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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놀아준다는 것, 아이와 논다는 것

다른 엄마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겠지만 나 역시 아이와 놀면서 어떻게, 뭐하고 놀지가 늘 고민거리였다. 그러니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재미있게 놀면서 가르치는 놀이방법을 가르쳐준다니! 

급한 마음에, 택배 아저씨에게서 책을 받아들자마자 앞장의 책소개와 프롤로그를 휘리릭 읽어내려갔다. 마음에 찔리는 말들이 눈에 들어온다. 


'훌륭한 메니저로서 자녀를 끌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자녀가 잘 따라오지 못하면 우리 부모들은 자녀를 다그치고 화를 내고 실망하고 좌절하곤 합니다. 자녀가 미숙하게 행동하며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잘 따라오지 못할 때, 그래서 자녀가 실망하고 어려움에 빠지게 될 때 우리 부모들은 함께 좌절하고 실망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녀를 '도와줄 것인가'를 과학적으로 고민하며 마음을 다해 자녀와 '함께 해야' 합니다.' (본문 인용)   


요즘 특히 초등 저학년인 큰아이에게 많이 야단치고 잔소리하는 중이라, 이 대목을 읽자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들었다. 아이가 학교 숙제도, 학습지 공부도 잘 했으면 싶고, 운동도 열심히 했으면 싶고, 돌쟁이인 동생도 잘 돌봐줬으면 싶고... 내가 생각해도 큰아이에게 원하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이다. 원하는 것은 많은데 아이가 잘 따라주지 않으니 화를 내는 일이 다반사다. 아이의 특성과 상황에 따라 아이를 보지 못하고 내 욕심대로 아이를 움직이려 했으니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물론 <집중력을 높이는 유아놀이>라는 이 책은, 0세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인 6,7세까지 재미있게 놀면서 익히고 배우는 놀이학습법을 제안해주고 있는 책이라, 초등 2학년인 우리집 큰아이에게는 맞지 않다. 나는 이 책을 큰아이보다는 돌쟁이인 둘째와 놀아주기 위해 신청하였고, 책을 읽어본 오늘 바로 놀아줄 놀이도 찜해놓았다. 

하지만 놀이만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놀이가 필요한지, 부모로서 우리는 아이들과 놀아줄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되는지를 같이 설명하고 있어, 큰아이 작은 아이 할 것없이 아이를 대하는 내 자세를 점검하게 만든다. 


그럼 책장을 넘겨보자. 책은 6개의 part와 하나의 부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파트 하나하나는 영유아의 인지발달 단계에 따라 3-12개월, 12-24개월, 3-5세, 6-7세, 기타 집중력과 기억력을 발달시키는 인지놀이와 읽기-쓰기-셈하기 눙력을 발달시키는 인지놀이 등으로 세분되었다. 그리고 각 파트별로 소제목이 있고 그 소제목에 따른 유용한 놀이법을 제시해주고 있다.

아이와 놀이를 한다고 해도 왜 그 놀이가 좋은지, 그 놀이가 아이에겐 어떤 영향을 줄지 잘 알지 못하고 그저 놀아주기 위해 노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개월수에 따라 인지해야 할 특성들을 알려주고 그에 맞는 놀이법을 알려준다. 예를 들면 12-24개월에서는 '소근육의 발달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소제목으로 그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준 뒤에 그에 따른 인지놀이(소근육을 발달시키는 책장 넘기기 놀이)를 소개해주는 식이다. 


이 책으로 나와 우리 아이들이 모든 걱정에서 놓여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여러모로 스트레스를 덜게 될 것은 확실하다. 큰아이는 '해야 할 일'만을 강조하는 엄마의 잔소리 스트레스에서 조금이라도 놓여날 것이고, "놀아줘, 놀아줘!" 하며 날마다 치마자락에 붙는 작은 녀석은 엄마의 노력으로 이제 조금 더 재미있어질 것이다.

아... 책을 뒤적거리며 엄마라는 이름은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한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엄마 스스로가 커져가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아이를 보는 마음의 눈이 동시에 커져가야 한다는 것이기에 오늘도 엄마로서의 나를 스스로 반성하고 저울질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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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일기라고도 할 수 없다.

... 어이구 한 줄 썼는데 또 일이 생기네... 이따가 보자, 페이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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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개화한 봄이다.

눈만 돌리면 여기저기서 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어 어지럽다.

우리 동네엔 특히 철쭉들, 무더기로 모여앉아 색색깔의 꽃들을 피워내고 있다.

그중에서도 흰 철쭉꽃...

나는 그 몽상적인 하얀 색에 취해 돌아간다. 돌아가고 또 돌아간다.

마음을 얼얼하게 만드는 네가 싫어, 철쭉꽃아. 그렇게 고웁지 마라, 그렇게 부시지 마라.

4월이, 아무도 모를 이 계절이

내게는 눈부신 이 하얀 철쭉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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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5-01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쭉이 시들어 가는 걸 보니 봄이 끝나가는구나 싶어요. 울 아파트 단지에 철쭉을 많이 심어서 봄이면 색색이 너무나 아름답거든요. 남은 봄 맘껏 즐기시길...

소호 2004-05-01 0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도 예쁘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던 철쭉에 (철쭉이 성장盛裝한 여자라면 아마도 이 말에 화가 나겠지만) 올해는 제가 반했네요. 특히 하얀 철쭉에요. 무더기로 피어있는 하얀 철쭉꽃에 머리를 파묻고 있으면 머리속도 금세 하얘지는 것 같아요.
 

‘우리’가 아닌 그녀

  전철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눈을 떴다. 나는 한양대 사회교육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다. 슬쩍 눈을 뜨고는 마치 안 졸았던 사람처럼 태연하게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미 시외로 빠져나온 뒤라 그런지 승객도 별로 없이 한산하다. 맞은편에 구경하기 좋은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말 심하게 입을 벌리고 자는 여자, 게다가 고개까지 뒤로 젖히고 있다. 그 여자는 자다가 한번씩 깨어 주위를 둘러보기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주위 시선에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세번째 건너 옆자리에 앉아 있었던 여자. 무릎을 건너 건너서 시선을 옮겨갔던지라, 그녀의 얼굴을 보기 전에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스포츠센터 가방이었다. 가방끈을 비롯해 전체적으로 낡고 닳았지만, 재질과 디자인은 제법 세련된 가방으로 스포츠센터에 출입하던 누군가의 것이었으랴 싶었다.

  원래의 주인이 다른 사람이었으리라 추측하는 것은, 그 가방을 품에 안고 있는 여자의 차림새가 노숙자의 모양새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군청색 낡은 점퍼에 짤막한 검은색 바지, 거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통굽신발, 그리고 손질하지 않은 긴 머리카락과 화장기 전혀 없는 부스스한 얼굴은 그녀가 노숙자이든 아니든간에 주위 사람들과는 다른 울타리에 속한 사람임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가 아니었다. 고개를 꺾고 입도 벌리면서 자는 여자는 ‘우리’ 중 하나인지라 사람들이 친근하게 웃었지만, 그녀는 우리의 범주가 아니었다. 그녀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몸을 반대쪽으로 밀착시켜 그녀의 몸에 닿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고, 다른 승객들 역시 그녀를 쳐다보거나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마치 가까이 오는 것을 막는 둥근 동그라미가 그녀 주변에 둘러쳐져 있는 듯 했다.


  나는 그녀를 한번씩 건너다보았다. 그녀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의식하지 않는다면 굳이 바라보지 않으려 애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도 나를 한번씩 건너다보았다. 별 것 아닌 그저 무심한 눈빛의 교환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이 어느 정도의 연대감이나 최소한의 위안이라도 줄 수 있기를 나는 마음속으로 희망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과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정류장을 더 스쳤을 무렵, 할머니 한 분이 아이를 데리고 올라탔다. 나는 자리를 양보하고 바로 맞은편인 그녀 앞으로 가서 섰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에게서는 노숙자들에게서 흔히 풍기는 그런 냄새도 나고 있었다. 그녀 옆자리에 앉았던 세련된 중년 여자는 문 쪽에 자리가 나자 부리나케 그 자리로 몸을 옮겼고, 이제 그녀 옆자리엔 친구 사이인 듯 보이는 두 여자가 서로 몸을 꼭 붙여 앉아있었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들을 바라보면서, 만약 이 허름한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부자가 되어 화려한 옷차림을 한다면 이 속에 끼일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노숙자 세계에도, 부자들의 세계에도 끼이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어 어쩌면 지금보다 더 초라하고 외로워질 것이다.  


  내릴 때가 가까워져 왔다. 나는 여전히 표정 없는 그녀를 일별하고 전철 밖으로 나왔다. 상큼한 봄바람이 몸과 마음을 가볍게 털어준다.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역 밖으로 나와 자전거 주차장으로 향했다. 전철역에서 집까지는 자전거로 15분. 산들바람을 만끽하면서 천천히 패달을 밟는다. 이제 허름한 그녀는 내 머리 속에 사라지고 없다. 내가 그녀에게 잠시나마 가졌던 관심은 그녀의 삶에 어떤 참견도 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질 뿐이라는 것을, 내 삶 속에 그녀를 들여놓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질 뿐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무표정한 눈빛이 변하지 않았던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녀는 내 얄팍한 선심이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나는 왜 더 이상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일까. 그저 지저분한 것이 싫어서? 아니면 내 삶도 버거운데 남의 버거운 삶까지 관여하는 것이 싫어서? 모르겠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의 표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를 벗어난 이의 표정을 갖고 있었던 그녀. 어쩌면 나는 그녀가 아니라 그 표정이, 우리의 숨은 얼굴일 수도 있는 그 표정이 두려운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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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애’로 하나 된 우리! 

  “아기 낳은 임산부들은 모두 평등하기도 하지. 잘 살든 못 살든, 잘 생겼든 못 생겼든, 나이가 몇 살씩 차이날지언정 서로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이 뒤뚱거리며 아파하고 또 똑같이 아기를 보고 경이로와하면서 우리는 마치 자매들처럼 우애로운 관계가 된다.”

  2001년 3월 29일의 일기 중 한 부분이다. 나는 3월 25일에 아기를 낳았는데 수술을 했던지라 며칠간을 병원에서 지냈다. 이 일기는 퇴원하기 전날 병원 로비에 앉아 쓴 것인데, 푸른 하늘에 따뜻한 햇볕이 로비에 가득 쏟아지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아기가 태어나고 내가 애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감격스럽다기보다 신기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고나 할까.

 

  병원 생활 역시 내겐 신기한 경험이었다. 남들처럼 무통주사도 맞고 누워있었지만 나는 얼굴이나 손발도 거의 붓지 않았고 몸도 가벼운 편이었다. 이틀째부턴 병원 안을 곧잘 돌아다니면서 다른 산모들을 기웃거리곤 했다. 똑같이 화장기 없는 부스스한 얼굴, 배도 볼록 나오고 펑펑한 옷을 입고, 아파서 허리도 제대로 못 펴고 다닌다. “마치 펭귄 같아.” 속으로 생각하면서 웃음이 나왔다. 나도 그 펭귄 부대 속의 한 마리 펭귄이었고, 그 속에서 내가 느낀 것은 편안한 자매애였다. 우리는 하나였고 모두 한 마음이었다. 그것은 월드컵 때 ‘오! 대한민국’을 외치던 길거리 행진보다도 더 진했고 동질스러웠다.

  “가슴 멍울이 아직도 너무나 아파요.”

  “어머나, 그래요? 그럼 그럴 땐 이렇게 해 보세요...”

  “여기 딸기 좀 드세요. 엄마가 사 오셨는데...”

  “아니 이 시간에 왜 여기 있어요? 신랑 기다려요?”


  그 즈음의 따뜻한 날씨만큼이나 정겹게 하나가 되었던 병실 생활이었다.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주치의 선생님에게 인사를 못했다는 것이다. 내 주치의 선생님은 여의사였는데, 진찰을 받으러 병원에 늘 같이 다니던 애아빠도 나도 그 분이 임신 중이란 사실을 몰랐다. 나이도 있고 또 워낙 몸집이 있는 분이라 그저 배가 나온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병실에 오시는 선생님이 바뀌어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애를 낳고 병실에 누워계신다고 했다. 그 분은 나보다 며칠 뒤에 애를 낳았다. 그런 줄 알았다면 나는 진찰실에 애아빠를 대동하지도, 의사 선생님께 이런저런 엄살 섞인 말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사차, 문안차 병실 앞에 갔는데 가족들이 있으니 나중에 오라고 수간호사가 말한다. 데면데면하지 못한 탓에 몇번 서성거리다가 끝내 들어가지 못했다. 같은 임산부였다는 사실보다는 의사 선생님이라는 사실이 아마도 더 무겁게 느껴졌었나 보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쾌하고 즐거운 펭귄부대의 한 대원으로 끼워넣을 수도 있었을 것을.

 

  어쨌거나 이때의 병실 생활은 ‘우리’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보지 않았던 내게 기억할 만한 시간이었다. ‘나’를 떠나 ‘우리’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고 친자매 사이를 떠나 더욱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자매애’란 것에 대해 그때 처음으로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보다 농도는 옅을지언정, 또한 여성으로서 제한적일지언정 나는 이제 그 자매애로 아래층 윗층 아이엄마들을 만나고 있다. 똑같이 아이를 키우고 또 똑같이 나이들어감을 서로 위로하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동질의 고민과 희망 속에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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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4-29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첫 애 임신 중인데 님의 글 읽으니 왠지 좋네요. 같은 경험을 공유해서인지 요즘은 산후 조리원이나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아주 친해지더군요. 님의 글 너무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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