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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쟈크 엘룰 / 대장간 / 1992년 12월
평점 :
절판
자끄 엘룰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으나 그의 책을 읽어보기는 처음이다. 그가 사회개혁적이고 공동체적인 기독교(한국의 김진홍 목사같은)를 내세우면서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와 새로운 대안제시에 열정적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주변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약간 현학적 논증들로 답답하고, 지루하지 않을 까 생각했는 데 가벼운 책들에 길들여져 있는 요즘 세태에 생각하게 하고, 고민하게 하고, 현실성있고, 바른 문제제기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요약이 필요한 것 같아 요약을 하면서 중간중간의 소감들을 써 보았고, 마지막에 나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1장 문제제기를 다루면서, 이땅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소명과 사명을 다루고 있다. 성경만이 그 ‘소명’이 무엇인가를 말해 줄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할 ‘역할’에 대해서 설명해 준다고 말한다. 성경은 이 역할을 세 가지로 정의하는 데,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며,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냄이 양을 이리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곧 저자는 세상에서 감당할 특정한 역할, 즉 세상을 보존하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가를 알려주며, 하나님의 어린양의 희생을 세상 속에서 계속 새롭게 보여주는 살아있는 ‘표징’의 삶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한 모순적인 한 숙명에 놓여있다고도 말하는 데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의 죄를 감소시킬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죄된 현실을 묵인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앞에서 저자는 성경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세상가운데서의 참여와 도전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을 그는 ‘보존’이라는 말로 쓰는 데,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심으로써 그것을 보존시키시며, 그 보존을 활용하심으로써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본문을 내가 헬라어 성경을 보며 사역(私譯)을 해본 바로는 ‘세월’은 하나님의 때,시간,사건으로 번역할 수 있고 아끼라는 ‘구속하라’‘값을 지불하고 구출해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때가 악하기에, 시대가, 세상이 악하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지혜로운 삶의 대한 도전과 명령은 하나님의 사건이 이 시대에 임하게 하여서 하나님의 종말의 때를 오게하라, 댓가를 지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그 나라가 오게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그의 문제의식과 사상은 내가 사역(私譯)하고, 이해한 관점과 어느정도 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다.
2장 기독교의 혁명성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그의 진단을 시작하며 그가 쓰는 용어가 그의 사상을 대변해 준다. ‘혁명’. 공산주의만 혁명을 하는 줄 알았지, 또는 분에 쌓인 농노계급들만 그런 혁명을 하는 줄 알았지 유순한 양과 같은 우리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런 얘기들을 들으면 마치 딴 얘기하듯, 과격분자가 얘기하듯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진단은 단호한 어조로 세상이 보존되려면 진정한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면 현재의 이 세상는 타락으로 인해 뒤틀려져 있으며, 세상과 하나님 나라사이에는 대립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대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데 필요한 세가지 지침을 설명하는데, 첫째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인간의 진상을 보여주시는 그 지점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의 질서와 일치되게 살 수 있는 정치 사회적 조건들을 발견하여야 한다. 둘째, 하나님이 제정하신 일정한 틀 안에서 작업하여야 한다. 그 한계를 벗어나게 되면 자신이 속한 사회에 해를 끼치게 된다. 셋째, 이 보존의 질서는 구원 선포를 목적으로 할 때만이 의미가 있게 된다. 그 지침에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도래케하고, 종말을 앞당기는 진정한 혁명(교회는 본래적으로 혁명적 성격을 띤다고 말함)이 일어나야 하며, 세상을 알아서 현대 문명의 억압에 대항하여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대안과 혁명적 상황을 창조할 것을 도전한다.
3장은 세상을 알고,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면서 어떠한 우상에 사로잡혀 있는 지를 말한다. 그것을 한마디로 ‘수단화’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문명에서는 ‘더 이상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우리는 집단의 목표를 상실한 채 거대한 수단만을 갖고 있다고 분석한다.과학과 기술, 경제활동, 국가 등 자신을 섬겨야하는 그 수단이 자신을 지배하여 현대인의 우상이 되어 수단 앞에 목적을 상실하고 종속되었다는 것이다. 그 수단은 수단이 수단을 낳고, 수단이 자신을 정당화 시킨다. 그래서 인간이 전혀 수단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고, 삶의 전영역으로 확산되며, 이 수단에 대해 인간이 부과하는 모든 목적은 명백히 가치없고 부적당하다는 것이다. 마치 덫에 걸린 것 같이 수단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실앞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 것인가? 먼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목적과 수단의 분리란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사역은 수단과 목적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현존이 하나님나라의 도래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구원과 하나님나라의 설립을 위한 하나님의 수단이었던 것이고, 동시에 목적이요, 구원과 나라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런 세상의 반대상황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앞에 우리는 수단의 노예됨에서 극복해야 하며, 씨름하여야 하는 데 하나님의 원리는 하나님이 목적을 세우시고, 인간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 목적을 이루시는 것이다. 그 목적이 인간 사회안에 실현되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성경에서 찾아야 함을 저자는 역설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금 강조하며 하나님께 달려있고, 행동과 제도적 개혁을 우선하기 전에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존재됨을 온전히 자각함을 말한다. 즉, 우리는 살아있어야하든 데, 세상속에 메이지 않는 ‘자유’의식을 가져 목적을 바로 세우며 수단은 수단으로서 자기자리를 찾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4장은 기독 지성인의 위치와 임무를 나타낸다. 3장에서는 영적인 삶의 존재됨의 회복과 그로인한 삶의 우선순위를 말했다면 이 장에선 지성의 제자도, 즉 ‘마음을 새롭게함’(롬12:2)을 말하고 있다. ‘마음’은 헬라어로 ‘누스’인데 이것은 지성적 마음을 나타낼 때 많이 쓰이는 단어이다. 저자는 우리의 믿음이 지성을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시키며,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과 관계가 있고, 성령의 사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단순한 지적 차원의 변화가 아니라 성령께서 행하셔서 마음에 영감을 주시고, 새로운 사고방식과 살고있는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심으로 삶 자체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 변화의 목적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다. 현실 인식에 대한 거부함이 팽배해 있고, 전체를 보지 못하게 하는 그림자, 신화들이 우리를 가리우며, 혼란스러움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앞에 우리는 어떻게 간격을 좁힐 것인가? 세상과 자신에 대한 자각을 해야하며, 신화들, 이전 시대의 지적 교리들(공산주의, 정치적 자유주의...)을 무너뜨리고, 객관적 실재를 발견하려는 의지, 즉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 사실들을 발견하려는 의지를 갖는 것이다. 또한 인간적 차원에서 파악하고자 하며, 현대의 문제들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참여하고 결단하는 것이다. 현대 세계를 인식하려는 이 노력은 결국 성령께서 우리가운데 행하셔야 한다. 성령을 통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세가지 정도로 우리의 할 중요한 일들을 요약해 볼 수 있는 데, 먼저 이웃을 재발견하는 것인데, 성령께서 진정한 인간 상호간에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시기 때문에 그 언어를 발견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둘째는 그 사건, 그리스도의 사건의 재발견이다. 단순한 역사속의 사건 혹은 신화가 아닌 그리스도의 사건이 우리를 살리는 근거가 된다는 확신으로 인해 그 사건이 중심이되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의미를 재발견토록 권면하는 것이다. 셋째는 거룩한 영역을 재발견하는 것으로, 인간지성의 한계를 진단하고, 그것이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 영역사이를 나누고 있는 경계선을 발견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역할이다.
마지막 5장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룬다. 여기엔 이 책의 목적과 최종적 대안을 어느정도 제시하고 있는 데 그러나 저자의 말은 ‘이 책이 해결 방안을 내놓기 위함이 아니라 교회갱신을 위해 해야 할 일들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과거 이레네우스나 칼빈은 나름대로 그 시대에 맞는 대안을 제시함으로 나왔다. 그러나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이 시대를 분별하고 있는 가? 어떤 영적 통찰력으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의미를 분별하고 있는 가? 사탄의 전략은 복음을 중립화 또는 무력화시키려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싸워야할 적은 누구이며, 우리의 전투는 어떤 성격의 것인가 또한 어떠한 무기들을 사용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며, 이 싸움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저자의 도전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싸움을 하는 가운데 선포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복음이라는 진주를 세상 사람들에게 던지는 데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 진주를 돼지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단지 그들은 개와 돼지와 같은 들을 귀가 없는 사람이니 상종도 하지 말라라는 의미보다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들을 귀를 만들어 줄 정도의 다양한 삶의 영역에 있어서 인간적인 수준의 회복과 복음에 대해 반응을 보여야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닐까? 그런 반응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모든 인간을 돼지와 같이 존재케 만들어 거룩한 진주를 받아들일 능력을 상실했다면 우리는 그렇게 만든 현대 문명의 토대들을 공격하는 ‘혁명’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에 도달하는 데 있어 두 가지 잘못(첫째, 기독교의 이상과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의 이념들 중 하나를 채용하여 기독교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둘째, 성경 속에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질서를 찾으려고 노력하며 그렇게 찾은 질서를 객관적으로 세상에 제시해놓고는 어떤 신비한 힘에 이끌려 세상이 그 질서를 받아들이고 복종할 것으로 기대하면서 그 정도의 작업에 만족하는 것이다.)을 피하며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지나칠만한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모든 것에 대해 신앙의 빛에 비추어 의문을 제기하고 재검토하여야하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재검토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변화된 삶의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부단한 성경연구(Text)와 살고있는 이 세상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Context) 등을 통해 그러한 사상을 형성해가야 한다.
그리고 저자는 여기서 자신이 서구 기독교에 대한 개혁과 혁명과 같이 생각하는 한 관점을 제시하는 데, 공동체적 차원의 과제를 말하면서 물질적 차원에의 도움, 공동체적 기독교를 말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물든 기독교의 위기성을 진단할 뿐아니라 사유 재산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을 살짝 엿보이고 있다. 그러나 또한 사회적인 운동으로의 변질을 우려하고 있는 데, 복음의 선포를 통한 영혼의 구원과 사회정의를 위한, 구조악을 대항한 복음에 대한 균형감각을 상실할 때 기독교가 영향력을 잃어갔다는 것을 반영한 저자의 목소리인 것 같다.
다른 책을 통해 이어져 갈만한 이 책에서 말한 다양한 문제의식과 약간의 대안에 대한 방향성을 맛보여줌과 구체적인 대안제시의 필요성(당위성)을 남겨 놓았다. 현대 사회의 모순성, 유혹, 우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돋보이며, 그것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기독교에 있고, 복음의 그 자체의 생명력에서 나온 혁명성과 영향력을 온전히 회복, 자각하여 세상에 정복해 나가는 것이다. 단순히 세상 조류에 흘러가지 않고 세상에 바른 대안과 기독교적 목소리를 내야할 때이다.
그러나 현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서구 기독교가 자끄 엘룰이 말한 대로의 대안을 준비하지 못하고, 복음의 생명력과 신앙의 중심성을 잃어간 자유주의 기독교에 붙잡혀서 대안준비는커녕 탁상공론으로 일삼아서 그 혁명성은 잃어갔고, 결국에는 그가 우려했던 대로 유럽의 기독교는 폭삭 주저앉은 듯 보인다. 그에 비해 한국 기독교는 어떠한 가?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며 진실되고 깊이있는 성경에 대한 연구(Text)와 이시대의 흐름과 사상에 대한 진단(Context)에 동떨어진 민중이 좋아하는 복음을 선포하고, 왜곡된 목회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내 교회의 교세 확장에 중점을 두진 않은 가? 카타르시스적인 자신이 받을 축복만을 추구하고 현실과 복음의 생명력에 대한 둔감과 그로인한 세상의 모순됨에 대항하는 하여 대안을 제시하고 바로 일으켜 세우려고 치열하고 고민하고 전진하는 혁명성은 찾아보기 힘들어진 것이 현실 아닌가? 안타깝다. 자끄 엘룰과 같은 유럽사회에 예언자와 같은 목소리를 우리 한국 기독교는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오히려 사회적인 연구나 발 빠른 대안제시보다 그의 기초 작업으로 바른 성경연구에서부터 시작해야할 것이다. 원어에서부터 차근차근 기초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말하는 석의(exegesis) 없는 시대 적용적 해석학(협의의 해석학)이 무슨 소용이 있는 가? 신학교안에서만 석의작업을 하고, 졸업 후엔 교회 성장을 위한 다양한 도구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는 현 흐름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다.
깨어있는 몇몇의 교회의 지도자들, 목회자들부터 기반다지기 작업을 새로 시작하며, 현실의 모순과 실태에 대한 바른 진단과 치열한 적용과 영적 전쟁에 대한 싸움의 몸부림, 그리고 종말에 열어 가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을 가슴에 새기며 그에 따른 삶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땅 끝까지 가는 미전도 종족 선교와 아울러 이 시대의 사회적 악에 대한 구석구석의 선교 또한 함께 진행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셨는데, 이 거대한 싸움과 과제 앞에서 우리의 교회가 하나 될 근거는 충분히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