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失明) –낭만의 옷을 입다
어둠 속의 댄서
영화 속에서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이들이 종종 등장한다. 눈에 보이는 병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까지 포함시킨다면 아마도 모든 영화에서 병든 인물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삶이 완벽히 건강하지는 않은 것처럼 어떤 영화도 완벽히 밝지만은 않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가진 장애는 타피스트리의 무늬처럼 그들 자신의 삶 속으로 파고들어가 나름의 무늬를 만들어내고 명암을 조율한다. 명암의 대비가 뚜렷할수록 보는 이들에게는 더욱 극적으로 느껴지기 마련. 이 화려한 대비를 통해 영화의 재미와 감동도 배가된다.
<어둠 속의 댄서>도 이렇게 명암의 파동이 큰 영화 중 하나이다. 이야기 전개나 스토리 라인도 단순하고 등장인물도 많지 않지만 마치 흑백사진처럼 선명한 극적 구도로 주인공의 일탈적 삶을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불행한 요소들을 두루 갖췄다. 그녀는 돈 한 푼 없는 이민자로 공장의 일용직 노동자이며 아비 없는 아이를 하나 키우며 살고 있는 데다 시력마저 점차 잃어가고 있다. 그녀가 가진 것이라곤 두꺼운 안경 너머로 마냥 천진하게만 보이는 해맑은 얼굴 정도일까. 아니, 그녀에겐 아들이 있었다. 아비 없는 아이이므로 그녀에게 또 하나의 장애로 작용할 수도 있을 아이. 그러나 그 아이는 그녀에게 더없는 기쁨이며 자랑, 삶의 희망이었다. 그것은 그녀, 셀마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혀 불편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더욱 넓은 꿈의 장(場)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과 같다. 그녀의 치명적인 장애는 결국 그의 삶 자체를 파국으로 몰고가는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의 사랑을 더욱 강하게 해주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그녀, 셀마의 두꺼운 안경을 잠시만 벗겨보자. 영화는 셀마의 실명을 그녀 자신의 환상과 연결시켜 거의 낭만적인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지만 (나는 이미 보고 싶은 것들을 다 보았답니다. 빗방울과 장미꽃, 구리주전자와 크림색 양탄자... 지나온 과거와 미래도...) 그렇게 말하고 노래부르는 것이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눈이 조금이라도 나쁜 사람이라면, 그래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실명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실명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손으로 더듬어 짐작하고 소리를 들어 알 수 있을 정도의 부분적인 소통은 가능할지 몰라도, 정상적인 사람들과 자유로운 인간관계를 가지거나 마치 ‘조금 안 보이는’ 정도의 근시인 것처럼 세밀한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셀마는 정상적인 사람들도 잘못하면 손이 잘려나갈 수 있는 프레스 작업을 하고 있으며, 더듬거리는 몸가짐이 좀 불편해보일 뿐 장님이라서 크게 불편할 것도 없을 것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덩치 큰 기차도 잘 보이지 않는 셀마가 선로를 발로 더듬어가며 집으로 향하는 것은 관객의 긴장감을 유도해내기 위한 장치 정도가 아닐까. 프레스 작업도 하는데 땅을 울리며 다가오는 기차 정도야...) 게다가 영화 속에서는 셀마의 시력 정도가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어떤 장면에서는 거의 완전히 실명한 상태처럼 느껴지는가 하면 또다른 장면에서는 부분적인 실명 상태인가 생각되기도 한다. 주인공의 연기가 실감났던 것은 물론 뷔욕의 뛰어난 연기력 덕분이었겠지만 그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의 효과도 컸을 듯 하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장애의 고통과 그것의 극복과정이 아닌 이상 실제적인 표현은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실명’이란 것은 주인공의 예술(뮤지컬)에의 열정과 끈끈한 가족애를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배경으로 작용할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줄거리 전체를 휘두르는 장애로 부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고통스럽게 여겨지지 않는다. 아들의 눈 수술을 위해 재심청구도 거부하고 사형날짜만을 세고 있는 셀마에게 그의 남자친구, 제프가 묻는다.
« 진을 왜 낳았어요 ? 당신처럼 될 줄 알면서도... »
« 안아보고 싶어서... 내 품에 안아보고 싶어서요. »
관객은 눈물을 빼고 ‘실명’이라는 현실적 고통은 여기서 다시 낭만적 기운을 얻는다. 마침내 결말부분, 예정된 수순대로 셀마는 그녀의 목숨을 담보로 아들의 시력을 회복시킨다. 사형대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아들의 안경을 건네받고는 새롭게 솟구치는 사랑의 감정에 노래를 부르는 셀마. 그리고 그 순간 잘려나가는 필름처럼 툭 떨어지는 그녀의 생명.
시력은 사람이 가진 보물 중 가장 큰 보물이다. 영화 속 주인공이 목숨을 내걸고 아들의 시력을 찾아주려 했을 만큼. 그러나 여기 이 주인공은 스스로의 그 고통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초연하다. 초연할 뿐더러 그것을 뮤지컬에의 꿈으로 환치시켜 환상적으로 몰고가기조차 한다. 역시 영화이다. 그렇다면 아들이 감내해야 할 그만의 몫의 고통에 대해서도 그렇게 초연할 수는 없었을까. 그녀의 태도, 스스로의 고통은 감내할 수 있지만 아들의 실명을 막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불사하려는 그녀의 태도는 분명 감동적인 모성애의 표본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억지스런 느낌도 든다. 그녀는 « 난 자유로워요 »라고 노래부르지만 실제로는 그 장애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있는 불쌍한 신세인 것이다.
<어둠 속의 댄서>라는 제목에서처럼 이 영화는 주인공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추는 춤을 보여준다. 환상 속에서는 화려할지라도 현실 속에서는 스스로 소진해 타버리는 춤. 댄서는 그의 노래와는 달리 어둠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의 춤 역시 장애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울다가 깨어나 그녀가 보여준 춤을 잊는다. 춤을 추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둠 속에서 추는 춤을 현실로서 드러내지 못한 이상, 이 영화는 제목에서처럼 여전히 모호한 예술의 경계선에 서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