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커피를 안마시니까 금단현상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건지 커피향이 나는 빵이 먹고 싶어진다. 로티보이의 번이라든가, 파리바게트의 모카빵이라든지. 어제는 집 앞 제과점이 카페 형식으로 리모델링을 한 후 개업행사가 있었다. 얼마 이상을 구매하면 딸기잼을 하나 얹어주고 원두커피를 제공하는 정도. 잼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런데 홍보 도우미 언니가 나눠주는 원두커피는 남편 것을 빼앗아 한 모금 마셔봤더니 너무 밍밍했다.
지난 여름, 연수를 받는 동안 구내식당 점심이 질릴 즈음이면 밖에 나가서 밥을 먹곤 했는데 달라진 대학가 풍경 중에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다양한 커피전문점들이었다. 요즘 대학생들이 지갑이 두둑해져서인지, 씀씀이가 변해서인지, 한 끼 밥값에 버금가는 커피를 파는 숍들이 성업 중이었다. 5천원짜리 돈가스를 시키자 둘이 먹고도 남을 만큼 넓적한 돈가스가 나왔는데 바로 옆 커피숍에선 내가 좋아하는 모카라떼를 그 이상의 가격에 팔고 있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커피전문점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애매모호한 분위기의 커피숍 겸 호프집이 많았다. 그런 집은 커피도 맛없고 안주도 맛없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가격대가 만만한 것도 아니어서 자주 다니지는 않았다. 결국 그런대로 괜찮은 커피숍이 발견되면 너나없이 그곳으로 몰려들곤 했다. 한 공간의 창가 자리에서 과 선배가 소개팅을 하고 있고 맞은편에서는 동기 녀석이 헤어질 여자 친구를 기다리는 식이었다.
어느 날 오후, 중문 근처에 갔는데 -왜 갔는지는 지금은 생각이 안 나지만- 동아리 동기 J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이렇게 밖에서 만난 것도 반가운데 이야기나 할래, 하더니 나를 그런대로 괜찮았던 그 커피숍에 데려갔다. 그녀는 마침 비어 있던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나는 아마도 모카라떼를 시켰을 것이고 그녀는 무슨 허브티 종류를 마셨던 것 같다.
J는 불문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항상 자기가 왜 불문학을 하는지는 자기도 모른다고 투덜거리곤 했었다. 원래 국문학을 선택했지만 1학년 때 학점이 안 좋아서 밀렸다는 말도 했다. 학부제가 생긴 후로 그런 일은 잦은 편이었다. 그리고는 거의 머슴처럼 부려먹던 남자 친구 이야기, 특징적인 동아리 선배들에 대한 소감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그녀와 그녀의 남자 친구는 좀 유명했다. 한낮에 J가 술에 취해 울고 있고 그런 J를 달래서 부축하는 남자 친구의 모습을 두 번인가 봤다. J는 자기가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 애 밖에는 자기를 받아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또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알면서도 동아리 밖에는 그런 자신을 받아줄 곳이 없다고도 했다.
나는 네가 술을 잘 안 마시는 게 불만이야.
대화 중간에 그녀가 툭, 그런 말을 던졌다. 별로 신선한 지적도 아니었지만 환한 대낮에, 그런대로 괜찮은 커피숍에 앉아서, 약속도 없이 만난 동기한테 갑자기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좀 이상했다. 나는 머쓱해져서, 그게 그렇게 불만이었어? 하고 물었다.
너는 술을 안 마셔도 솔직할 수 있어서 참 좋겠다.
J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J의 눈빛은 비꼼도, 호기심도 아닌 부러움이었다. 내가 그랬던가. 무지해서 용맹한 무용담으로 점철된 시절이었으니 그리 보였을 수 있겠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J의 솔직함과 자유분방함에 기함하고 있던 터였다. 나는 그냥 까불었던 것이지만 J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흠모하던 선배를 계속 흠모했고 그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 나이에 그런 마음은 숨기려고 해도 잘 숨겨지지도 않지만. 그런 J를 바라보는 선배의 눈빛은 차갑고 매정했다. 우리에게는 장난기 가득 머금은 따듯한 눈빛을 보내면서도 유독 J에게만은 그러지 않았다. 내가 동아리에 드나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선배는 그녀에게 완전히 벽을 보였다. J는 사람들이 다 보는 잡기장에 악필로 심란한 마음을 써내려가기도 했다. 술을 마시면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보였고 그녀가 쓴 시에는 복잡한 가족사와 외롭고 성긴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처음에 그녀는 나를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술도 잘 마시고 시도 잘 쓰는 그녀에게 호기심이 있었다.
나는 좀 비겁하게도 스스로의 솔직함에 자신이 없던 터라 그 날 J와의 대화는 그냥 겉돌다 끝나 버렸던 것 같다. 이후에 그녀는 동방에 한 동안 뜸했다, 다시 나오기를 반복하더니 갑자기 휴학을 해버렸다. 나중에 한 선배로부터 다단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러더니 결혼을 했다고 하고 아기 엄마가 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아무도 J의 소식을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 후로 가끔씩 묵은 잡기장의 삐뚤빼뚤한 활자 속에서, 호평을 받았던 연작시 속에서, J를 떠올리곤 했다.
중문의 그 커피숍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 자리에는 편의점이 들어섰고 맞은편에는 커피 전문점이 생겼다. 당시 그 순간을 돌이켜 보면 J는 그 날 어쩌면 나랑 술을 마시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면 내가 먼저 스타우트를 주문해 버릴 텐데. 당시의 나는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지만- 타인이 보내는 큐 사인에 그다지 민첩하지 못했다. 이따금 내 이름을 반갑게 부르며 커피숍으로 이끌던 J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금도 이 도시에 살고 있다면 언젠가 한번은 마주치지 않을까, 서로 많이 변해서 못 알아볼 수도 있을까, 아쉬운 마음. 지금이라면 내가 먼저 이름을 부르고, 안부를 묻고, 커피를 살 수도 있을 텐데.
혼자서, 친구들과, 지인들과, 때로는 낯선 사람과 다양한 이름의 커피숍에서 참으로 숱한 커피를 마셨지만 J와의 짧은 추억은 그 가운데서도 아주 검고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모락모락 커피 향 같은 이야기꽃을 피워 봐도 좋았으련만 커피 향을 즐기거나, 상대의 심중을 헤아리거나 하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던 것 같다. 커피 한 잔에 인연의 타이밍이 적절히 녹아들면 그보다 더 맛난 커피가 어디 있을까. 그런 아쉬움, 그리움이 드는 커피의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