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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이라는 배우를 보고 선택한 영화. 밤늦은 시간에 비디오 가게로 뛰어들어가 빌려온 것이다. 아직 아이가 어려서 영화관에 갈 짬을 내기가 쉽지 않은지라, 요즘은 우리집 안방이 곧 내 영화관이다. 아이를 재우고 남편과 같이 영화를 보는 시간, 사실 이것도 호사라면 호사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남편이 말한다. "어, 저거 일본 만화로 나왔던 건데? 근데 내용이 많이 틀리네..."  올드보이가 일본 만화를 각색한 것이라는 걸 나는 알지 못했었다. 하긴 알아도 비디오를 고르는 데 별 상관은 없었겠지만.

남편은 보다가 졸다가 과자를 먹는다고 부시럭대다가... (나는 영화 보는데 옆에서 소리내고 부시럭대는 사람이 젤 싫더라. ^^) 드디어 아무래도 먼저 자야겠다며, 안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제 맘놓고 관람하는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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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4-29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먼저 보고 너무 좋아서 만화도 읽었는데 영화가 훨씬 좋더군요.
 

내 마음의 오아시스

고독한 마음으로 이 영화를 보았다. 처음부터 이 영화를 보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중증 장애인과 사회 부적응자의 사랑 이야기, 영화 홍보용으로 뿌려지는 팜플렛에서 대충 읽었던 이 영화의 줄거리는 다소 어두웠고 우울하게 느껴졌다. 연말이자 연시를 앞두고 이런 영화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편하게 웃고 넘길 수 있는 코믹영화나 소박하고 동화적인, 마음 따뜻해지는 영화를 찾고 싶었다. 그러나 왠지 마땅한 영화를 고를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종내, 언젠가는 봐야지 싶었던 <오아시스>를 집어들게 되었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풍경으로 시작되는 영화 초입부, 빨간색 동그라미 안에 숫자가 적힌 눈에 익숙한 시내버스, 버스를 기다리는 무관심한 사람들, 그리고 그 풍경 속에 건달처럼 히죽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는 남자 홍종두. 주인공 남자 역을 맡은 설경구의 자연스런 연기가 시선을 화면에 붙들어놓긴 했지만 그외에는 별반 새로울 것도 없어보였다. 처음엔 그랬다. 그러다가 여자 주인공 한공주가 등장하고 그녀의 깨진 거울놀이에 나비들이 하늘하늘 날아오를 때부터 내 눈은 초롱초롱해지기 시작했다. 연기자들의 장애인 연기가 처음이고 또 저토록 실감나게 한 것도 처음이랴. 그러나 지루한 혼자만의 놀이에 싫증나 던져버린 거울, 그 깨진 조각들에서 저리 아름다운 환영을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외화 <마빈스룸>에서도 아픈 아버지 옆에서 거울을 들고 햇빛의 춤을 보여주었던 딸이 있었지만 그 거울놀이가 이처럼 아름답고 신기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때부터 오아시스에 미끄러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날아오르는 나비

그랬다. 내게 영화 ‘오아시스’는 그 날아오르는 나비였다. 깨진 거울 조각들에서 태어난 나비, 거울이 거울로의 기능을 전혀 못하게 되었을 때 문득 나풀거리며 날아올랐던 나비는 장애인인 한공주가 가족들에게마저 버림받고 홀로 남았을 때 그녀의 깨어진 꿈 속으로 찾아온 종두였고 또한 믿겨지지 않는 그들의 사랑이었다. 손발이 뒤틀리고 입도 비뚤어진,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듣기 힘든 장애인 여자를 누가 사랑하겠는가. 전과자 이력에 덜 떨어진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의 핀잔과 멸시만 먹고 사는, 어디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듯한 남자를 어떤 여자가 사랑하겠는가. 그런 그들이 서로 만나고 사랑을 한다. 기적처럼. 수리수리 마수리 수수리 사바하, 마법의 주문처럼.

    사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이들의 사랑은 영화니까 가능한 것이었다. 현실에서는 찾기 어려운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이창동 감독은 ‘좀 모자란’ 홍종두를 내세워 출감한 다음날 피해자의 집을 찾아가게 하고 홀로 남겨진 장애인 여자를 만나게 했으며 그 여자에게 첫눈에 끌리게까지 만들었다. 첫눈에 끌리는 일이 젊고 아리따운 여자들에게만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해도, 공주 같이 자기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을 보며 그것을 연상하기란 쉽지 않다. 종두가 공주에게 처음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거의 성폭력이라 해야 할 만큼 일방적이었다. 그런데도 며칠이 지난 어느 밤, 외로움과 무서움에 떨던 공주는 종두가 거울에 붙여두고 간 그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자신을 겁탈할 뻔한 남자에게 어떻게 먼저 전화를 걸 수 있느냐고 반감을 표시하던 이들도 있었지만, 영화 속 이야기를 어떻게 현실적인 잣대로 저울질 할 수 있겠는가. 감독은 어쩌면 정상적이지 않은 이 둘을 연인의 관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이러한 무리수가 필요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게다가 공주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하는 것이, 그것은 공주가 세상으로부터 받았던 최초의 프로포즈였던 것이다. 거칠고 서툴었지만 자신을 한 인간으로, 한 여자로 인정해준 프로포즈. 종두의 행동은 공주가 보고 있는 줄 알면서도 그녀 집 거실에서 정사를 나누던 옆집 부부의 몰지각, 그리고 종두를 취조하던 형사의 비아냥 섞인 웃음(그런 여자한테서도 그런 생각이 나더냐)보다는 최소한 인간적인 것이었다. ‘사랑’은 고사하고 공주가 어디 사람 취급이나 제대로 받았던가. 옆집 부부의 정사를 훔쳐보다 문을 닫고 공주는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팔로 힘들게 입술에 루즈를 바른다. 그녀에게는 호사스러운 단어인 사랑이란 것에 그녀가 처음으로 마음의 문을 연 순간, 깨진 거울 조각들에서 나비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종두와 공주의 사랑

이들의 사랑이 특별하거나 색달랐던 건 아니었다. 이들은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 그러하듯이 서로 사랑스런 시선으로 쳐다보면서 웃고 얘기하고 짜장면을 먹는다. 그럼에도 이들의 사랑이 달라보였던 것은 이들이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도 한심하거나 아름답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이들의 사랑을 용납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사랑이라니, 살아있음 혹은 삶 자체부터가 매일매일 다급한 숙제와도 같은 그들 아니던가.

    그러나 그들은 사랑을 한다. 고귀하거나 빛나보이진 않아도 헌신적이고 성실하고 따뜻한 사랑, 세상과의 단절 속에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기쁨이었던 사랑. 그 사랑을 통해 중증 장애인 한공주는 사랑받는 귀여운 여자 ‘공주마마’로 다시 태어나고, 어디에도 발붙일 곳 없던 천덕꾸러기 전과자 홍종두는 사랑하는 여자를 자상히 보살피는 믿음직한 남자 ‘홍장군’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들의 사랑에 우리가 감동을 받았다면 그것은 이들의 사랑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더욱 절박한 상황 속에 처해있어 그 절박한 순수함으로 우리가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랑의 귀한 속성들을 더욱 확연히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발견한 오아시스는 무엇이었던가. 이 영화의 제목인 ‘오아시스’는 공주 방에 걸려있던 그림의 제목이기도 하다. 공주가 잠잘 때마다 올려다보던, 싸구려 냄새를 폴폴 풍겼지만 즐겁고 몽환적인 이국의 향취를 담고 있었던 그림. 지저분하고 누추한 속에서 머나먼 꿈을 담고 있었던 그림. 그들의 사랑은 그처럼 멀고도 힘든 여정을 지나고 있다. 세상의 무지와 편견, 적대감 속에서 그들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무자비하게 난도질 당하면서. 사랑의 한중간에서 졸지에 성폭행범으로 몰린 종두는 왜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을까. 흥분하여 말도 못하고 답답함으로 머리만 찧고 있었던 공주는 그렇다 치더라도, 종두는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함구하고 유치장으로 끌려간다. 말을 해봐야 이미 그들을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 앞에서 그들의 사랑은 조롱거리가 될 뿐이다. 누가 그들을 갸륵하게 여겨주겠는가.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부분은 경찰서를 빠져나온 종두가 공주의 집 앞 나무에 기어올라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던 장면이었다. 그는 그림 위에 항상 그림자를 드리워 공주를 무섭게 했던 나뭇가지를 꺾어버린다. 그리고 종두를 보지 못하는 공주는 힘들게 몸을 일으켜 창문께에 볼륨을 높인 라디오를 밀어놓는다. 소박하지만 열정적인 사랑의 세레나데와도 같았던 이 장면은, 공주와의 전화통화에서 종두가 “수리수리…” 주문을 걸어 나무 그림자를 사라지게 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 그 환상은 실재가 되고 그들은 그들만의 오아시스를 확인한다. 그리고 엔딩, 공주는 햇빛이 따스하게 비치는 방안에서 종두의 편지를 읽고 행복한 미소를 띄며 방 청소를 한다. 다소 안이하게 느껴지는 동화적인 (그 후로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결말이었다지만 내겐 전혀 애석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현실의 벽에 머리를 부딪쳐야 했던 그들에게 그런 해피 엔딩마저 없으면 어쩌란 말인가.

나의, 우리의 오아시스

이 영화 속에서 육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종두와 공주 뿐이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쫓아가다 보면 오히려 이 두 사람을 제외한 등장인물 모두가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비인간적으로 보인다. 종두의 형은 자신이 저질러놓은 사고에 종두를 대신 교도소에 보내놓고서도 면회는 커녕 돌아온 종두를 한심하고 쓸모없게 여기며, 형수 역시 내놓고 싫은 기색이다. 또한 공주의 장애인 수첩을 이용해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갔던 공주의 오빠는 세입자를 조사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하자 부리나케 공주를 데려다놓는다. 마치 찌그러졌지만 차마 버리지는 못하는 낡은 가구처럼. 공주 오빠의 탐욕은 점입가경으로, 종두와 공주의 정사를 목격하고 경찰서에 종두를 성폭행범으로 신고했을 때도 종두 가족에게 고소를 취하할 테니 돈을 달라고 요구할 정도이다. 그밖에도 공주의 옆집 부부와 종두의 가족들, 식당주인, 식당 안의 사람들 등 몸은 정상이지만 양심과 의식과 정신은 불구인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우리는 과연 이들을 마음놓고 비난할 수 있을까. 이들의 행동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비추고 있다. 자신의 잇속과 관계되지 않는다면 더없이 냉랭하고 무관심한 현대사회, 우리는 공주나 종두가 아니지만 또다른 의미에서 그들처럼 고독하고 두렵다. 어쩌면 우리도 그들처럼 오아시스를 찾아나서야 하지는 않을까. 오아시스는 뜨거운 열대의 사막 속에 숨어있어 가장 혹독한 시련 속에 찾아낼 수 있는 샘(泉)이다. 이 영화를 다만 장애인의 사랑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릴 수 없는 것은 그 샘이 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같은 삶의 근원, 메마른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끌어올려야 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이상한 영화였다. 결코 아름답지 않은 주인공들이 등장하는데도 아름다웠고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는데도 보고 난 뒤 한 편의 맑은 동화를 읽은 것처럼 마음이 잔잔해져왔다. 공주방에 걸려있던 그 그림이 진짜처럼 현실 속으로 살아나와 아기 코끼리와 색종이를 날리는 소년, 이국적인 여인이 공주의 방안을 걸어다닐 때는 나도 그만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더랬다. 영원히 깨지 않는 행복한 꿈이 있다면, 사람이 사람으로서 충분히 아름답고 귀하며 오직 사랑만으로 축복받는 세상이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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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4-29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이었던 영화죠. 문소리와 설경구 연기가 너무나 좋더군요. 옆자리에 앉은 중년 커플리 병신들 나오는 영화라며 짜증난다고 먹어대고 시끄럽게 구는 바람에 열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이 영화 정말 좋았어요
 

실명(失明) –낭만의 옷을 입다

어둠 속의 댄서

영화 속에서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이들이 종종 등장한다. 눈에 보이는 병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까지 포함시킨다면 아마도 모든 영화에서 병든 인물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삶이 완벽히 건강하지는 않은 것처럼 어떤 영화도 완벽히 밝지만은 않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가진 장애는 타피스트리의 무늬처럼 그들 자신의 삶 속으로 파고들어가 나름의 무늬를 만들어내고 명암을 조율한다. 명암의 대비가 뚜렷할수록 보는 이들에게는 더욱 극적으로 느껴지기 마련. 이 화려한 대비를 통해 영화의 재미와 감동도 배가된다.

    <어둠 속의 댄서>도 이렇게 명암의 파동이 큰 영화 중 하나이다. 이야기 전개나 스토리 라인도 단순하고 등장인물도 많지 않지만 마치 흑백사진처럼 선명한 극적 구도로 주인공의 일탈적 삶을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불행한 요소들을 두루 갖췄다. 그녀는 돈 한 푼 없는 이민자로 공장의 일용직 노동자이며 아비 없는 아이를 하나 키우며 살고 있는 데다 시력마저 점차 잃어가고 있다. 그녀가 가진 것이라곤 두꺼운 안경 너머로 마냥 천진하게만 보이는 해맑은 얼굴 정도일까. 아니, 그녀에겐 아들이 있었다. 아비 없는 아이이므로 그녀에게 또 하나의 장애로 작용할 수도 있을 아이. 그러나 그 아이는 그녀에게 더없는 기쁨이며 자랑, 삶의 희망이었다. 그것은 그녀, 셀마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혀 불편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더욱 넓은 꿈의 장(場)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과 같다. 그녀의 치명적인 장애는 결국 그의 삶 자체를 파국으로 몰고가는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의 사랑을 더욱 강하게 해주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그녀, 셀마의 두꺼운 안경을 잠시만 벗겨보자. 영화는 셀마의 실명을 그녀 자신의 환상과 연결시켜 거의 낭만적인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지만 (나는 이미 보고 싶은 것들을 다 보았답니다. 빗방울과 장미꽃, 구리주전자와 크림색 양탄자... 지나온 과거와 미래도...) 그렇게 말하고 노래부르는 것이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눈이 조금이라도 나쁜 사람이라면, 그래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실명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실명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손으로 더듬어 짐작하고 소리를 들어 알 수 있을 정도의 부분적인 소통은 가능할지 몰라도, 정상적인 사람들과 자유로운 인간관계를 가지거나 마치 ‘조금 안 보이는’ 정도의 근시인 것처럼 세밀한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셀마는 정상적인 사람들도 잘못하면 손이 잘려나갈 수 있는 프레스 작업을 하고 있으며, 더듬거리는 몸가짐이 좀 불편해보일 뿐 장님이라서 크게 불편할 것도 없을 것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덩치 큰 기차도 잘 보이지 않는 셀마가 선로를 발로 더듬어가며 집으로 향하는 것은 관객의 긴장감을 유도해내기 위한 장치 정도가 아닐까. 프레스 작업도 하는데 땅을 울리며 다가오는 기차 정도야...) 게다가 영화 속에서는 셀마의 시력 정도가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어떤 장면에서는 거의 완전히 실명한 상태처럼 느껴지는가 하면 또다른 장면에서는 부분적인 실명 상태인가 생각되기도 한다. 주인공의 연기가 실감났던 것은 물론 뷔욕의 뛰어난 연기력 덕분이었겠지만 그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의 효과도 컸을 듯 하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장애의 고통과 그것의 극복과정이 아닌 이상 실제적인 표현은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실명’이란 것은 주인공의 예술(뮤지컬)에의 열정과 끈끈한 가족애를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배경으로 작용할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줄거리 전체를 휘두르는 장애로 부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고통스럽게 여겨지지 않는다. 아들의 눈 수술을 위해 재심청구도 거부하고 사형날짜만을 세고 있는 셀마에게 그의 남자친구, 제프가 묻는다.

« 진을 왜 낳았어요 ? 당신처럼 될 줄 알면서도... »

« 안아보고 싶어서... 내 품에 안아보고 싶어서요. »

관객은 눈물을 빼고 ‘실명’이라는 현실적 고통은 여기서 다시 낭만적 기운을 얻는다. 마침내 결말부분, 예정된 수순대로 셀마는 그녀의 목숨을 담보로 아들의 시력을 회복시킨다. 사형대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아들의 안경을 건네받고는 새롭게 솟구치는 사랑의 감정에 노래를 부르는 셀마. 그리고 그 순간 잘려나가는 필름처럼 툭 떨어지는 그녀의 생명.

    시력은 사람이 가진 보물 중 가장 큰 보물이다. 영화 속 주인공이 목숨을 내걸고 아들의 시력을 찾아주려 했을 만큼. 그러나 여기 이 주인공은 스스로의 그 고통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초연하다. 초연할 뿐더러 그것을 뮤지컬에의 꿈으로 환치시켜 환상적으로 몰고가기조차 한다. 역시 영화이다. 그렇다면 아들이 감내해야 할 그만의 몫의 고통에 대해서도 그렇게 초연할 수는 없었을까. 그녀의 태도, 스스로의 고통은 감내할 수 있지만 아들의 실명을 막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불사하려는 그녀의 태도는 분명 감동적인 모성애의 표본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억지스런 느낌도 든다. 그녀는 « 난 자유로워요 »라고 노래부르지만 실제로는 그 장애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있는 불쌍한 신세인 것이다.

    <어둠 속의 댄서>라는 제목에서처럼 이 영화는 주인공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추는 춤을 보여준다. 환상 속에서는 화려할지라도 현실 속에서는 스스로 소진해 타버리는 춤. 댄서는 그의 노래와는 달리 어둠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의 춤 역시 장애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울다가 깨어나 그녀가 보여준 춤을 잊는다. 춤을 추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둠 속에서 추는 춤을 현실로서 드러내지 못한 이상, 이 영화는 제목에서처럼 여전히 모호한 예술의 경계선에 서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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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4-29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인상깊게 봤는데 재미 없었다는 사람이 더 많더군요. ㅎㅎ
 

두번 보지는 못할, 그러나 한번은 꼭 봐야만 할 영화

레퀴엠 (Requiem for a Dream)

그것이 늘 ‘죽음’과 연관된 것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인지, ‘레퀴엠’이란 단어는 그 발음에서부터 어딘지 모르게 장중하고 약간은 비극적인 울림을 갖는다. 레퀴엠. 성당 천정으로부터 울려퍼지는 오르간 소리처럼 명료하면서도 엄숙하고 정신을 긴장시키는 느낌. 이 영화는 그 울림의 여운을 혀끝으로 음미하면서 우연찮게 집어든 것이었다.

    영화를 말할 때 줄거리를 요약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가장 간단한 방법이지만 때로는 김빠진 맥주처럼 맛없게 만들어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이렇게 독특하고 파격적인 영상을 지닌, 그리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줄거리가 아닌 영상 속에 숨어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주요 등장인물들 네 명이 서서히 마약에 중독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레퀴엠은 아주 단순하고 상투적인 스토리 라인을 따르고 있어서 줄거리만으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외로움 속에 홀로 늙어가는 여자 사라와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녀의 아들 해리, 집은 부유하지만 삶의 방향도 목적도 없는 해리의 여자친구 마리온, 그리고 해리의 친구 타이론. 이들 네 명이 엮어가는 비극적이고 암울한 사중주는 왜곡되거나 분할된 화면, 반복적으로 빠르게 교차하는 영상들을 통해 구체화된다. 그중에서도 계속 되풀이되면서 보여지는 약물 복용장면은 샘플링이나 콜라쥬, 몽타주 기법이 적절하게 사용되면서 우리에게 약물 복용자의 체험에 동참하게 만들고 있다.

    이 영화가 만약 훈계조로 마약의 위험성을 알리려 했다면, 즉 좀 더 객관적으로 마약 복용자들을 바라보았더라면 우리는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스스로 마약 중독자가 된 것처럼 화면 속으로 빠져들게 되며, 영상은 갈수록 고통스러워져 보는 일 자체가 고문처럼 끔찍한 일이 되고 만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사라가 병원에서 전기충격 치료를 받는 장면이나 마리온이 약을 위해 음란파티에서 몸을 파는 장면, 해리의 한쪽 팔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 장면들은 눈을 감고 싶어질 정도로 끔찍하다. 숨돌릴 틈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지는 융단폭격 같은 영상들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마약은 이렇게 나쁜 것이니 하지 마시오’ 물론 그렇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은 ‘하지 말라’는 경고, 훈계보다 더 무섭다. 그러나 중독자들의 이 금단현상을 보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그 밑바닥에 깔려있는 고독하고 방향키도 없으며 무의미한 인생들을 보는 일일 것이다.

    미망인 사라가 마약 성분의 다이어트약에 중독돼 덜그덕거리는 아래턱으로 말하는 장면(« ...난 이제 돌봐야 할 사람도 없쟎니 ? 네 아빤 돌아가시고 넌 따로 살고. 청소도 음식도 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어... 난 그 TV쇼에 나가야만 해. 네 자랑도 하고 네 아빠 얘기도 해야지... »)이나 해리의 친구 타이론이 엄마의 따뜻한 속삭임이 들려오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들을 보는 일은 고통스럽고 쓸쓸하다.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이들의 자기확인은 중독을 통한 환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사라의 ‘빨간 드레스’는 행복했던 지난 시절에 대한 레퀴엠이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현재의 자기 모습을 다시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는 요술 방망이이다. 그것이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아는 우리는 사라를 보면서 고통스럽다.

    해리와 마리온이 부표 같은 인생에 몸을 던져 섹스하듯이, 그렇게 어디엔가에 몸과 정신을 던지지 않으면 현실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을 ‘영화적’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은 오늘 우리의 삶이 바로 그렇게 때문이다. 현실이 이토록 밋밋하고 암울할진대, 어찌 중독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랴. 비단 약물 뿐만이 아닌, 커피나 담배, 일, 여자 혹은 남자, 혹은 사랑이라는 허상, 요리나... 기타 행위하고 보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에 우리는 중독되면서 살아간다. 어떤 식으로든지 현실에 기여할 수 있는 중독이라면 ‘마니아’라는 좋은 별칭으로 불러도 좋으리라. 그러나 영혼을 팔아야 하는 마약 중독만큼은 되돌이키기도, 빠져나오기도, 현실 속으로 복귀하기도 어렵다. ‘레퀴엠 ’의 주인공들은 어찌 되었던가. 그들은 현실과 꿈을 맞바꾼 대신 초점 없이 흐릿한 눈과 몽롱한 정신, 윤간당하는 육체를 얻었다. 육체는 감각적 쾌락에 맡긴 대신 정신은 사지가 뜯기우는 저승의 길목에 두고 온 셈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시작과 끝은 고리의 양 끝처럼 펼쳐졌다가 마침내 하나로 맞닿는다. 전기충격 치료를 받는 사라, 몸을 팔고 약을 얻어온 마리온, 철창에 갇혀 피폐해진 타이론, 그리고 썩은 팔을 잘라내고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해리는 평온한 모습( !)으로 잠을 잔다. 모태 속 태아처럼 옆으로 돌아누워 웅크린 모습으로. 잠을 자는 이들은 어린 아기들처럼 죄없고 순수해보인다. 영화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이 아릿했던 곳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누군들 죄가 있겠는가. 이들은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과 꿈, 무기력, 혹은 무의미 등에 그들의 삶을 먹혀버린 가여운 희생양일 뿐이다. 끝내 현실 속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리는 (꿈 속으로 도피하는) 이들, 이 잠이야말로 영화 속에서 그려진 가장 편안하고 아늑한 휴식처이다.

    누군가가 « 이 영화 두 번 보지는 못하겠다 »고 말했었다. 장면장면이 섬찟해, 보면서 고통스럽다고. 그러나 « 한번은 꼭 봐야 할 영화 »라고 그 누군가는 덧붙였고, 나도 거기에 동조하였다. 영화가 주는 여운도 그렇지만 잔혹한 동시에 아름다운 영상미만으로도 볼 이유는 충분하다. 거기에다 눈을 홀리는 영상들에 너무 빠져들지만 않는다면 그 영상들 뒤에 자리한 다른 요소들을 음미해볼 수도 있다. 삶은 우울하고 고독하며 또한 현실은 몽상과 꿈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삶의 가치란 것이 다만 그 빛나고 허망한 잠깐의 순간에 녹아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미 포기했는가 ?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아니다. 해리가 그리는 아름다운 마리온은 이미 그 자리에 없지만 우리의 마리온은 아직 떠나지 않았다.

 ** 레퀴엠이란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 또는 '죽은 이의 혼을 달래기 위한 노래'로 풀이되는 카톨릭 교회의 예식용 음악이다. 진혼곡, 또는 진혼미사곡으로 번역되어 쓰이기도 하는데 이 말은 라틴어 입당송(入堂頌)인 미사곡 <레퀴엠>의 첫 마디가 “requiem(안식을…)”으로 시작되는 데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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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참 평화 있을지어다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샤인’

천재들의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늘 흥미를 동하게 한다. 더욱이 그러한 천재성이 삶의 다른 편에 감추어져 있는 고통(극심한 고독이나 정신적 방황, 질병 등)과 동행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취화선’에서 화가 장승업은 지독한 술꾼이었고 ‘뷰티풀 마인드’의 수학천재 존 내쉬 역시 노년에 노벨상까지 수상했지만 정신병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비범하지만 그에 준할 만한 정신적, 신체적 결함을 지니고 있었던 천재들. 그리고 그러한 고통 속에서 꽃피워진 그들의 예술과 사랑, 학문적 업적들. 영화 ‘샤인’도 이 구도 안에 들어가 있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천재들의 일화가 극단으로 향해있는 예가 대부분인지라 (그래야 보통 사람들의 호기심이 더하지 않겠는가) 이 영화 ‘샤인’의 주인공도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천재의 조건을 흡족하게 만족시킨다. 자기만의 세계에 살면서 일상사에서도 돌출적인 행동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못하는 외골수적인 음악천재. 피아노 앞에서 연주할 때만 빼고 그는 심약한 성격에 말도 횡설수설하며 정신병까지 갖고 있다. ‘데이빗 헬프갓’ 그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나는 고양이야, 고양이…” 한 남자의 중얼거리는 옆모습. 그 뒤를 이어 축축하게 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 허름한 롱코트에 빗물로 얼룩진 안경을 걸쳐쓰고서 한 남자가 우산도 없이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이제 막 문을 닫으려는 한 바(Bar)를 발견하고서 다가드는 남자... 이렇게 영화는 시작된다. ‘데이빗 헬프갓’이라는 실존하는 현역 피아니스트의 일대기를 영상화 한 이 영화는 그 화려한 수상경력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시작부터 범상치 않은 느낌을 전해준다. 논픽션 실화라는 것, 그래서 실제 인물의 삶과 얼마나 일치하는가 등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지만, 그것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 영화는 아름다운 영상과 영화 전편에 흐르는 명곡들, 주인공 역을 맡은 제프리 러쉬의 명연기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던 때는 몇 년 전이었다. 오래 전이지만 몇몇 장면들은 너무도 생생하여 두번째의 관람을 망설이게 했다. 그러나 다시 읽을 때마다 감상이 달라지는 책이 있듯 좋은 영화도 되풀이해 보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기쁨이 있다. ‘샤인’의 두번째 감상으로 내가 찾아낸 것은 주인공 헬프갓의 어머니와 그의 여자 형제들이었다. 내 어설픈 기억력 탓이라 할 수 밖엔 없지만 나는 헬프갓이 일찍 어머니를 잃고 독자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이 영화에서 어머니의 존재란 밥 해주고 빨래하고 집안을 청소하는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미국 유학을 권유하러 음악선생이 헬프갓의 집에 들렀을 때도 헬프갓의 어머니는 시선을 외면한 채 그저 “그건 애아버지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라고만 한다. 헬프갓의 여자형제들도 어린 시절 그와 함께 놀았다는 한 문장으로 족하다. 이들은 마치 그림자 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인물들과도 같다.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의 축이 헬프갓과 그의 아버지 피터를 중심으로 해서 돌고 있으니만큼 어머니와 여자형제들의 역할이 빛을 잃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영화의 기술적 측면에서가 아닌 실제의 어머니가 그렇게 무력했다면 헬프갓의 어머니 역시 헬프갓의 정신병력에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권위적인 사랑법 밖에는 몰랐던 부성(父性)을 모성이 감싸안지 못했으니 말이다.

    헬프갓 아버지 ‘피터’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이 영화를 지탱하는 힘일지도 모르지만, 어린 헬프갓에게는 치명적인 사랑이었다. “나만큼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라고 재차 못박듯 이야기하는 피터의 말은 주문처럼 ‘그러니까 넌 내게로 돌아와야만 한다’는 말로 들린다. 세상의 모든 아들들이 그러하듯 어린 헬프갓에게도 그의 아버지가 최상의 모델이자 ‘힘있고 강한 사람’으로서의 표본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터, 더욱이 아버지는 영원한 그의 음악선생이 아닌가. “이겨야만 하는 거야. 힘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살 수 있어. 그렇지 않으면 벌레처럼 밟혀 죽어” “힘있는 사람? 아버지처럼?” 나찌에게 가족이 죽임을 당한 피터에게 있어 강한 자가 살아남을 수 있고 그러자면 경쟁에서 이겨야만 한다는 결론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또한 그토록 하고 싶었던 바이올린을 아버지의 반대로 못하게 되었던 자신과는 달리 헬프갓은 자신처럼 열심히 후원해주고 가르쳐주는 아버지를 만났으니 얼마나 ‘운 좋은 녀석’인가 말이다. 헬프갓 역시 유학 문제가 거론되기 전까지는 아버지 피터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한다. 권위적이었든 강압적이었든 그 방법 여하를 떠나 헬프갓에 들인 피터의 공력을 생각하자면, 타고난 재질이 있었다고 해도 헬프갓의 음악적 성과를 이끌어낸 동력은 ‘아버지’였다고 말할 만 하다.

    그런데 이 천재적 음악성을 지닌 행운아가 어쩌다가 정신병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던가. 영화에서는 그 이유를 난해하기로 유명하다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 탓으로 돌렸지만, 마(魔)의 음악 탓을 하기보다는 역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출하듯이 유학을 갔지만 아버지와의 단교(斷交)로, 심리적 연결고리가 끊어짐으로써 그 공허감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해버린 것이다. 여기에 더해 헬프갓의 유일한 정신적 친구였던 여류 소설가의 죽음이, 물병 속의 물을 넘치게 한 한 방울의 물처럼 그의 정신을 흘러넘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헬프갓의 음악에의 중압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바 없으나 그것이 입구가 막혀버린 항아리, 혹은 뚜껑이 꼭 닫힌 채 끓고 있는 냄비와 같았다면 어떤 식으로든 넘치고 흘러 깨어져버렸을 것이다. 천재성과 정신병이 서로 호환될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 해도 극단으로 흐르는 정신이 친구로 택하기 쉬운 것이 정신병이 아닌가.

    토막토막 끊어진 낱말들로 알지 못할 말들을 쉬지않고 중얼거리고 다니며 집안을 온통 어지럽히고 엄숙해야 할 교회에서는 자신을 돌봐주는 베릴부인의 가슴을 더듬는 헬프갓,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니지만 그 정신질환 속에서도 피아노 앞에만 앉으면 자신있는 모습이 된다. 어디에서건 음악만 있으면 아이처럼 행복해하고 천진해지는 그. ‘샤인’을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단박에, 귀에 이어폰을 꽂고 덤블링을 하던 헬프갓이 듣고 있던 음악을 기억할 것이다. 비발디의 ‘세상엔 참 평화 없어라’, 물이 나오지 않는다며 목욕을 하다말고 뛰쳐나와 팬티바람에 외투만 걸친 채 덤블링을 하는 장면에서 흐르던 곡이다. 푸르디 푸른 하늘 아래 두 팔을 벌리고 그토록 해맑게 웃으며 뛰어오르는 그를 보고 초면의 점성술사 ‘길리언’이 마음을 열고, 그렇게 그는 구원받는다. 사회도, 가족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 중년여인의 포옹이 해낸 셈이다. 길리언과 결혼하여 마음과 정신의 안정을 되찾고 마침내 성공적인 재기 콘서트를 여는 헬프갓.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주문과도 같은 말에서 해방된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폴란드계 유태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한 음악적 천재아가 어떻게 그 삶과 음악을 완성해가는가 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보다 폭넓은 질문들을 숨기고 있다. 예술이나 사랑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혹은 구원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과도하고 강압적인 애정은 상대를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는가, 진정한 자유와 기쁨은어디에서 오는가… . 이에 대한 대답은 영화를 보는 이들 각자가 다 다르겠지만 통틀어 한 가지의 공통분모는 있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그것이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동기요 기쁨일 것이다. 찾기 쉽지 않다 해도 세상에 어찌 참 평화가 없을 것인가. 아니 평화와 사랑이란 누구나의 마음 속에 이미 깃들어 있는 것, 구원이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서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 집안 풀장에서 수영을 하는 헬프갓은 물 위에 라벨의 악보들을 둥둥 띄워놓고 그 속에서 자신도 하나의 악보인 양 헤엄을 치고 있다. 그 푸른 물빛, 그 자유로운 부유(浮遊)에 멈칫 가슴이 떨렸다. 마음 속의 그리고 몸 속의 질병으로부터 우리는 언제 그토록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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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4-29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영화 음악도 좋더군요. 저도 재미게 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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