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아빠는 출근하고 아이는 아직 단잠에 빠져있는 시간. 이 시간이 내게는 하루 중 가장 편안하고 느긋한 시간이다. 늘어져 있는 아침식탁을 치우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오간다.

하나. 방귀를 뿡뿡 뀌고 돌아다니면서.
-애아빠가 옆에 있을 때면 나는 방귀를 조심한다. 나오는 방귀를 어찌하겠느냐만은 불가피할 때면 물소리를 함께 내거나 화장실에 가서 물을 틀어놓고 뀌거나 해서 소리를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 "세상에 방귀도 마음대로 못 뀌고 살다니" 하면서 불쌍하게 여기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뭐 많이 불쌍한 일은 아니다. 처음엔 나도 애아빠처럼 아무 생각없이 방귀를 뿡 뀌었다. 그랬더니 애아빠가 "아니 여자가 그렇게 방귀를..." 하면서 뭐라뭐라 한다. 자기는 아무 때나 큰 소리로 뿌웅-뿡 뀌면서 말이다. 나는 조금 우스웠지만, 여자는 언제나 우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의 생각이 귀여워서 그 다음부턴 조심하기로 했다. 화장실에서 '쉬아'를 할 때도 마찬가지. 그는 화장실 물을 열어놓고 쉬를 한다. 나도 아무 생각없이 따라서 했다가 핀잔을 들었다. (대개 엄마들은 아이의 동태를 관찰해야 하므로 문을 열어놓고 쉬를 하기 십상이다. 나만 그런가?...) 그래서 그 다음부턴 쉬를 할 때도 언제나 문을 닫고 한다. 그러면 그 잠깐 동안에도 화장실 불을 켜야 하는 경제적 손실이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젠 애아빠가 보이지 않으니, 다시 쉬도 그냥 문 열어두고 하고 방귀도 뿡뿡 뀌고 다닌다. 그러면서 혼자 웃음이 나온다. ^^

둘. 아랫집 윗집 아줌마들과 오가며 느끼는 사실.
-아줌마들 중에 '아줌마' 호칭을 특히 싫어하는 이들이 있다. 다른집 아이들한테도 꼭꼭 자신을 '이모'라 칭하게 한다. 물론 '이모'란 호칭이 훨씬 정겨운 어감을 풍기기 때문에 일부러 그러는 경우도 많다. 나도 그럴 때가 있으니까. 그러나 그중의 어떤 엄마들은 아이가 '아줌마'라고 부르면 꼭꼭 정정하여 자신은 '아줌마'가 아니고 '이모' 혹은 '이쁜 이모'라고 말한다. (귀여운 엄마들이다) 아줌마란 말이 통념적으로 우아한 부인을 일컫는 품위있는 말이라면 아마 그 엄마들도 좋아했을 것이다. 아줌마란 호칭은 우리에게 있어 여전히, 줄서기에서 밀리지 않는 두꺼운 팔뚝을 가진, 놋그릇이나 질그릇 같이 수더분한 이름이다.
  아가씨 적에 프랑스에 몇 번 오간 적이 있었다. 그래봐야 며칠, 몇 주간이었지만. 비행기를 탔는데 스튜어디스가 내게 '마담'이라 한다. 나는 속으로 화가 났다. "뭐? 마담이라고? 내가 아줌마로 보인단 말이지?" 불어의 마담(madame)이란 말이 기혼 여자에 대한 경칭으로 '부인' 정도라고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madame은 아주 어린 여자(마드모아젤)가 아닌 경우, 기혼이든 미혼이든 성숙한 여자에게 불러주는 경칭이었다. 우리의 '아줌마'가 'madame' 같은 어감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셋. 미운 오리새끼.
-아이에게 '미운 오리새끼'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문득.
지금도 마찬가지일지 모르지만, 아가씨 적엔 특히 이쁘고 똑똑한 여자를 보면 주눅이 많이 들었다. 특히 그 이쁜 여자가 그냥 인형처럼 이쁜 게 아니라 우아하기까지 하면 더욱 그랬다. 어떤 모임에서 오며가며 얼굴을 익혔던 한 여자는 건축을 전공하고 이태리에서 유학까지 마치고 온 사람이었는데, 당시 내 또래였으니 젊었던 데다 예쁘고 우아했다. 게다가 그 침착하고 또릿한 어조라니. 나는 "이 여자의 애인이 될 남자는 틀림없이 굉장한 사람일 거야" 생각하면서 슬쩍 그녀를 훔쳐보곤 했다. 그녀에 비하면 촌스럽고 무식한 나는 그야말로 '털 빠진 오리'였다. (사실 미술과 건축, 문학, 문화비평 분야에서 사람과 사람으로 연결되어진 그 모임 자체가 내게는 과분하고 분에 넘치는 것이긴 했다) 나는 그렇게 자주 주눅들어가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아니, 과거형이 아니라 지금도 나는 종종 주눅이 든다. 지금은 외면적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내적인 성취가 큰 사람을 훨씬 선망하지만 말이다.
  비디오에서 미운 오리는 나중에 백조가 된다. 오리가 백조로 변했을 때 아이는 '백조야, 백조' 하면서 소리지른다. 여전히 '털빠진 오리'인 나는 감히 백조가 되길 꿈꾸지 못한다. 백조가 되기까지의 그 거칠고 힘든 시간들을 내가 보듬어왔다고는, 혹은 지금 보듬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양심!) 다만 그 시간들이 앞으로 내게 필요하다면 잘 견뎌내고, 그 시간들을 잘 다듬어가길 바랄 뿐이다.

꼬리. 조금 전에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이승연 누드파문을 읽었다. '위안부'를 테마로 누드화보집을 만들었다고. 경악! 사람들이 경악할 만 하다. 그 누드집으로 위안부 문제에 얽힌 한-일관계를 다시금 재조명해보고 싶다니... 기가 막히다. 아무래도 이승연은 보기보다는 머리가 나쁜 듯. 이 일로 도대체 어떤 애국적인 이름을 얻고 싶어 그런 것일까. 게다가 그 일(촬영이라든지...)을 하는 사람들은 또 어떤 이들인지. 그들도 대외적으로는 '예술'을 한다고 말할 텐데 그 머리 속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이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