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임마꿀레
임마꿀레 일리바기자 외 지음, 김태훈 옮김 / 섬돌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인간의 내부에는 선악이 공존하고 있다. 공존하는 선, 악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로 비집고 나오려고 한다. 상황에 따라 선이 앞서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악이 전면에 나서기도 한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전면에 보이는 것뿐이다. 따라서 사람에 대한 평가는 선, 악 중에 어떤 것이 전면에 있을 때 보았느냐하는 것이다. 임마꿀레 일리바기자에게도  어제까지의 다정한 이웃이 생명을 위협하는 완전한 적으로 돌변한 이야기를 <내 이름은 임마꿀레>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남에 어느 날 갑자기라는 것은 없다. 대기 중에서 작은 물 분자들이 뭉치고 뭉쳐 더 이상 그 무게를 감당 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주변의 환경에 의하여 비로든, 우박으로든, 눈으로든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듯 르완다의 문제 또한 많은 문제점들을 이미 갖고 있었기에 다정했던 이웃이 적으로 돌변한 사건은 하루아침의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일은 당연한 수순을 밟은 것뿐, 별반 놀랄 일도 아니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당연한 수순을 밟는 것이지만 개인사에는 느닷없는 일, 뜬금없는 일처럼 느껴지고 더 혹독하게 느껴질 수 있다.

르완다의 문제는 이미 벨기에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안고 있었다. 르완다는 과반수의수를 훨씬 넘기는 후투족과 투치족 및 기타 민족으로 구성이 된 나라다. 외부의 물리적인 힘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힘의 균형 내지는 질서를 지키면 그다지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르완다는 벨기에 식민지를 거치면서 벨기에식민정책 일환으로 일방적으로 투치족을 우대하다가 투치족이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다시 후티족을 지원하는 식의 식민정책은 두 종족간의 갈등의 골을 심화시킨다. 그 갈등들이 불거져 나온 것이 바로 르완다 내전이다. 한 마을에서 사이좋은 이웃으로 , 학교에서는 동기 선후배로 살아온 이들이 어떻게 집단 학살이라는 광기에 휩싸이게 되었을까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반신반의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우리는 종종 나와 다른 사람을 구분 짓는다. 마찬가지로 집단에 있어서도 ‘우리’라는 집단과 ‘다른 집단’을 편을 갈라서 배타적인 모습을 보인다. 거기에 이권이 개입이 되어 있다면 충분히 있을 법 한 이야기다.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정말 없었으면 하는 우리의 바람은 인간이 저지르는 악행이 인간답지 못하다는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싶어 하는 본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고 혼자는 본성에 따라 살 가능성이 많지만 일단 집단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인간은 참으로 나약한 존재다. 혼자 있는 것을 겁내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인간은 집단을 이룬다. 단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단체가 요구하는 요구사항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르완다 후투족들도 그랬을 것이다. 선동자가 선동하는 대로 쉽게 사람들은 흔들린다. 집단 안에서 생각은 필요가 없다. 누군가 선동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배신자로 낙인찍어 집단으로부터 영원히 제거 시킨다. (히틀러가 그랬고, 무솔리니가 그랬다) 그들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다. 동물이나 바퀴벌레쯤으로 인간을 생각한다. 반드시 없애야 할 대상 일뿐 그들이 죽이는 것이 인간이라는 개념은 없다. 집단의 광기 속에 있는 자들에게 인간의 자애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들은 이미 생각하는 힘을 잃었기 때문에 스스로도 인간이라는 생각이 없다. 내가 없고, 내 생각이 없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집단. 집단의 명령, 규율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비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다다수가 집단의 광기에 휩싸여 무자비한 살육의 잔치를 벌이는 중에도 아주 극히 일부의 인간의 이성이 남아 있는 자들은 비밀리에 투치족을 돕는다. 광기에 휩싸인 자들에게 알려지면 그들의 목숨도 장담을 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그 속에 임마꿀레 일리바기자 많은 투치족은 은둔의 생활에 들어 간다. 은둔 생활 중에 임마꿀레 일리바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에 대한 걱정, 살육현장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대한 분노와 절망만이 임마꿀레의 것이었다.  왜 우리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하느냐고,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하느님에게 항의도 해봤다. 살려달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임마꿀레는 기도하고 기도했다. 기도를 하면서 임마꿀레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 자신은 하느님의 보호 하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살아남은 임마꿀레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생각한다.

원제<Left to tell>가 의미하듯 르완다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세상에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왜 임마꿀레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었을까?

임마꿀레가 신앙으로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면 벌어지는 현상에 대하여 원망과 분노만을 터트리지 않는다. 그녀는 보복을 꿈꾸지 않는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평화'였다. 보복은 또 다른 피를 부른 다는 것을 아는 임마꿀레는 용서의 신성함을 믿고 따르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용서가 세상에서 젤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자고 임마꿀레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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