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애’로 하나 된 우리!
“아기 낳은 임산부들은 모두 평등하기도 하지. 잘 살든 못 살든, 잘 생겼든 못 생겼든, 나이가 몇 살씩 차이날지언정 서로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이 뒤뚱거리며 아파하고 또 똑같이 아기를 보고 경이로와하면서 우리는 마치 자매들처럼 우애로운 관계가 된다.”
2001년 3월 29일의 일기 중 한 부분이다. 나는 3월 25일에 아기를 낳았는데 수술을 했던지라 며칠간을 병원에서 지냈다. 이 일기는 퇴원하기 전날 병원 로비에 앉아 쓴 것인데, 푸른 하늘에 따뜻한 햇볕이 로비에 가득 쏟아지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아기가 태어나고 내가 애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감격스럽다기보다 신기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고나 할까.
병원 생활 역시 내겐 신기한 경험이었다. 남들처럼 무통주사도 맞고 누워있었지만 나는 얼굴이나 손발도 거의 붓지 않았고 몸도 가벼운 편이었다. 이틀째부턴 병원 안을 곧잘 돌아다니면서 다른 산모들을 기웃거리곤 했다. 똑같이 화장기 없는 부스스한 얼굴, 배도 볼록 나오고 펑펑한 옷을 입고, 아파서 허리도 제대로 못 펴고 다닌다. “마치 펭귄 같아.” 속으로 생각하면서 웃음이 나왔다. 나도 그 펭귄 부대 속의 한 마리 펭귄이었고, 그 속에서 내가 느낀 것은 편안한 자매애였다. 우리는 하나였고 모두 한 마음이었다. 그것은 월드컵 때 ‘오! 대한민국’을 외치던 길거리 행진보다도 더 진했고 동질스러웠다.
“가슴 멍울이 아직도 너무나 아파요.”
“어머나, 그래요? 그럼 그럴 땐 이렇게 해 보세요...”
“여기 딸기 좀 드세요. 엄마가 사 오셨는데...”
“아니 이 시간에 왜 여기 있어요? 신랑 기다려요?”
그 즈음의 따뜻한 날씨만큼이나 정겹게 하나가 되었던 병실 생활이었다.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주치의 선생님에게 인사를 못했다는 것이다. 내 주치의 선생님은 여의사였는데, 진찰을 받으러 병원에 늘 같이 다니던 애아빠도 나도 그 분이 임신 중이란 사실을 몰랐다. 나이도 있고 또 워낙 몸집이 있는 분이라 그저 배가 나온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병실에 오시는 선생님이 바뀌어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애를 낳고 병실에 누워계신다고 했다. 그 분은 나보다 며칠 뒤에 애를 낳았다. 그런 줄 알았다면 나는 진찰실에 애아빠를 대동하지도, 의사 선생님께 이런저런 엄살 섞인 말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사차, 문안차 병실 앞에 갔는데 가족들이 있으니 나중에 오라고 수간호사가 말한다. 데면데면하지 못한 탓에 몇번 서성거리다가 끝내 들어가지 못했다. 같은 임산부였다는 사실보다는 의사 선생님이라는 사실이 아마도 더 무겁게 느껴졌었나 보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쾌하고 즐거운 펭귄부대의 한 대원으로 끼워넣을 수도 있었을 것을.
어쨌거나 이때의 병실 생활은 ‘우리’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보지 않았던 내게 기억할 만한 시간이었다. ‘나’를 떠나 ‘우리’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고 친자매 사이를 떠나 더욱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자매애’란 것에 대해 그때 처음으로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보다 농도는 옅을지언정, 또한 여성으로서 제한적일지언정 나는 이제 그 자매애로 아래층 윗층 아이엄마들을 만나고 있다. 똑같이 아이를 키우고 또 똑같이 나이들어감을 서로 위로하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동질의 고민과 희망 속에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