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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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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검은색이 차별받는 것은 사람 피부색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동물이건 가전제품이건 심지어 음식에서도 검은색이 차별받지는 않는다. 오로지 인간뿐이다. 미국의 대통령이 흑인일지라도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흑인에 대한 정서는 변하지 않는다. 어디 검은색뿐이랴 누런 황인종들 역시 백인의 눈에는 별다를 것이 없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유색인종 간에서 서로 차별을 하곤 하니 인간의 피부색에 대한 차별은 피부색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본능적으로 누리고 싶어 하고 과시하고 싶어 하는 권력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프리카 대륙이 세계를 지배했다면 백인들을 노예로 부리며 박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피지배 세력에 대한 박해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좋은 예가 아닌가 싶다. 헤닝 만켈의 『불안한 낙원』은 동아프리카의 한 도시의 백인과 흑인의 서로 대척하는 삶 속에서 흑인 사회에 녹아들려 했던 한 백인 여성의 눈으로 보여준다.

스웨덴의 가난한 가정의 한나는 극심한 여름 가뭄으로 목전에 닥친 곤궁으로 집을 떠밀리듯 떠나게 된다. 네 한 몸쯤은 챙길 수 있다는,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줄 게 없다는 어머니의 말로 친척이 살고 있는 해안 도시로 향한다. 친척들과 연락이 닿지 않았던 한나는 우연히 호주에 가는 배에 오르게 되고 배의 항해사와 결혼을 하게 되지만 남자는 병으로 죽게 된다. 배가 동아프리카의 로우렌소 마르케스라는 항구 도시에 정박했을 때 한나는 몰래 배를 떠난다. 우연히 투숙한 호텔에서 한나는 심하게 앓게 되고 조기유산을 한다. 그 호텔은 실제로는 유명한 매음굴이었고 한나를 돌봐주던 매음굴의 주인은 한나에게 청혼을 하고 둘은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남편 역시 죽게 되고 한나는 매음굴을 물려받아 운영하면서 흑인들의 삶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려고 한다. 백인과 남성이 지배하는 그곳의 삶, 한나는 그 부조리에 저항한다. 백인 남편을 살해한 이사벨이 감옥에 투옥되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한나의 이런 행동은 백인과 흑인 모두에게 외면받을 뿐이다. 한나의 피부색으로는 결코 흑인들과 하나가 될 수 없었다. 백인들에게는 기득권을 포기하면서까지 흑인들을 생각하는 그녀를 배신자로 낙인찍었으며 흑인들 역시 오랜 기간의 백인에 대한 증오심과 뒤이을 보복 때문에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한나를 의심하며 거부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지만 결코 흑인 사회에 녹아들 수 없었던 그녀는 마지막까지 흑인을 생각하며 아프리카를 떠난다.


“흑인들은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백인들은 현재의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다른 사람들, 아랍인들과 인도인들은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 진실이 파고들 여지가 없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 (p. 208) 


고단한 삶 속에서도 기득권은 존재한다. 가난한 백인과 가난한 흑인은 서로 같지 않다. 피부색만으로 기득권을 가질 수 있는 사회. 이 세계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법으로 아무리 금지를 해도 유전자 깊숙이 박혀 버린 우월감은 어느 한 인종이 멸망하기 전까지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차별은 아프리카가 아니더라도 어느 세계에의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한다. 모진 학대 속에서도 지켜내려는 그들의 영혼은 맑고 순수하지만 한없이 배고프고 고달프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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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부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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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은 칼보다 강하다.’ 국어시간에나 배우고 말았을 명언이 현재에 와서 실감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키보드는 칼보다 강하다.’ 방구석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는 것만으로도 여론을 조작할 수 있으며 심지어 사람이 죽기까지도 한다. 개인이 모인 것만으로도 이런 힘을 보이는데 국가가 인터넷 댓글을 관리하게 되면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이 된다. 더욱이 이를 제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것이 더 끔찍할 따름이다. 국가권력에 의한 네트워크 여론조작이라니, 나치의 괴벨스가 본다면 기뻐서 환호성을 지를 것이다. 장강명의 『댓글부대』는 국정원 불법 선거개입 사건이 모티프가 된 것으로 네트워크 시대의 새로운 권력과 그것을 둘러싼 이야기를 보여준다. 새로운 시대에 혁명적인 방식으로 등장해 대화와 소통의 장이 될 줄 알았던 인터넷은 그 등장만큼이나 어두운 이면으로 과거에 드러나지 않았던 끔찍한 모습마저 쉽게 보여주게 되었다.

소설은 그럴 듯한 이름의 팀-알렙의 멤버 세 명인 삼궁, 01査10, 찻탓캇이 해왔던 이야기를 폭로하는 인터뷰 형식과 그 이면의 이야기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들은 처음에는 상품평과 유학 등의 소소한 조작을 일삼는 것으로 돈을 벌어 ‘김치녀’라고 욕하지만 정작 자신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여자를 안기 위해 안마방과 유흥업소를 전전한다. 이들은 점차 단순한 조작에서 벗어나 악성 루머와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마치 자신들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권력을 쥐었다고 착각하게 된다.


처음에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 내 또래들은 정말 엄청난 도구가 왔다, 이걸로 이제 혁명이 일어날 거다, 하고 생각했지. 모든 사람이 직위 고하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토론으로 대안을 찾아낼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생각했지. 인터넷이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권위를 타파해서 민주화를 이끌 거라고도 믿었어. 거대 언론이 외면하는 문제를 작은 인터넷신문들이 취재하고, 인터넷신문조차 미처 못 보고 넘어간 어두운 틈새를 전문 지식과 양식을 갖춘 블로거들이 파고들어갈 줄 알았어. (P.55)


결국 인터넷 혁명은 어두운 쪽에서 일어났다. 여론 조작의 신기원, 과거 TV속의 조작이 직설적이고 단순한 것이었다면 인터넷의 그것은 조금 더 교묘하고 심리적이다. 인터넷 여론 조작이나 선동의 핵심은 매우 단순하다. 단순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효과는 절대적이다. 그것은 바로 ‘이간질’이다. 사람의 이기적인 본성을 살살 건드려 실제 문제는 보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이것만 한 게 없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담배 값 인상으로 인해 정부의 비판이 거세지면 흡연자 대 비흡연자의 구도로 싸움을 붙인다. 최저임금에 대한 비판이 등장하면 외국인 노동자는 힘든 일도 열심히 한다고 한다. 결국 네트워크는 이전투구의 현장이 되고 남산의 실세들은 이를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다. 문제의 본질은 이미 사라졌고 남는 것은 서로에 대한 분노뿐이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현실과 너무나도 닮아 있는 소설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야기만이 가질 수 있는 독창적인 세계를 좋아하는 것이다. 살인이 일어나고 세계가 황폐해져도 소설속의 이야기라면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댓글부대』의 경우는 어떠한가. 너무나도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현실을 끔찍하게 반영한 것이 아니던가. “독기 없이 이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저자의 말이 사무치게 느껴진다. 그래서 더 불쾌하다.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권력이, 그 권력을 눈감아주면서 독이 든 떡고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불쾌하다. 바꿀 수 없는 희망조차 생기는 않는 현실은 더 불쾌하고 두렵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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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스트레인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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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제, 신분제라는 것이 현대에 와서는 희미해지지 않을까 예상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특정 국가의 신분제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명목상의 계급제나 신분제는 이미 역사 속에서나 쓰일 단어가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러한가. 자본주의와 더불어 성장한 자본가들은 새로운 계층을 형성했고 그 두터운 벽은 과거 신분제가 무너지던 시절을 반성이라도 하려는 듯 높기만 하다. 요새 유행하고 있는 금수저, 흙수저의 자조적인 농담만 보아도 과거 신분제가 또 다른 형태로 정착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사실 이것이 우리나라만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급격한 사회체제의 변화를 겪은 나라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런 체제의 변화가 동양의 경우 과거의 지배 체제가 그대로 현재로 이어진 반면 과거의 계급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 구축―물론 과거로부터 이어진 세력도 있겠지만―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바로 노동자 계급의 사상이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계급 질서 자체가 변동이 되었다는 것은 변혁의 주체인 노동자 측에서는 환호성을 지를 만한 시기였다면 당시의 지배 계급들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세계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를 가졌던 시기였을 것이다. 세라 워터스의 『리틀 스트레인저』는 이런 무너져가는 지배계층의 공포를 대저택 헌드레즈홀에 투영한다. 쇠락한 대저택에 출몰하는 귀신들, 그곳을 억지로 지켜나가는 노부인, 그녀에겐 자신들을 위협하는 노동자 계급의 성장이 귀신들이 주는 공포와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영국 워릭셔의 대저택 헌드레즈홀, 전쟁과 노동자 계급의 성장으로 대저택은 물론 소유주인 에어즈 가문마저 몰락의 위기에 처해 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과거를 추억하며 살아가는 노부인 에어즈 부인과 전쟁으로 인해 신체적, 정신적인 문제가 생긴 아들 로더릭, 그리고 실제로 대저택을 지켜나가고 있는 캐럴라인, 하인들은 다 떠나고 새로 온 소녀 베티가 헌드레즈홀에서 살고 있다. 과거 헌드레즈홀에서 일했던 유모의 아들인 패러데이는 자수성가해 의사가 되었고 우연한 기회에 헌드레즈홀을 방문하게 되고 그곳의 주치의가 된다. 에어즈 부인은 새로 온 이웃과 파티를 열지만 끔찍한 사고가 발생하게 되고 헌드레즈홀은 괴이한 일이 연이어 발생하는 불길한 장소가 된다.

헌드레즈홀은 이제 팔리지 않고 무성한 수풀에 뒤덮여 있다. 과거의 영화는 이미 잊혀졌고 흉물스럽게 변한 건물일 뿐이다. 이 책의 이야기는 굉장히 모호한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그것은 화자 자체가 어린 시절 헌드레즈홀을 욕망했던 ‘리틀 스트레인저The Little Stranger’이기 때문이다. 망가뜨려서라도 갖고 싶었던 대저택, 이처럼 화자에 대한 의심은 이 이야기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화자 자체가 성공한 노동자 계급의 한 사람이며 대저택을 탐하던, 누구보다도 헌드레즈홀의 몰락을 바랐던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저택의 귀신으로 출몰하던 낯선 존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실재하지 않지만 각자가 가진 두려움의 또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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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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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명체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인간이란 기억마저도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좋았던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오래가며 여러 번 곱씹게 된다. 자신이 준 피해보다는 받은 피해가 더 사무치게 기억나며 반대로 타인에게 받은 도움은 금새 잊지만 남을 도운 기억이 있다면 죽을 때까지 잊지 않는다. 하지만 강렬한 기쁨 역시 사무치는 기억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와는 별개로 평범했던 일들은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잊어간다. 강렬한 기억은 오래가지만 평범한 기억들은 의외로 쉽게 잊혀지는 존재 역시 인간이다. 그래서 오래된 추리소설 같은 것도 다시 읽을 수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강렬한 기억이 희미해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갑자기 누군가의 이름이 기억이 날 듯 말 듯 아른거리는 느낌 같은 것이 아닐는지. 가즈오 이시구로의 『파묻힌 거인The Buried Giant』은 이런 기억의 망각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했던 기억, 참혹했던 기억들 모두 안개에 사로잡혀 잊혀져 함께 어울려 사는 존재들의 삶은 과연 어떤 것일까.

고대 잉글랜드의 안개로 가득한 평원, 토끼굴 언덕에 사는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서로 깊이 사랑하지만 정작 서로에 대한 기억은 없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대한 기억도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이들 부부 뿐만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사람들이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마을에 뿌옇게 내려앉은 안개가 기억을 앗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노부부에게 희미하게 남은 아이에 대한 기억으로 아들을 보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둘의 여행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아들 대신 괴이한 모험담으로 전개가 된다. 젊은 색슨족 전사 위스틴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늙은 기사 가웨인 경이 합류하게 되고 이들은 망각의 안개의 원인을 찾아 여행을 함께 떠나게 된다. 결국 그 원인은 마법에 걸린 용 케리그가 내뿜은 입김 때문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고 이들은 망각으로 알 수 없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고 또한 덕분에 함께 덮여 있던 아픈 상처들도 되살아나게 된다.

망각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망각은 나쁜 기억들 뿐 아니라 아름답고 행복했던 기억마저 덮는다. 하지만 망각은 마찬가지로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마저 덮어둔다. 망각의 안개를 걷어내는 것은 행복한 기억, 사랑했던 상대를 바로 볼 수 있게 해주지만 참혹했던 기억도 함께 끄집어낸다. 사랑했던 노부부, 젊은 전사과 그의 전우가 된 늙은 기사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참혹한 기억은 끝까지 끄집어내지 않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아무리 참혹한 기억이라도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좋을까. 기억하려는 자와 잊으려는 자, 그리고 잊게 하려는 자. 우리는 현실 역시 소설과 다르지 않다. 잊지 않았는데도 기억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많은 지금 우리의 삶이 더 가혹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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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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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항상 인간에게 시련을 안겨준다.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와 앞날이 창창한 극히 일부의 사람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좌절을 맛본다. 어떤 사람은 곧 포기하고, 어떤 사람은 좌절을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삶 속의 좌절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불행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어떨까. 그리고 인위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상황과 신체적 능력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방식으로 이를 극복하려 한다.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Nemesis』는 자신의 상황을 악화시키고 스스로 자신에게 벌을 주고 무너져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애비뉴 놀이터의 감독관인 버키 캔터는 작지만 다부지고 운동신경이 뛰어난 남자다. 자신을 낳다가 죽은 어머니와 범죄자인 아버지 대신 조부와 자랐다. 그는 군인이 되어 참전하기를 원했지만 형편없는 시력 탓에 불가능하게 되자 이것을 자신의 큰 수치로 여긴다. 대신 아이들을 가르치고 놀이터를 돌보는 일에 전념하고 이런 놀이터의 아이들과 부모들은 친절하고 듬직한 버키 선생을 매우 따르며 좋아한다. 그러던 중 폴리오 유행병이 지역에 번지게 된다. 놀이터의 아이들도 병에 걸려 병원에 실려가고 죽었다. 당신 폴리오는 치료약이나 백신이 존재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했다. 캔터 역시 심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면서도 아이들이 그렇게 된 것이 자신의 잘못 때문인지 자책한다. 인디언 힐에 가 있던 여자친구인 마샤는 전염병을 염려해 캔터를 오라고 하지만 아이들을 두고 떠날 수 없다고 캔터는 거부한다. 결국 캔터는 아이들을 두고 인디언 힐에 가지만 아이들을 두고 온 것에 대해, 공포에 사로잡힌 자신을 자책한다.


네메시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복수의 여신이다. 필립 로스는 네메시스의 의미를 “운명, 불운, 어떤 이를 골라 희생자로 만드는 극복할 수 없는 힘”이라고 하였다. 버키 캔터는 책의 제목처럼 네메시스의 희생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신화 속의 네메시스의 복수는 인간의 분수 넘친 행동이나 지나친 행운으로 성공해 오만해졌을 때에만 벌을 내렸다. 주인공 캔터의 삶은 자신의 첫 번째 불행을 잘못된 방법으로 극복하려 했던 잘못된 선택 때문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삶을 어머니에게 빚졌다고 생각했던 캔트는 자신의 꿈마저 이루지 못하고 전염병으로 무너져 가는 자신과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과 신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향한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무너져버린 삶, 캔터는 원인을 찾아야 했고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다. 캔터에게 있어서 네메시스는 자책감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분노해 버린 자기 자신일 뿐이었다. 결국 캔터는 자신을 학대하는 데서 위안을 찾았다. 여자친구의 청혼에 폴리오에 걸려 온전하지 못하게 된 자신의 몸을 보이며 더 좋은 남자를 찾아 결혼을 하라고며 거부했고 마지막까지 비참한 채로 남기를 원했다.


너는 늘 이런 식이었어. 너는 뭘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지를 못해. 한 번도! 너는 늘 네 책임이 아닌 것까지 책임을 지려고 해. 끔찍한 하느님이 책임을 지거나 끔찍한 버키 캔터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는데 사실 책임은 둘 중 누고에게도 있지 않아. <p.260>


메르스가 잠잠해졌다. 당국의 안일한 대처로 사람들이 죽어가도 비아냥거리던 인간이길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던 반면 메르스 보균자가 되어 바이러스를 퍼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을 탓했던 사람도 있었다. 소설 속의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을 때의 공포감, 그보다 더 지독한 현실이 우리 곁을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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