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 남편이 장미 서른 송이를 사왔다. 꽃보다 현금이라고 주장해서 용돈도 받았다. 저녁에는 작년 크리스마스에 샀던 트리에 불을 밝히고 눈사람 인형도 옆에 세워놓았다. 특별히 외출을 계획하지는 않았다. 배가 불러오는 이유도 이유지만 요즘 밖에 자유롭게 나다니지 못하는 이유는 앞머리 때문이었다. 파마약 냄새 나는 미장원에 가기 싫어서 집에서 앞머리를 좀 정돈해 보려고 했는데 남편이 본인이 깎아주겠다고 나섰다. 손재주가 있어 믿고 맡겼는데 이게 웬 걸! 금방 못난이 인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예쁘다고 억지를 부리는 남편에게 욕을 해주고는 어서어서 부지런히 길러서 미장원에 가야겠다, 마음먹고 있었다. 어느 정도 앞머리가 내려와서 미장원에 갔는데 남편이 이렇게 깎아놓았다고 했더니 미용실 언니 포복절도. 주변에서 머리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 파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미용실에서도 권하지 않고 출산 이후로 미뤘다.

  그래도 앞머리도 잘랐겠다, 미용실에서 드라이도 해줬겠다, 간만에 신경 쓴 것 같아서 <아바타>를 보러 갔다. 3D로 봐야한다는 일념 하에 전 좌석 매진인 상영관에 갔는데 밀폐된 공간에서 두꺼운 옷을 입은 숱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니 숨이 턱턱 막히더라는. 영화 초반에는 생각보다 지루해서 잠깐 졸기까지 했다. 하지만 영상도, 스토리도, 메시지도, 그간에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영화였다. <늑대와 춤을>, <매트릭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 여러 가지 영화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들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웰빙 SF, 자연주의 블록버스터라고나 할까. 무성한 입소문처럼 굉장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신선한 상상력이나 예상 밖 해피엔딩도 그렇고,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좋을 것 같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이면 직장 동료나 친구들 선물 위주로 생각했는데 올해는 엄마를 위해 냉장고를 질렀다. 친정집에 십년 넘은 냉장고가 있는데 문도 헐거워지고 냉동실도 좁아서 엄마가 그 동안 불편해 하시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앞으로 몇 년은 더 쓸 수 있다며 절대로 바꾸지 않으실 기세였다. 냉장고 리터로 치자면 우리 집에 있는 것이 훨씬 더 큰데 대부분의 음식을 친정집에서 얻어다 먹고 있으니 항상 죄송한 마음이 있었다. 장모님이 해주신 일 년치 반찬값에 한참 못 미친다며 남편은 손수 냉장고를 고르고 계산했다. 엄마는 얘들이 무슨 짓을 한 거냐며 펄쩍 뛰셨지만 이미 결제하고 배달 예약까지 해놔서 소용 없다고 잘라 말했다. 따지고 보면 다 우리를 위한 일이다. 엄마가 언제 당신만을 위해 장을 보고 요리를 하신 적이 있었던가. 그래도 어쨌거나 남편이 장한 일을 했으니 나도 이번 시어머니 생신 때 신경 좀 써야겠다. 

  작년에는 둘 다 논문 쓴다고, 올해는 무거워진 몸 때문에, 항상 계획만 하고 있는 겨울 여행은 가지 못했지만 조촐하게 보내는 크리스마스에 별다른 아쉬움은 없다. 어쩌면 둘이서 조용하게 보내는 크리스마스도 올해가 마지막인지 모른다. 트리와 눈사람 인형이 제자리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크리스마스를 나는 것도. 끝나가는 연휴를 아쉬워하지 않으며 이렇게 푹 쉴 수 있는 겨울도. 새 달력을 걸고 새 탁상달력에 동그라미도 쳐놓았다. 얼마 남지 않은 한 해를 잘 마무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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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12-27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벌써 몇년째인지 몰라요..
마님이 크리스마스와 신정때 호두까느라 집에 매일 밤 11시에 들어오니까요..흑흑.

깐따삐야 2009-12-28 11:06   좋아요 0 | URL
참! 마님이 이맘때쯤 가장 바쁘시구나. 그래도 덕분에 멋진 공연 보시잖아요. 좋으시겠다.^^

2009-12-27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8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8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9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상상했던 서른과는 조금 달랐지만 올 한해도 비교적 무탈하게 보냈다. 언젠가 친구와 재미로 색깔사주란 것을 본 적이 있다. 영화관 앞 한 평 남짓한 간이건물에서 수다쟁이 색깔도사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는 그때 내 인생의 정점은 지났다는 듯 말했었다. 그리고는 평범하게 흘러가는 인생이 요즘 같은 시대에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내 인생에 과연 정점이 있긴 있었나? 내 직업과 내 성격 상,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올 한해 학교에 복직해서 여름까지는 정말 바쁘게 보냈다. 군단위의 작은 학교에 근무하다가 대학원으로, 다시 도시의 큰 학교로 복직했을 때 처음에는 다소 혼란스러웠다. 항상 어디에나 장단은 있는 법. 시골 아이들이 학구열은 낮은 반면 정감 있는 행동들로 감동을 주었다면, 도시 아이들은 매사 열심이면서도 이기적인 말 한 마디로 확 거리를 두게 만드는 대비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아이들을 지도하는 교사나 학부모도 마찬가지였다. 콩 심은 데 팥 나겠나. 아이들이 그러한 부모와 교사들의 언행을 무의식중에 답습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미안한 것은, 담임이 자꾸 바뀌어서 우리 반 아이들에게 혼란을 주었던 점. 지금 그 아이들을 대신 맡고 계신 기간제 선생님을 보면서 느낀 것도 많다. 임시 담임을 하는 내내 교탁에 예쁜 화병을 갖다 놓고 아이들에게 잔치도 열어주셨다. 아무 걱정 없이 쉴 수 있었던 것도 선생님 공이 크다. 나와 동갑이지만 그 순수하고 열성적인 마음에 존경심이 절로 일었다. 그런 분들이 학교 현장에 많아졌으면 좋겠다.

  결혼생활도 그럭저럭 꾸려왔다. 남편은 나에게 많이 변했다고 한다. 예전 같으면 절대 이쯤에서 끝나지 않을 문제도 지금은 어느 순간 입을 다물어 버린다나. 내가 뒷심이 없어 포기가 빠른 건지, 더 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버려 체념하기 시작한 건지, 다툼은 과거보다 줄었지만 그렇다고 내 기분이 썩 좋아진 것은 아니다. 그는 성실하긴 하지만 훌륭할 정도는 아니고 나 역시 크게 꼬투리 잡을 데는 없을지라도 함께 살기 무난한 성품은 아니다. 자꾸 마모되다 보면 둥글어지기도 하는 것인지 이제는 왜? 라며 고개를 바짝 쳐들 때 보다 그래그래, 하고 넘어갈 때가 더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엄마 목소리를 식별한다는 뱃속의 아기를 생각하면 청소기 돌리는 소음 이외에는 오로지 좋은 소리, 고운 말만 들려주고 싶기도 하다. 이따금씩 너도 알 건 알아야 해,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그런 주장을 핑계로 목소리를 높일 때도 있지만.

  책을 많이 읽는다고 좋은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는, 어쩌면 당연한, 그러나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깨달음 하나. 부모님으로부터, 친구들로부터, 심지어 남편에게까지 들었던 말. 너는, 깐따삐야 너는, 당신은, 책을 노상 읽으면서도... 어떻게... 오버인지는 몰라도 그러한 비판은 일말의 수치심까지 들게 했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책을 읽는 줄 아냐, 라고 반박하기에는 어딘지 께름칙한 기분. 좋아하는 책을 읽는다고 좋은 사람이 되지는 않지만 필요한 책을 읽으면 희망이 있는 것도 같다. 아픈 곳이 낫고 무럭무럭 성장하려면 때로는 쓴 약, 입에 맞지 않는 음식도 섭취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간혹 아, 이 책 재밌겠는데, 가 아니라 이 책은 나 같은 사람이 읽어야 되는데, 싶은 책들이 있다. 책 많이 읽고도 하나도 안 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으면, 스스로 사랑해 마지않는 취미에 오욕을 남기고 싶지 않다면, 지적 허영이나 호기심, 단순한 흥미를 떠나 전략적, 성찰적 독서가 필요한 것 같다.

  며칠 전, 영화 <파주>를 보면서 생각했다. 사람은 참 약하고, 비겁한 존재구나. 죄의식에 시달리다가도 쉽게 용서를 구하고, 잡히지 않아 열망하던 것들에 대해 다시 쉽게 실망하고 도망치고... 모든 다채로운 감정과 이성적 판단에 앞서 살아가는 일, 삶이 우선이기 때문일까. 언젠가부터 전혀 간을 하지 않은 음식처럼 내 삶이 밍밍해졌음을 깨달았을 때 나이를 먹는구나, 라는 느낌 한켠에는 내가 이제 제대로 비겁해지고 있구나, 하는 씁쓸한 자각. 어떤 문학작품들은 마지막 불씨를 태우듯 서른을 불사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간의 세월동안 구축해놓은 틀 안에서는 그 무엇도 도화선이 되지 못하더라는. 영화에서 김중식(이선균 분)은 말한다. 자꾸 할 일이 생겨. 그는 학생일 때는 학생운동을 하고 사회로 나오자 사회운동을 한다. 자꾸 할 일을 만듦으로서 정체성을 찾고 속죄를 하고. 아무것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지만 그것이 삶의 누추함과 지루함을 견디는 그의 삶의 방식이다. 내 눈에는 그 또한 비겁한 삶의 방식.

  내게는 이제 더욱 평범해지는 일만이 남은 것 같다. 수다쟁이 색깔도사가 말한 것처럼. 그때는 그 말이 어쩐지 섭섭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부디 그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죽음’을 잊고 살 때가 많은데 베푸는 것은 관두고서라도 그저 주변에 빚 많이 안지고 떠날 수 있는 생이었으면, 하는 바람.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상상을 하더라도 결국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한 자리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현실. 나는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했지만, 영원히 어른아이로 머물더라도, 반드시 숙제를 끝내고나서 놀러나가는 순진한 초등학생 같은 마음가짐만큼은 변함없이 가지고 갔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 비겁함과 맞바꾸는 최고의 약속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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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12-23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파주를 보며 그냥 '불쌍한 인생들' 이 자꾸만 떠올랐다는.. 하지만 그 영화에서 건진 건 '서우'라는 배우에요. 형부를 사랑하지만 감정이 뒤얽혀버린 연기를 너무 기가막히게 해주는지라..더불어 책 많이 읽는다고 똑똑하고 현명해지지 않는다.. 이것 역시 요즘 제가 느끼는 명제 중에 하나라는..^^

깐따삐야 2009-12-27 15:00   좋아요 0 | URL
저는 그 영화 속 주인공들이 참 싫었어요. '서우'의 연기는 단연 돋보였죠. 이선균에 대해선 조금 실망. 책도 많이 읽어야 할 나이가 있는 것도 같고. 저 자신이 매너리즘에 빠진 것도 같고 그러네요.^^

레와 2009-12-24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새해 다짐을 '무뎌지지 말자!'로 정했어요. ^^

쿵당쿵당 가슴 뛰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깐따삐야 2009-12-27 15:02   좋아요 0 | URL
좋네요. 무뎌지지 말자! 제게도 필요한 다짐이에요.
전에는 별 거 아닌 일에도 급흥분하고 가슴 뛰고 그랬는데 말이죠.^^

웽스북스 2009-12-26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의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위무였음을 깨닫게 되는 일이 많지요. 파주, 저도 꼭 보고 싶네요. 흑.

사실 이 연말일기를 쓰자는 태그를 보고 저도 뭔가좀 써보고싶은데 슬렁슬렁 아무래도 그냥 지나가게 될 것 같아요. 흐흐. 깐따삐야님. 우리 새해에는 글로 좀더 자주 만나요.

깐따삐야 2009-12-27 15:05   좋아요 0 | URL
그쵸? 그나저나 영화가 좀 어두워서 보고 나면 꿀꿀해져요.

작년에는 서로 이런저런 변화를 맞느라 그랬는지 이야기를 많이 못했죠. 정말 올해는 더 많이, 자주 봐요.^^


Mephistopheles 2009-12-27 15:07   좋아요 0 | URL
또 누가 압니까 웬디양님과 깐따님이 자주 수다를 떨면 메피스토가 간장게장 쏠지...(먹는 걸로 미끼 던지는 중)

깐따삐야 2009-12-29 17:28   좋아요 0 | URL
대체 언제적 간장게장인지 가물가물~ 지금은 왠지 냉면이 먹고 싶어요!
 

#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 해 겨울, 주기도문도 채 외우지 못하던 나는 꼬박꼬박 교회에 나갔다. 오빠, 그리고 매일 함께 놀던 동네 언니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매년 구세군에서 준비하는 크리스마스는 마을 아이들의 축제였다. 그 날 밤, 오빠는 촛불을 들고 무언가를 낭송했고 나는 옆집 기옥이 언니와 울면 안 돼, 춤을 추었다. 너는 너무 어려서 안 돼. 처음에는 노래도, 춤도, 아무것도 시켜주지 않았는데 누군가 한 명이 빠지게 돼서 그 역할을 내가 맡게 되었다. 언니들이 울긋불긋 화장을 해주었고 하얀 스타킹에 발레복처럼 생긴 무용복도 입었다. 춤을 추다가 날아갈 것만 같았다. 무대 아래에는 엄마가 와 있었다. 엄마는 내가 깜찍하게 춤을 잘 추었다고 뿌듯해 하셨다. 근데 엄마, 왜 다 함께 기도합시다, 할 때 엄마만 눈 안 감았어? 엄마는 기도 안 했어. 내가 보기엔 기도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 엄마였는데 엄마는 참 담담하게 말했다.

#
  잠결에 깨어보니 아빠가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빠가 내 코 밑에 닭다리를 갖다 대고 간질이고 있었다. 냄새 맡고 일어날 줄 알았어. 밤늦게 퇴근한 아빠가 치킨과 아이스크림을 사오셨다. 아빠가 사온 치킨은 호프집에서 맥주 안주용으로 바짝 튀긴 통닭이었다. 엄마는 아빠의 늦은 퇴근과 나의 소아비만을 걱정했지만 나는 아빠가 술 한 잔 하고 통닭을 사오는 겨울밤이 참 좋았다. 방안에 솔솔 퍼지며 깊은 잠도 깨우던 고소한 통닭 냄새.

#
  그 날, 동아리 건물 앞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었다. 기숙사 근처에서 Y와 K가 내 이름을 부르며 올라왔다. 방학 중의 만남이 반가워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신나게 이야기를 하는데 어라, 멀리서 느릿느릿 걸어오는 저 사람. D선배였다. 친구들이 먼저 알아보곤 호들갑을 떨었다. 따뜻한 캔커피를 뽑는다, 동아리방으로 올라간다, 선배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네 선배라는 남자, 하체가 너무 부실한 것 아니냐는 K의 농담에 구박을 날리며 잔뜩 붉어진 얼굴로 그 자리를 떠났다. 눈발이 폴폴 날리던 추운 날이었는데 주변의 찬 공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
  눈 오네요! 산성의 굽이진 길을 따라 올라갔다. 굳이 걷자는 이유는 뭔가. 구두창이 미끄러웠지만 그의 손을 잡거나 팔을 붙잡거나 하지는 않았다. 조심해요, 라며 내 팔을 붙잡은 건 그였다. 추위와 긴장으로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고 넘어지기라도 하면 우스울까봐 되도록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계획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고 그럼에도, 거리 한번 좁혀보겠다고 이 추운 날, 이러고 있는 남자에 대해 웃음이 났다. 눈을 기다리는 이유도 참 여러 가지다.  

#
  오늘은 올해 들어 가장 많은 눈이 내린 날. 슈가 파우더를 흩뿌려놓은 듯한 달콤한 경치 감상도 잠시. 가족의 출근길과 외출이 염려되는 날씨였다. 채 눈이 녹지 않은 오전에는 꼼짝도 안하고 집에서 김치부침개를 부쳤다. 볕이 들기 시작한 오후에는 아크릴판으로 뭔가를 제작 중인 남편이 공구를 산다길래 마트에 따라갔었다. 딸기가 먹음직스러워 보여서 한 팩 샀는데 기대보다는 단맛이 덜했다. 주말 오후라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 그나저나 요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는 듯, 어쩐지 다리로 걷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걷는 것 같은 느낌이다. 머잖아 내가 발을 떼는 순간,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서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겠지.-_- 어제는 눈도 오고 하여 <크리스마스 캐롤>을 보러 갔는데 디테일이 훌륭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전에 지나치게 충실한 것이 흠이었다. 매우 교훈적인 호러 무비라고 볼 수 있음. 관객은 딱 네 명. 아, 내 안에 한 사람 더. 이제는 오래 같은 자세로 앉아 있기도 힘들고, 눈이 와도 호젓한 기분에 젖기보다 나와 주변 사람들의 안위를 더 염려하는,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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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12-19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도 기억이 나요. 아침에 인근 초등학교에서 받는 민방위 훈련에 늦어 눈길 내리막 길을 내려가다 미끄러져 2미터 정도 공중부양했다 그냥 철푸덕 떨어졌던 기억이..2분 기절했던 기억도 모락모락...이래서 눈오는 날엔 배수구 트랜치 잘못 밟으면 비명횡사한다는 소리를 직접 체험했어요...

깐따삐야 2009-12-21 10:51   좋아요 0 | URL
상상만 해도 아찔! 눈 오는 날은 아무리 바쁘셔도 찬찬히 걸어야 해요. 저도 출근길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옷을 다 버려 다시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BRINY 2009-12-19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2000년 겨울인가 엄청난 대설이 왔을 때가 기억나요. 여기가 서울이냐 알래스카냐!하고 외치던 때요. 도로와 인도 구별도 안가고, 테헤란로에 차도 안다니고, 아파트 단지 쪽문 들어서다가 휙 미끄러져서 간신히 기둥붙잡고 살아났던 일

깐따삐야 2009-12-21 10:55   좋아요 0 | URL
어제도 대낮인데도 인적이 드물더라구요. 바람은 차고 길은 꽁꽁 얼어붙고.
항상 그런 상황에서는 창피해서 아픈 내색도 못하고 반짝 일어나곤 하죠. 저도 잘 넘어지는 편이라 그런 경험 많아요.ㅋㅋ

웽스북스 2009-12-20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육점인지 닭집인지 앞에서 기다렸다 은박 비닐 봉투에 담아와서 먹던 기름이 흥건하던 그 닭맛, 닭냄새가 막 그리워져요. 물론 요즘 굽네치킨 같은 닭들, 엄청 세련되고 맛있지만, 기다림, 설렘, 뭐 이런 것들이 그 때 그 닭을 따라올 수 있을까 싶기도 해요. 저 수많은 내용중에 먹을 거에 집착하는 웬디씨 ㅋㅋㅋ

깐따삐야 2009-12-21 10:59   좋아요 0 | URL
기름 좔좔 시장닭 맛을 어떻게 잊겠어요. 하여간 양도 되게 많았었는데. 요즘 치킨 광고들 보면 저 숱한 치킨집이 장사가 다 되긴 되는걸까, 싶을 정도로 정말 다양해졌죠. 아, 언제쯤 치킨에 맥주 한잔 할 날이 올지 모르겠어요.ㅠ
 



   화려한 음식의 향연이나 자극적인 장면 하나 눈에 띄지 않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의 풍미를 돋우는 것은 메릴 스트립과 에이미 아담스라는 걸출한 두 여배우였다. 어느 시공간, 어느 역할에 갖다 놓아도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 사람이었던 것처럼 관객의 오감에 쏙쏙 스미는 연기를 보여주는 메릴 스트립, 한편 <박물관이 살아있다>에서 용감하고 발랄한 비행사로 출연했던 에이미 아담스는 이 영화에서 매우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요리 블로거로 변신했다. 두 사람은 영화 속에서 한 번도 만나지 않지만 각자의 서로 다른 사연과 매력으로 관객에게 어필한다.

  줄리아 차일드(메릴 스트립 분)는 남편을 따라 파리로 건너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다가 미국인을 위한 프랑스 요리 레시피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요리로 인정을 받고 책을 내기까지 갖가지 우여곡절을 겪지만 항상 변함없는 마음으로 자신과, 자신의 음식을 지지해주는 남편의 사랑으로 어려움을 극복한다. 두 사람에게는 아이가 없다는 아픔이 있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준비하는 줄리아와 그런 줄리아를 더욱 따듯한 마음으로 보듬는 남편의 모습은 다채로운 레시피보다 더 빛을 발한다.

  한편 2천년대 뉴욕에 살고 있는 줄리 파웰(에이미 아담스 분)은 작가가 되려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매일매일 따분한 공무원으로서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 온종일 상담 전화를 받다가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다양한 요리를 만드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낙이다. 줄리의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던 남편은 블로그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고 그녀는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 레시피를 1년 동안 마스터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줄리의 줄리아 레시피 탐구 블로그는 점점 더 유명해지고 드디어 인터뷰와 출판 제안까지, 작가의 꿈을 이루게 된다.

  나중에 줄리는 줄리아가 자신의 블로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좌절하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줄리아와 줄리아의 레시피를 좋아하고 도전한 덕분에 스스로 행복해졌음을 깨닫게 된다. 가재를 죽이지 못해 안달복달하고, 낮잠 때문에 스튜를 바짝 태우고, 블로그 때문에 직장 상사에게 잔소리를 듣고, 남편과 다투고... 늘 성공적인 날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요리에 대한 열정이 그녀의 일상을 구원한 것은 틀림없다.

  어느 날 앨범을 펼쳐보았는데 한쪽 귀퉁이에 ‘오늘은 깐따삐야가 밤도 태우고 고구마도 태웠다’라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남편의 글씨체였고 구체적인 날짜까지 적혀 있었다. 짓궂은 사람, 웃음이 났다. 물 조절과 불 조절, 시간 조절까지 무참히 실패했던 작년 겨울의 일이었다. 냄비 하나가 아작 났고 우리는 예상치도 못한 군밤과 군고구마를 먹어야 했다. 지금은 물론 예상한 것들을 먹을 수 있을 만큼은 능숙해졌지만 그리 될 때까지 망가진 그릇하며 낭비한 양념들을 차마 헤아리기 힘들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요리는 그처럼 누구나의 일상이고, 추억이고, 사랑이구나 하는 생각. 예전에 부모님께 혼이 나거나 오빠와 다투었을 때도 엄마가 밥 먹어라, 하는 말 한 마디에 밥상 앞에 마주 앉아 수저질을 하다보면 서운했던 감정이 따끈한 된장찌개 국물에, 고소한 꽁치 구이 한 점에, 사르르 녹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었다. 잘 익은 김치 한 포기를 들고 와 계란과 바꾸어 가시던 아주머니도 있었고 아빠가 미꾸라지라도 많이 잡는 날이면 동네 아저씨들이 몰려와 생선국수 잔치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제는 급식이 보편화되었지만 가끔씩 보온도시락 속 반찬들, 김치볶음과 소시지 부침, 따끈따끈했던 물통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온정으로 가득한 음식의 효능이다.

  소박한 냄비 하나에 일상과 추억과 사랑을 담아내는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메릴 스트립의 미소는 오래도록 여운이 길고 에이미 아담스의 미소는 기분 좋은 날, 무언가 소중한 것을 깨달은 날, 나의 그것과도 닮아 있었다. 쌀쌀해진 날씨, 잔잔하고 훈훈한 사랑의 레시피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픈 맛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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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2-16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깐따삐야님.
이 글의 느낌이 무척 좋아요. 바람이 매섭게 부는 날 따뜻한 집에서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호호 거리며 군고구마를 까먹는 그런 느낌의 글이랄까요. 맨 마지막에 깐따삐야님이 쓰신 글을 그대로 인용해서 이 페이퍼를 얘기해보자면,

쌀쌀해진 날씨, 잔잔하고 훈훈한 사랑의 글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픈 맛있는 페이퍼다.

이쯤 되겠네요. 정말 잘 읽고 추천 누르고 갑니다. 깐따삐야님의 글은 언제나 소박하고 정겨워 좋았지만, 오늘 이 글은 특히 더해요.

Mephistopheles 2009-12-16 16:39   좋아요 0 | URL
더불어..짐승같은 식욕...포함해야 합니다..=3=3=3=3

깐따삐야 2009-12-17 15:1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마음에 드셨다니 기분 좋습니다. 소재에 비해 다양한 음식들이 나오지 않아서 조금 의아했는데 그래도 즐겁게 본 영화였어요.^^

이제 '메피님 같은 식욕'을 관용어로 사용해야겠어요.ㅋㅋ

비로그인 2009-12-16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미 아담스, 30대가 넘어서도 저렇게 천진무구한 얼굴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자연의 신비여요.(영화 `다우트'를 보면 더 확실해 진답니다)

깐따삐야 2009-12-17 15:21   좋아요 0 | URL
그쵸? 확 들어오는 미모는 아니지만 의외로 다양한 장르에 쓸 수 있는 얼굴일지도 모르겠어요. '다우트'는 못 본 영화인데 이번 기회에 챙겨봐야겠네요.

레와 2009-12-16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는 안해요. 안해요..

엉...엉....ㅠ_ㅠ

깐따삐야 2009-12-17 15:22   좋아요 0 | URL
3D 이런 것과는 별로 상관없는 영화이니 나중에 dvd로 보셔도 될 것 같아요.^^

Mephistopheles 2009-12-1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를 보고 메릴 스트립이라는 배우는 레전드 라고 그냥 단정지어버렸어요...ㅋㅋ
천진난만한 얼굴로 따진다면 예스맨에 나왔던 '조이 데샤넬'이란 배우도 눈여겨보세요.
굉장히 사랑스런 배우라는..(500일 썸머 개봉예정되어 있는 것 같던데..)

깐따삐야 2009-12-17 15:26   좋아요 0 | URL
정말 그래요. 더 이상의 수식이 필요 없을 정도로.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한번 찾아보겠어요.^^

hnine 2009-12-16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리아 차일드라는 실제 유명한 요리사가 있는데 (파파 할머니였으니 지금도 살아계신지는 모르겠어요.) 혹시 이 영화의 줄리아 차일드가 그 할머니일까요?
아, 위의 포스터를 자세히 보니 '실화'라네요. 맞나봐요!

깐따삐야 2009-12-17 15:49   좋아요 0 | URL
네. 줄리아 차일드도 줄리 파웰도 모두 실존인물이라고 하네요. 줄리 파웰은 지금도 살아있구요.^^

비연 2009-12-1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보고 싶은 영화 중 하나에요^^

깐따삐야 2009-12-17 15:51   좋아요 0 | URL
두 배우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런 영화입니다. 보세요.^^
 

  요즘 커피를 안마시니까 금단현상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건지 커피향이 나는 빵이 먹고 싶어진다. 로티보이의 번이라든가, 파리바게트의 모카빵이라든지. 어제는 집 앞 제과점이 카페 형식으로 리모델링을 한 후 개업행사가 있었다. 얼마 이상을 구매하면 딸기잼을 하나 얹어주고 원두커피를 제공하는 정도. 잼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런데 홍보 도우미 언니가 나눠주는 원두커피는 남편 것을 빼앗아 한 모금 마셔봤더니 너무 밍밍했다.

  지난 여름, 연수를 받는 동안 구내식당 점심이 질릴 즈음이면 밖에 나가서 밥을 먹곤 했는데 달라진 대학가 풍경 중에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다양한 커피전문점들이었다. 요즘 대학생들이 지갑이 두둑해져서인지, 씀씀이가 변해서인지, 한 끼 밥값에 버금가는 커피를 파는 숍들이 성업 중이었다. 5천원짜리 돈가스를 시키자 둘이 먹고도 남을 만큼 넓적한 돈가스가 나왔는데 바로 옆 커피숍에선 내가 좋아하는 모카라떼를 그 이상의 가격에 팔고 있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커피전문점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애매모호한 분위기의 커피숍 겸 호프집이 많았다. 그런 집은 커피도 맛없고 안주도 맛없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가격대가 만만한 것도 아니어서 자주 다니지는 않았다. 결국 그런대로 괜찮은 커피숍이 발견되면 너나없이 그곳으로 몰려들곤 했다. 한 공간의 창가 자리에서 과 선배가 소개팅을 하고 있고 맞은편에서는 동기 녀석이 헤어질 여자 친구를 기다리는 식이었다.

  어느 날 오후, 중문 근처에 갔는데 -왜 갔는지는 지금은 생각이 안 나지만- 동아리 동기 J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이렇게 밖에서 만난 것도 반가운데 이야기나 할래, 하더니 나를 그런대로 괜찮았던 그 커피숍에 데려갔다. 그녀는 마침 비어 있던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나는 아마도 모카라떼를 시켰을 것이고 그녀는 무슨 허브티 종류를 마셨던 것 같다.

  J는 불문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항상 자기가 왜 불문학을 하는지는 자기도 모른다고 투덜거리곤 했었다. 원래 국문학을 선택했지만 1학년 때 학점이 안 좋아서 밀렸다는 말도 했다. 학부제가 생긴 후로 그런 일은 잦은 편이었다. 그리고는 거의 머슴처럼 부려먹던 남자 친구 이야기, 특징적인 동아리 선배들에 대한 소감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그녀와 그녀의 남자 친구는 좀 유명했다. 한낮에 J가 술에 취해 울고 있고 그런 J를 달래서 부축하는 남자 친구의 모습을 두 번인가 봤다. J는 자기가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 애 밖에는 자기를 받아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또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알면서도 동아리 밖에는 그런 자신을 받아줄 곳이 없다고도 했다.

 나는 네가 술을 잘 안 마시는 게 불만이야.

  대화 중간에 그녀가 툭, 그런 말을 던졌다. 별로 신선한 지적도 아니었지만 환한 대낮에, 그런대로 괜찮은 커피숍에 앉아서, 약속도 없이 만난 동기한테 갑자기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좀 이상했다. 나는 머쓱해져서, 그게 그렇게 불만이었어? 하고 물었다.

 너는 술을 안 마셔도 솔직할 수 있어서 참 좋겠다.

  J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J의 눈빛은 비꼼도, 호기심도 아닌 부러움이었다. 내가 그랬던가. 무지해서 용맹한 무용담으로 점철된 시절이었으니 그리 보였을 수 있겠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J의 솔직함과 자유분방함에 기함하고 있던 터였다. 나는 그냥 까불었던 것이지만 J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흠모하던 선배를 계속 흠모했고 그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 나이에 그런 마음은 숨기려고 해도 잘 숨겨지지도 않지만. 그런 J를 바라보는 선배의 눈빛은 차갑고 매정했다. 우리에게는 장난기 가득 머금은 따듯한 눈빛을 보내면서도 유독 J에게만은 그러지 않았다. 내가 동아리에 드나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선배는 그녀에게 완전히 벽을 보였다. J는 사람들이 다 보는 잡기장에 악필로 심란한 마음을 써내려가기도 했다. 술을 마시면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보였고 그녀가 쓴 시에는 복잡한 가족사와 외롭고 성긴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처음에 그녀는 나를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술도 잘 마시고 시도 잘 쓰는 그녀에게 호기심이 있었다.

  나는 좀 비겁하게도 스스로의 솔직함에 자신이 없던 터라 그 날 J와의 대화는 그냥 겉돌다 끝나 버렸던 것 같다. 이후에 그녀는 동방에 한 동안 뜸했다, 다시 나오기를 반복하더니 갑자기 휴학을 해버렸다. 나중에 한 선배로부터 다단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러더니 결혼을 했다고 하고 아기 엄마가 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아무도 J의 소식을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 후로 가끔씩 묵은 잡기장의 삐뚤빼뚤한 활자 속에서, 호평을 받았던 연작시 속에서, J를 떠올리곤 했다.

  중문의 그 커피숍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 자리에는 편의점이 들어섰고 맞은편에는 커피 전문점이 생겼다. 당시 그 순간을 돌이켜 보면 J는 그 날 어쩌면 나랑 술을 마시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면 내가 먼저 스타우트를 주문해 버릴 텐데. 당시의 나는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지만- 타인이 보내는 큐 사인에 그다지 민첩하지 못했다. 이따금 내 이름을 반갑게 부르며 커피숍으로 이끌던 J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금도 이 도시에 살고 있다면 언젠가 한번은 마주치지 않을까, 서로 많이 변해서 못 알아볼 수도 있을까, 아쉬운 마음. 지금이라면 내가 먼저 이름을 부르고, 안부를 묻고, 커피를 살 수도 있을 텐데.

  혼자서, 친구들과, 지인들과, 때로는 낯선 사람과 다양한 이름의 커피숍에서 참으로 숱한 커피를 마셨지만 J와의 짧은 추억은 그 가운데서도 아주 검고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모락모락 커피 향 같은 이야기꽃을 피워 봐도 좋았으련만 커피 향을 즐기거나, 상대의 심중을 헤아리거나 하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던 것 같다. 커피 한 잔에 인연의 타이밍이 적절히 녹아들면 그보다 더 맛난 커피가 어디 있을까. 그런 아쉬움, 그리움이 드는 커피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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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9-12-12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야~ 제목을 White coffee 로 읽고서, '응? 웬 하얀 커피?' 했다는. -_-
오늘은 오랜만에 믹스커피를 먹었는데요, 음, 전에 먹던 그 맛이 아니라서 조금
실망했었답니다. (자판기 커피라서 그런가.킁)
누구나 커피를 주제로 글을 쓰라면 다들 제각각 이야기가 많을지도..하고
깐따님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깐따삐야 2009-12-14 12:08   좋아요 0 | URL
white coffee라... 괜찮겠는데요? ^^
자판기마다 커피 맛이 조금씩 다르죠. 저 학교 다닐 때는 도서관 휴게실 자판기 커피가 가장 맛있었고 학생회관 자판기 커피가 가장 별로였던 것 같아요.
커피에 얽힌 사연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을까요!

레와 2009-12-14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학교 다닐때는 커피숍 보다는 단대 자판기 커피를 주로 마셨어요. 꼭 연못 근처에서..ㅋ 같은 학교안이라도 각 단대마다 커피 맛은 제각각..

싸고 양도 많은 인문대 커피가 그리운데요..^^

깐따삐야 2009-12-16 14:05   좋아요 0 | URL
그때는 단대 자판기 커피 가격이 150원~200원이었는데 여름에 연수 가서 보니 더 이상 인기가 없는 것 같고 그 옆에 덩치 큰 다른 자판기가 들어와 있더라구요. 그 안에는 컵이나 팩으로 제조된 온갖 커피 종류가 와글와글!

그러게요. 싸고 양도 많고 어느 날은 쓸쓸히 위안이 되기도 하는 그 커피가 그립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