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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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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는 루푸스로 39세에 타계할 때까지 장편소설 2편과 단편소설 32편, 여러 권의 평론집과 에세이를 남겼다고 한다. 미국 문학사에서 남부 고딕계열 단편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작가의 이름과 동일한 이 두툼한 한 권의 책 『플래너리 오코너』로 명단편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단편의 배경이 되는 미국 남부의 상황은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는 없어졌지만 인종분리에 엄격하고 산업화에도 뒤처지고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분위기가 깊게 남아 있는 빽빽한 분위기였다. 더해서 작가의 고딕적인 분위기는 결함을 갖거나 뒤틀린 인물들이 기괴한 배경으로 그로테스크한 사건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다. 평온한 분위기에서 시작하지만 급격하게 변하는 상황은 단편이라는 짧은 호흡과 어울려 당황스럽고 깊은 인상을 준다. 작가의 병과 고립된 분위기, 고립된 종교(가톨릭) 등 작가의 경험으로 그려낸 세계는 비극적이고 격렬하며 그로테스크하다. 

어릴 적 총탄에 맞은 사고로 의족을 하고 있는 딸 조이와 함께 사는 호프웰 부인은 딸인 서른 둘이나 된 조이를 어린아이를 다루듯 한다. 조이는 헐가로 이름을 개명하는 등 반항을 해 보지만 그것이 전부이다. 하루는 집에 착하게 생긴 열아홉의 청년이 성경을 팔러 온다. 친절한 호프웰 부인은 청년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시골 사람이라 사모님 같은 분이 좋아할 리 없다는 청년의 말에 “좋은 시골 사람은 세상의 소금이에요! 게다가 우리는 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요.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이 있는 법이에요. 그게 인생이에요!”라고 말한다. 좋은 시골 사람인 청년은 평범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뚱뚱한 조이에게 접근해 의족을 떼어 보여 달라고 하고 그것을 가지고 도망친다. 조이는 청년에게 이야기한다. “너는 그냥 좋은 시골 사람 아니었어?” 「좋은 시골 사람들」

플로리다에 가기 싫은 할머니는 신문을 꺼내들고 연방교도소를 탈출한 ‘부적응자’들이 플로리다 쪽으로 갔다는 기사를 보여주며 범죄자들과 같은 방향에 가기 싫다며 아들 베일리를 설득해 보려 한다. 하지만 결국 함께 집을 떠나 플로리다로 향하던 할머니는 도중에 예전에 살던 집을 가보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이 가는 길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가도 집은 나오지 않고 할머니는 예전 집이 다른 주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 내고 부끄러워져 여행가방을 차는 바람에 사고가 난다. 도움을 요청하려고 지나가던 차를 세웠으나 내린 것은 교도소에서 탈옥했다는 부적응자들. 하지만 할머니는 자신의 가족들이 죽어나가도 부적응자들에게 설교를 멈추지 않는다. 부적응자들은 할머니에 총을 세 방 쏘아 죽인다. “할머니가 참 말도 많았어.” 「좋은 사람은 드물다」

위의 단편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단편에서 풍기는 비극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또한 종교적 색채는 인간이 저지르는 온갖 죄악은 종교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신에 대한 믿음을 잃은 인간들은 비극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사건을 통해서만 자신의 무지를 알게 되고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는다. 흔히들 인간군상이라는 말을 하는데 오코너의 등장인물들은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 군상들이 아닌 어둡고 탁한 전혀 다른 인간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플래너리 오코너가 앓았던 루푸스가 그녀의 작품 활동을 방해했지만 작품들에는 그 그림자가 전혀 비치지 않는다고 했지만 죽음을 앞둔 자신의 상황이 작품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고 종교적인 색채 역시 같은 이유로 납득이 간다. 죽음으로부터 저항하는 것. 어찌 따로 떼어놓을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책 뒷면의 글을 보면 전미도서상을 받은 『단편소설전집』을 기반으로 출간된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작가의 총 32작품 중 31편만 실려 있어 1작품이 부족한데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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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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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이란 얼마나 덧없는가. 광풍처럼 휘몰아치던 복고의 물결도 어느 정도 사그러들어 이것 역시 과거의 일이 되는 듯하다. 영화와 드라마, 노래까지 점령했던 과거의 모습은 분명 어느 정도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10대를 갓 지나 20대가 된 사람들에게 복고는 아직 미래의 이야기겠지만 어느덧 30대를 넘긴 사람들에게는 과거는 추억이 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은 무뎌지고 아픈 기억도 추억으로 남긴다. 이런 기억들이 사라지거나 단절되는 것은 삶의 흔적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과연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일까. 파트릭 모디아노는 잃어버린 과거, 삶의 지난 모습들을 이야기한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 주인공은 과거를 잃은 자신을 탐색한다. 모디아노의 “기억의 예술”은 『지평L‘horizon』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

시위 현장의 어수선한 거리에서 지하철 입구로 내려가던 보스망스는 시위대에 밀려 트렌치 코트 차림의 젊은 여자를 붙잡고 벽에 부딪힌다. 눈두덩에 피를 흘리는 여자와 약국에 가서 반창고를 붙이고 고요한 거리를 함께 걸었다. 마르가레트 르 코즈. 반창고를 떼어 주고 대화를 나누었다. 마르가레트는 자신을 만나러 회사로 오라고 이야기한다. 이제부터는 자연스레 그리되는 것 아니냐는 듯. 보스망스는 어디에선가 사람과 사람의 첫 만남은 마치 가벼운 상처처럼 두 사람에게 남아 그들을 고독과 무감각으로부터 깨워 일으킨다는 말을 읽은 것을 기억해 냈다. 둘은 닮았다. 보스망스에게는 돈을 요구하며 자신의 삶을 짓밟는 어머니가, 마르가레트에게는 예전에 사귀었던 남자인 부아야발에게 쫒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았으며 약한 부분을 보듬었다.

새로운 일자리를 얻은 마르가레트도 안정되었고 둘의 사이도 편안해지는 듯 보였으나 이별은 한순간에 다가왔다. 마르가레트를 고용했던 부부가 경찰에 체포되고 그녀도 출두를 요구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독일로 잠깐 피신하겠다고 보스망스에게 이야기하고 밤기차로 떠났다. 이마르가레트의 얼굴도 기차의 유리창 속에서 그에게 손을 흔들던 모습처럼 지평 너머로 사라졌다. 후 그녀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40년이 흘렀다. 보스망스는 글을 쓰게 되었고 기억을 더듬어 마르가레트를 찾기 시작한다. 세월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머리가 하얗게 샌 어머니라는 이름의 여자의 폭력에도 웃어 넘겼으며 마르가레트가 두려움에 떨었던 부아야발은 그저 늙은 부동산 업자로 변해 있었다. 보스망스는 마르가레트의 마지막 일자리에서 질문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미래 계획이 어떻게 됩니까?” 하지만 둘은 한 번도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고 영원히 현재 속에 있으리라 생각했다. 미래, 40년 후의 베를린. 보스망스가 태어난 해에 다시 재건되기 시작한 도시, 마르가레트 르 코즈의 고향. 현재의 보스망스는 베를린의 한 서점 앞에 있다. 마르가레트는 거기 있을 것이다. 장 보스망스는 그녀에게 향한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지평이란 현재와 미래가 포개져 혼재하는 시공간”이라 밝혔다. 과거를 탐색하지만 그 과거로 인해 현재의 정체성까지 모호해지는 이야기를 즐겼던 모디아노의 이야기는 이 작품에서는 조금 다르게 드러난다. 『지평』의 등장인물은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살고 있는 누구라도 미래를 보고 있다. 이제는 어둡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평온한 느낌과 함께, 그가 어느 날 떠나온 그 장소 그 지점으로 같은 시간 같은 계절에 돌아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치 시계의 두 바늘이 정오가 되면 하나 되어 만나는 것처럼. (P.184)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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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수인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주원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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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분노>에서 불명확한 의문들이 <천국의 수인>에서 풀리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또 다른 의문만 더했다. 마지막 책을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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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제르미날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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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의 소설 중에 제목 정도라도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대부분 『인간 짐승』, 『나나』, 『목로주점』 등을 이야기할 것이다. 이 작품들은 나폴레옹 3세가 지배하던 제2제정기(1852~1870)를 배경으로 ‘루공’과 ‘마카르’ 가문의 5대에 걸친 역사가 담겨 있는 루공-마카르 총서(Les Rougon-Macquart)' 중의 작품들인데 스무 권에 걸친 에밀 졸라의 연작소설중의 한권이기도 하다. 에밀 졸라를 자연주의 소설의 거장으로 만들어준 이 작품들은 ‘제2제정하의 한 가족의 자연적·사회적 역사’라는 부제답게 당시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가치도 충분하다. 루공-마카르 총서는 두 가문의 가계도의 인물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 일생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제르미날Germinal』은 루공-마카르 총서 중 13번째 작품인데 연작소설인 만큼 7번째 작품인 『목로주점』과도 연관이 있다. 『목로주점』의 주인공이기도 한 제르베즈의  딸의 이야기는 9권 『나나』였고 아들의 이야기가 바로 『제르미날』이다.

에티엔은 철도회사에서 상사의 따귀를 때렸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고 몽수(‘돈으로 이루어진 산mont sou’이라는 의미의 가상도시)에 있는 탄광으로 찾아든다. 기계공으로 몽수의 탄광에 일자리를 찾으려 하지만 노동자의 자리도 구하기가 힘들다. 르 보뢰(‘먹어치우다, 탐욕스럽게 먹다’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devorer’에서 비롯된 이름) 탄광에서 죽은 광부 대신 운좋게 일자리를 구한 에티엔은 광산노동자들의 비참한 근무환경을 접하게 된다. 그곳의 하숙집 주인의 딸 카트린은 보게 된 에티엔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숙집에서 함께 살게 된 난폭한 샤발이라는 남자는 사랑에 빠진 카트린의 애인이었다. 광산에서 알게 된 노동운동가와 공산주의자의 영향으로 에티엔은 광산의 교묘한 임금 삭감에 항의해 조합을 만들어 돈을 모은 후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선동한다. 파업기간동안 비폭력 투쟁은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군인들의 발포로 카트린의 부모가 살해당한다. 강경진압에 목숨을 잃은 광부들은 의욕을 잃고 다시 일을 시작하려 하지만 무정부주의자 수바린이 광산을 폭발시키고 갇혀버린 에티엔은 자신의 연적인 샤발을 죽이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연인인 카트린도 죽게 되고 홀로 살아남은 에티엔은 파리로 향하게 된다.

『제르미날』은 노동자계급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초의 소설로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대두될 문제를 제시함으로써 미래를 예견하는 작품을 쓰고자 한다’고 밝혔는데 시간이 훌쩍 지난 우리의 상황과도 크게 다를 바 없으니 이것을 기막히다고 해야 할까. 기존 작품들과는 달리 에티엔은 끝까지 살아남아 희망이 보이는 듯한 결말을 취하고 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제르미날은 ‘파종의 달, 싹트는 달’이라는 의미―내가 찾고 있던 것은 새로운 인간의 자라남과, 캄캄한 어둠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겹게 일하면서 발버둥치는 노동자들의 노력을 담을 수 있는 제목이었습니다(에밀 졸라)―를 가졌다고 한다. 희망은 비참한 현실에서 더 아름답게 보인다.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죽음을 곁에 두고 일하는 광산 노동자들과 석탄 값이 내려가서 임금을 내려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부르주의의 화려한 만찬은 노동자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그리고 그 희망이 얼마나 소박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노동소설의 측면에서만 살펴보기에는 그 안에 담긴 대중소설로의 면모 역시 무시할 수가 없다. 광산의 문란한 섹스와 짐승 같은 애정행각 속에서 피어나는 에티엔과 카트린의 순수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제르미날』을 노동소설로만 볼 수 없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대중성과 예술성을 함께 갖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노동자와 현실의 잔혹함과 그 속에서도 피어나는 에티엔―카트린―샤발로 이어지는 통속적이지만 흥미로운 삼각관계와 사랑의 감정, 이 둘이 적절히 조화되어 읽는 즐거움도 함께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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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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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예술 분야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작품이 크게 성공하고 끊임없이 따라붙는 성공작의 꼬리표는 작가에게 힘보다는 부담을 주는 것이 사실일 것이고, 과거 사례만 보아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물며 적지 않은 나이에 낸 첫 작품이 그렇다면 어떨까. 천명관에게 『고래』는 그런 작품일 것이다. 문단과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그야말로 혜성같이 등장한 천명관에게 『고래』는 뛰어넘기 힘든 꼬리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후 단편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와 장편 『고령화 가족』에서도 천명관의 이야기는 여전했지만 『고래』를 기준점으로 삼은 독자들의 눈높이에는 부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천명관을 『고래』에서 놓아주어야 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들일 것이다. 『고래』가 이야기의 정점이었을 뿐 천명관은 자신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내고 있다. 그리고 7년 만에 선보이는 두 번째 단편집인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는 어떨까?

십일 톤 덤프트럭을 몰며 지갑에 두툼히 돈을 넣고 다니며 한때 잘 나가던 경구가 도박에 빠져 아내와 이혼을 하고, 트럭까지 빼앗기고 찾아든 곳은 냉동 창고 노가다였다. 일을 끝내고 얻은 꽁꽁 언 냉동 칠면조 덩어리에 경구는 어쩔 줄을 모른다. 돌처럼 딱딱한 칠면조 덩어리는 삶아먹는 건지, 몇 시간을 삶아야하는지도 모른다. 하루 일당만큼 값비싼 칠면조이지만 경구에게는 불길한 날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외상값을 닦달하는 노래주점 최 사장과 실랑이를 하다 칠면조 덩어리로 최 사장을 내리친다. 당구장 앞에 세워진 남의 트럭을 타고 달리며 조수석에 놓인 칠면조 덩어리를 보고 아내에게 내밀며 피식 웃는 아내를 상상한다. 아이와 함께 다리를 뜯는 모습을 상상하며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그래, 까짓것. 거칠게 한판 살다 가는 거다. 인생 뭐 있나? 백반 좀 먹고 빠구리 좀 치다 가면 그뿐이지.” (p.110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다른 단편들도 다르지 않다. 밥을 먹고 소화제를 먹고, 자기 위해 수면제를 먹고, 섹스를 위해 비아그라를 먹고 비타민제를 먹어야 하는 화학적 인생들. 그럼에도 보형물을 넣어야 되는 물리적 인생이 아니라고 자위하는 사람들. 이 단편집의 등장인물들은 무언가를 잃고, 삶의 막다른 곳에 다다른 사람들이다. 삶의 목표는커녕 하루하루가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독히도 우울하고 어둡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건지도,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어디로든 향하고 있다.

“얘야, 잊지 마라. 사는 건 누구나 다 매한가지란다. 그러니 딱히 억울해할 일도 없고 유난 떨 일도 없단다.” (p.182 우이동의 봄)

작가의 첫 번째 단편집인 『유쾌한 하녀 마리사』와 이 책은 7년이라는 시간만큼이나 닮은 듯 다르다. 전 단편집이 외국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부조리와 아이러니로 가득 찬 세계에서 어쩔수 없는 개인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는 우리의 이야기를 조금 더 진지하게 그려냈다. 하지만 두 단편집 모두 녹록치 않은 하루하루의 삶을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비극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이 닮아 있다. 본 단편집이 더 무겁고 덜 유쾌한 느낌이 드는 것은 우리 삶의 모습과 더 닮아 있기 때문일까. 우리 삶이 왜 이렇게 우울해졌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교과서에나 어울릴 법한 허울 좋은 말들인 ‘노력’, ‘정직’이 이 사회에 통용되기나 할까?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엉뚱하고 극단적인 방법뿐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은 삶은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다. 우리 삶은 피곤하고 피폐해졌다. 지지고 볶던 마누라, 싸우고 집을 나가도 슬그머니 돌아와 있던 마누라와 이혼한 지 칠 년이나 지나버린 것이다.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렇게 됐다(p.121).”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고, 뭐 하여간 그렇게 된 거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우리 대신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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