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눈이 내렸다. 펑펑...퍼엉펑...

"어제는 비가 내렸네, 키 작은 나뭇잎 새로..."가 아니라 어제는 눈이 내렸다.

오랜만에 보는 눈이 포실포실 살찐 도톰한 모양으로 하늘에서 무작정 쏟아지고 있었다.  

눈 앞을 새하얗게 덮는 눈 속에서 잠시 내 머릿 속도 하얘졌다. 

요때만큼은 세상이 이대로 멈춰도 좋으리라.

너도 정물, 그리고 너를 바라보는 나도 정물이다.

 

아이는 눈 속에서 잠을 잤다.

창 밖으로 펄펄 휘날리는 눈 속에서 아이는 잠을 잤다.

눈 속에 기이하게 피어오른 아름다운 꽃이 있다면 이와 같으리.

매일 바라보면서도 이렇게 기적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니

 

사방에 눈 쌓이는 소리만 가득한데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눈처럼 오랫만인 어느 知人의 목소리,

나직하고 조용한 그 목소리가 말한다.

으응, 눈이 와서 걸었어. 지금 뭐하고 있니?

눈처럼 오랫만에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면, 눈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으응, 그냥...

 

아름다운 눈, 그리고 그 눈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눈(眼)

또 눈(眼)들...

어제는 충분히 아름답고 고요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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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굼 2004-01-13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내리는 것만 보라고 모든 것이 멈춰버려서 그렇게 조용한가 봅니다.
눈이 온다고 비가 온다고 알려주는 지인이 있다는 것도 좋은 일이에요.
 

새벽에 깨어 책을 읽었다. 속독이 아닌, 오히려 책을 읽는 데서도 남보다도 느린 내가 책 한 권을 읽는 데 두시간 남짓 밖에 걸리지 않았다.글이 반에 삽화가 반이다.

조경란의 악어 이야기

책 내용이 새삼스러워서가 아니라 문득, 그저 새삼스럽게 말이 하고 싶어졌다.

결혼한 뒤 언젠가, 오랫만에 만난 친구가 내게 말했다.

결혼할 때 넌 마치 칼을 버리고 투항하는 장군 같았어.

친구의 표현이 왠지 조금 위안이 되었다.

내게 버릴 칼이라도 있었니?

그 친구의 말대로 나는 이제 무장해제된 군인이었다. 나는 여전히 퍼런 갑옷을 입고 있는 친구가 부러웠고 그 앞에 허여멀끔하게 빈 손으로 서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나는 그 날 그 친구에게, 우리 앞으론 만나지 말자 했다. 질투 때문이 아니라 부끄러움 때문이었고 그 친구의 세상을 더이상은 공유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미 조금씩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조경란의 악어 이야기에 코끼리도 나온다. 발목에 줄이 묶여있는 서커스단의 코끼리. 어렸을 때 사슬에 묶여 절망을 경험한 어린 코끼리는 나이가 들어서 발목을 가는 줄로 묶어놓아도 도망갈 염을 내지 않는다. 그의 마음 속에는 이미 포기가 깃들어 있어, 발목의 가는 줄도 쇠사슬처럼 무거울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코끼리구나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 포기해버린 것일까. 아니 그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내 발목의 줄은 언제든 끊어버릴 수 있다는 것만 자각할 수 있으면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그 줄은 왜 이리 무거운 것일까. 왜 나는 줄을 끊고 숲으로 뛰쳐나가지 못하는 것일까. 추위와 배고픔에 대한 두려움, 낯선 세상에 대한 공포, 그리고  한 가정을 꾸리게 된 순간부터 내가 짊어지게 된 책임감...  그것을 모두 끌어안고도 나는 숲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도무지 내 칼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디에 쓰는 물건이란 말이냐. 그리고 어디서 되찾아야 한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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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1-0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아님, 새해 둘째 날입니다. 새벽에 깨어 책 읽고 글 쓰는 기분, 다시 느끼기 시작해야겠습니다. 요즘 잠이 좀 많아졌거든요. 내게도 버릴 칼이라도 있었던가, 싶네요. 그리고 저도 보이지 않는 가는 끈이 제 발목을 온통 묶게 하고 그걸 핑계삼아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무엇이 두려워 이리 틀 속에 갇혀 사는지... 새해엔 뭔가 다른?, 이런 생각은 안 하겠습니다. 그저 내 감정에 조화로운 질서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집중하고 몰입하고 싶습니다. 새해 첫날, '몰입의 즐거움'으로 새해 즐독 시작했는데요, 느낌이 좋습니다. 소아님, 소아님의 칼의 정체를 찾아 행복한 한 해 보내시기 바래요. 저도 어떤 식으로든 그렇게 해야겠어요. 복도 많~~이 받으세요. ^^

소호 2004-01-02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말씀에 기운이 솟네요. 혜경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취하지 않고 사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취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취하지 않으려고 무진 노력을 한다.

남들처럼 정상적이라는 게 취하지 않는 것이라면, 나도 취하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맨날 더듬거린다. 잘 보이지 않아서 더듬더듬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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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 2004-01-13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다. 남들이야 어떻든 난 취해야 산다.
내가 그렇다는데 어쩔 것이냐.
취해야 그림을 그렸던 장승업처럼 나도 취해야 명징하게 보인다는데 어쩔 것이냐.
그래, 취하긴 취하되 좋은 것에 좋게 취하자.
그래야 그 향도 취할 만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유리 : 규사와 소다회, 석회 따위를 섞어서 녹였다가 급히 냉각시켜 만든 물질. 단단하고 투명하나 깨어지기 쉬움. (국어사전)

유리조각 : 유리가 깨져 부서진 잔해들 

내겐 '유리' 또는 '유리조각'하면 떠오르는 동화가 있다. 아주 어릴 적에 읽어서, 읽었는지 어쨌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유독 한 장면만큼은 생생하게 떠오르는 동화다.

어느 마을에 꼽추 아들과 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받을까 봐 집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못하게 했다. 꼽추 아들은 바깥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자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뜨자, 꼽추 아들은 가난한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인 아버지의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선다.

"나도 이제 세상 속으로 나가 행복을 찾아볼 테야."

집을 나서자마자 아이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는 꼽추 아들,  갈 길을 재촉하는데 저 앞에서 뭔가 반짝거리는 것이 보인다. 길바닥에서 뭔가가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꼽추는 "저게 바로 행복인가 봐" 외치며 달려나간다. 그런데 가까이 가보니 그것은 깨진 유리조각이 햇빛에 빛나는, 사금파리일 뿐. 꼽추는 실망하고 다시 행복을 찾아 앞으로 걸어나간다... 곧 요술 할머니가 등장하여 마술 지팡인가 뭔가를 건네주고 결국 꼽추는 많은 보물을 찾아 행복하게 된다.

이 동화의 다른 부분들은 시간이 가면서 다 잊혀지고 흐릿해졌다. 내용이라봐야 못 생긴 개구리가 왕자 되는 것 만큼이나 흔한 소재에 뻔한 결말이었다. 그런데 오직 한 부분, 잠깐이나마 꼽추의 눈에 유리조각이 행복으로 비쳐졌던 부분만은 내 마음 속에 그대로 꽂혔다. 동화 속 꼽추조차 실망했는데 내겐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이다. 먼지 풀풀 날리는 길바닥에서 '반짝' 빛났던 유리 조각들, 나는 아직도 그것이 진짜 행복이라고 믿는다. 허무하고 아무 것도 없고, 꽉 쥐면 깨져버리고 고작해야 햇빛에 반짝 빛나기나 하는 그것이.

깨지기 쉬운 이 삶 속에서 나는 무수한 유리조각들과 부딪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자주, 옛날 옛적 그 곱추처럼 "저것이 바로 행복 아니야?" 소리치며 달려나가곤 한다. 그렇게 달려나가서, 그것이 금가루가 아니라 유리가루임을 확인하고 실망스러워 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매번 달려나간다. 언젠가는 그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겠지. 동화의 기운에 힘입어, 내게 유리조각은 여전히 행복의 조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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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오아시스

고독한 마음으로 이 영화를 보았다. 처음부터 이 영화를 보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중증 장애인과 사회 부적응자의 사랑 이야기, 영화 홍보용으로 뿌려지는 팜플렛에서 대충 읽었던 이 영화의 줄거리는 다소 어두웠고 우울하게 느껴졌다. 연말이자 연시를 앞두고 이런 영화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편하게 웃고 넘길 수 있는 코믹영화나 소박하고 동화적인, 마음 따뜻해지는 영화를 찾고 싶었다. 그러나 왠지 마땅한 영화를 고를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종내, 언젠가는 봐야지 싶었던 <오아시스>를 집어들게 되었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풍경으로 시작되는 영화 초입부, 빨간색 동그라미 안에 숫자가 적힌 눈에 익숙한 시내버스, 버스를 기다리는 무관심한 사람들, 그리고 그 풍경 속에 건달처럼 히죽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는 남자 홍종두. 주인공 남자 역을 맡은 설경구의 자연스런 연기가 시선을 화면에 붙들어놓긴 했지만 그외에는 별반 새로울 것도 없어보였다. 처음엔 그랬다. 그러다가 여자 주인공 한공주가 등장하고 그녀의 깨진 거울놀이에 나비들이 하늘하늘 날아오를 때부터 내 눈은 초롱초롱해지기 시작했다. 연기자들의 장애인 연기가 처음이고 또 저토록 실감나게 한 것도 처음이랴. 그러나 지루한 혼자만의 놀이에 싫증나 던져버린 거울, 그 깨진 조각들에서 저리 아름다운 환영을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외화 <마빈스룸>에서도 아픈 아버지 옆에서 거울을 들고 햇빛의 춤을 보여주었던 딸이 있었지만 그 거울놀이가 이처럼 아름답고 신기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때부터 오아시스에 미끄러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날아오르는 나비

그랬다. 내게 영화 ‘오아시스’는 그 날아오르는 나비였다. 깨진 거울 조각들에서 태어난 나비, 거울이 거울로의 기능을 전혀 못하게 되었을 때 문득 나풀거리며 날아올랐던 나비는 장애인인 한공주가 가족들에게마저 버림받고 홀로 남았을 때 그녀의 깨어진 꿈 속으로 찾아온 종두였고 또한 믿겨지지 않는 그들의 사랑이었다. 손발이 뒤틀리고 입도 비뚤어진,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듣기 힘든 장애인 여자를 누가 사랑하겠는가. 전과자 이력에 덜 떨어진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의 핀잔과 멸시만 먹고 사는, 어디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듯한 남자를 어떤 여자가 사랑하겠는가. 그런 그들이 서로 만나고 사랑을 한다. 기적처럼. 수리수리 마수리 수수리 사바하, 마법의 주문처럼.

    사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이들의 사랑은 영화니까 가능한 것이었다. 현실에서는 찾기 어려운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이창동 감독은 ‘좀 모자란’ 홍종두를 내세워 출감한 다음날 피해자의 집을 찾아가게 하고 홀로 남겨진 장애인 여자를 만나게 했으며 그 여자에게 첫눈에 끌리게까지 만들었다. 첫눈에 끌리는 일이 젊고 아리따운 여자들에게만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해도, 공주 같이 자기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을 보며 그것을 연상하기란 쉽지 않다. 종두가 공주에게 처음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거의 성폭력이라 해야 할 만큼 일방적이었다. 그런데도 며칠이 지난 어느 밤, 외로움과 무서움에 떨던 공주는 종두가 거울에 붙여두고 간 그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자신을 겁탈할 뻔한 남자에게 어떻게 먼저 전화를 걸 수 있느냐고 반감을 표시하던 이들도 있었지만, 영화 속 이야기를 어떻게 현실적인 잣대로 저울질 할 수 있겠는가. 감독은 어쩌면 정상적이지 않은 이 둘을 연인의 관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이러한 무리수가 필요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게다가 공주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하는 것이, 그것은 공주가 세상으로부터 받았던 최초의 프로포즈였던 것이다. 거칠고 서툴었지만 자신을 한 인간으로, 한 여자로 인정해준 프로포즈. 종두의 행동은 공주가 보고 있는 줄 알면서도 그녀 집 거실에서 정사를 나누던 옆집 부부의 몰지각, 그리고 종두를 취조하던 형사의 비아냥 섞인 웃음(그런 여자한테서도 그런 생각이 나더냐)보다는 최소한 인간적인 것이었다. ‘사랑’은 고사하고 공주가 어디 사람 취급이나 제대로 받았던가. 옆집 부부의 정사를 훔쳐보다 문을 닫고 공주는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팔로 힘들게 입술에 루즈를 바른다. 그녀에게는 호사스러운 단어인 사랑이란 것에 그녀가 처음으로 마음의 문을 연 순간, 깨진 거울 조각들에서 나비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종두와 공주의 사랑

이들의 사랑이 특별하거나 색달랐던 건 아니었다. 이들은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 그러하듯이 서로 사랑스런 시선으로 쳐다보면서 웃고 얘기하고 짜장면을 먹는다. 그럼에도 이들의 사랑이 달라보였던 것은 이들이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도 한심하거나 아름답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이들의 사랑을 용납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사랑이라니, 살아있음 혹은 삶 자체부터가 매일매일 다급한 숙제와도 같은 그들 아니던가.

    그러나 그들은 사랑을 한다. 고귀하거나 빛나보이진 않아도 헌신적이고 성실하고 따뜻한 사랑, 세상과의 단절 속에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기쁨이었던 사랑. 그 사랑을 통해 중증 장애인 한공주는 사랑받는 귀여운 여자 ‘공주마마’로 다시 태어나고, 어디에도 발붙일 곳 없던 천덕꾸러기 전과자 홍종두는 사랑하는 여자를 자상히 보살피는 믿음직한 남자 ‘홍장군’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들의 사랑에 우리가 감동을 받았다면 그것은 이들의 사랑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더욱 절박한 상황 속에 처해있어 그 절박한 순수함으로 우리가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랑의 귀한 속성들을 더욱 확연히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발견한 오아시스는 무엇이었던가. 이 영화의 제목인 ‘오아시스’는 공주 방에 걸려있던 그림의 제목이기도 하다. 공주가 잠잘 때마다 올려다보던, 싸구려 냄새를 폴폴 풍겼지만 즐겁고 몽환적인 이국의 향취를 담고 있었던 그림. 지저분하고 누추한 속에서 머나먼 꿈을 담고 있었던 그림. 그들의 사랑은 그처럼 멀고도 힘든 여정을 지나고 있다. 세상의 무지와 편견, 적대감 속에서 그들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무자비하게 난도질 당하면서. 사랑의 한중간에서 졸지에 성폭행범으로 몰린 종두는 왜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을까. 흥분하여 말도 못하고 답답함으로 머리만 찧고 있었던 공주는 그렇다 치더라도, 종두는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함구하고 유치장으로 끌려간다. 말을 해봐야 이미 그들을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 앞에서 그들의 사랑은 조롱거리가 될 뿐이다. 누가 그들을 갸륵하게 여겨주겠는가.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부분은 경찰서를 빠져나온 종두가 공주의 집 앞 나무에 기어올라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던 장면이었다. 그는 그림 위에 항상 그림자를 드리워 공주를 무섭게 했던 나뭇가지를 꺾어버린다. 그리고 종두를 보지 못하는 공주는 힘들게 몸을 일으켜 창문께에 볼륨을 높인 라디오를 밀어놓는다. 소박하지만 열정적인 사랑의 세레나데와도 같았던 이 장면은, 공주와의 전화통화에서 종두가 “수리수리…” 주문을 걸어 나무 그림자를 사라지게 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 그 환상은 실재가 되고 그들은 그들만의 오아시스를 확인한다. 그리고 엔딩, 공주는 햇빛이 따스하게 비치는 방안에서 종두의 편지를 읽고 행복한 미소를 띄며 방 청소를 한다. 다소 안이하게 느껴지는 동화적인 (그 후로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결말이었다지만 내겐 전혀 애석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현실의 벽에 머리를 부딪쳐야 했던 그들에게 그런 해피 엔딩마저 없으면 어쩌란 말인가.

나의, 우리의 오아시스

이 영화 속에서 육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종두와 공주 뿐이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쫓아가다 보면 오히려 이 두 사람을 제외한 등장인물 모두가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비인간적으로 보인다. 종두의 형은 자신이 저질러놓은 사고에 종두를 대신 교도소에 보내놓고서도 면회는 커녕 돌아온 종두를 한심하고 쓸모없게 여기며, 형수 역시 내놓고 싫은 기색이다. 또한 공주의 장애인 수첩을 이용해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갔던 공주의 오빠는 세입자를 조사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하자 부리나케 공주를 데려다놓는다. 마치 찌그러졌지만 차마 버리지는 못하는 낡은 가구처럼. 공주 오빠의 탐욕은 점입가경으로, 종두와 공주의 정사를 목격하고 경찰서에 종두를 성폭행범으로 신고했을 때도 종두 가족에게 고소를 취하할 테니 돈을 달라고 요구할 정도이다. 그밖에도 공주의 옆집 부부와 종두의 가족들, 식당주인, 식당 안의 사람들 등 몸은 정상이지만 양심과 의식과 정신은 불구인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우리는 과연 이들을 마음놓고 비난할 수 있을까. 이들의 행동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비추고 있다. 자신의 잇속과 관계되지 않는다면 더없이 냉랭하고 무관심한 현대사회, 우리는 공주나 종두가 아니지만 또다른 의미에서 그들처럼 고독하고 두렵다. 어쩌면 우리도 그들처럼 오아시스를 찾아나서야 하지는 않을까. 오아시스는 뜨거운 열대의 사막 속에 숨어있어 가장 혹독한 시련 속에 찾아낼 수 있는 샘(泉)이다. 이 영화를 다만 장애인의 사랑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릴 수 없는 것은 그 샘이 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같은 삶의 근원, 메마른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끌어올려야 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이상한 영화였다. 결코 아름답지 않은 주인공들이 등장하는데도 아름다웠고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는데도 보고 난 뒤 한 편의 맑은 동화를 읽은 것처럼 마음이 잔잔해져왔다. 공주방에 걸려있던 그 그림이 진짜처럼 현실 속으로 살아나와 아기 코끼리와 색종이를 날리는 소년, 이국적인 여인이 공주의 방안을 걸어다닐 때는 나도 그만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더랬다. 영원히 깨지 않는 행복한 꿈이 있다면, 사람이 사람으로서 충분히 아름답고 귀하며 오직 사랑만으로 축복받는 세상이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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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4-29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이었던 영화죠. 문소리와 설경구 연기가 너무나 좋더군요. 옆자리에 앉은 중년 커플리 병신들 나오는 영화라며 짜증난다고 먹어대고 시끄럽게 구는 바람에 열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이 영화 정말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