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탐구>의 이해를 위해 요구되는 독자 자신의 참여와 함께, 

이 책을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의 한 인용으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게 하는 다른 이유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은 반드시, 그것이 정직하고 품위있게 행해진다면, 고백과 함께 시작한다. 글로 좋은 철학을 

쓰고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잘 생각하는 일은 지성보다는 의지와 관련되는 일이라고 그는 자주 말했다. 그 의지는 오해하려는 유혹에 저항하는 의지이며, 피상성에 저항하는 의지다. 진정한 이해를 방해하는 건 지성의 부재가 아니라 오만의 존재일 때가 많다. 그러므로: "너의 오만의 건물을 해체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끔찍히도 어려운 일이다." 오만의 해체가 요구하는 자기-반성, 이것이 품위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품위있는 철학을 쓰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게 너무 고통스럽다는 이유에서 자기 안의 심연으로 내려가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의 글에서 언제나 피상적일 것이다." (366) 


아래 포스트에 인용한 문단 다음의 문단. 

<철학적 탐구> 1번 (이것도 '단장'이라 부를 수 있나. '명제'라 불러야 하나), 하여튼 1번이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이 어떻게 언어를 배웠나에 대해 말하던 대목에서 인용. 


철학은 지성보다 의지의 문제. 그 의지는 오해의 유혹에, 피상성에 저항하는 의지. 

어제 자기 전 보다가 이 대목에서, 깊이 공감했다. 잠들기 전 짧은 순간 그래서 행복했다. 

아도르노도 거의 같은 얘기를, 아주 그냥 독자의 에너지 전부를 요구하면서, <미니마 모랄리아>의 여러 단장에서 한다. 

아도르노와 비트겐슈타인의 비교 연구는 아마 이미 꽤 있을 듯. 비트겐슈타인은 (원래 책을 아주 많이 읽는 편은 아니었고, 특히 철학책을? 그가 즐겨 읽은 건 탐정물? 그리고 일찍 타계한 편이기도 하고) 아도르노를 읽지 않았지만 아도르노는 비트겐슈타인을 읽었는데, 몇 군데서 무시하듯이, 무시할 수만은 없다면서 무시하듯이 언급하지 않나 한다. 


품위있는 인간. 품위있는 철학. decent person, decent philosophy. 

나는 이 구절에서도, 영어 "decent"엔 명확히 규정하긴 힘들더라도 강력한 의미가 있음에 반해 

번역한다면 쓸 수 있을 한국어 어휘들(좋은, 품위있는.....)의 경우, 그게 무슨 뜻인지 물론 알지만 그 의미가 강력하지 않음, 구속력 미미함..  생각했다. 거의 강박적으로 이런 생각 한다. 말이 말같지 않은 일. 이것이, 변절이 아무렇지 않고 거짓말도 술술 잘하는 데 기여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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