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놀이터 삼아
강신주 지음 / 문예당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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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는 보글보글 거품 일어나듯 생각이 끓어오르다가도 다 읽고나면 아무 말도 생각이 안 나는 그런 책이 있다. 말을 하려 해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할 지 막막해지는.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정말로 할 말이 없거나 나와 동떨어진 얘기여서가 아니라(그럴 때는 오히려 할 말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읽고있는 동안에 소화가 다 되어 그걸 새롭게 되새김질 하려 하니 도무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이 책은 소위 잘 나가는, 이력이 화려한(영문학 박사에 여성학 석사) 페미니스트 여성 저자의 에세이이다. <세계를 놀이터 삼아> 라는 제목이 저자의 삶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아래 부제로 단 '여자답게 살 것인가, 여자로 살 것인가'라는 문장이 저자가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하고싶은 말이라 할 수 있겠다. 저자는 그것, 즉 자신의 페니미즘적 주장을 자신이 유학중에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로써 풀어놓았다. 일반인에게 거부감을 먼저 일으키기 쉬운 '페미니즘'이란 단어가 그녀의 책에서 이토록 자연스럽게 읽힐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솔직담백한 글솜씨 영향도 있겠지만, 그녀가 그 단어를 하나의 주장이나 논리가 아닌 생활로써 이해하고 풀어놓았기 때문이다.

86년에 시작된 유학생활부터, 결혼하여 아이 둘을 낳고 사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세계를 놀이터 삼아' 뛰어다닌 그녀의 행적이 재미도 있거니와 세계와 나(혹은 나와 타자)를 잇는 시선이 날카롭고 명쾌하여, 읽으면서 느끼는 기쁨이 컸다. 솔직하되 경박하지 않은 품위있는 글솜씨로 저자는 자칫 산만하게 늘어져버릴 수도 있을 주제를 끝까지 재미있게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이 책에 대한 소감은 나로서는 아주 사적이며 동시에 아주 공적인 것이었다. 주제는 공공연히 논의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세세한 속이야기들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이 책을 덮고나니, 속이야기 나눠 할 수 있는 새로운 친구가 생긴 듯 하여 마음이 뿌듯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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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혼한다
게일 래드클리프 외 지음, 김예숙 옮김 / 다해출판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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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혼한다>라는, 결혼해 살고 있는 입장에서는 자못 불순하게까지 느껴지는 제목의 이 책을 남편 몰래 감춰놓고 한 장씩 읽었다. 감춰놨다기보다는 눈에 띌 장소에 일부러 놓지는 않았다는 것이 맞는 말이겠지만.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실소가 나왔지만 이 책으로 인해 마치 내가 이혼을 상상해보거나 혹은 염두에 두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비치기는 싫었기 때문이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눈치채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결혼한 이들에게 '이혼'이란 말은 그만큼 금기시되는 단어이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 말만큼은 쉽게 내뱉으면 안 되는, 하다하다 안 되어서 결국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하게 되는, 말 그대로 불가피한 방법이기에 사실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이혼'이라는 단어에 대해 더욱 무관심해지려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같이 사는 혼자되기를 위해 이 책을 읽었다. 책 서문에서는 이혼이나 사별로 혼자 되거나 혹은 독신을 선언해 혼자 사는 이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지만 내 생각으로는 같이 사나 혼자 사나 결국 각자의 인생은 스스로가 책임져야 하므로, 아니 그보다 삶이란 결국 혼자 사는 것이므로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같이 사는 삶이 주체적이지 못하다면 혼자 사는 삶 역시 그렇지 못할 것임이 자명하다. '같이'나 '홀로'는 삶을 위한 부수적인 조건일 뿐, 문제는 스스로의 삶에 대한 자각이며 책임감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러한 내 생각을 확인시켜 주었다. 다만 전제했다시피 이 책에서 제안한 여러 가지 방법이나 충고는 실제로 혼자 살고 있거나 그러기를 결심한 이들만을 염두에 둔 것이어서, 결혼해 큰 문제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할 것 같았다. '혼자살기'를 너무 육체적인 의미로만 해석했달까. 종종 원론적이고 불필요한 설명처럼 느껴졌던 부분들은 저자가 너무 친절하고 자상한 탓이었다. 저자는 혼자살기의 장점을 나열하고 그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예를 들어가며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밤이 무섭거나 도둑이 두렵거나 혹은 담판에서 이겨야만 할 때는 이러이러하게 행동하고 말하라는 식으로. 혼자살기를 준비하고 있는 이들은 이러한 말들로 힘을 얻고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혼자살기를 선택해 그렇게 살고있는 사람이라면 책을 읽으며 조금 맥풀려했을지도 모른다. 너무도 뻔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마치 이혼이나 혼자살기의 옹호서와도 같은 성격을 띄는 것은 사회적으로 아직도 이혼에 대한 편견이 심하게 자리잡고 있는 (즉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한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사고'처럼 부닥치는 일이라는, 따라서 불행하거나 적어도 불운하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렇게 혼자 사는 일 자체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사회적인 활동 면에서 좀 더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조금은 느긋하게 스스로의 상황을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여성의 정신적, 신체적 독립이 아직은 요원한 시점에서 첫 걸음마를 위한 이러한 책이 다소간의 도움은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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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움 : BEING PEACE
틱낫한 지음, 강옥구 옮김 / 장경각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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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막역히 알고 지내던 스님 한 분이 이 책을 권해주셨을 때만 해도 나는 그저 그런 책이겠거니 했다. '평화로움'이라는 제목부터가 전혀 색다르게 보이지 않은 데다 스님이 권해주시는 책이니 아마도 좋은 명상서적쯤 되리라 생각했던 게다. '네, 읽어볼께요' 대답만 시원스레 하곤 몇 달을 그냥 보냈다. 왜 선뜻 그 책을 찾으러 서점에 가지 않았는지? 아마도 흔하게 쏟아져나오는 명상서적들의 그 뜬구름 잡는 것 같은 글귀들에 좀 싫증이 나 있던 탓이었나 보다. 이 책을 집어든 건 일부러 권해주신 스님께 미안해서였다.

그런데 이런 책이 있었다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 장 한 장 넘겨가면서 나는 점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자주 웃기도 했다. 이 책은 머리로 읽어 이해하라고 있는 책이 아니었다. 머리를 써서 읽을 만큼 어려운 말도 없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 너무도 일상적인 일들을 적어놓고 있는 것이다. 모든 명상서적들이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읽으라 하지만,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이 보통 마음가짐으로 명상에 도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는 나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고 밥을 먹고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이 편안한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평화로워지기'란 얼마나 쉬운가. 또 얼마나 아름답고 부드러운가.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자주 겉표지에 찍혀있는 이 선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웃는 얼굴이 마치 바로 옆에 있는 양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목소리를 듣는다 해도 전혀 낯설지 않았으리라. 책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나는 이 책을 권해준 스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 다음 장을 넘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스님 덕에 어렵게 만나게 된 이 책. 이 속에 담긴 소박하고 따뜻한 말들은 베트남과 한국, 혹은 이곳과 저곳의 거리를 그대로 뚫고 들어와 내게 들어왔다. 살아있음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리고 그렇게 살아있어 웃을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큰 기쁨인가.

저자인 베트남 선사 '틱냩한'은 고국에서의 평화운동으로 미운 털이 박혀 귀국을 금지당하고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그가 그렇게 떠돌면서 강연한 글들을 모아 엮어놓은 것이다. 의식주가 초라해도 인간의 정신은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글이었다. 저자가 전해주는 감동에 번역자의 노력도 한 몫 했는데, 단순하고 깔끔한 문장들이 거침없이 수월하게 읽혀 사고의 흐름을 막지 않는다. 좋은 저자에 좋은 번역자, 그리고 좋은 글. '평화로움'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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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렛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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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렛. 딱히 이 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이올렛'이라 발음할 때의 이 아리아리한 뉘앙스에 유독 마음이 끌리는 것도 아니면서 이 책을 집어들었다. 작가 때문이다. 신경숙, 내가 좋아하는 작가라고 공언하고 다니는 몇몇 작가 중 한 사람이다. 한 여자가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주저앉아 고즈넉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그의 글은 내게 늘 미진하고 아쉽게 지나보낸 어떤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곤 했다. 너무 빨리 사라져버려 잡을 수 없음을 안타까워 할 수도 없었던 그런 것들, 그 흔적들, 얼핏 떠올랐다 다시 사라지는 기억들, 내 역사들... . 그런 것들이 신경숙의 느린 문투 속에서 다시금 하나하나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 '바이올렛'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감상으로 다가왔다. 주인공의 내면으로 자맥질하듯 빠져들어가게 하는 그의 문장이야 예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뭐랄까, 독백이 너무 길면 사람을 맥 풀리게 하듯 주인공의 내면에로의 집착이 현실을 너무 감싸안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주인공 '오순이'의 상처에 스스럼없이 동참할 수 없었던 까닭에 나는 글을 읽으면서 덜컥, 돌부리에라도 걸린 듯이 한번씩 쉬곤 했다.

그녀, 오순이는 주위의 어떤 시선도 끌지 못할 만큼 아무렇지 않은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출생부터가 축복받지 못했던 삶, 그녀 아버지의 부재와 그로 인해 충족되지 못했던 어머니의 불행은 그녀의 어린 가슴 속에서부터 뿌리깊게 자란다. 그렇게 사랑과 관심의 부재 속에서 자라 세상 밖으로 나온 그녀, 그녀는 여전히 무력하고 나약하다. 우연히 일어나 그녀의 삶을 통째로 흔들어놓았던 하나의 사건 역시 그녀가 지닌 상처, 이 부재를 증명하고 확인시켜주는 일에 다름 아니다.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사랑의 부재,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반복되는 무관심 속에서 버림받은 역사. 작고 보잘 것 없는 '바이올렛'이라는 꽃은 그래서 그녀의 가냘프고 외로우며 쓸쓸한 성정(性情)을 상징하고 있다. 결말 부분에 그녀가 심은 바이올렛이 포크레인에 파먹히는 장면은 이 세상에서의 그녀 삶의 고달픈 행로를 암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에도 불구하고 글을 읽으며 나는 오순이의 그 막막한 심정에 동감할 수가 없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오순이가 이 세상으로부터 숨고싶을 때 써내려가던 글들, 그것은 지나치게 '신경숙'적인 냄새를 풍긴다. 작가 자신이 썼으니 물론 당연하겠지만 그것은 작가가 아닌 오순이라는 여자가 썼어야만 했을 글이다. 그 글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그녀 오순이가 썼다기엔 너무도 문학적이어서 나는 조금 지루해졌다. 작가는 그녀의 오순이를, 오순이의 글을 통해 다시금 재현해놓고 있었다. 게다가 오순이의 그 무력함이라니. 자신을 끝내 싸고도는 결핍의 증거들 속에서 자유롭지는 못할지라도 그녀는 어떻게든 그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저항은 너무나 소극적이다. 그녀는 왜 '수애'의 애정이나 농원에서 자라는 식물들을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까. 그것들이 그토록 푸르른 위안을 던져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녀 자신의 상처에만 골몰하여 그것을 핥아대느라 그 위안을 붙잡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집착, 스스로에게서 절대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러한 무력한 집착들이 내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누군들 다르랴. 그렇게 스스로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을 읽으며 어쨌든 기억에 남길 만한 것,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이야기이기를 기대했던 나로서는 읽고나서 마음이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 글쎄, 이렇게 말을 해놓고 보니 역시 애매하긴 마찬가지이다. 나 역시 좋고 유쾌한 것만 기억 속에 담아두려는 편의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젖어버린 건 아닌지... . 그리하여 오순이의 저 고통조차 '현실 속에서의 추동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냥 덮어버리려 하는 것은 아닌지.... 가을의 문턱에서 내 마음을 산란하게 했던 책 한 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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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아빠는 출근하고 아이는 아직 단잠에 빠져있는 시간. 이 시간이 내게는 하루 중 가장 편안하고 느긋한 시간이다. 늘어져 있는 아침식탁을 치우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오간다.

하나. 방귀를 뿡뿡 뀌고 돌아다니면서.
-애아빠가 옆에 있을 때면 나는 방귀를 조심한다. 나오는 방귀를 어찌하겠느냐만은 불가피할 때면 물소리를 함께 내거나 화장실에 가서 물을 틀어놓고 뀌거나 해서 소리를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 "세상에 방귀도 마음대로 못 뀌고 살다니" 하면서 불쌍하게 여기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뭐 많이 불쌍한 일은 아니다. 처음엔 나도 애아빠처럼 아무 생각없이 방귀를 뿡 뀌었다. 그랬더니 애아빠가 "아니 여자가 그렇게 방귀를..." 하면서 뭐라뭐라 한다. 자기는 아무 때나 큰 소리로 뿌웅-뿡 뀌면서 말이다. 나는 조금 우스웠지만, 여자는 언제나 우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의 생각이 귀여워서 그 다음부턴 조심하기로 했다. 화장실에서 '쉬아'를 할 때도 마찬가지. 그는 화장실 물을 열어놓고 쉬를 한다. 나도 아무 생각없이 따라서 했다가 핀잔을 들었다. (대개 엄마들은 아이의 동태를 관찰해야 하므로 문을 열어놓고 쉬를 하기 십상이다. 나만 그런가?...) 그래서 그 다음부턴 쉬를 할 때도 언제나 문을 닫고 한다. 그러면 그 잠깐 동안에도 화장실 불을 켜야 하는 경제적 손실이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젠 애아빠가 보이지 않으니, 다시 쉬도 그냥 문 열어두고 하고 방귀도 뿡뿡 뀌고 다닌다. 그러면서 혼자 웃음이 나온다. ^^

둘. 아랫집 윗집 아줌마들과 오가며 느끼는 사실.
-아줌마들 중에 '아줌마' 호칭을 특히 싫어하는 이들이 있다. 다른집 아이들한테도 꼭꼭 자신을 '이모'라 칭하게 한다. 물론 '이모'란 호칭이 훨씬 정겨운 어감을 풍기기 때문에 일부러 그러는 경우도 많다. 나도 그럴 때가 있으니까. 그러나 그중의 어떤 엄마들은 아이가 '아줌마'라고 부르면 꼭꼭 정정하여 자신은 '아줌마'가 아니고 '이모' 혹은 '이쁜 이모'라고 말한다. (귀여운 엄마들이다) 아줌마란 말이 통념적으로 우아한 부인을 일컫는 품위있는 말이라면 아마 그 엄마들도 좋아했을 것이다. 아줌마란 호칭은 우리에게 있어 여전히, 줄서기에서 밀리지 않는 두꺼운 팔뚝을 가진, 놋그릇이나 질그릇 같이 수더분한 이름이다.
  아가씨 적에 프랑스에 몇 번 오간 적이 있었다. 그래봐야 며칠, 몇 주간이었지만. 비행기를 탔는데 스튜어디스가 내게 '마담'이라 한다. 나는 속으로 화가 났다. "뭐? 마담이라고? 내가 아줌마로 보인단 말이지?" 불어의 마담(madame)이란 말이 기혼 여자에 대한 경칭으로 '부인' 정도라고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madame은 아주 어린 여자(마드모아젤)가 아닌 경우, 기혼이든 미혼이든 성숙한 여자에게 불러주는 경칭이었다. 우리의 '아줌마'가 'madame' 같은 어감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셋. 미운 오리새끼.
-아이에게 '미운 오리새끼'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문득.
지금도 마찬가지일지 모르지만, 아가씨 적엔 특히 이쁘고 똑똑한 여자를 보면 주눅이 많이 들었다. 특히 그 이쁜 여자가 그냥 인형처럼 이쁜 게 아니라 우아하기까지 하면 더욱 그랬다. 어떤 모임에서 오며가며 얼굴을 익혔던 한 여자는 건축을 전공하고 이태리에서 유학까지 마치고 온 사람이었는데, 당시 내 또래였으니 젊었던 데다 예쁘고 우아했다. 게다가 그 침착하고 또릿한 어조라니. 나는 "이 여자의 애인이 될 남자는 틀림없이 굉장한 사람일 거야" 생각하면서 슬쩍 그녀를 훔쳐보곤 했다. 그녀에 비하면 촌스럽고 무식한 나는 그야말로 '털 빠진 오리'였다. (사실 미술과 건축, 문학, 문화비평 분야에서 사람과 사람으로 연결되어진 그 모임 자체가 내게는 과분하고 분에 넘치는 것이긴 했다) 나는 그렇게 자주 주눅들어가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아니, 과거형이 아니라 지금도 나는 종종 주눅이 든다. 지금은 외면적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내적인 성취가 큰 사람을 훨씬 선망하지만 말이다.
  비디오에서 미운 오리는 나중에 백조가 된다. 오리가 백조로 변했을 때 아이는 '백조야, 백조' 하면서 소리지른다. 여전히 '털빠진 오리'인 나는 감히 백조가 되길 꿈꾸지 못한다. 백조가 되기까지의 그 거칠고 힘든 시간들을 내가 보듬어왔다고는, 혹은 지금 보듬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양심!) 다만 그 시간들이 앞으로 내게 필요하다면 잘 견뎌내고, 그 시간들을 잘 다듬어가길 바랄 뿐이다.

꼬리. 조금 전에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이승연 누드파문을 읽었다. '위안부'를 테마로 누드화보집을 만들었다고. 경악! 사람들이 경악할 만 하다. 그 누드집으로 위안부 문제에 얽힌 한-일관계를 다시금 재조명해보고 싶다니... 기가 막히다. 아무래도 이승연은 보기보다는 머리가 나쁜 듯. 이 일로 도대체 어떤 애국적인 이름을 얻고 싶어 그런 것일까. 게다가 그 일(촬영이라든지...)을 하는 사람들은 또 어떤 이들인지. 그들도 대외적으로는 '예술'을 한다고 말할 텐데 그 머리 속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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