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엔 월수 수업. 

지난 주 수요일에 가방이 무거워서 책을 학교 사무실에 두고 오고 

지금 막 오늘 수업에서 읽을 글 보고 있는 중이다. 주제: 여행. 


여행과 관광. 이것도 토론 주제로 쓰는데, 

"바보는 방황하고 현자는 여행한다 

A fool wanders, a wise man travels." 

"여행자는 보는 것을 보고, 관광객은 보러 온 것을 본다 

The traveler sees what he sees, the tourist sees what he has come to see." 

"관광객은 자기가 갔던 곳을 모르고, 여행자는 자기가 갈 곳을 모른다 

Tourists don't know where they've been, travelers don't know where they are going." 


이런 인용들과 함께, 여행은 보다 분명히 세계와 만남을 통해 자기형성(self-making), 

관광은 이보다 훨씬 피상적인, 거의 소비에 불과한 활동... 같은 구분을 하고 얘길 하다가 

아니 그런데 사실 둘 사이 분명한 대립이 혹은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다.. 는 의견이 

나올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니 (그렇다면) 주제를 확장해 "변증법"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방금 생각. 

그러나 그러기엔 내가 역부족이다. 게몽의 변증법에 대해서, 그러다 현시국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딘가 있겠지만 내겐 없다. 


지금까지 아마 단 한 번 

수업 중 학생에게서 정면 공격 혹은 비판 받은 적 있다. 

토론 주제가 시사적인 건 아니었던 거 같은데 

지금 이런 세상은 교수님 세대의 잘못이기도 합니다 : 불시에 이런 말 들음. 

음... 먼저 ("first of all"), 나는 교수가 아닌데 비정규직 교원을 교수라 부르지 말자 같은 말은 절대 네이버 

해서는 안되겠지. 그렇게 반응하진 않았고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향. 꿀먹은. ;;; 아래와 비슷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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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뉴스룸 

요즘 거의 매일 본다. 생전 안보던 뉴스. 


좀 전 갓복현 기자 출연하고 

박근혜 10월 26일, 11월 4일 대국민 담화에서 몇 장면 나오는데 

채팅창에선: "음성변조, 모자이크 해라!"


상상하니 웃겼고 

실제 앞으로 종종 그래도 좋을 것 같. 


근데 나라가 정말 뭐 이런 개판인지

매일 새로운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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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로 된 니체 해설서를 주문하고 얼마 전 받아서 

방금까지 아주 조금 읽음. "연보"와 "서론"의 첫 페이지. 

대강 이런 뜻인가보다... 면서 더듬더듬 보는 것인데, 바슐라르 제대로 읽고 쓰려면 

사실 불어를 아주 잘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할 수 있는 한 빨리. 음 그래서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한다면 

그럼 뭐 또 어때. 그래도 평생 바슐라르를 읽었고 읽을 거잖아. 다 읽지는 않았습니담. : 이러고 있음. 


"서론" 첫 페이지에서 니체 저작으로 보라고 권하는 판 중 

갈리마르에서 14권으로 나왔다는 <전집>이 있다. 전집광...... 이므로 

14권 전부를 볼 수 있는 이미지 없을까 검색했는데 그렇게는 검색되지 않고 낱권들의 이미지가 검색된다. 

위 이미지는 <반시대적 고찰>. 3권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4권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여러 역자가 

번역했는데 필립 라쿠-라바르트, 장-뤽 낭시. 이런 유명한 이름이 있어서 흠칫. 


프랑스 대단하지 않나. 

이런 전집 보면. 


버지니아 울프도 굉장히 번역 잘 되었을 것 같다. 책 자체도 (종이, 폰트 질감 등등에서) 오 이건 사야해 일텐데. 

소설 박스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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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탐구>의 이해를 위해 요구되는 독자 자신의 참여와 함께, 

이 책을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의 한 인용으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게 하는 다른 이유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은 반드시, 그것이 정직하고 품위있게 행해진다면, 고백과 함께 시작한다. 글로 좋은 철학을 

쓰고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잘 생각하는 일은 지성보다는 의지와 관련되는 일이라고 그는 자주 말했다. 그 의지는 오해하려는 유혹에 저항하는 의지이며, 피상성에 저항하는 의지다. 진정한 이해를 방해하는 건 지성의 부재가 아니라 오만의 존재일 때가 많다. 그러므로: "너의 오만의 건물을 해체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끔찍히도 어려운 일이다." 오만의 해체가 요구하는 자기-반성, 이것이 품위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품위있는 철학을 쓰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게 너무 고통스럽다는 이유에서 자기 안의 심연으로 내려가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의 글에서 언제나 피상적일 것이다." (366) 


아래 포스트에 인용한 문단 다음의 문단. 

<철학적 탐구> 1번 (이것도 '단장'이라 부를 수 있나. '명제'라 불러야 하나), 하여튼 1번이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이 어떻게 언어를 배웠나에 대해 말하던 대목에서 인용. 


철학은 지성보다 의지의 문제. 그 의지는 오해의 유혹에, 피상성에 저항하는 의지. 

어제 자기 전 보다가 이 대목에서, 깊이 공감했다. 잠들기 전 짧은 순간 그래서 행복했다. 

아도르노도 거의 같은 얘기를, 아주 그냥 독자의 에너지 전부를 요구하면서, <미니마 모랄리아>의 여러 단장에서 한다. 

아도르노와 비트겐슈타인의 비교 연구는 아마 이미 꽤 있을 듯. 비트겐슈타인은 (원래 책을 아주 많이 읽는 편은 아니었고, 특히 철학책을? 그가 즐겨 읽은 건 탐정물? 그리고 일찍 타계한 편이기도 하고) 아도르노를 읽지 않았지만 아도르노는 비트겐슈타인을 읽었는데, 몇 군데서 무시하듯이, 무시할 수만은 없다면서 무시하듯이 언급하지 않나 한다. 


품위있는 인간. 품위있는 철학. decent person, decent philosophy. 

나는 이 구절에서도, 영어 "decent"엔 명확히 규정하긴 힘들더라도 강력한 의미가 있음에 반해 

번역한다면 쓸 수 있을 한국어 어휘들(좋은, 품위있는.....)의 경우, 그게 무슨 뜻인지 물론 알지만 그 의미가 강력하지 않음, 구속력 미미함..  생각했다. 거의 강박적으로 이런 생각 한다. 말이 말같지 않은 일. 이것이, 변절이 아무렇지 않고 거짓말도 술술 잘하는 데 기여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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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한 넌센스를 하나 혹은 이상 밝혀내는 일, 

언어의 한계에 이해가 자신의 머리를 부딪치며 얻은 혹들을 밝혀내는 일, 

이것이 철학의 결과다. 이 혹들이 우리에게 발견의 가치를 보게 한다." 


그들 자신 이 "혹들"을 경험한 적 없는 이들에게, 이런 설명이 말해주는 바가 

조금이라도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긴 한데, 비트겐슈타인의 방법은 이런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이 심리적 문제에 관심 없는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닌 것처럼. <철학적 탐구>는 -- 아마 그 어떤 다른 철학 고전보다 더 -- 독자의 지성만이 아니라 독자의 "참여(개입)"까지 요구한다. 다른 위대한 철학 저술들 -- 가령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은 이 철학자가(쇼펜하우어가) "무슨 말을 했나 알고 싶은" 독자가 관심과 재미를 느끼며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철학적 탐구>를 그렇게 읽는다면, 그것은 바로 지루한 책, 읽기 고역인 책이 된다. 그게 지성에 가하는 부담 때문이 아니고, 비트겐슈타인이 "하는 말을" 취합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상 이 책에서 그는 그 무엇도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게 아니고, 그는 혼란을 해결하는 테크닉을 제시한다. 그 혼란이 독자 자신의 혼란이 아니라면, 이 책은 아무 관심도 자극하지 않을 것이다. (366) 



어제 광화문 갔다가 집에 와서 

자기 전 이 책의 위 부분을 읽었다. 이 책 재미있고 좋은 책인데 

적지 않은 부분 열심히 그리고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노트는 하지 않았고 기억에 남은 것이 거의 없는 편. 

비트겐슈타인은 유튜브에서 관련 다큐멘터리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철학자와 그에 대해 만들어진 영상물... 그것의 양을 순위를 매긴다면 당연 top 10 안엔 물론이고, 아마 2위쯤 하지 않을까? 1위가 니체일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과 쇤베르크를 같이 살펴보는 다큐도 있는데, 그것 들어보다가 관심 새삼 자극됨. 


<철학적 탐구>가 다른 철학 고전들과 어떻게 다른가

잘 설명하는 것 같긴 한데, 하지만 만사 그렇듯이 이것도 정도의 문제. 

어떤 철학자가 "무슨 말을 했나 알고 싶어서" 읽는 건, 그 동기가 유지되는 한 결코 멀리 가지 못하지 않나. 

처음 동기는 그렇더라도 조만간 그의 문제가 내 문제가 되어야만, 멀리 가고 이해를 얻을 수 있지 않나.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가 

8시부터 들려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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