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전, 출전을 잊었는데 

아도르노가 "전쟁의 마지막 해들 동안 있었던 일, 

미국에 있던 우리가 그 전모를 진실을 알았을 때, 그건 막대한 해방이었다 (immensely liberating)" 

이런 얘기 하는 글이 있다. 


알려고 애썼지만 알 수 없던 것을, 그러는 동안 은밀히 최악을 예상하고 혹은 심지어 기대하면서, 

마침내 분명히 알게 되었을 때의 후련함.... 을 말하는 것처럼 저 한 문장만 인용하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어떻게 그렇지 않은지 설명하려니, 수업 가기 전에 수업 준비하면서 쓰는 글이라 시간도 부족하고 

음. 암튼, 여기서 아도르노가 말하는 해방은 강한 의미의 해방. 다시 살 수 있게 하는.)


그런데 이것, 이것도 사실 사람마다 다르지 않나. 

진리가 해방인 사람이 있고, 너무 많은 진리, 너무 많은 현실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후자인 사람에겐 

어떤 진리, 어떤 현실도 언제나 너무 많은 진리, 현실이고. 그러니까 이 사람에겐 '진리'의 개념, 성립하기 어렵고. 


<다가오는 것들>에서 

"진리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 사실 보기보다 더 깊이 철학적인 질문일 것이다. 

"진리는 우리를 해방하는가?" 이건? 철학보다 심리학의 질문인가. 심리학의 철학. 이걸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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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것들> 이 스틸이 많이 보이는 건 

이것도 이 영화의 새로움 (아주 담담한 새로움) 보여주기 때문 아닐까. 

표정으로 두 사람이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님 보여주지 않나. 가깝지 않은데 불편하거나 두렵지도 않은 사이.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자기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이. 


영화가 보여주는 다른 장면들론 

사실 아주 가까운 사이이긴 하다. 나탈리의 가족들이 식사할 때 파비안이 나탈리 집으로 방문하고 

나탈리는 그에게 들어오라 함. 나탈리의 아들과 딸이 파비안에 대해 잘 알고 있고 특히 아들은 질투하기도 함. 

("엄마의 애제자, 엄마의 이상적 아들이잖아요"). 파비안의 공동체에 방문했을 때, 파비안과 마리화나 나눠 피운 

나탈리가 현기증 느끼면서 쓰러지고, 파비안은 그녀를 자기 글쓰는 공간의 소파에 눕게 한다. 그리고 그녀는 파비안에게, 자기 옆에 앉아서 말을 해달라고 하고 '무슨 얘기 해드려요?'라자 '너에 대해, 네 삶에 대해 말해 봐.'


자막이 70%도 번역되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 많거나 빠르면 100% 번역이 안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영화 자막 번역에선 90% 정도라면 

아주 충실한 번역일 것 같긴 한데, 어쨌든 이 영화 한국어 자막은, 뭉텅뭉텅 누락된 느낌. 영어자막도 있는 걸로 

언제 다시 보면서 확인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이들 대화가 어떤 뉘앙스인지 알 수 없긴 한데 


나는 저 장면도 그렇게 보였다. 

가깝지만 타인인 사이, 타인이기 때문에 가까운 사이... 그런 사이. 

가지 말고 얘기해 봐. (무슨 얘기요?) 네 얘기, 네 삶 얘기. : 이 대목도 그런 사이인 사람들이 나누는 말들로 여겨졌다. 


파비안은 고교 시절 나탈리의 철학수업이 자기 인생을 바꾸고 결정한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정말, 이 영화를 만든 미아 한센-뢰브 감독은 나탈리의 철학 수업 40부작..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아이디어를 같이 탐구했던 사람들이, 저런 사이가 되기 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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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말, 미국의 주요 신문에 기고하는 저명한 정치 언론인이 

젊고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한 정치인을 인터뷰 했다. 그는 이 정치인에게 라인홀트 니버를 읽었느냐고 질문했다. 정치인은 읽었다고 답했고, 인터뷰어는 다시 질문했다. "니버에게서 얻은 교훈은 무엇인가요? What do you take away from him?" 여기 정치인은 아래와 같이 답했다. 


"이 세계에 심각한 악이, 고난과 고통이 존재한다는 강력한 관념. 

이것들을 제거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언제나 겸손해야 할 것. 그러나 동시에 그 겸손함이, 냉소와 행동하지 않음의 핑계가 되지 않게 할 것. 이것이 그에게서 내가 가져온 교훈이다.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노력할 것. 순진한 이상주의와 억울한 현실주의 사이를 오가지 않을 것. 이것이 내가 가져온 교훈이다." 


<뉴욕타임즈>의 데이빗 브룩스가 그 언론인인데 그는 이 답에 흡족해 했다. "Pretty good," said Brooks, condescendingly. 2년 뒤, 그 정치인은 미국의 대통령이 된다. 


이 책의 오프닝. 

오바마는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 목록에서 10위 안에 들게 되겠지. 아닌가? 어쨌든 앞으로 한, 한 세기 동안은?  

Entitled Opinions에서 로버트 해리슨도, 한 에피소드에서 거의 최상급 칭송을 그에게 보낸 적이 있다. 


해리슨은 그가 뛰어난 독자고 또 뛰어난 작가라는 점에서, 역대 대통령들 중 최고다.. 같은 얘길 했는데 

정치는 모르고, 이 책이 들려주는 일화에서처럼 '사상'의 영역에서면, 일개 언론인도 그를 "condescendingly" 대할 수도 있을 것 같긴 하다. 정답의 세계.. 에 살고 계시겠지. 그런데 그 정답은 어떤 정답이란 말인가. What right answers they are! 이렇게 하면 되나 영어론. 


지식인 정치인. 이것의 한 예를 남기는 것만도 작지 않은 유산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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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mcavoy rebecca hall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이젠 옛날이 된 

학생 시절 (나이가 많긴, 아주 많긴 했다) 보고 좋아했던 영화. 

그런데 '학생 할인' 이런 구절 보면 지금까지도, 나도 해당한다고 착각을 순간 하는 때가 있다. 며칠 전에도 어느 커피숍 앞에서 그러고 있다가, 그래 그러라고 평생 대학원생처럼 사는 것도, 뭐 좋은 점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았다. 아주 미미하게 하나 정도 있다고 판단했던 듯. 공부의 주제를 생각하고 그에 대한 책들을 꾸준히 읽는다. 그러지 않는 쪽으로 가지 않는다. 이 정도? 그런데 그게 대학원생만, 대학원생이어야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사실 이도 좋은 점 아님. 치명적일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선 좋게도 작용할 수 있는 무엇이라면, 늘 미완의 상태에 있는 것? 늘 하나의 '시도'로서 생각하고 쓰는 것? 아도르노도 "형식으로서의 에세이" 이 글에서, 에세이(essai, essay는 "시도"의 의미라고 아주 자주 주석이 동반하는)의 철학, 에세이주의.. 같은 것을 제시하기도 했으니,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스트로 사는 건, 그럴 수 있다면 좋은 걸수도. 





이 영화 배경이 아마 80년대 초. 

저 방은 제임스 맥어보이 캐릭터의 방일 텐데 그가 읽는 책들 (침대 주변에 놓여 있는) 제목이 

큰 화면으로 보면 보인다. 마르쿠제, 프로이트가 있었던 것 같지만 확인 필요. 책 제목 확인하고 싶어서 

유툽으로 찾아봤지만 확인엔 실패했다. 디비디로 갖고 있다면 지금 찾아보겠으나. 이 책들과 벽에 붙인 

여러 포스터, 사진들이 시대와 저 인물에 대해, 말하는 바 있음을 분명히 하는 영화이긴 하다. 더스틴 호프만의 

The Graduate, 이 영화 포스터도 있는데 "지금 절 유혹하시는 겁니까, 로빈슨 부인?" 이 대사로 의외로 아주 웃긴 

장면에 성공하기도 한다. 


하여튼 이 방도 영화에서 보았던 방들 중 좋았던 방. 

저런 '구석'이 있는 방 좋지 않나. 







시위하는 대학생들이 나오는 영화는 2731편쯤 있나? 아니면 

31편쯤 있나? 아주 많을 것 같기도 하고, 의외로 없을 것 같기도 한데 

이 영화는 그런 영화. 시위하면서 사랑에 빠진다. 아니, 사랑하기 위해 시위도 사랑하게 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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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샘슨(Ian Samson)이라는 작가가 

BBC Radio3에서 하는 문학 팟캐스트에서 죽은 작가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연재하기 시작했던데 

조너선 스위프트, 조지 엘리엇, 버지니아 울프 등이 편지를 받았고 어제의 업로드는 애거서 크리스티에게. 


(이언 샘슨은 어떤 작가인가 검색해 보니 

그 자신 추리소설 작가인가 봄. 66년생인데, 위와 같은 사진이 찾아진다. 이게 최근이 아니라 몇 년 전 사진일 수도 있으니, 66년대 후반생도 언뜻 노인처럼 보여도 이상하지 않은 지금이다. 60년대 후반생은 내겐 또래로 ; 여겨지므로, 잠시 그의 외모가 충격. (젊음의 위력, 재생력, 다시 시작하기 이런 건) 다 끝났구나. 심정이 되었다. 매일 결단해야 한다. 아주 작은 차이라도, 오늘 있게 하라........ 이런 결단). 


크리스티를 다른 추리소설 작가들과 비교하면서 

그녀가 사실 양으로도 질로도 최고의 작가일 수 없는데 다른 추리 작가들은 거두지 못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에 대하여, "당신 성공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질문한다. 그리고 편지의 끝으로 가서 그가 주는 답은: 


"내 생각엔, 비밀의 비밀이 있어요. 

진지한 책들은 거의 언제나 절망의 산물이지요. 

당신에게, 당신이 감당해야 했던 배신과 고통들이 있었습니다. 

당신의 책이 갖는 근본적 매혹이 있다면, 그 매혹은 당신의 저 경험들과 닿아있을 겁니다. 

누구도 보이는 대로의 그 사람이지 않다는 것.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존재며, 사라지거나 아니면 실망시킨다는 것. 

(That they are unreliable and subject to disappear and disappoint). 나는 당신 책들이 살인을 다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살인은 당신 책에서, 오히려 독자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쓰인다고까지 말하겠습니다. 당신은 기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고, 당신 소설은 모두 기만이 주제입니다." 



*진지한 책들은 (드문 예외가 있겠지만) 절망의 산물이다. 

전에 들어본 말 같은데, 그런데 이 말도 생각을 자극하고 그런가 하면 이 경우 "serious" 이것도 우리말로 

꼭 맞게 옮길 말은 마땅치 않다는 생각도 든다. Most serious books are born of despair. 이런 문장에서 serious는 '진지함 + 가치있음'. 


진지함... 이 마땅치 않게 느껴지는 건 "진지충" 이 말 때문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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