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 곰을 지켜라 웅진책마을 53
김남중 지음, 김중석 그림 / 우리교육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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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의 삼촌 김명석은 군대시절 자신이 발견한 주먹곰에게 관심이 많다. 그래서 독자적으로 연구를 해 왔었다. 사회에 나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자연의 친구들이란 회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주먹곰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의 친구들은 주먹곰에 관심을 갖게 된다. 회사는 방송사를 등에 업고 물량 공세를 펴가면서 주먹곰을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주먹곰 샘플 채취를 위한 출장에 강수와 우림이 따라가면서 이야기는 시작이 되고 있다.

주먹곰은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환경적 변이의 과정을 거친 반달곰의 후예라는 데서 이야기는 출발을 한다. 커다란 덩치였던 반달곰으로 살던 때는 호랑이 다음가는 맹수로 적이 별로 없었지만 주먹곰으로 변종이 된 상황은 많은 적들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이 된 상황이다. 어미 반달곰이 작아진 자식들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모습만을 보고 자란 주먹곰들, 살아남기 위하여 벌려야만 했던 치열한 삶에 눈물이 난다.

<주먹곰을 지켜라>를 보면서 내내 떠오른 것은 프랑수와 플라스의 그림책 <마지막 거인>이 었다. 희귀한 무엇이 존재하는 소문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거의 비슷하다.   귀하니까 선점을 하면 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론이든 학계든 기업이든 정부든 말로는 귀하니까 연구하고, 보호하고, 번식하고........ 온갖 말로서 포장을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궁극의 것은 돈이다. <주먹곰을 지켜라>에 나오는 자연의 친구, 방송국 오피디 이들이 찾고 있는 주먹곰은 단순히 곰이 아니라 돈이고 승진이다. 돈과 승진을 위하여는 그들은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결국 주먹곰을 놓고 이전투구의 모습을 보인다. 이에 강수와 우림이와 김명석은 주먹곰을 빼돌려 꼭지산에 숨겨두지만 언제까지나 꼭지산에 숨겨만 둘 수는 없다. 개발이라는 논리로 꼭지산도 이미 자연의 친구들이 눈독을 들였었고 정부는 개발책을 이미 발표한 상태다. 방송국의 오 피디와 김명석은 결국 방송을 이용하여 주먹곰을 지키고자 한다. 주먹곰이 살수 있는 공간 확보를 위하여 방송을 통한 캠페인을 열어 결국 꼭지산을 영구자연림으로 만들었고 거기서 주먹곰은 새끼를 낳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가 되고 있다.

동물학자 최재천 씨는

"자연에게 길은 곧 죽음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저 검푸른 열대 곳곳에 휑하니 길을 뚫고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저 깊은 숲 속에서 수백 년 동안 행복하게 잘 살던 거대한 나무들이 실려 나옵니다. 나무들이 사라진 벌거벗은 대지에는 더 이상 동물들이 살지 못합니다. 길은 우리 인간이 자연의 가슴에 내리꽂는 비수입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우리 인간들이 어떤 논리를 펴든 자연에게 인간은 최대의 적이다. 인간이 자연을 이용만 함으로써 요즈음에는 '환경의 역습'리란 말까지 할 정도로 자연으로부터 많은 피해를 입는다. 자연은 우리가 이용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 그 자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인간도 결국 자연의 한 부분이므로 자연과 동화되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들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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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아그네스 선생님 푸른동산 6
커크패트릭 힐 지음, 신상호 옮김 / 동산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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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하세요 아그네스 선생님>에는 알레스카의 사람들(어른들이나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그리듯이 펼쳐진다. 이곳의 아이들은 우리의 40~70년대 아동 문학에 나타나는 아이들의 모습처럼 일을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현실 속의 우리 아이들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물론 상황이 다르니 똑 같길 바랄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요즈음 우리나라는 일은 어른들이 하는 것이고 아이들은 공부만 하면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도 공부만이 자신들이 할 일이라고 듣고 또 들어 이제 자신들은 공부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 집안일을 돕는 것조차도 낯설어한다. 설혹 하게 되면 생색을 내거나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 현실이다. 공부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들도 우리 자신이 키우고 있으면서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찬다. 가족의 구성원으로 가족 내에서의 자기 역할을 하는 아이들을 보니 너무 예뻤다.

알레스카의 작은 마을에 선생님이 오지 않으면 힘들게 열은 학교가 문을 닫고야 마니까 선생님을 맞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지원자가 얼마 없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선생님들이 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긴 왔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선생님들은 작은 마을을 떠났다. 잠깐 머무르다 훌쩍 떠나는 선생님을 워낙 많이 보아왔던지라 아이들은 새로 선생님이 오면 '또 얼마나 있다가 갈까'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그런 마을에 비쩍 마른 여자 선생님이 오셨다. 동네 여자들은 모두 긴치마에 두꺼운 양말과 모카신을 신는데 선생님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마을 여자들이 바지를 입는 경우에는 아주 추운 날에 치마 속에 덧입을 뿐인데 다르다. 이제까지 자신들이 알던 것과는 다르다. 선생님 이름은 아그네스 서터필드. 영국에서 태어났고 오랫동안 알라카켓에서 근무를 했다고 했다.

아그네스 선생님은 오시자마자 교실 뒷 벽면을 다 덮을 정도로 큰 세계지도를 거셨다. 그리고 교실의 책상을 둥글게 늘어놓으라고 하셨다. 선생님 책상도 아이들 틈 사이에 끼워 넣는다. 사용하던 교과서를 상자 안에 넣었다. 성적표도 넣으면서 '성적이 전부가 아니다'라고 하셨다. 대신에 선생님은 새 연필, 새 색연필, 크레용, 미술용 연필, 물감, 붓, 도화지를 상자에서 꺼내 놓으셨다. 색연필, 크레용의 색을 물어보고  새로운 색을 가르쳐주고, 붓의 사용법을 가르쳐주고, 레코드플레이어에 음반을 얹어 음악을 듣고 ....... 아이들 하나하나를 살피고 아이들 하나하나에 맞는 교재를 선택하고 아이들에 맞는 교수법을 적용시키고.....  아그네스 선생님과 아이들은 그렇게 수업이 진행되었다. 기존의 틀을 깨고 아그네스 선생님만의 방식으로 수업은 진행이 되었다. 즐거운 학교, 개인의 특성과 능력을 인정 해 주는 선생님, 우리가 꿈꾸는 학교의 모습이 여기에 있다. 누구나 좋은 줄은 알지만 오늘의 현실에서 가능한 이야기일까 생각 해 본다.(아쉽게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오지의 작은 학교라는 전제하에, 한 선생님의 지도하에 한 선생님의 의지 하에 어떤 것을 목표로 했다면?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누구의 간섭 없이 나름대로의 교수법으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들(주고 싶은 것들)을 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읽고 쓰고 셈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가치관이 문제가 아니라 더 큰 세상에 나아가 다른 아이들과 경쟁력 있는 아이들로 키우고자 한다면 이 이야기는 꿈꾸는 이야기다.

아그네스 선생님을 보면서 나는 내 아이가 유치원 때 만났던 선생님을 생각했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한다. 비록 유치원의 아이들이지만 그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못하는 이야기가 없었다. 교보에서 자신이 읽었던 책에 대하여(그것이 딱히 그림책이나 동화책에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도 이야기를 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영화 음악에 대하여도(장르 불문하고)이야기를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자신의 남자친구와 어디를 가서 어떤 커피를 먹었는지도 이야기 했다고 들었다. 아이의 입을 통하여 들은 이야기는 책의 내용이 아니라 교보라는 서점에 책이 얼마나 많은지 책을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중에서 자신은 어떤 작가의 책을 샀고 책값은 얼마인가 하는 잡다한 이야기였고 어떤 음악을 어디서 들었으며 누구랑 들었고 그 음악에는 어떤 악기를 사용한 것 같고 느낌은 어땠는지 하는 것이었다. 커피를 마시면서는 커피의 종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데 자신이 마신 것은 어떤 종류며 어떤 향이 나고 카피는 어느 나라에서 많이 난다는 이야기 같은 것이었다. 선생님에게 교보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은 날은 아이는 자신도 교보에 가고 싶다고 했었고 음악에 관하여 들은 날은 악기와 소리에 대하여 관심을 보였다. 카피 이야기를 들은 날은 카피가 난다는 나라를 지도에서 찾아보았다. 실제 유치원 교육과정에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 아이는 잡다한 상식들을 갖추는 것을 보면서 한 인간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은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는 수다쟁이가 되라고 말을 한다. 건강한 수다 속에 상식을 담고 가치관을 담는다면 수다가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는데 동의 할 것이다. 아그네스 선생님의 파격적인 교육도 어쩌면 우리네 수다의 변형일지 모른다. 특성을 제대로 이해 한 수다가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교육이 되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리더스 가이드 이벤트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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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니 섬 아침이슬 청소년 1
시어도어 테일러 지음, 김석희 옮김 / 아침이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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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가 속한 환경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다.

태평양의 작은 섬 비키니섬 사람들 또한 그렇게 살아왔다.

너무 오지인지라 거의 외부와는 단절 된 채  조용히 살고 있었다.

가족들을 위하여 식량을 구하고 마을의 중대사는 투표로 결정되는 평화로운 마을, 바다 저쪽에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지만 그것은 그들과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일상은 그날이 그날처럼 오히려 단조롭기까지 했다. 1942년 일본 군인들이 비키니섬에 나타날 때까지 비키니 섬 사람들은 총을 본 사람조차 없었다.

그러나 외부에서 사람들이 총을 들고 들어오고부터는 평화가 지속 되지를 못했다.

 외지인들에게 원주민들은 원시인쯤으로 인식이 되었고 그들은 언제나 비키니 섬 사람들을 열등한 무리,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들로 취급을 했다. 그들은 섬사람들을 착취했고, 술 취한 군인들은 때때로 여자들을 요구를 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외지인은 억압의 대상이었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미군들이 비키니 섬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환호했다. 미군들은 이전에 자신들을 무시하며 자신들에게 무리한 요구만을 하던 일본군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군인들은 나눌 줄 아는 신사적인 사람처럼 섬사람들은 느꼈다.

어느 날, 죽은 줄로만 알았던 쏘리 리나무의 외삼촌 아브람이 비키니 섬으로 돌아왔다. 아브람은 오랜 동안 상선을 탔었기에 비교적 밖의 사정에 밝았고 영어가 가능했다. 때문에 라디오를 통하여 지금 밖의 사정이 어떤지, 전쟁이 지금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비교적 다른 섬사람들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그로 인하여 사람들이 얼마만큼 죽었으며 그곳의 참상이 어떤지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던 아브람은 일본이 물러나고 미군에 의하여 1946년 비키니 섬에서 행하여 질 핵실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섬사람들은 미군이 홍보하는 말을 그대로 믿었다.

미국은 섬사람들에게 말을 했었다.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여러분들을 구해냈다. 전쟁을 종식시키고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핵실험은 꼭 필요하다. 핵실험을 하는데 비키니 섬 조건이 가장 좋다.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여러분들은 협조를 부탁한다. 여러분들이 이주 할 곳은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다. 여러분이 이주 할 장소를 고르면 미국은 이주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다 해주겠다. 2년만 다른 으로 이주했다가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 와도 된다."

그러나 아브람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에서는 한 순간에 폐허가 되었고 사람들은 한 순간 죽어갔으며 살아있다고 해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질병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 핵 실험이 비키니 섬에서 실험이 되면 섬은 남아나지 않을 것이고 살아남더라도 예정에 자신들이 알던 비키니 섬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나의 정책이 입안이 될 때 정책을 입안하는 자들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정책에서 최우선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정책을 입안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입장만(정책)이 중요할 뿐이다. 자신의 정책의 실행을 위하여 그들은 최선을 다한다. 그 곳에(그 땅) 기대어 살던 사람들은 공권력에 의하여 자신들이 살던 곳을 떠날 수밖에 없다. 순진한 비키니 섬 사람들도 미국의 감언이설에 속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설혹 비키니 섬 사람들이 미국의 정책에 반대를 했을지라도 비키니 섬 사람들이 자신들이 기대 살던 땅을 떠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비키니 섬 사람들은 투표에 의하여 자신들이 기대어 살았던 땅과 바다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쏘리와 아브람은 비키니섬을 핵실험기지로 삼는 것에 반대하기 한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던 중 아브람은 죽게 되고 삼촌이 계획한 일을 쏘리는 자신을 이해 해주는 몇몇 사람과  계속 진행시킨다. 그들의 저항은 비키니 섬을 핵실험 기지화 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는 분명 실패를 했다.

그들이 주장했던 말들이 옳았다는 것을 비키니 섬 사람들은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되었다. 비키니 섬은 60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들이 알던 예전의 비키니 섬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은 어떻게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킬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묻는 것이었다는 것을. 비키니 섬에 대하여 미국은 이젠 돌아가 살아도 좋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쉽게 돌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섬 여러 곳에 흩어져 지금도 살고 있다고 한다. 인간들에 의하여 한번 훼손이 된 자연은 아직도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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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 행운돼지 즐거운 책방 1
김종렬 지음, 김숙경 그림 / 다림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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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마을에 전단지 한 장이 뿌려졌다.

“진달래 시민 여러분!

길모퉁이 행운돼지로 오십시오.

커다란 행운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행운돼지에 있는 물건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돈은 한 푼도 받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행운돼지”

"원한다면, 행운돼지에 있는 물건을 공짜로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다"

물건을 공짜로 가질 수 있다는 솔깃한 문구! 처음엔 그 것이 가진 파괴력의 의미를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우리 주변에서 개업식에서 나누어주는 싸구려 플라스틱 바가지 하나 얻기 위하여 긴 줄을 서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면 가게 안에 있는 물건을 무엇이든 공짜로 준다는 말은 파격이다.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다는데……. 외상도 아니고 공짜라잖아? 다른 사람들이 좋은 것 다 가져 가기 전에 나도…….' 사람들의 처음 심리는 그랬을 것이다.

어라? 하루에 딱 열 사람에게만 행운을 준다. 가게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가지고 온 물건들을 보니 입이 딱 벌어진다. 사람들은 자신들도 앞선 행운의 주인공이 꼭 되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된다. 아니 다른 사람들에 한발 앞서 그 행운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몸살이 났다.

긴 줄 사이로는 사람들의 팽팽한 긴장감이 돈다. 행여 누군가 자신의 행운을 가로채지 않을까, 누군가 끼어들어 행운의 순서가 뒤쳐질까 두렵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행운의 순서가 뒤바뀔까 엄마와 아빠가 바턴터치 식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이들은 긴 줄에 대고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웃지 못 할 촌극이 벌어지고 있지만 어른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행운 잡기에 열을 올리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드디어 주인공의 부모님도 오랜 줄서기 끝에 물건을 복제하는 항아리를 얻게 된다.

그 항아리를 사용하는 것을 본 주인공은 자기의 부모들이 이전에 행운을 얻은 사람들과 표정이랑 모습이 비슷해 져 가는 것을 느낀다. 뭘까? 이 껄끄러운 느낌은? 그래, 행운돼지 가게 앞의 동상의 모습과 닮아가는 부모님. 제발 그만 멈춰주었으면 해서 말려도 보지만 부모님에게 아이는 이미 안중에도 없다.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을 시험해 보고 즐기는 데만 관심이 있다. 부모님들이 행운을 탐닉하면 탐닉할수록 자신들의 본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이는 안타깝게 바라 볼 수밖에 없다. 주인공은 두렵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어떻게 해야만 할까? 되돌리고 싶다. 행운이라고 믿었던 항아리를 가지기 전으로. 그래, 모든 것은 그 행운돼지로 부터다. 거기에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답이 있긴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의 답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부모님이다. 보모님들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조건을 갖추어 놓고 기다려 보지만 부모님은 마치 "우린 이 행운을 영원히 지킬 것이야."하듯 아이가 만들어 논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않는다. 아이는 어떤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 했을까?


모든 불행이 행운 돼지에게 있다고 따지는 주인공에게 행운돼지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 행운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행운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요. 대부분 작은 행운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욕심을 부리고 맙니다. 욕심 때문에 자신이 점점 행운과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까마득히 모르면서 말이지요." 라는 답을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행운? 욕심이 행운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한다고?

또 행운 돼지는 이런 말도 했다.

"제가 오기를 간절히 바란 건 사람들입니다. 마음속에서 자라는 욕심이 저를 불렀지요. 저는 단지, 원하는 사람들에게 행운을 나누어 드렸을 뿐입니다."

그러니 모든 책임은 행운돼지인 내게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인간들에게 있는 것이다? 세상엔 공짜란 없다는 법, 행운도 그것을 관리 할 줄 아는 사람에게나 행운이지 그것을 관리 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불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이 책을 읽고 내 아이는 소재 면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닮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주제 면에서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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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임마꿀레
임마꿀레 일리바기자 외 지음, 김태훈 옮김 / 섬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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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내부에는 선악이 공존하고 있다. 공존하는 선, 악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로 비집고 나오려고 한다. 상황에 따라 선이 앞서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악이 전면에 나서기도 한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전면에 보이는 것뿐이다. 따라서 사람에 대한 평가는 선, 악 중에 어떤 것이 전면에 있을 때 보았느냐하는 것이다. 임마꿀레 일리바기자에게도  어제까지의 다정한 이웃이 생명을 위협하는 완전한 적으로 돌변한 이야기를 <내 이름은 임마꿀레>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남에 어느 날 갑자기라는 것은 없다. 대기 중에서 작은 물 분자들이 뭉치고 뭉쳐 더 이상 그 무게를 감당 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주변의 환경에 의하여 비로든, 우박으로든, 눈으로든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듯 르완다의 문제 또한 많은 문제점들을 이미 갖고 있었기에 다정했던 이웃이 적으로 돌변한 사건은 하루아침의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일은 당연한 수순을 밟은 것뿐, 별반 놀랄 일도 아니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당연한 수순을 밟는 것이지만 개인사에는 느닷없는 일, 뜬금없는 일처럼 느껴지고 더 혹독하게 느껴질 수 있다.

르완다의 문제는 이미 벨기에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안고 있었다. 르완다는 과반수의수를 훨씬 넘기는 후투족과 투치족 및 기타 민족으로 구성이 된 나라다. 외부의 물리적인 힘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힘의 균형 내지는 질서를 지키면 그다지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르완다는 벨기에 식민지를 거치면서 벨기에식민정책 일환으로 일방적으로 투치족을 우대하다가 투치족이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다시 후티족을 지원하는 식의 식민정책은 두 종족간의 갈등의 골을 심화시킨다. 그 갈등들이 불거져 나온 것이 바로 르완다 내전이다. 한 마을에서 사이좋은 이웃으로 , 학교에서는 동기 선후배로 살아온 이들이 어떻게 집단 학살이라는 광기에 휩싸이게 되었을까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반신반의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우리는 종종 나와 다른 사람을 구분 짓는다. 마찬가지로 집단에 있어서도 ‘우리’라는 집단과 ‘다른 집단’을 편을 갈라서 배타적인 모습을 보인다. 거기에 이권이 개입이 되어 있다면 충분히 있을 법 한 이야기다.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정말 없었으면 하는 우리의 바람은 인간이 저지르는 악행이 인간답지 못하다는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싶어 하는 본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고 혼자는 본성에 따라 살 가능성이 많지만 일단 집단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인간은 참으로 나약한 존재다. 혼자 있는 것을 겁내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인간은 집단을 이룬다. 단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단체가 요구하는 요구사항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르완다 후투족들도 그랬을 것이다. 선동자가 선동하는 대로 쉽게 사람들은 흔들린다. 집단 안에서 생각은 필요가 없다. 누군가 선동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배신자로 낙인찍어 집단으로부터 영원히 제거 시킨다. (히틀러가 그랬고, 무솔리니가 그랬다) 그들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다. 동물이나 바퀴벌레쯤으로 인간을 생각한다. 반드시 없애야 할 대상 일뿐 그들이 죽이는 것이 인간이라는 개념은 없다. 집단의 광기 속에 있는 자들에게 인간의 자애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들은 이미 생각하는 힘을 잃었기 때문에 스스로도 인간이라는 생각이 없다. 내가 없고, 내 생각이 없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집단. 집단의 명령, 규율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비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다다수가 집단의 광기에 휩싸여 무자비한 살육의 잔치를 벌이는 중에도 아주 극히 일부의 인간의 이성이 남아 있는 자들은 비밀리에 투치족을 돕는다. 광기에 휩싸인 자들에게 알려지면 그들의 목숨도 장담을 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그 속에 임마꿀레 일리바기자 많은 투치족은 은둔의 생활에 들어 간다. 은둔 생활 중에 임마꿀레 일리바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에 대한 걱정, 살육현장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대한 분노와 절망만이 임마꿀레의 것이었다.  왜 우리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하느냐고,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하느님에게 항의도 해봤다. 살려달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임마꿀레는 기도하고 기도했다. 기도를 하면서 임마꿀레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 자신은 하느님의 보호 하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살아남은 임마꿀레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생각한다.

원제<Left to tell>가 의미하듯 르완다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세상에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왜 임마꿀레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었을까?

임마꿀레가 신앙으로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면 벌어지는 현상에 대하여 원망과 분노만을 터트리지 않는다. 그녀는 보복을 꿈꾸지 않는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평화'였다. 보복은 또 다른 피를 부른 다는 것을 아는 임마꿀레는 용서의 신성함을 믿고 따르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용서가 세상에서 젤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자고 임마꿀레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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