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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독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코끼리
랠프 헬퍼 지음, 김석희 옮김 / 동아시아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해외소설을 읽을때 중요한 건 내용보다 오히려 번역이라 생각한다. 잘못된 번역이 얼마나 원저를 왜곡시키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역자가 김석희님인걸 알고 일단 믿음이 갔다. 지금까지 김석희님이 보여준 멋진 우리말 작업은, 역자를 보고 책에 대한 믿음 갖는데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되리라 생각한다.
안개 자욱한 어느 우중충한 아침, 들려오는 아기울음소리와 귀청을 찟는 듯한 나팔소리와 함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동시에 태어난 아기와 코끼리. "내 아들이 아기 코끼리와 한날한시에 태어난 건 뭔가 신비롭고 특별한 사건이 분명해"란 요제프의 말은, 저자가 막 책을 손에든 독자에게 하는말이리라. 그렇다. 이 책은 브람이란 아이와 아기코끼리 모독의 종種을 뛰어넘는 우정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들의 우정과 사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 갑자기 현관문 앞뒤에서 날뛰며 신들린듯 소란을 피우는 모독. 왜 그럴까? 요제프는 순간 생각한다. 왜 모독이 저러는지를…"왜? 왜 모독이 현관까지 왔을까? 그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브람이다! "(p.33) 그렇다. 그의 예감은 적중한다. 그의 아들 브람은 침대에 누워서 땀에 흠뻑 젖은 채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모독은 자기 친구인 브람이 뭔가 안좋은 상태임을 알아차리고, 이를 알리기 위해 그러 소란을 피운것이었다. 마치 '오수의 개'를 보는 듯하다.
아. 모독과 브람의 애정은 서커스단을 배경으로 한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모독은 바로 서커스단에서 묘기를 부르는 코끼리이고, 브람의 아버지는 조련사. 계속될거만 같던 이들의 우정은 서커스단이 운영난으로 매각되면서 위기를 맞이 한다. 모독역시 팔려가는 것이다. 슬퍼하는 브람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요제프. "모독은 반드시 네 옆에 있지 않아도 친밀감을 느낄 수 있어. (중략) 둘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지리적인 거리가 아니라 마음과 가슴이야. 모독을 잊어버려라. 그래야 네 마음에 평화가 찿아올거야"(p.74) 하지만 모독을 잊으라는 요제프의 말을 브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들의 우정, 사랑은 그토록 깊었던 것이다.
마침내, 브람은 모독과 함께 하기로 마음을 정한다. 자기가 모독과 헤어져 지낼 수 없음을 알고 큰 결단을 한 것이다. 팔려가는 동물들이 실려가는 배에 숨어드는 브람…그러나 배가 난파당하는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는데, 이는 브람과 모독이 겪는 시련의 시작에 불과하다. 죽음의 위협을 가하는 산적떼…"산적들은 우르르 달려와 밀치닥거리면서 브람의 물건을 뒤져서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물건을 서로 차지하려고 저희들끼리 다투었다. 브람은 그들을 막으려다가 옆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하미드는 브람의 팔을 움켜잡고 단검을 브람의 목에 들이댔다."(p.209) 하지만 이들은 모독까지 끌어가는데, 또 한번의 이별인걸까? 이제껏 한번도 사람을 죽인적 없던 모독은 이들을 응징한다. 몸으로 이들을 짓이겨 버린것이다. 이 과정에서 칼에 찔리는 부상을 입는 모독. 가슴이 아프다.
또 하나의 시련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미치광이가 모독을 애꾸로 만든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 미치광이는 한때 유명한 조련사였지만, 사랑하던 연인이 서커스도중 사고로 죽자 코끼리들에게 화풀이를 해왔다고 한다. "모독은 사내를 짓밟을까 내던질까 생각하면서 망설였다. 갈고리를 힘껏 휘둘러 모독의 눈에 박아넣는 데에는그 시간만으로 충분했다."(p.345) 정말 끔찍한 상황. 브람이 고통스런 모독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왔지만, 그 앞에 펼져진건 목이잘린 사내와 아직도 모독의 눈에 박힌채 느슨하게 매달려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는 갈고리...정말 가슴아프다. 왜 사람은 동물을 괴롭히는건지. 사실 난 못난 사람을 '짐승같은 놈' '개 같은 놈'이라고 하는 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오히려 인간보다 짐승들이 훨신 낫다. 동족을 죽이고, 온갖 음모와 추악함이 넘실대는 인간보다 오히려 동물들이 낫다. 불쌍한 모독…
브람은 모독의 생일잔치가 열린 직후 죽었다. 모독도 곧 그를 뒤따라 갔다.(p.389) 한날한시에 태어난 그들이 죽음까지도 같이 한 것이다. 이들의 아름다운 우정과 사랑은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이들이 겪는 시련들을 돌아보면 대부분은 추악한 인간들의 의한 것이었다. 엄연히 하나의 생명체인 힘없는 동물들을 괴롭히고 죽이는 추악함. 그렇기에 브람과 모독의 우정과 사랑이 더욱 빛을 발한거 같다. 오랜만에 아름답고 순수한 이야기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