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렛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바이올렛. 딱히 이 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이올렛'이라 발음할 때의 이 아리아리한 뉘앙스에 유독 마음이 끌리는 것도 아니면서 이 책을 집어들었다. 작가 때문이다. 신경숙, 내가 좋아하는 작가라고 공언하고 다니는 몇몇 작가 중 한 사람이다. 한 여자가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주저앉아 고즈넉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그의 글은 내게 늘 미진하고 아쉽게 지나보낸 어떤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곤 했다. 너무 빨리 사라져버려 잡을 수 없음을 안타까워 할 수도 없었던 그런 것들, 그 흔적들, 얼핏 떠올랐다 다시 사라지는 기억들, 내 역사들... . 그런 것들이 신경숙의 느린 문투 속에서 다시금 하나하나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 '바이올렛'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감상으로 다가왔다. 주인공의 내면으로 자맥질하듯 빠져들어가게 하는 그의 문장이야 예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뭐랄까, 독백이 너무 길면 사람을 맥 풀리게 하듯 주인공의 내면에로의 집착이 현실을 너무 감싸안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주인공 '오순이'의 상처에 스스럼없이 동참할 수 없었던 까닭에 나는 글을 읽으면서 덜컥, 돌부리에라도 걸린 듯이 한번씩 쉬곤 했다.

그녀, 오순이는 주위의 어떤 시선도 끌지 못할 만큼 아무렇지 않은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출생부터가 축복받지 못했던 삶, 그녀 아버지의 부재와 그로 인해 충족되지 못했던 어머니의 불행은 그녀의 어린 가슴 속에서부터 뿌리깊게 자란다. 그렇게 사랑과 관심의 부재 속에서 자라 세상 밖으로 나온 그녀, 그녀는 여전히 무력하고 나약하다. 우연히 일어나 그녀의 삶을 통째로 흔들어놓았던 하나의 사건 역시 그녀가 지닌 상처, 이 부재를 증명하고 확인시켜주는 일에 다름 아니다.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사랑의 부재,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반복되는 무관심 속에서 버림받은 역사. 작고 보잘 것 없는 '바이올렛'이라는 꽃은 그래서 그녀의 가냘프고 외로우며 쓸쓸한 성정(性情)을 상징하고 있다. 결말 부분에 그녀가 심은 바이올렛이 포크레인에 파먹히는 장면은 이 세상에서의 그녀 삶의 고달픈 행로를 암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에도 불구하고 글을 읽으며 나는 오순이의 그 막막한 심정에 동감할 수가 없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오순이가 이 세상으로부터 숨고싶을 때 써내려가던 글들, 그것은 지나치게 '신경숙'적인 냄새를 풍긴다. 작가 자신이 썼으니 물론 당연하겠지만 그것은 작가가 아닌 오순이라는 여자가 썼어야만 했을 글이다. 그 글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그녀 오순이가 썼다기엔 너무도 문학적이어서 나는 조금 지루해졌다. 작가는 그녀의 오순이를, 오순이의 글을 통해 다시금 재현해놓고 있었다. 게다가 오순이의 그 무력함이라니. 자신을 끝내 싸고도는 결핍의 증거들 속에서 자유롭지는 못할지라도 그녀는 어떻게든 그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저항은 너무나 소극적이다. 그녀는 왜 '수애'의 애정이나 농원에서 자라는 식물들을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까. 그것들이 그토록 푸르른 위안을 던져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녀 자신의 상처에만 골몰하여 그것을 핥아대느라 그 위안을 붙잡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집착, 스스로에게서 절대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러한 무력한 집착들이 내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누군들 다르랴. 그렇게 스스로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을 읽으며 어쨌든 기억에 남길 만한 것,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이야기이기를 기대했던 나로서는 읽고나서 마음이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 글쎄, 이렇게 말을 해놓고 보니 역시 애매하긴 마찬가지이다. 나 역시 좋고 유쾌한 것만 기억 속에 담아두려는 편의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젖어버린 건 아닌지... . 그리하여 오순이의 저 고통조차 '현실 속에서의 추동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냥 덮어버리려 하는 것은 아닌지.... 가을의 문턱에서 내 마음을 산란하게 했던 책 한 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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