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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와 가나코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5년 5월
평점 :
‘직장인’이라는 신분에 ‘학생’이라는 신분을 보탠 지 3년째, 평소처럼 책을 사들였지만 좀처럼 읽지는 못했다. 두 신분에 필요한 책들만 겨우 읽었음을 고백한다. 오쿠다 히데오의 『나오미와 가나코』는 그동안 목적 없이 순전한 재미로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은, 거의 유일한 소설이다. 이런 몰입은 정말 오랜만인지라 흥분감이 가시지 않아 짧은 인상을 먼저 남겼는데 제대로 기록해 두고 싶어졌다.
육체적인 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휘두르는 폭력은 십중팔구 지독히 나쁘다. 대개는 남성이 여성에게, 성인이 아이에게 가하기 쉽다. 내 동거인인 남자는 남자치고 그리 힘센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 잠결에도 온 힘을 다하는 나를 간단히 제압한다. 다행히도 문제적인 폭력성을 보인 적은 딱히 없지만, 언젠가 그가 내 서랍장에 화풀이를 해댔을 때 나는 완전히 겁먹어서 한동안 그의 행동이 잘못됐음을 지적하지도 못했다. 그때 그는 어떤 일로 나에게 잔뜩 화가 났는데 애먼 서랍장을 쾅쾅 닫았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그가 처음으로 무섭고 낯설었다. 나는 소리쳤다. 내 서랍장에 손끝 하나 대지 말라고, 내 서랍장을 치는 건 나를 때리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내 서랍장은 내 분신이라고. 내가 직접적으로 당하지 않아도 그의 행동은 분명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폭력이었다.
가나코가 남편 핫토리 다쓰로에게 당한 폭력의 수위는 내가 겪은 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쓰로는 냉장고에 넣지 않아 과일이 상했다는 이유 따위가 사람도 똑같이 상해야 마땅하다는 데 충분한 근거가 되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가나코는 머리칼을 잡힌 채 마구잡이로 손찌검은 물론 발길질까지 당하며 두들겨 맞아 온몸이 시커먼 멍으로 물드는 것은 기본이고 갈비뼈까지 다쳐야 했다. ‘반달에 한 번꼴’이라지만 언제 무슨 이유로 예고도 가차도 없이 남편의 폭력이 무자비하게 날아들지 모른다. 단 한순간인들 숨조차 마음대로 쉴 수 있었겠는가. 남편의 심사가 무엇에 뒤틀릴지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데 말이다. 다쓰로의 폭력에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지배당한 채, 가나코는 자기 목숨이 언제 치명적인 위협에 놓일지 암담한 상황인데도 저항의 몸짓도, 도움의 손짓도 한 번 하지 못한다.
누구도 가나코를 도와주지 않는다. 시어머니는 아들의 폭력성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며느리의 입맛과는 상관없이 아들 입맛의 된장국을 끓이는 법만 알려줄 뿐 아무런 언질도 해주지 않는다. 가나코가 남편의 폭력에 대해 말했어도, 시어머니는 아들의 역성을 들며 ‘맞을 만한 짓’을 하지 말라고 가나코를 탓했을 것이다. 시누이 핫토리 요코도 오빠의 폭력을 진작에 눈치챘지만 “다음에 만나면”이라고 외면했다(요코는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이다. 오빠의 실종을 파헤치는 유일한 인물인데 “아무리 용서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어도 하나뿐인 오빠니까”라고 놀라운 행동력과 실행력과 추진력 등등의 근거를 밝혔지만 나중에는 “왜 내 인생에 오점을 남겨야 하는데?”라고 울부짖는다). 지금 당장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다음’은 없다. “당하는 쪽은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
가나코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친구 나오미가 유일하다. 나오미의 적극적인 제안을 ‘도움’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약하다. 그것은 살인이었으니까! 친구를 위해 살인까지 불사하다니 얼핏 개연성이 떨어지는 행동이다. 그러나 조금만 이해하려 들면 전혀 이해되지 않는 행동도 아니다. 나오미는 아버지의 상습적인 폭력을 피해 고향을 떠나 지금 이곳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기껏 도망쳐 온 자리에서도 똑같은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에게. 광기 어린 아버지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어머니를 보면서도 속수무책으로 숨어서 공포에 떠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나오미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잠재되어 있었다. 나오미는 친구라도 구해야 했다. 그때부터 다쓰로는 가나코에게뿐만 아니라 나오미에게도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폭력이라는 이름의 끔찍한 괴물일 뿐이었다. 그러니 다쓰로를 살해하는 일은 ‘살인’이 아니라 ‘제거’였다. 당연히 후회도 가책도 망설임도 없을 수밖에, 괴물을 제거하는 일에 양심 따위가 끼어들지 않도록 노력할 수밖에.
하지만 나오미와 가나코는 평범한 여자들이다. 다쓰로를 제거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방법을 찾고 도구를 준비하고 알리바이를 조작하고…… 나오미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그 과정은 나름대로 치밀하게 준비되는 듯 보이지만, 그들은 전문적인 킬러가 아니다. 일단은 다쓰로를 무사히 살해하고 암매장하여 단순 실종으로 처리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 한계가 분명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나오미가 ‘신이 기회를 준, 완벽한 계획’이라고 믿어도 평범한 여자들이 저지르는 살인이 허술하지 않다면 그야말로 판타지가 아닌가. 오쿠다 히데오는 일부러 마련해 둔 허술한 구멍들에서 본격적인 스퍼트를 내기 시작한다. 나오미와 가나코에게는 ‘괴물을 제거하는 일’이었어도 어쨌든 살인, 그에 뒤따르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나오미와 가나코에게 그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구성원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경찰 같은 사회가 아니다. 경찰은 가나코를 지켜주지 못했듯이 다쓰로의 죽음도 방관한다. 다쓰로가 겉으로는 모범적인 ‘훈남’ 냄새 폴폴 풍기며 잘 다니던 회사도 불미스러운 스캔들로 피해를 입을까 봐 직원의 실종을 은폐하려 든다. 오로지 오빠의 실종에 의문을 품은 여동생 요코만이 집요하게 나오미와 가나코의 숨통을 조여온다. 폭력이 한 개인의 몸과 정신에 어떤 상처로 각인되어 어떻게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게 되는지 그 미묘한 심리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가다가, 이제 오쿠다 히데오의 이야기는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분출하며 끈질기게 추적하는 요코, 그리고 그 추적을 따돌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나오미와 가나코가 긴박하게 쫓고 쫓기는 데 집중한다. 이야기는 한순간에 절정, 절정, 절정…… 끝없는 절정으로 이어지는 궤도를 따라 내달리는데 한숨을 돌릴 틈조차 없다. 단연 압도적인 흡인력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글자 그대로 손가락이 책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나오미와 가나코의 첫 행보는 델마와 루이스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확연히 다르다. 죽음은 자유의 쟁취가 아니다. 델마와 루이스의 저항은 거기서 끝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무엇이든 하는 편이 훨씬 나으므로, 일단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므로 나는 나오미와 가나코의 선택을 지지한다.
나오미와 가나코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느라 ‘리아케미’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빠트렸다. 이 소설에는 중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불편한 편견이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중국인인 리아케미도 처음에는 그런 편견에 기대어 그려지므로 오쿠다 히데오의 생각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그러나 큰언니처럼 나오미와 가나코를 지지하고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쳐 생의 의지를 불사르는 리아케미이다. 오쿠다 히데오가 중국인에 대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리아케미라는 멋진 여성 캐릭터도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