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깨어 책을 읽었다. 속독이 아닌, 오히려 책을 읽는 데서도 남보다도 느린 내가 책 한 권을 읽는 데 두시간 남짓 밖에 걸리지 않았다.글이 반에 삽화가 반이다.

조경란의 악어 이야기

책 내용이 새삼스러워서가 아니라 문득, 그저 새삼스럽게 말이 하고 싶어졌다.

결혼한 뒤 언젠가, 오랫만에 만난 친구가 내게 말했다.

결혼할 때 넌 마치 칼을 버리고 투항하는 장군 같았어.

친구의 표현이 왠지 조금 위안이 되었다.

내게 버릴 칼이라도 있었니?

그 친구의 말대로 나는 이제 무장해제된 군인이었다. 나는 여전히 퍼런 갑옷을 입고 있는 친구가 부러웠고 그 앞에 허여멀끔하게 빈 손으로 서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나는 그 날 그 친구에게, 우리 앞으론 만나지 말자 했다. 질투 때문이 아니라 부끄러움 때문이었고 그 친구의 세상을 더이상은 공유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미 조금씩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조경란의 악어 이야기에 코끼리도 나온다. 발목에 줄이 묶여있는 서커스단의 코끼리. 어렸을 때 사슬에 묶여 절망을 경험한 어린 코끼리는 나이가 들어서 발목을 가는 줄로 묶어놓아도 도망갈 염을 내지 않는다. 그의 마음 속에는 이미 포기가 깃들어 있어, 발목의 가는 줄도 쇠사슬처럼 무거울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코끼리구나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 포기해버린 것일까. 아니 그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내 발목의 줄은 언제든 끊어버릴 수 있다는 것만 자각할 수 있으면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그 줄은 왜 이리 무거운 것일까. 왜 나는 줄을 끊고 숲으로 뛰쳐나가지 못하는 것일까. 추위와 배고픔에 대한 두려움, 낯선 세상에 대한 공포, 그리고  한 가정을 꾸리게 된 순간부터 내가 짊어지게 된 책임감...  그것을 모두 끌어안고도 나는 숲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도무지 내 칼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디에 쓰는 물건이란 말이냐. 그리고 어디서 되찾아야 한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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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1-0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아님, 새해 둘째 날입니다. 새벽에 깨어 책 읽고 글 쓰는 기분, 다시 느끼기 시작해야겠습니다. 요즘 잠이 좀 많아졌거든요. 내게도 버릴 칼이라도 있었던가, 싶네요. 그리고 저도 보이지 않는 가는 끈이 제 발목을 온통 묶게 하고 그걸 핑계삼아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무엇이 두려워 이리 틀 속에 갇혀 사는지... 새해엔 뭔가 다른?, 이런 생각은 안 하겠습니다. 그저 내 감정에 조화로운 질서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집중하고 몰입하고 싶습니다. 새해 첫날, '몰입의 즐거움'으로 새해 즐독 시작했는데요, 느낌이 좋습니다. 소아님, 소아님의 칼의 정체를 찾아 행복한 한 해 보내시기 바래요. 저도 어떤 식으로든 그렇게 해야겠어요. 복도 많~~이 받으세요. ^^

소호 2004-01-02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말씀에 기운이 솟네요. 혜경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