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 남편이 장미 서른 송이를 사왔다. 꽃보다 현금이라고 주장해서 용돈도 받았다. 저녁에는 작년 크리스마스에 샀던 트리에 불을 밝히고 눈사람 인형도 옆에 세워놓았다. 특별히 외출을 계획하지는 않았다. 배가 불러오는 이유도 이유지만 요즘 밖에 자유롭게 나다니지 못하는 이유는 앞머리 때문이었다. 파마약 냄새 나는 미장원에 가기 싫어서 집에서 앞머리를 좀 정돈해 보려고 했는데 남편이 본인이 깎아주겠다고 나섰다. 손재주가 있어 믿고 맡겼는데 이게 웬 걸! 금방 못난이 인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예쁘다고 억지를 부리는 남편에게 욕을 해주고는 어서어서 부지런히 길러서 미장원에 가야겠다, 마음먹고 있었다. 어느 정도 앞머리가 내려와서 미장원에 갔는데 남편이 이렇게 깎아놓았다고 했더니 미용실 언니 포복절도. 주변에서 머리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 파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미용실에서도 권하지 않고 출산 이후로 미뤘다.

  그래도 앞머리도 잘랐겠다, 미용실에서 드라이도 해줬겠다, 간만에 신경 쓴 것 같아서 <아바타>를 보러 갔다. 3D로 봐야한다는 일념 하에 전 좌석 매진인 상영관에 갔는데 밀폐된 공간에서 두꺼운 옷을 입은 숱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니 숨이 턱턱 막히더라는. 영화 초반에는 생각보다 지루해서 잠깐 졸기까지 했다. 하지만 영상도, 스토리도, 메시지도, 그간에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영화였다. <늑대와 춤을>, <매트릭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 여러 가지 영화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들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웰빙 SF, 자연주의 블록버스터라고나 할까. 무성한 입소문처럼 굉장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신선한 상상력이나 예상 밖 해피엔딩도 그렇고,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좋을 것 같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이면 직장 동료나 친구들 선물 위주로 생각했는데 올해는 엄마를 위해 냉장고를 질렀다. 친정집에 십년 넘은 냉장고가 있는데 문도 헐거워지고 냉동실도 좁아서 엄마가 그 동안 불편해 하시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앞으로 몇 년은 더 쓸 수 있다며 절대로 바꾸지 않으실 기세였다. 냉장고 리터로 치자면 우리 집에 있는 것이 훨씬 더 큰데 대부분의 음식을 친정집에서 얻어다 먹고 있으니 항상 죄송한 마음이 있었다. 장모님이 해주신 일 년치 반찬값에 한참 못 미친다며 남편은 손수 냉장고를 고르고 계산했다. 엄마는 얘들이 무슨 짓을 한 거냐며 펄쩍 뛰셨지만 이미 결제하고 배달 예약까지 해놔서 소용 없다고 잘라 말했다. 따지고 보면 다 우리를 위한 일이다. 엄마가 언제 당신만을 위해 장을 보고 요리를 하신 적이 있었던가. 그래도 어쨌거나 남편이 장한 일을 했으니 나도 이번 시어머니 생신 때 신경 좀 써야겠다. 

  작년에는 둘 다 논문 쓴다고, 올해는 무거워진 몸 때문에, 항상 계획만 하고 있는 겨울 여행은 가지 못했지만 조촐하게 보내는 크리스마스에 별다른 아쉬움은 없다. 어쩌면 둘이서 조용하게 보내는 크리스마스도 올해가 마지막인지 모른다. 트리와 눈사람 인형이 제자리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크리스마스를 나는 것도. 끝나가는 연휴를 아쉬워하지 않으며 이렇게 푹 쉴 수 있는 겨울도. 새 달력을 걸고 새 탁상달력에 동그라미도 쳐놓았다. 얼마 남지 않은 한 해를 잘 마무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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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12-27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벌써 몇년째인지 몰라요..
마님이 크리스마스와 신정때 호두까느라 집에 매일 밤 11시에 들어오니까요..흑흑.

깐따삐야 2009-12-28 11:06   좋아요 0 | URL
참! 마님이 이맘때쯤 가장 바쁘시구나. 그래도 덕분에 멋진 공연 보시잖아요. 좋으시겠다.^^

2009-12-27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8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8 13: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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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9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