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참 평화 있을지어다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샤인’

천재들의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늘 흥미를 동하게 한다. 더욱이 그러한 천재성이 삶의 다른 편에 감추어져 있는 고통(극심한 고독이나 정신적 방황, 질병 등)과 동행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취화선’에서 화가 장승업은 지독한 술꾼이었고 ‘뷰티풀 마인드’의 수학천재 존 내쉬 역시 노년에 노벨상까지 수상했지만 정신병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비범하지만 그에 준할 만한 정신적, 신체적 결함을 지니고 있었던 천재들. 그리고 그러한 고통 속에서 꽃피워진 그들의 예술과 사랑, 학문적 업적들. 영화 ‘샤인’도 이 구도 안에 들어가 있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천재들의 일화가 극단으로 향해있는 예가 대부분인지라 (그래야 보통 사람들의 호기심이 더하지 않겠는가) 이 영화 ‘샤인’의 주인공도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천재의 조건을 흡족하게 만족시킨다. 자기만의 세계에 살면서 일상사에서도 돌출적인 행동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못하는 외골수적인 음악천재. 피아노 앞에서 연주할 때만 빼고 그는 심약한 성격에 말도 횡설수설하며 정신병까지 갖고 있다. ‘데이빗 헬프갓’ 그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나는 고양이야, 고양이…” 한 남자의 중얼거리는 옆모습. 그 뒤를 이어 축축하게 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 허름한 롱코트에 빗물로 얼룩진 안경을 걸쳐쓰고서 한 남자가 우산도 없이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이제 막 문을 닫으려는 한 바(Bar)를 발견하고서 다가드는 남자... 이렇게 영화는 시작된다. ‘데이빗 헬프갓’이라는 실존하는 현역 피아니스트의 일대기를 영상화 한 이 영화는 그 화려한 수상경력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시작부터 범상치 않은 느낌을 전해준다. 논픽션 실화라는 것, 그래서 실제 인물의 삶과 얼마나 일치하는가 등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지만, 그것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 영화는 아름다운 영상과 영화 전편에 흐르는 명곡들, 주인공 역을 맡은 제프리 러쉬의 명연기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던 때는 몇 년 전이었다. 오래 전이지만 몇몇 장면들은 너무도 생생하여 두번째의 관람을 망설이게 했다. 그러나 다시 읽을 때마다 감상이 달라지는 책이 있듯 좋은 영화도 되풀이해 보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기쁨이 있다. ‘샤인’의 두번째 감상으로 내가 찾아낸 것은 주인공 헬프갓의 어머니와 그의 여자 형제들이었다. 내 어설픈 기억력 탓이라 할 수 밖엔 없지만 나는 헬프갓이 일찍 어머니를 잃고 독자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이 영화에서 어머니의 존재란 밥 해주고 빨래하고 집안을 청소하는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미국 유학을 권유하러 음악선생이 헬프갓의 집에 들렀을 때도 헬프갓의 어머니는 시선을 외면한 채 그저 “그건 애아버지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라고만 한다. 헬프갓의 여자형제들도 어린 시절 그와 함께 놀았다는 한 문장으로 족하다. 이들은 마치 그림자 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인물들과도 같다.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의 축이 헬프갓과 그의 아버지 피터를 중심으로 해서 돌고 있으니만큼 어머니와 여자형제들의 역할이 빛을 잃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영화의 기술적 측면에서가 아닌 실제의 어머니가 그렇게 무력했다면 헬프갓의 어머니 역시 헬프갓의 정신병력에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권위적인 사랑법 밖에는 몰랐던 부성(父性)을 모성이 감싸안지 못했으니 말이다.

    헬프갓 아버지 ‘피터’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이 영화를 지탱하는 힘일지도 모르지만, 어린 헬프갓에게는 치명적인 사랑이었다. “나만큼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라고 재차 못박듯 이야기하는 피터의 말은 주문처럼 ‘그러니까 넌 내게로 돌아와야만 한다’는 말로 들린다. 세상의 모든 아들들이 그러하듯 어린 헬프갓에게도 그의 아버지가 최상의 모델이자 ‘힘있고 강한 사람’으로서의 표본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터, 더욱이 아버지는 영원한 그의 음악선생이 아닌가. “이겨야만 하는 거야. 힘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살 수 있어. 그렇지 않으면 벌레처럼 밟혀 죽어” “힘있는 사람? 아버지처럼?” 나찌에게 가족이 죽임을 당한 피터에게 있어 강한 자가 살아남을 수 있고 그러자면 경쟁에서 이겨야만 한다는 결론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또한 그토록 하고 싶었던 바이올린을 아버지의 반대로 못하게 되었던 자신과는 달리 헬프갓은 자신처럼 열심히 후원해주고 가르쳐주는 아버지를 만났으니 얼마나 ‘운 좋은 녀석’인가 말이다. 헬프갓 역시 유학 문제가 거론되기 전까지는 아버지 피터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한다. 권위적이었든 강압적이었든 그 방법 여하를 떠나 헬프갓에 들인 피터의 공력을 생각하자면, 타고난 재질이 있었다고 해도 헬프갓의 음악적 성과를 이끌어낸 동력은 ‘아버지’였다고 말할 만 하다.

    그런데 이 천재적 음악성을 지닌 행운아가 어쩌다가 정신병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던가. 영화에서는 그 이유를 난해하기로 유명하다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 탓으로 돌렸지만, 마(魔)의 음악 탓을 하기보다는 역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출하듯이 유학을 갔지만 아버지와의 단교(斷交)로, 심리적 연결고리가 끊어짐으로써 그 공허감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해버린 것이다. 여기에 더해 헬프갓의 유일한 정신적 친구였던 여류 소설가의 죽음이, 물병 속의 물을 넘치게 한 한 방울의 물처럼 그의 정신을 흘러넘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헬프갓의 음악에의 중압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바 없으나 그것이 입구가 막혀버린 항아리, 혹은 뚜껑이 꼭 닫힌 채 끓고 있는 냄비와 같았다면 어떤 식으로든 넘치고 흘러 깨어져버렸을 것이다. 천재성과 정신병이 서로 호환될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 해도 극단으로 흐르는 정신이 친구로 택하기 쉬운 것이 정신병이 아닌가.

    토막토막 끊어진 낱말들로 알지 못할 말들을 쉬지않고 중얼거리고 다니며 집안을 온통 어지럽히고 엄숙해야 할 교회에서는 자신을 돌봐주는 베릴부인의 가슴을 더듬는 헬프갓,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니지만 그 정신질환 속에서도 피아노 앞에만 앉으면 자신있는 모습이 된다. 어디에서건 음악만 있으면 아이처럼 행복해하고 천진해지는 그. ‘샤인’을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단박에, 귀에 이어폰을 꽂고 덤블링을 하던 헬프갓이 듣고 있던 음악을 기억할 것이다. 비발디의 ‘세상엔 참 평화 없어라’, 물이 나오지 않는다며 목욕을 하다말고 뛰쳐나와 팬티바람에 외투만 걸친 채 덤블링을 하는 장면에서 흐르던 곡이다. 푸르디 푸른 하늘 아래 두 팔을 벌리고 그토록 해맑게 웃으며 뛰어오르는 그를 보고 초면의 점성술사 ‘길리언’이 마음을 열고, 그렇게 그는 구원받는다. 사회도, 가족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 중년여인의 포옹이 해낸 셈이다. 길리언과 결혼하여 마음과 정신의 안정을 되찾고 마침내 성공적인 재기 콘서트를 여는 헬프갓.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주문과도 같은 말에서 해방된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폴란드계 유태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한 음악적 천재아가 어떻게 그 삶과 음악을 완성해가는가 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보다 폭넓은 질문들을 숨기고 있다. 예술이나 사랑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혹은 구원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과도하고 강압적인 애정은 상대를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는가, 진정한 자유와 기쁨은어디에서 오는가… . 이에 대한 대답은 영화를 보는 이들 각자가 다 다르겠지만 통틀어 한 가지의 공통분모는 있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그것이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동기요 기쁨일 것이다. 찾기 쉽지 않다 해도 세상에 어찌 참 평화가 없을 것인가. 아니 평화와 사랑이란 누구나의 마음 속에 이미 깃들어 있는 것, 구원이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서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 집안 풀장에서 수영을 하는 헬프갓은 물 위에 라벨의 악보들을 둥둥 띄워놓고 그 속에서 자신도 하나의 악보인 양 헤엄을 치고 있다. 그 푸른 물빛, 그 자유로운 부유(浮遊)에 멈칫 가슴이 떨렸다. 마음 속의 그리고 몸 속의 질병으로부터 우리는 언제 그토록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인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waho 2004-04-29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영화 음악도 좋더군요. 저도 재미게 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