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마일리스 드 케랑갈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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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좀 직설적인 제목을 가진 이 소설은 결코 고어물이 아닙니다. 장기 이식과 관련된 매우 심오한 소설입니다. 한 청년이 서핑을 즐기고 돌아오던 도중 교통 사고를 당해 뇌사 상태에 빠집니다. 그리고 의사는 이 육체적으로는 지극히 건강한 청년의 장기들을 죽어가고 있던 다른 생명들에 이식하여 그 생명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게끔 청년의 부모에게 장기 이식을 권합니다. 비록 비가역적 뇌사상태라고는 하지만, 분명 아들은 숨을 쉬고 있고 심장이 뛰고 있는데, 어떤 부모가 쉬이 자식의 죽음을 인정하고 자식의 신체를 갈가리 찢기고 조각내길 원할까요. 시몽 랭브르의 부모도 그랬습니다. 의사가 시몽 생전에 장기 이식에 관한 어떠한 의사 표명 같은 것을 하지 않았는지 묻자 시몽의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냅니다. 이제 겨우 열아홉의 신체 건강한 아이가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미리 생각하고 그런 것을 준비했겠느냐고. 하지만 결국 시몽의 부모는 이를 받아들입니다. 시몽은 결국 스러져갔지만 간, 심장, 폐, 신장을 기증해 6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되지요. 자신들을 담았던 눈은 절대 안된다던 시몽의 부모, 시몽의 숨이 끊길 때 이어폰을 꽂아 꼭 그가 좋아하던 바닷소리를 들려 달라고 부탁하던 시몽의 부모의 모습이 참으로 절절하고 눈물겨웠습니다.

 

시몽이 서핑을 나가서 사고를 당하고 병원에 실려와 장기 기증을 설득하고 실제로 장기 기증 및 수술이 이루어지는 과정, 그 24시간을 이 책 한권에 세세히 담아놨습니다. 시몽과 시몽의 부모와 시몽의 여자친구와 의사와 간호사와 장기이식을 받는 사람들. 그들의 24시간도 함께. 따옴표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독특한 문체의 이 작품은 추천사에 '시 같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바로 그 '시 같음'이 읽기에 조금 버거운 면이 있었습니다. 24시간 동안 벌어지는 일인데다 장기 이식과 관련된 일이니 긴박하게 사건이 전개되리라 예상했었는데 곁가지로 자주 빠지는 전개 때문이었는지 솔직히 긴박감보다는 난해함이 앞섰습니다. 게다가 장기 이식과 의학 관련 전문 용어들이 난무하기도 해서 더욱 읽기 쉽지 않았구요. 후에 역자 후기를 보아하니 역자님도 번역을 하는데 꽤나 애를 먹었다고 해서 어쩐지 위로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이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특장점이자, 묘미인 것 같은데 제 그릇은 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웠던 작품이었습니다.

 

얼마전에 친구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자신의 신체를 해부할 수 있게끔 한 병원에 기증하기로 했단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말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텐데 아버지 정말 대단하시다고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를 지켜봐야 할 친구의 심정은 또 어떠할지 생각하니 마냥 감탄할 일도 아니더라구요. 장기 기증이나 시신 기증, 어찌 보면 참 당연한 일인 것도 같지만 역시 나와 내 주변의 문제가 된다면 그리 쉬이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긴 이 모든 것들은 일단 '죽음'을 전제하고 가정해야 하는 일이니 더욱 그럴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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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은 멋있다 소설의 첫 만남 1
공선옥 지음, 김정윤 그림 / 창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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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인가, 한 중학생이 방학 동안 학교에서 정해주는 책들을 읽고 독서록을 작성해야 하는데 큰일이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요즘 중학생들에겐 학교에서 어떤 책들을 읽기 권장하나 궁금해서 그 목록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데미안을 비롯 어른들도 읽기 힘들어 하는 고전들이 즐비하더라고요. 솔직히 어른들도 읽다가 포기해 버린다는 그 어려운 책들을 도대체 이제 겨우 중학생인 아이들에게 읽길 권한다면... 그래 역시 독서란 재미없고 어려운 거야...라는 의식이 아이들에게 박혀버리지 않을까... 그래서 독서 기피증이 생겨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책 좀 읽으라며.. 잔소리를 해대지요. 우리나라 성인 평균 1년 독서량 9.6권을 자랑하면서 말이죠. 내년에 교육과정이 개정된다고 합니다. 독서와 논술 교육이 강조된 교육과정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읽기도 힘들고 읽고 나서 너무 어려운 나머지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할 책들만 읽기 강요한다면 과연 그 독서가 제대로 된, 그래서 인생에 도움이 되는 독서가 될까요? 개정되는 교육과정에 발 맞추어 아이들이 좀 더 독서와 친해질 수 있도록 창비에서 참신하고 뜻깊은 시리즈가 출시 되었네요. '소설의 첫 만남'이라는. 동화와 소설 중간 어디쯤에 존재할 법한 9편의 단편 소설들을 엮어서 말이죠.

 

소설의 첫 만남 첫 이야기는 공선옥 작가의 '라면은 멋있다'입니다. 민수라는 아이는 가정형편이 어려운데, 이를 여자친구인 연주에게 감춥니다. 연주는 햄버거 가게에서 일을 하는데 그녀의 일이 끝나길 기다리며 민수는 햄버거 가게 앞을 서성입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비싼 햄버거를 사 먹어야 하니까요. 그렇게 연주가 일이 끝나면 둘은 분식집에 가서 라면을 먹고 걷거나 혹은 놀이터에서 데이트를 합니다. 연주의 집도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연주가 중학생 때 산 옷을 여전히 입고 다니는 걸 안 민수는 연주에게 그녀의 생일 선물로 예쁜 코트를 사주겠노라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버리고 맙니다. 과연 민수는 이 위기(?)를 어떻게 해쳐 나갈 것인가!!!

 

 

 

 

역시 아이들이 소설에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기획된 작품이라 그런지 정말이지 순식간에 읽힙니다. 읽는 데 30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 같네요. 게다가 곳곳에 삽화가 듬뿍 담겨 있어서 아기자기 하고 감성 또한 자극합니다. (동화와 소설 중간 단계 답죠? ^^) 민수와 연주는 지극히 평범한 우리 주변의 고등학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무얼 고민하고 무얼 생각하고 무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가 잘 담겨 있었습니다. 아마 아이들이 이 작품을 읽는다면 맞아 맞아... 이건 완전 내 이야긴데...하고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심지어 그들이 사용하는 말투(은어나 비속어)도 사실적으로 담아내서 더욱 실감나고 좋았습니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독서는 '무엇'을 읽느냐 보다는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하다고요. 재밌게 읽고 완벽하게 소화해 낸 책 한 권이 전세계 지구인이 다들 걸작이라고 평가하지만 나는 결코 소화시키지 못하겠는 작품보다 훨씬 더 훌륭한 명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라는 아주 아주 즐거운 행위를 말 그대로 '즐겁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기획된 이 '소설의 첫 만남'은 아주 칭찬해!!! 부디 아이들에게 그래서 어른들에게도 널리 널리 사랑받는 시리즈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다른 작품들도 사두었으니 쭈욱 읽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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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열대
해원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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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공작 요원들이나 간첩들이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 등은 참 재밌는 것 같습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도 그렇고 아이리스도 그렇고 그리고 이 작품 슬픈 열대도 그렇습니다. 항상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 느끼는 건 북한의 정예 요원들의 능력치란 것은 참으로 대단하구나...하는 것입니다. 좀 우스운 생각이지만 가끔 이런 요원들이 득시글거리는 북한이라면 우리가 그들과 싸울 때 혹 지고 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어이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아무튼, 이 소설에서도 전지전능 북한의 전설적인 요원인 장상범, 아니 권순이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북한 35호실 요원이었는데 북한에서 멕시코로 향하는 어떤 수송선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아 멕시코로 향하다가 그만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그 배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가 됩니다. 그런데 그 배 안에는 수많은 북한의 소녀들이 철창에 갇혀있었고, 순이는 그녀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결국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고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 중 하나인 메데인 카르텔의 용병으로 몸담게 된 순이는 어떤 음모에 의하여 메데인 카르테를 처부수려는 모종의 세력에 희생당한 리타라는 소녀를 만나고 그녀를 보며 순이가 구하지 못했던 소녀들을 떠올리고 때문에 순이는 리타를 데리고 콜롬비아를 떠나 스위스로 가기위해 각고의 위기를 헤치며 모험을 하며 액션을 보여준다...는 것이 이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출판사 자체가 읽는 영화를 표방하는지라 이 작품 역시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양 소설의 장면 장면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가끔 이건 애초에 시나리오를 소설로 각색한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특히 화려하고 장대한 스케일의 순이의 화려한 액션들에 대한 묘사는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또한 정말 생소한 소재와 용어들이 난무함에도 마약 카르텔이 어떻게 운용되는지에 대한 묘사 역시 흥미로웠습니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정신 놓고 읽다 보면 어느새 결말입니다.

 

다만 그 재미완 별개로 아쉬운 점들도 많았습니다. 각종 영화들(람보,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은밀하게 위대하게, 대부, 본 시리즈 등등)에서 봤을 법한 클리셰 범벅은 좀 진부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책 도입부의 인물 관계도를 보고 이미 반전을 몇 가지 짐작해버릴 정도였거든요. 게다가 이 모든 음모의 꼭짓점에 있는 늑대의 정체란 것이. 참.......;;; 또한 리타라는 소녀를 구하려는 순이의 마음은 이해하나, 그 소녀 하나를 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순이는 이해가 가면서도 불편했습니다. 리타가 민폐 캐릭터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리고 콜롬비아라는 나라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제게 콜롬비아라는 나라는 절대 함부로 가지 말아야 할 위험한 곳..이라는 인상이 강해져버리는 역효과도 있었고요.

 

하지만 결코 소설이 재미가 없었단 말은 아닙니다. 최근 읽은 소설들 중 가장 몰입감 있고 빠르게, 그리고 매우 흥미롭게 읽혔음을 거듭 강조합니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재미진 장르 소설들이 자꾸 나와주니 장르 소설을 애정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뿌듯하네요.

 

이 소설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역시 순이가 배 안의 소녀들을 구하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 구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만 홀로 살아 남아 마음 속 깊이 상처와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3년 전 우리에게 있었던 큰 사건이 생각나 버렸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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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남극 탐험기
김근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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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83 나는 지금 여기 있습니다. 다른 곳에 있지 않아요. 』

 

한때 치열하게 무언가에 도전하다가 거듭된 실패에 좌절하고 뭐든 다 포기해버리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시 한 편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유치환님의 <생명의 서>였습니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병든 나무처럼 부대낄 때/아라비아 사막으로 나는 가자"라는 시의 첫 연이 너무나 제 이야기 같았기에 그대로 가슴속에 박혀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저는 사막을 갈구했습니다. 사막을 동경하기 시작했습니다. 극한의 장소인 그곳에 가면 삶에 대한 애증을 다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결국 사막은 지금의 내 삶 다름 아니라는 것을. 걷고 걷고 또 걸어도 보이는 것은 모래뿐인 사막이나 살고 살고 또 살아도 실패뿐인 내 인생이나 다를 바가 무엇이겠냐는 것을. 하지만 더불어 깨달은 점도 있습니다. 사막엔 오아시스가 있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내 인생에도 오아시스와 같은 무언가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을. 그 오아시스 하나를 찾기 위한 것이 인생이고 그렇게 오아시스를 찾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그러니까 살아볼만한 인생 아니겠느냐는 것을. 독후감이란 것을 쓰면서 이 무슨 헛소리냐고요? 글쎄 왜일까요. 저는 김근우 작가의 <우리의 남극 탐험기>라는 이 소설을 읽으며 자꾸만 <생명의 서>가, 그 시를 가슴에 담던 그때의 내가, 사막 같은 인생이 떠올랐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둘, 아니 셋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실패함으로써 성공한 이들입니다. 경제학자인 섀클턴 박사는 이미 아기 시절 시력을 잃어버림으로써 실패를 맛봅니다. 그는 비록 천재로 태어났으나 굉장히 보수적인 영국사회에서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실패자였습니다. 영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옥스퍼드에 진학했고 절절한 첫사랑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결코 이룰 수 없는 그 사랑에도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나'는 원래 중학생 시절까지 야구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야구선수로서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야구를 포기하고 공부에 매진해 겨우 삼류 대학에 진학했으나 그 안에서 찾은 첫사랑에 실패하고, 군대 시절 겪은 일련의 사건으로 대학은 자퇴하고, 체육교사가 되겠다며 다시 대학에 입학하지만 결국 임용고시에도 매번 낙방하고 맙니다. 그런데 인생의 매 순간이 실패인 그들 앞에 실패자들을 위한 안내자, 위대한 실패자 '어니스트 헨리 섀클턴'이라는 탐험가(실존인물입니다.)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가 말합니다. "이길 수 있다면 싸울 필요도 없지만 이길 수 없다면 싸워야 하는 거라고," 그래서 그들은 남극으로 떠납니다. 실패하기 위해서, 실패함으로써 성공하기 위해서.

 

p.105 너는 내가 만나본 가장 훌륭한 바보야. 너는 실패할 거야. 실패함으로써 성공할 거야. 똑똑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보이기 때문에 실패하고, 그렇게 해서 비로소 성공할 거야. 세상은 알아주지 않겠지만, 결단코 알아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너는 너 자신이 성공한 걸 알 테니까. 』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의 불법적인 남극 횡단은 무모했기에 위기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전문가들이 철저히 준비해 시작한 탐험도 실패하기 마련인데 비전문가인 두 사람의 남극 탐험이라니, 그것도 그들 중 하나는 시각장앤이자 노인이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해버리려던 그들 앞에 말을 하는 북극곰(!)이 나타납니다. 하늘을 나는 펭귄 무리도 등장합니다. 그리고 위대한 실패자, 실패자들을 위한 안내자 섀클턴 경이 나타나나 그들을 이끕니다. 그렇게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남극 탐험을 이어나가지만 그들은 결국 실패하고, 실패함으로써 성공합니다. 그렇게 그들의 탐험은 끝이 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p.275 이렇게 전해주게. 끝나지 않는다면 시작할 필요도 없지만,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난다면 시작해야 한다고.』

 

이런 그들의 성장기와 인생사와 탐험기가, 아마 눈치채셨겠지만 모순 가득한 헛소리와 헛소리와 헛소리 속에서 전개됩니다. 딱히 즐겁고 유쾌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닌데, 아니 오히려 짠내나기 이를데 없는 그들의 인생이야기에 자꾸만 웃음이 나는 건 이런 말이 안 되지만, 또한 생각해 보면 말이 되는 그런 헛소리들 덕이었습니다. 말이 되는 일만 일어날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일도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게 우리 사는 인생사니까, 게다가 책 속 표현처럼 바른 말만 해야하는 세상이니, 이런 헛소리들 좀 해도 괜찮은 거 아니겠습니까?

 

p.196 이 세상은 정합성이 지배하는 곳이야. 쉽게 설명하자면 말이 되는 일만 일어나는 세상이라는 것이지. 사람이 죽을 수는 있어도 죽은 사람이 되살아날 수는 없어. 근데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도대체 뭐가 어쨌단 말이야. 말이 되는 일만 일어나는 세상이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야. 섀클턴 경이 내 앞에 나타난 것처럼. 사람들이 이 세상은 말이 되는 일만 일어날 수 있는 세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아니라고 하세. 왜냐하면 사람들이 모두 이 세상은 말이 되는 일만 일어날 수 있는 곳이라고 하면 누군가는 아니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네. 』

 

책을 읽는 내내 우리 인생의 이들의 남극 탐험과 다를 바가 뭔가 생각했습니다. 계속되는 위기와 고난의 연속, 그렇지만 결코 멈출 수 없는, 끝날 때까지는 끝낼 수 없는 영원 아닌 영원의 과정. 그렇게 유치환 시인은 사막을 노래했고, 이 작품 속 주인공들은 남극을 탐험했고, 우리는 우리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다른 어디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실패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때 우리 앞에 섀클턴 경이, 섀클턴 박사가, 말하는 북극곰이, 플라잉 펭귄이 나타나 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부디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진 맙시다. 왜냐하면 계속되는 실패들 속에서 우리는 결국 성공할테니까요. 어차피 따지고 보면 실패한 인생이라는 건 사실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일 테니까요.

 

p.126 어쩌자고 이런 세상에 태어났니. 참 안됐구나.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우리는 죽음의 먹이로 태어난 거니까. 자, 웃어보자고.

죽음의 먹이로 태어난 거야 그렇다 치고 왜 웃어야 되는 걸까. 나는 그 이유를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웃음이 나왔을 뿐이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

 

고양이를 잡아 먹은 오리로 처음 접한 작가 김근우, 처음 그의 작품을 읽었을 때 그의 이력이 눈에 띄었습니다. 장애로 인한 중학교 중퇴. 하지만 결국 작가로서의 성공. 결국 작가 또한 실패함으로써 성공한 인물이네요. 작품 속에서 '나'는 무명 작가인데(고양이를 잡아 먹은 오리에서도 그렇고 아마 실제 작가의 모습이 많이 투영된 인물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첫 두편의 소설이 문학상을 수상하고 이런 기대에 힘입어 이어 낸 3번째 작품은 졸작이라고 손가락질 받습니다. 이에 독자는 그 책을 찍어내기 위해 희생한 나무들에게 '나무야 미안해.'라고 사과를 하죠. 이런 표현을 빌려 작가는 후에 죽어서 희생당한 나무들에게 본인이 영혼을 담아 사과할 테니 독자분들을 그럴 필요가 없다고 밝히고 있던데, 저는 나무에게 그래도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나무야 너는 나무로서 나이테를 늘려가며 천년만년 살아가는 인생엔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이 멋진 책을 위해 종이로 재탄생 했으니 결국 성공한 인생이라고. 그런 너의 희생이 참으로 고맙다고.

 

p.294 미안해. 네가 반드시 들어야 하는 말, 누군가는 반드시 들려줘야 하는 말을 단 한마디라도 찾고 싶었는데 찾지 못했어. 어쩌면 그런 말은 남이 아니라 너 스스로 찾아야 했던 건지도 모르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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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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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배신하여 아버지를 죽음로 몰아간 어머니와 삼촌에게 복수의 칼을 가는 남자, 하지만 복수의 대상이 다름 아닌 어머니라는 사실에 고뇌하는 남자, 그리하여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갈등하다 결국 복수와 함께 자신 또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는 남자 햄릿. 그 오랫동안 전세계에인들에게 읽혀오고 사랑받아온 인물인 햄릿이 현대적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이언 매큐언이라는 거장을 통해서, 그것도 아직 세상밖에 태어나지도 못한 태아로 말이죠.

 

우리들의 현대적인 햄릿(아직 태아인지라 이름이 없으니, 그냥 햄릿이라고 지칭하겠습니다.)은 출산 2주를 앞둔 태아입니다. 그의 아버지 존은 이름없는 시인, 하지만 그에겐 그의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오래된 대저택이 있었고, 문화재적 가치를 가진 이 저택의 현금 가치는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리고 존이 사랑하고, 존을 사랑했던(과거형) 여인 트루디, 그러니까 햄릿의 어머니인 그녀는 이제 존을 사랑하는 대신 그녀에게 육체적 쾌락을 제공하는 존의 동생 클로드와 불륜 상태입니다. 트루디는 임신을 핑계로 존을 급기야 대저택에서 내쫓고 클로드와 이 집에서 밀회를 즐기며 이제 그들은 모종의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존을 처치하고 대저택을 팔아 돈을 챙기는 것. 그들의 모종의 계획엔 태아인 햄릿의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고, 이 모종의 계획들을 전부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햄릿은 고뇌에 빠집니다. 그리하여 햄릿 역시 트루디와 클로드를 파면시킬 수 있는 복수를 계획합니다.

 

굉장히 얄팍한 두께를 자랑하는 이 작품은 사실 줄거리를 정리하자면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리 쉽고 빠르게 읽히진 않습니다. 우리들의 햄릿이 태아인 주제에 매우 현학적이고 지적이며 냉소적이기 때문입니다. 트루디가 틀어놓는 팟캐스트를 통해 온갖 지식을 습득하고 세상사에 통달해 버린 햄릿은, 하여 만사에 시크합니다. 만사라 해봐야 존과 트루디와 클로드에 관한 것이 전부이지만 그들을 통해 인간사 전체를 통찰하는 능력이 있달까요? 이런 태아답지 않은 통찰력에 가끔은 웃음도 터지고 자주자주 동경의 시선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햄릿에 대한 독자로서의 제 주된 심정은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이었습니다.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에게서 부정당하는 존재. 아버지를 살해할 계획에 결코 자의는 아니지만 공범처럼 참여해 버리는 그의 상황. 아버지의 복수를 꿈꾸지만 복수의 대상은 다름 아닌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게 느끼는 그의 감정은 애증. 복수의 방법으로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모두 극단적인 것들 뿐. 그리고 그는 거듭 말하지만 아직 태어나기도 전인 태아. 이 모든 것들이 독자의 안타까움을 증폭시킵니다. 하긴 원작인 셰익스피어의 햄릿 자체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비극이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요. 하지만 원작이 비극인 걸 알고 때문에 이 작품 역시 비극이리라는 걸 짐작하면서도, 또한 한편으론 부디 비극이 아니길 바라게 되는 마음 역시 싹틉니다. 그래서 저는 작품을 읽어가는 내내 햄릿이 죽지 않길, 부디 죽지 않길 그렇게 바라고 또 바랐더랬습니다. 그리고 결국 결말은.............

 

셰익스피어 원작인 햄릿을 과거에 읽긴 했으나 좀 오래전의 일이라 큰 줄거리 외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원작과 패러디(?) 사이에서 줄타기 하며 얻는 큰 즐거움을 이 작품에서 찾기는 힘들었습니다. 이 작품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이 바로 그것이었을 텐데 이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 제 부족한 지식에 상당한 아쉬움이 남네요. 하지만 원작의 햄릿보다 저는 태아인 이 작품 속 햄릿이란 인물에 더욱 정이 갔으므로 책을 읽는 동안 잔재미에 집착하는 제게 넛셸은 충분히 로맨틱, 성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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