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의 이 책에 좀 묘한 대목이 있다. 왜 과학은 (17세기 이후 과학은) 서구에서 시작했고 그리고 성공했나. 

왜 근현대에 과학의 진보를 서구가 주도했나. 이런 질문을 하고, 답하지 않는다. 질문을 하고 답하지 않는 그 흐름이 묘함. '이건 (중요하지는 않을지라도) 흥미로운 질문인데 그러나 답이 서구의 우월함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면 그 질문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겠지. 그럴 거라면 하지 마. 나라면 지금 어디로 갈지 나도 모르겠어 당신은 어때? 당신은 어떻게 답하겠는가?' : 이런 느낌? 


<과학 혁명의 구조>가 좀 답답한 책이 되는 이유가 쿤의 저런 면에 있다는 생각도 든다. 애매하게 신중함? 오래 전 이 책 읽은 수업이 있었는데, 수업에서 읽은 흔적이 많이 있는데도 남은 기억은, 읽기 고역이었다는 거 말고 거의 없는 책. 페이퍼 쓰면서 옆에 두고 조금씩 읽었는데, 지속적으로 답답한 책이긴 했다. 그런데 50년대 말 시작해서 60년대에 절정에 달한달까 서구 문화의 자기반성? 서구 이성의 자기반성? 그 조류에 속하는 책 아닌가 하게 된다. 근현대 과학의 진보를 서구가 주도한 건 순수히 역사적 우연이었다.....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면 아마 그는 진심으로 기뻐했을 거 같다. 


바슐라르에게는 과학의 진보가 가리키는 이성의 운명, 인류의 운명이 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슐라르님. 하여튼 신중함은 개나 줘버리시는 바선생님. 무분별하게, 과장스럽게 철학하시는. 


그에 따르면, 과학 진보의 결정적 순간을 과학 도시의 수립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물리학 도시"는 19세기 초에 수립되는데, 물리학 도시의 수립을 전후하여 한 세대 동안 과학의 성격이 전면적으로 변화한다. 아마추어들의 여흥에서 "가르치는 합리주의"와 "배우는 합리주의"의 결합으로. 물리학 도시의 수립은 학교로서의 물리학의 수립이기도 했다. 학교가 되기 전 아마추어 물리학에게는 "독자"가 필요했다. 학교가 된 다음 물리학자에게는 "제자"가 필요했다. 학교가 되고나자 진보는 막을 수 없는 무엇이었다. "인간은 망설인다. 학교는 망설이지 않는다. 학교는 반드시 가르친다." 


............ 저렇게 적어두니 논의의 매혹은 말할 것도 없고 설득력도 1도 없어 보이는데, 나는 완전히 설득되었다. 다른 많은 조각들도 가져다가 연결하면 더 설득력 있게 될 것이긴 하다. 


바슐라르에게는 "지금 내가 하는 이건 서구의 역사지..." 같은 생각이 없었다. 

그 생각없음은 '나는 인류를 대표하는 구세계 백인남자'의 오만이 아니고, 잘 반성된 보편주의 관점이 언제나 강하게 실행되기 때문에 가능한 편견의 삭제. 그런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이성은, 그것이 학교가 되는 순간 막을 수 없는 운명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라도 학교에 들어오면, 그 운명에 참여하게 된다. : 여기서 학교는 뭐고 그 운명이란 또 뭐고 따지자면 아주 길게 (영원히....) 따질 수 있을 것이긴 함.  그런데 '해방의 페다고지' 이것으로 전환시킬 아이디어가 여기 압축되어 담겨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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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21-12-21 16: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몰리님 덕분에 ˝학교˝에 대한 시각을 하나 더 가질 수 있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

몰리 2021-12-21 16:55   좋아요 2 | URL
아이구. 다행입니다. 이 무슨 암짝에도 소용없는 포스팅을..... 이럼서 썼는데 말이에요. 저도 감사합니당.

scott 2021-12-21 16: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를 이해 못했던 이유를 몰리님 포스팅 읽고 끄덕^^ 끄덕^^

몰리 2021-12-21 16:57   좋아요 2 | URL
쿤의 경우도
책은 (체계는) 사라져도 인간은 남는다의 예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요.
굉장히 답답한데 좋으신 분 ㅎㅎㅎㅎㅎㅎ 무엇에든 진심이신 분. 이런 느낌이 남음.

얄라알라 2021-12-21 21:54   좋아요 2 | URL
(제 기억을 뒤지면) 그냥 쿤은 당연히 다 읽어야 하는, ‘너, 당연히 읽었지?‘ 그런 분위기가 있었죠?
읽었어도 이해 못했기 때문에 아주 부담스러웠던 시선.


몰리님 덕분에 토머스 쿤님의 얼굴을 처음 보았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1-12-21 2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쿤 자신이 이 책을 썼지만 자신도 이 책 의미를 잘 몰랐고 나중 다름 사람들이 진짜 의미를 알려 주어 쿤도 비로소 깨달았다는 글을 읽은 적 있습니다.
아마 자신도 잘 모르는 얘기를 쓰다보니 책이 어려워진 것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얄라알라 2021-12-21 21:59   좋아요 2 | URL
북다이제스터님께서 전해주신 말씀대로라면, 쿤은 서글퍼야할 것 같습니다. 의미 파편을 던져놓앗는데 퍼즐은 독자들이 맞추고 포장까지.....

수능 예비고사에 자주 등장해서, 더욱 권위(?)를 입었던 이 책, 저야말로 파편도 아니고 구절 구절 읽었던 것 같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1-12-21 22:04   좋아요 2 | URL
전 넘 어려워 읽다 포기했는데, 다른 사람들 얘기론 저자 자신도 잘 모르는 이야기여서 제가 잘 이해 못한 것은 넘 당연하다는 말에 큰 위안 받았습니다. ^^

몰리 2021-12-22 16:29   좋아요 1 | URL
뭐랄까, 이건 내가 꼭 써야 하는 책이라는 사명감도 배어나면서
이러고 싶지는 않다는 저항감도 느껴지는, 오묘하게 양가적인 태도가 있는 책이지 않나는 생각이 듭니다. 과학을 민주화(과학의 탈권위화)를 해야겠는데 그러기엔 과학을 너무 사랑한 사람. 정말 자기가 무얼 썼나 잘 몰랐을 거 같아요.

북다이제스터 2021-12-22 16:57   좋아요 1 | URL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나서 찾아봤습니다. <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라는 책에 있는 내용입니다.

˝<과학혁명의 구조>를 쓴 토머스 쿤은 자신 저서의 깊은 뜻을 몰랐다. 나중 인문학자들이 그의 책을 읽고 쿤에게 그 의미를 알려주었는데, 쿤은 자신 책 뜻에 놀랐다고 한다.


과학은 단순하게 사실의 나열이나 반증주의의 학문이 아니다. 과학은 마음의 상태다. 과학은 주관성과 객관성의 이분법을 뛰어넘어 상호주관적 진실을 다루는 학문이다. 우주의 객관적 진실은 우리 모두의 주관적 진실이 모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문학과 사회과학뿐 아니라 자연과학에서도 해석이 중요하다. 대상에 중립적이고 순수한 접근은 불가능하며, 우리는 ‘합법적 편견’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같은 제목으로 적어도 2종 존재하는 책으론 이거 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위의, 아미르 악젤의 책이 있고 사이먼 싱(Simon Singh)이 쓴 것이 있다. 사이먼 싱이 쓴 것은 

국역된 책이 세기말-세기초 ㅋㅋㅋㅋㅋㅋㅋ 90년대말, 00년대초 거의 베스트셀러였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주변의 모두가 그 책 얘기를 했었다. 나도 한 권 갖고 있었다. 언제 어쩌다 사라졌나 모르겠는 책이 된 그 시절의 한국어판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이미 오래전 사라진 사이먼 싱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기억하면서 

아미르 악젤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구입했다. 이것이 중고로 나와 있었다.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1993년 6월, 내 오랜 친구 톰 슐츠가 캘리포니아에서 보스턴으로 나를 보기 위해 왔다. 

우리는 뉴버리 가의 노천 카페에서 햇빛 아래 앉아 있었다. 톰은 막 이혼한 후였다. 여러 생각들이 많아 보였다. 그는 문득 내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말이다." 그가 말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증명되었어." 이건 최신 농담인가, 나는 생각했다. 저 말을 한 톰의 시선은 길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20년 전에, 톰과 나는 룸메이트였다. 우리는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수학과 학부생이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우리가 자주 얘기했던 주제다. 우리는 함수와 집합과 복소수체와 위상학을 얘기했다. 수학과 학생들 누구도 잠을 충분히 자지 않았다. 과제가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에. 수학과와 다른 학과의 차이가 여기 있었다. 수학과에선 수학 악몽을 꾼다. (......)" 




아 밑줄 친 저 대목 웃겼다. 

어제 밤에 도착했고 오늘 아침 읽었는데 현실 웃음 터졌다. 저자에게 감사가 밀려듬. 

............... 이것저것 할 일도 많고 시간은 없고 시간은 점점 없어지고 이미 산 시간은 잘못 산 시간이고 그렇다면, 별게 다 웃겨지는 게 아닌가, 나는 왜 웃고 있는가 하면서 웃음. 


그런가 하면, 저렇게 회고될 시간을 누구든 아직 살 수 있는 거 같기도 하다. 

저렇게 회고될 시간을 당장 내일 살 수도 있을 거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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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12-19 2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몰리님! 사이먼 싱의 <페르마의 마지막정리>도 재밌어요ㅋㅋ

몰리 2021-12-20 10:02   좋아요 1 | URL
일단 이거 읽고 (이건 얇아요. 얇고 작은 책) 그것도 살려구요. ㅋㅋㅋㅋㅋ 수학을 글로 배워보려고 합니다.

scott 2021-12-20 0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수학과에서 수학 악몽을 ㅋㅋㅋ


몰리 2021-12-20 10:04   좋아요 1 | URL
이언 스튜어트의 <젊은 수학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수학자로서 보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말하는 대목 보면...
아니 주로 세계를 이렇게 본다면 그것은 광증이 아닙니까. 하게 되는 대목이.
그러니 악몽을 꾸. ;;;;;;
 






이 책 얘기 서재에 자주 썼지만 

10여년 전 처음 알고 나서 아주 좋아했던 책이다. 세 권 갖고 있다. 하드커버 하나. 페이퍼백 하나. 독일어판 하나. 


논문을 무슨 주제로 쓰든 아도르노 책이 (가급적 <부정변증법>) 반드시 참고문헌에 

포함되게 쓰자. (....) 이런 다짐이 어쩌다 저절로 든 적도 있다. 그 다짐 후 쓴 (그냥 뭐 한 세 편 되나) 논문에 전부 

아도르노 책이 포함되었다. 


저 부제, <훼손된 삶에서 나온 성찰> 

이거 아주 너무 좋음. 세상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걸 하는 누군가도 있는 것이다. 


이걸 처음 읽던 때는 대학원생이었는데, 이 책과 그 시절의 삶은 서로 녹아 있다. 

여기서 저기로 바로 갈 수 있다. 


이 책에 쓰인 세 개의 제사 중에, 다 좋지만 그래도 최고는  

"모두가 나쁜 곳에서는 최악을 아는 것이 좋다" (Where everything is bad, it must be good to know the worst). 


논문도 부지런히 써야겠지만 논문 아닌 글도 쓰고 싶은데 

논문 아닌 글에서는 가장 먼저 저걸 제목으로 써야 한다는 작정을 본격적으로 올해 하였는데 ㅎㅎㅎㅎㅎㅎ 이것에 대해 내가 나에게 올해의 작정상을 주려는 참이다. 


<모두가 나쁜 곳에서는 최악을 아는 것이 좋다>. 

제목이 다함. 아니 제목이 다하는데 뭘 써? 


이 제목으로 쓰고 싶어지는 모두가 쓴다면 좋을 거 같다. 


2,30년뒤 누군가의 논문 참고문헌이 이런 식으로 쓰인다면 보기에 아주 좋.  


<모두가 나쁜 곳에서는 최악을 아는 것이 좋다>, 김--

<모두가 나쁜 곳에서는 최악을 아는 것이 좋다>, 나--

<모두가 나쁜 곳에서는 최악을 아는 것이 좋다>, 박--

<모두가 나쁜 곳에서는 최악을 아는 것이 좋다>, 이--

<모두가 나쁜 곳에서는 최악을 아는 것이 좋다>, 정--


존재하는 작품의 제목을 차용하는 건 표절이 아니고 저작권 위반이 아니라고 한다. 저작권 법의 세계도 복잡하고 오묘한 듯. 암튼 누군가의 논문 참고문헌이 위와 같이 작성되는 게 불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었. 아직 저 제목은 책으로는 (책이 아니라면 하여튼 '작품'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 일단 하나가 존재하기 시작하자 다수가 존재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 그랬으면 좋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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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초부터 열심히 덕질해 온 유튜브 아기계정 백송이tv. 아기가 얼마 전 돌이었다. 11월 26일. 

인스타 계정도 있는데 유튜브에 올라오지 않은 짧은 영상, 사진들 있다. 


돌 직후 올라온 영상이 있는데 

송이가 책장 앞에 서서 책을 고름. (걷게 된지 얼마 안됨. ㅎㅎㅎㅎ 걷기 시작하자 책장 앞으로 걸어간 아기?) 

책을 아주 생각하면서 고른다. 앞표지도 보고 뒷표지도 보고. 

찾는 게 아닌 책은 휙휙 던짐. (그래서 송이맘의 코멘트는: "하루에 정리만 열번....") 


그러다 찾던 책을 찾아내니까 그걸 손에 꼭 들고 자리에 철퍼덕 앉음. 

그리고 착 (기대에 차서....) 표지를 넘김. 


응 이거 내가 찾던 거. 이런 표정으로 골똘히 표지를 넘김. 

그녀가 깊이 들여다보는 페이지에는 오른쪽에는 할머니 파마하고 앞치마를 두른 할머니가 있고 

("할머니"라고 본문에 적혀 있음) 왼쪽에는 단정한 젊은 여자, 아니면 소녀가 (할머니의 딸? 손녀?) 있다. 얼룩소도 있고 푸른 풀밭도 있고 하튼 그런 그림책. 


그래 나 이거 보려고 했어. 표정으로 보다가 

오른손 검지를 펴고 힘 딱 주고 오른쪽의 할머니 찍으면서 "아빠" 그러고 

왼쪽의 단정한 여자(소녀) 찍으면서 "엄마" -- 그러다 카메라 쪽을 '맞지?' 하면서 보는 

그런 영상.  


송이는 아기버전 겨울 추리링(무릎 팔꿈치 나온)이랄지 아기버전 할머니 홈웨어를 입고 있는데 ㅎㅎㅎㅎㅎ 이 옷도 엄청 귀엽고 책을 고르고 자리에 앉아 골똘히 보는 그 과정 전부가 너무 귀엽다. 할머니를 아빠로 (말 아직 못해서 정확히 '아빠'는 아니다) 보는 것도 귀여운데, 유튜브 영상에서 익히 본 바 송이 부친께서 파마를 하신 분이라. 



책을 그리워하는 마음. 

책 속의 아빠와 엄마를 보고 싶은 마음. 

아주 오래전 언젠가 우리에게도 책이 그런 것이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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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에 따르면 과학은 처음부터 사회적 활동이었다. 

"고대에 홀로인 인간의 과학이라도, 이미 그것은 사회적 활동이었다. 

과학 사유이면서 이기적인 사유는 없다." 


과학이 사회적 활동인 것, 누구도 혼자서는 합리주의자가 될 수 없는 것. 

합리적 사유를 하려면 합리주의자들의 사회로 가야 하고 그 사회 안에서 다른 합리주의자의 감시가 필요한 것. : 바슐라르에 따르면, 과학사가 진보의 역사가 되게 한 중요한 비결이 여기 있다. 이런 얘기를 좀 많이 함축적으로 하시고, 심지어 시적으로 하시고 하튼 그래서 흩어져 있는 말씀들을 해석하고 일관된 논의로 묶어내고 하는 게 쉽지 않지만, 어쨌든 그의 입장은 이런 것. 이런 입장에서 "과학 도시" 이 말을 사랑하고 자주 쓰시기도 하는 것. 


합리주의자가 되려면 다른 합리주의자들이 생산해 둔 관습들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타인의 정신에 자기 정신을 동질화시킬 수 있는 사람만이, 합리주의자로서 타인과 대화할 수 있다. 


"정신의 동질화. 이것이 일어나지 않을 때,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와 수학자 아벨의 대화는 

광인들의 대화일 것이다." 





아 저거. 웃겼던 말이다. 바슐라르 특유의, 진정 뜬금없이 철학사, 문학사의 거인들 소환하기. 

키에르케고르가 나올 대목이 전혀 아닌데, 나옴. 그리고 그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의문의 1패가 아니고 필연적 1패. 예상된 1패. 너무 늦게 온 1패. 이성을 의심하고 멀리했던 키에르케고르. 심장의 인간 키에르케고르. 


나는 그의 사회에 대한 ('과학도시' '과학사회'로 한정하긴 하지만) 이 엄청난 낙관. 

모든 인간에게서 그의 지적 능력의 최선을 실현시키는 공간에 대한 이 흔들림없는 믿음. 

이게 참으로........... 존경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믿기지 않기도 하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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