서 첫눈에 서로의 영혼까지 들여다봤다고 확신하는 연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미 죽어버린 여자의 시점으로 서술함으로써, 운명적인 상대라는 것을 첫눈에 감지한 그 사랑의 결말이 죽음임을 아예 처음부터 설정해 놓고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로 시작하는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1998년)처럼 서술자인 ‘나’가 사자(死者)임을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 대해 아무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독자는 책장을 거의 모두 넘긴 후 네다섯 장 남겨두고서야 지금껏 내내 이야기한 여자가 이미 죽었음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나는 노삭의 의도를 어떻게 처음부터 알았을까? 어쩌면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의 김을 새게 만들 수도 있는 폭로일지 모르지만, 사실 이 내용은 출판사 보도자료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니 혹시라도 나 말고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내가 추리소설의 중요한 반전을 떠벌리기라도 한 것처럼 부디 화내지 마시길!

『늦어도 11월에는』의 첫 문장은 “우리는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이다. 부유한 유부녀 마리안네가 이혼남인 희곡작가 베르톨트 묀켄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다. 그러고 나서 곧이어 “아니지, 차근차근 얘기해 나가야 한다”는 문장으로 이어져 마리안네는 베르톨트를 처음 만났던 날부터 떠올린다. 그들은 문학상 수상식장에서 처음 만난다. 마리안네는 그 문학상을 제정한 기업가 남편 대신 참여한 아내로, 베르톨트는 그 문학상을 받는 작가로. 그들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베르톨트가 곧장 마리안네에게 다가와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쏟아놓은 고백이 그들 사이의 첫마디였다. 그리고 마리안네는 베르톨트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그 고백을 듣자마자 과감하게 행동하기 시작한다.

우연히 같은 공간에 머물게 됐을 뿐인 그들의 첫 만남과 베르톨트의 고백과 마리안네의 행동 사이에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만한 연결 고리가 없다. 마리안네가 수상식에 참여하기 전에 베르톨트의 작품을 미리 읽어보긴 했다. 하지만 그 작품을 읽으면서 영혼의 깊은 교감을 느꼈다든가 하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이고 숙명적인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베르톨트는 수상식장에서 마리안네를 보기 전까지 그녀의 존재 자체에 대해 까맣게 몰랐다. 그러나 노삭은 이다지도 턱없어 보이는 사랑, 이해받지 못하는(도덕적 혹은 윤리적인 측면이 아니라 이성적 혹은 논리적으로! 서로 사랑이라는데 이성이나 논리, 상식이 웬 말이야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사랑에도 다른 사람들은 감지하지 못하는 뭔가가 분명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입으로는 그 자리에 어울리는 수상 강연을 그럴듯하게 하면서도 탁자 아래로는 다리를 잠시도 가만두지 못한 채 발 장난을 하는 베르톨트가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마리안네는 직감한다. 베르톨트는 마리안네가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금방 눈에 띄는” “좀 드문 사람”, “품위 있는 귀부인”임을 첫눈에 알아본다. 베르톨트는 마리안네의 특별한 ‘품위’에 대해 줄곧 상기시키는데, 초면에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고백까지 하게 만든 그 품위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종잡을 수 없다. 단지 그들은 ‘문학상 수상식장’이라는 공간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단둘만 억지로 끌려 나온 이질적인 존재임을 서로 단박에 알아차렸다고 짐작할 뿐이다. 속마음을 숨긴 채 적당히 섞여드는 척하지만, 그 ‘적당히’를 잘 견디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배겨내지 못하는 사람은 들뜨게 되어 있고 또한 동류를 금세 알아본다.

베르톨트가 받은 ‘문학상’ 이름은 ‘상공인협회’ 문학상이다. ‘상공(商工)’과 ‘문학’이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말하는 것은 편견일지 모르지만 왠지 내게는 그리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이 문학상을 제안하고 거액의 상금을 후원한 사업가는 마리안네의 남편 막스 헬데겐이다. 막스에게 문학을 향한 열정이나 애정, 혹은 사명 같은 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문학상 제정이 자기 명성을 높여주고 자기 기업을 좋은 이미지로 광고하는 기회가 되어줄 수 있다는 계산이 섰을 뿐이다. 그가 익명으로 남겠다고 면치레했던 것도 수상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누구나 다 상공인협회 문학상이 막스의 작품임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막스는 돈을 투자해 자신이 얻고 싶었던 것을 모두 얻었다. 누구의 어떤 작품이 수상했는지는 자기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사업상 중요한 일을 밀쳐두고 수상식장에 참석하는 것은 더더욱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막스는 대신 아내 마리안네를 밀어 넣었다.

수상식장에서 남편을 대신하는 마리안네는 결코 ‘마리안네’ 자신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마리안네에게 궁금해 하는 것은 ‘마리안네’가 아니라 ‘막스’이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마리안네의 생각이 아니라 막스의 의견이다. 베르톨트 역시 당분간의 생활비가 아쉬워 마지못해 수상식을 참고 있을 뿐, 자신이 그들만의 성대한 교양 잔치에 근사한 들러리가 되어주는 역할이라는 것쯤은 잘 알았다. 마리안네는 뜨거웠으나 불안정했던 첫사랑의 상처에서 도망치기 위해 성공한 기업가이자 막대한 자산가인 막스의 견고한 성채에 안착해 물리적인 안정을 얻은 대신 자신으로 존재하기를 그만두었다. 마리안네가 베르톨트의 갑작스러운 고백을 경계하지 않고 100퍼센트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어쩌면 그 말이 그녀조차도 억누르느라 한동안 잊었던 자신을 화들짝 일깨웠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 말이 그녀에게는 이제껏 숨죽이며 기다려온,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삶을 버리고 다르게 살아보라는 일종의 신호였을지도.

그리하여 그날 밤, 마리안네는 자신을 다시 발견해 준 베르톨트와 함께 훌쩍 떠나버린다. 마리안네가 가정을 순식간에 버리는 과정(평범하지 않다!)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과연 그들은 황홀한 고백과 사랑에 대한 확신만큼 행복하기만 할까? 그들은 알아가면서 사랑하게 되는 보통 연인들과 달리 먼저 사랑하고 나서 뒤늦게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를 밟는다. 커피에 설탕을 넣는지, 안 넣는지부터 지나간 사람, 어린 시절부터 마리안네가 좋아한 자장가,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 베르톨트의 어머니, 그리고…… 서로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에 대해 불안해지는지, 그리하여 결국 무엇을 원하는지까지. 그 단계는 별로 달콤하지 않다. 오히려 당황스럽고 불안하고 괴로우며 이내 슬퍼진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영혼이 교감하는 듯했던 마법의 효력은 오래지 않아 사라지고,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졌을 뿐 아니라 자기 마음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자신으로 인해 상대가 상처받을까 봐 서로 숨기는 ‘배려’는 상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상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자괴감으로 이어진다.

가령 마리안네는 다만 베르톨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서 그가 쓴 글이라도 읽으려 했을 뿐인데 베르톨트는 질색한다. 베르톨트가 자신이 작가라는 사실을 증오하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글을 완성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완벽주의자라는 것을 마리안네는 몰랐다. 게다가 그는 자기 일에 대해서는 마리안네의 관심조차 거부한다. 그가 마리안네와 공유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일을 마치고 나면 “늦어도 11월에는……” 일종의 대가로 주어질 미래이다.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지만, 약간의 돈과 낡은 폭스바겐 한 대로 자유를 꿈꿀 수 있는 미래만 말이다. 마리안네는 앞뒤 재지 않고 충동적으로 대담한 고백도 서슴지 않는 남자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힐 줄도 몰랐을 것이다. 남자가 약속하는 11월은 멀었고, 마리안네는 지금 그의 곁에서도 자신이 존재해야 할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불행해진다. 마리안네가 스스로를 위해 그의 곁에서 존재하려 했다면 그를 떠나지 않았을까? 그러나 마리안네는 그를 위해 존재하고 싶었고, 그를 떠올리면 자신은 ‘방해, 속박, 구속, 짐, 잘못’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리안네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한계에 도달했다. 때마침 시아버지가 그녀를 회유하러 찾아왔고 그것은 그녀에게, 막스를 떠나올 때처럼 가방 하나 달랑 싸는 것으로 베르톨트를 버리고 막스에게 돌아가도 된다는 신호가 되어준다. 베르톨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였다고 말하지만 마리안네는 처음에는 그를 버린 게 분명하다. 하지만 마리안네가 베르톨트 곁에서 더는 불행하지 않기 위해 되돌아온 자리는 더더욱 끔찍했다. 그녀의 외도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가짜로 행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리안네는 더욱 움츠러든 채 저들이 마음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할까 두려워하면서 자신이 ‘극복’했음을 증명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느라 모욕감 속에 질식해 간다. 드디어 11월, 베르톨트가 마리안네를 막스에게 잠깐 맡겨둔 것처럼 그녀를 당당하게 찾아왔을 때, 그녀는 그를 버렸다는 것을 망각한 채 그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잠깐 떠나 있었다고, 그가 자기를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생각한다. 베르톨트가 찾아왔고, 마리안네는 이번에는 가방조차 쌀 필요 없이 막스 앞에서 두 번째로 미련 없이 베르톨트를 따라나선다.

어쩌면 마리안네가 막스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제멋대로 편리하게 떠났다가 돌아왔다가 떠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남편을, 다른 남자를 기다리는 간이역으로 취급하다니! 마리안네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막스도 마리안네를 사랑하지 않았다. 도대체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막스에게 마리안네는 ‘완전한 가정’이라는 평판을 완성해 주는 역할이다. 마리안네가 처음 집을 떠났을 때 막스가 취한 행동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배신당한 남편의 분노라고 할 수 없다. 가정이라는 사업체를 운영하다가 발생한 불의의 사고를 무마하기 위한 조처였을 뿐이다. 마리안네의 귀가를 환영한 것도 아내의 외도까지 감싸주는 남편의 넉넉한 품이 아니었다. 아내의 부재를 요양으로 눈속임해 둔 임시방편이 들통 나서 자신이 쌓아온 명성에 흠결이라도 생길까 봐 초조해 하던 막스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단지 마리안네와 막스의 셈이 맞았다가 어긋나는 일이 반복됐을 뿐이다. 막스의 억울한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래도 막 집을 나선 마리안네와 베르톨트의 사고 소식을 듣고 나서 그가 침착하게 발휘한 사업가 기질은 정나미가 떨어지게 만든다.

마리안네처럼 사랑해 보지 않는 이상 ‘그게 정말 사랑이라고?’ 의심하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겠지만, 그들이 사랑이라고 하니까 일단 그렇게 믿기로 한다. 『늦어도 11월에는』를 처음 읽어나갈 때는 깨닫지 못했는데, 돌이켜보니 그들의 사랑이 끝내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폭로는 황홀한 고백에 죽음의 씨앗부터 심어놓은 노삭이 먼저 했음을 알겠다. 마리안네는 자신과 함께라면 죽어도 괜찮다는 베르톨트를 데리고 수상식장을 빠져나와 자기 집으로 향하다가 “죽음은 영원하다”는 위험 표지판에 문득 눈길을 둔다. 사랑은 죽음으로 완성될까? 그리하여 사랑은 죽음처럼 영원해질까? 어쩌면 베르톨트가 낡은 폭스바겐을 사기 위해 무대에 올린 희곡(프란체스카, 파올로, 말라테스타, 단테 이야기)에 노삭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담겨 있을 수도 있지만 노삭이 왜 그들 연인을 위해 죽음을 미리 예비해 두었는지 잘 모르겠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결국 하나의 욕구에서 잉태한 것이라지만 그것도 사실 잘 모르겠다. 죽음이 영원할지라도 모든 것은 죽음으로 끝이다. 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사랑하는 순간 죽었기 때문에 사랑의 기억만 남더라도, ‘그때 죽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이 통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때 마리안네와 베르톨트가 죽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사랑도 남루해졌을 것이다. 곧 낡은 폭스바겐은 고장 날 테고 약간의 돈도 바닥나겠지. 진짜 사랑이든 더는 아니든, 사랑의 과정이 뒤바뀌든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행복해지기 위해 행동할 용기가 되어주고, 그로 인해 좀더 불행했을지라도 행복했다면 그걸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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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단장하는 여자와 훔쳐보는 남자 - 서양미술사의 비밀을 누설하다
파스칼 보나푸 지음,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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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性)은 욕망이다. 오죽하면 식욕, 수면욕과 더불어 인간의 3대 욕망의 하나로 말할까. 하지만 이런 욕망, 특히 성에 대한 욕망은 쉽게 드러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일까? 성에 대한 대부분의 것들은 은밀하고 비밀스럽다. 같은 이유로 이런 은밀함을 훔쳐보는 것에 대한 쾌감은 강할 수밖에 없다. 관음증이란 ‘에로틱한 광경을 몰래 엿보면서 만족을 느끼는 행위’인데 이런 감추어진 것을 훔쳐보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맞다. 부끄러워도 어쩔 수 없지만 대부분은 관음증 환자다. 그리고 이런 에로티즘은 여성의 나체―성행위가 아닌―를 훔쳐보는데서 극대화된다.

파스칼 보나푸의 『몸단장하는 여자와 훔쳐보는 남자 : 서양미술사의 비밀을 누설하다』는 제목과 표지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거울을 보고 몸을 단장하는 여자와 열쇠구멍을 통해 그것을 훔쳐보고 있는 남자, 그림을 보는 행위 역시 관음증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는 책의 서두는 놀라우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이 만든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훔쳐보기를 가장 정확하게 되새길 수 있는 방법은 그리는 것이다. 글로 기록된 욕망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이게 만들지만 그려진 욕망은 상상보다 더 에로틱하다. 사진처럼 적나라한 드러냄도 그 풍성한 색의 욕망을 넘어설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은 서양미술사의 누드화를 이야기하고 욕망을 이야기한다. 요즈음 같은 성이 넘쳐나는 세상에 누드화 정도로 선정성을 이야기하는 것도 무의미할 수 있겠지만 당시의 누드화는 얼굴과 몸으로 드러나는 욕망을 억지로 잠재우며 감상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드화가 등장하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종교가 지배하던 서양에서도 나체는 원죄였고 금기였다. 하지만 이후 이교의 조각상들의 무수한 발견과 신학의 새로운 해석―신의 형상대로 빚은 인간의 육신은 아름다운 것이라는―이 등장하면서부터야 여신과 신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파스칼 보나푸의 책은 여성의 몸치장의 과정을 서양사의 누드화로 대입해 보여준다. 마지막 양말 한 짝을 벗고 벌거벗은 채로 물에 몸을 담근 후 몸을 말리고 머리를 빗고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고 옷을 입고 마지막 치장을 한다. 이런 여성의 행위에 대한 그림, 특히 누드화는 욕망의 기록이다. 누드화뿐만이 아니라 그림 자체가 욕망의 기록일 것이다. 이는 서로 상호보완적이다. 미술의 역사, 즉 그림이 욕망이고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 그림이라면 누드화야말로 그 꼭대기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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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성장 심리백과 - 미국아동청소년심리협회의
미국아동청소년정신과협회 지음, 권상미 옮김, 노경선 감수 / 예담Friend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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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그것도 예쁘고 깜찍한 딸아이를 키우는 친구가 있다. 꽤 늦은 나이에도 결혼을 미루거나 결혼을 하고도 아이를 갖지 않으려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 친구가 첫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태어난 후 우리의 관심은 온통 아이에게 쏠렸다. 친구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대신 먼저 아이에 대해 묻기 바빴다. 아이가 언제 무엇을 처음 했는지는 순식간에 친구들 사이에 퍼지곤 했다.

어디에서 배웠는지 “아니야!”라는 말을 아이가 입술 끝에 달고 산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다음에 친구들이 모였을 때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딸기를 건네면서 “딸기 줄까?” 두근두근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아니야!”라고 결연하게 외쳤다. 그러면서도 작은 손은 내밀어 딸기를 움켜쥐었다. 그게 너무 웃겨서 우리는 여러 번 계속했다.

그런 모순적인 행동은 발달단계상 아이가 자신이 독립적인 존재임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한다. 기억도 나지 않는 자신이나 동생의 어린 시절을 어설프게 떠올리는 게 아니라 눈앞에서 한 생명이 발달단계를 차근차근 밟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는 건 놀랍고 신비로운 경험이다. 그 결연한 “아니야!”는 아이가 “고유한 인격체가 되고자 분투하고 있다는 증표”였다. 그렇게 알고 나니, 친구는 무조건 머리부터 옆으로 흔들고 보는 아이의 고갯짓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워져서 조금은 참을 만해졌다고 했다.

아이의 “아니야!”에 대한 그토록 근사한 표현은 『미국아동청소년정신과협회의 아이성장심리백과』에 나온다. 0세부터 초등학교(영아기→유아기→학령전기→학령기)까지 폭넓게 다루는 만큼 각 시기에 대해 세부적으로 설명해 주지는 못하지만, 이 책이 좋은 이유는 무엇보다 신체적 성장 단계에 따른 정서적 심리 발달을 아이의 시선으로 섬세하게 짚어준다는 점이다. 아이의 연령에 따라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신체적, 정서적 특징들을 제대로 잡아내는 이 책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만 3~4세가 되면 아이의 상상력이 급속도로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상상 속의 친구를 만들 수 있는데, 만약 아이가 자기 잘못을 상상 속의 친구에게 돌린다면 무조건 혼나지 않으려고 비겁하게 거짓말하는 나쁜 아이라고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가 스스로 비판할 줄 알게 됐다는 뜻”, “아이가 자신이 허용할 수 없는 잘못에 대해 반감을 가진다는 뜻”, “아이의 양심과 가치관이 발달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이를 거짓말쟁이라고 혼내는 대신 상상 속의 친구는 현실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부드럽게 설명해 주라고 권한다. 거짓말이 의도적인 기만행위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은 만 7~8세에 생긴다. 자기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거짓말이 지름길이 되어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는데, 그때는 거짓말이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아이가 깨닫게 해줘야 한다. 이때도 나쁜 것은 ‘아이’가 아니라 아이의 ‘행동’이라는 걸 분명히 해준다.


이 책은 보통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라는 보통 아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다소 특별한 가정(이혼 가정, 한부모 가정, 재혼 가정, 입양 가정, 동성 부모가 이룬 가정 등 다양한 형태의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부터 여러 질병으로 아픈 아이, 심지어 불치병으로 죽음을 앞둔 아이에 대해서까지 부모가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들여다봐줘야 덜 상처받는지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가 우리 집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리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부모가 전체적인 육아의 원칙을 세우고 건강한 가치관을 아이에게 전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미국 책이어서 아이들의 음주나 흡연, 폭력 조직 등까지 다루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좀 과하고 너무 이른 이야기이지 않나 싶지만, 아이들의 반사회적 행동이나 폭력성은 이제 비단 미국 아이들의 문제만은 아니게 됐다.


아이의 육체적인 건강과 관련한 육아 백과는 단연 『삐뽀삐뽀 119 소아과』를 따라갈 책이 없다. 하지만 아이는 육체만 발달하지 않는다. 아이의 정신, 즉 정서와 심리도 함께 성장한다. 아이의 연령별 발달단계에 따른 아이의 정서+행동+인지 발달을 다루는 『미국아동청소년정신과협회의 아이성장심리백과』는 엄마를 성가시게 하는 아이의 행동이 사실은 아이가 정신적으로도 건강하게 발달 중이라는 증표임을 알려준다. 아이는 엄마를 괴롭히려고 엄마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일부러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단지 아이는 지금 아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즉 온몸으로 끝없이 세상을 탐구할 뿐이다.


친구의 딸아이는 벌써 다섯 살배기로 자랐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 책의 이전 판본을 선물했다. 그런데 분리불안 장애, 틱 장애, 투렛 장애, 선택적 무언증, ADHD, 자폐증, 야경증, 몽유병 등 아이가 겪을 수 있는 심리 장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록을 더해 제목을 달리 단 책이 새로 나왔다. 사실 아이의 심리 장애를 진단하는 일은 신중하고 섬세한 주의를 필요로 하고 반드시 소아정신과 의사를 찾아야 하는 일이지만, 엄마가 가정에서 아이를 관찰하는 데 일차적인 기준은 되어줄 수 있을 듯하다. 다른 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유용한 정보이다. 다시 선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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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의 불행학 특강 - 세 번의 죽음과 서른 여섯 권의 책
마리샤 페슬 지음, 이미선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목침 두께의 소설을 단숨에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때 해야 할 일들만 아니었으면 정말 그러고 싶었다. 딸 블루와 아빠 가레스는 내가 지금까지 책에서든 현실에서든 어디에서든 봐온 부녀들 중에 가장 근사한 관계였으니까. 이 소설을 읽어 나가면서 지인에게 블루와 가레스 부녀에 대한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을 때, 지인은 내 이야기만 듣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롤리타와 험버트를 부녀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전혀 연관시키지 못했는데, 그제야 어느 점에서는 닮았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중년 남자와 소녀의 여행이라는 『롤리타』의 콘셉트를 교묘히 비틀어 쓴 데뷔작(※출판사 보도자료)”이라는 문구도 보인다. 그러나 나보코프의 『롤리타』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지금은 특별한 ‘부녀(父女)’에 대한 수다를 떨고 싶다.

가레스는 사실 평범한 아버지가 아니다. 우리 아빠를 보통 가정의 보통 아버지 기준이라고 가정해 비교하면 꽤 색다르고 신선하다. 우리 아빠는 선량하고 다정다감하며 헌신적인 남자이다. 자식 우선의 가정 이외에는 눈길 줄 데도 가져보지 못한 아빠는 대신 자식에게 당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걸었다. 그래서 자식이 먹으면 당신도 먹은 셈치고, 자식이 입으면 당신도 입은 셈치고, 자식이 아빠와는 상관없이 자기 의미와 행복을 찾아 뭔가를 누리면 당신도 누린 셈친다. 가령 우리 아빠는 당신이 읽지 않을 책이라도 그 책을 좋아하는 자식에게 사 주는 것으로 자식과 함께 당신도 읽은 셈친다. 고된 노동과 빠듯한 살림으로, 더구나 자식만 바라봤던 아빠의 삶에 자신을 위해 책을 사고 읽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는 것을 잘 알지만, 나는 아무래도 이게 가장 아쉬웠나 보다. 아빠와 책 이야기를 정신없이 나눌 수 없다는 것. 가레스에게 흥분했던 것은 그가 딸이 지겨워질 정도로 책 이야기를 나누려는 아빠였기 때문이다.

가레스의 아내이자 블루의 엄마가 진귀한 나비 표본 몇 점만 남긴 채 납득하기 어려운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었다. 정치학 교수인 아빠 가레스는 아내의 돌연한 죽음 이후 딸 블루를 데리고 아내랑 살던 집과 하버드대를 떠나 미국 전역을 떠돈다. 다행히 가레스가 저명한 정치학자로 설정되어 있는지라 그가 가는 곳마다 일류부터 삼류까지 그를 환영하는 대학들은 널려 있다. 즉 한곳의 안정적인 월급만을 바라고 얽매이지 않아도 먹고살 걱정은 없다. 아무튼 그는 길게 잡아도 일 년을 넘기지 않고 짧으면 일 년에 두세 번까지 옮겨 다닌다. 이때 그의 원칙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무조건 자동차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그 차 안에서 길디긴 이동 시간 동안 가레스는 블루와 함께 온갖 책들을 탐독하고 진지하게 책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를 따라 전학이 일상이 되어버린 블루의 진짜 교육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문학(물론 서구 중심의 목록, 이 소설의 배경이 미국이니까) 고전부터 아빠 전공인 정치학은 물론 인문학을 포함한 다양한 학문 분야의 어려운 책들, 이런 책까지 실제로 있을까 싶도록 신기하고 우스꽝스러운 제목의 책들(아마도 이런 책들은 작가가 지어낸 목록일 터)까지 섭렵한 데다가 “항상 네가 한 말에 출처를 밝히렴”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아빠에게 길들여졌으니, 블루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이 소설에 다채로운 각주가 무수히 달리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단지 그 각주들이 이야기 속에 유기적으로 녹아들지 못해 이야기의 흐름에는 대체로 불필요해 보인다는 것이 아쉽다. 그래도 그것으로 아빠의 지대한 영향력 아래에 있는 블루의 강박을 드러낼 의도였다면 성공적인 장치인 듯하다. 사실 블루는 ‘파파걸’이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아버지는……”으로 시작한다. 꽤 곁가지로 흐르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특별한 책상을 선물할 줄 아는 아빠라면 나도 별수 없었을 거라고 인과관계 따질 새도 없이 고개부터 끄덕여진다.


나는 좋은 책상이 탐난다. 상판이 널찍하고 아주 두툼해서 이 책 저 책 펼쳐서 마음껏 늘어놓아도 충분하고, 웬만큼 책탑을 쌓아놓아도 휠까 봐 걱정할 필요 없는 책상. 폐업한 식당의 식기며 탁자며 의자며 사들여 말끔하게 손질해 되파는 동네 중고 물품점에서 내가 딱 책상으로 쓰고 싶은 탁자를 발견한 적 있지만 우리 집에는 그 커다랗고 묵직한 탁자를 들여놓을 공간이 없다. 특별한 디자인이랄 것도, 색다른 장식이랄 것도 없이 소박하게 상판과 네 다리가 아주 튼튼하기만 한 것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투박하지만 자꾸 쓸수록 내 움직임에 편안하게 길들여 오래된 친구에게처럼 정붙일 수 있을 텐데. 그때 두 눈 딱 감고 일단 집 안에 들였으면 어떻게든 공간이 만들어졌을까? 부족한 공간을 염두에 두고, 그 탁자 대신 다른 빈약한 원목 책상을 훨씬 비싸게 들였는데 지금도 별 마음이 가지 않는다. 아빠 가레스가 (“온갖 훌륭한 생각의 나래”를 펼치길 바라면서) 딸 블루에게 평생 쓸 책상을 선물하는 장면에 가슴이 두근거린 것은 그때 내가 놓친 책상을 내내 아쉬워하는 와중이어서일까?

“놀랍게도 내 낡은 시민 케인풍 책상에 창문 옆 구석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8년 전 () 내가 썼던 엄청나게 큰 르네상스풍 호두나무 책상이었다. 아버지는 숨 막힐 듯이 더운 어느 일요일 오후에 골동품상에게 이끌려서 힐리어 저택에서 열린 세일에 갔다가 이 책상을 보게 됐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그 책상을 봤을 때(그리고 다섯 장정이 낑낑대며 그것을 겨우 경매대 위에 올려놓았을 때) 아버지는 책상에 앉아 있는 내 모습만 떠올렸다고 한다(나는 그때 팔을 펼쳐도 책상 너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여덟 살짜리에 불과했다). 그는 액수를 끝내 밝히지 않았지만 거액을 지불했고 매우 자랑스러워하며 이것은 “내 딸 블루가 온갖 훌륭한 생각의 나래를 펼칠 책상”이라고 선언했다. () 책상을 두고 떠나야 했을 때, 나는 정교한 맹금 발톱 다리와 각각의 열쇠가 필요한 서랍이 일곱 개 달린 거대한 책상을 두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구간에 검은 조랑말을 두고 떠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엉엉 울며 아버지를 파충류라고 불렀다. () “그런데 그것을 다시 사서 배송하는 데 얼마나 들었어요?” () “600달러 들었다.” () 아버지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 또한 책상 밑을 살피다 보니 한쪽 다리에 작은 빨간색 가격표(1만7000달러)가 아직도 붙어 있었다.”

아빠 가레스에게 후한 점수를 준 것은 그가 딸을 위해 준비한 책상이 고가의 근사한 앤틱 가구이기 때문은 아니다. 책상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할 수 있는지, 얼마나 특별할 수 있는지, 그 책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시작될 수 있는지 알았다. 그리고 딸은 이제 스스로를 책임지며 주도적으로 살아가야 할 시기에 돌입했다. 뭔가를 읽고 쓸 때뿐만 아니라 생각하고 궁리하고 고민할 때마다 무수히 마주 앉게 될 책상이니만큼 특별한 책상을 선물해 주고 싶은 아빠의 그 마음이 소중하다.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이 책상이 아빠의 마지막 선물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으면 더욱 애틋해진다.

블루는 이 책상 앞에서 미심쩍은 죽음(엄마의 교통사고) 한 번과 사고사 혹은 자살로 위장되는 살인 두 번과 아빠의 증발 사이에 빈 이야기를 메워나간다. 연결 고리가 헐거워 보이는 이 사건들의 열쇠는 가레스의 정체이다. 가레스가 딸 블루에게 한사코 숨긴 비밀과 닿아 있는. 그리고… 절대적인 신뢰로 아빠에게 밀착되어 있었던 블루가 드디어 아빠의 사고 범위를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시작한다. 이지적인 혹은 문학적인 분위기〔‘불행학 특강(Special Topics In Calamity Physics)’이라는 제목 아래 고전과 소설을 포함한 책 36권의 제목을 빌린 36강과 기말고사라는 커리큘럼 형식부터 무수한 각주까지(각 강의 제목으로 제시된 책이 이야기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 책이 각 강을 읽기에 앞서 필독서라고 말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의 분위기는 짐작해 볼 수 있겠다)〕와 추리소설 같은 분위기가 이 소설에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흥미를 높여주긴 하지만, 이 소설은 결국 아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딸이 자기 눈으로 세상과 마주하는 성장소설이다. 바로 그 점이 긴 이야기와 여러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충분히 매혹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계속 넘기게 만든다. 처음 마주하는 세상이 배신투성이일지라도 오롯이 자기 눈으로 세상의 기만까지 직시한다는 것은 멋지고 용감한 일이다. 언제까지고 동화 속에서 살 수는 없다. 각색되지 않은 동화는 없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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