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 해 겨울, 주기도문도 채 외우지 못하던 나는 꼬박꼬박 교회에 나갔다. 오빠, 그리고 매일 함께 놀던 동네 언니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매년 구세군에서 준비하는 크리스마스는 마을 아이들의 축제였다. 그 날 밤, 오빠는 촛불을 들고 무언가를 낭송했고 나는 옆집 기옥이 언니와 울면 안 돼, 춤을 추었다. 너는 너무 어려서 안 돼. 처음에는 노래도, 춤도, 아무것도 시켜주지 않았는데 누군가 한 명이 빠지게 돼서 그 역할을 내가 맡게 되었다. 언니들이 울긋불긋 화장을 해주었고 하얀 스타킹에 발레복처럼 생긴 무용복도 입었다. 춤을 추다가 날아갈 것만 같았다. 무대 아래에는 엄마가 와 있었다. 엄마는 내가 깜찍하게 춤을 잘 추었다고 뿌듯해 하셨다. 근데 엄마, 왜 다 함께 기도합시다, 할 때 엄마만 눈 안 감았어? 엄마는 기도 안 했어. 내가 보기엔 기도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 엄마였는데 엄마는 참 담담하게 말했다.

#
  잠결에 깨어보니 아빠가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빠가 내 코 밑에 닭다리를 갖다 대고 간질이고 있었다. 냄새 맡고 일어날 줄 알았어. 밤늦게 퇴근한 아빠가 치킨과 아이스크림을 사오셨다. 아빠가 사온 치킨은 호프집에서 맥주 안주용으로 바짝 튀긴 통닭이었다. 엄마는 아빠의 늦은 퇴근과 나의 소아비만을 걱정했지만 나는 아빠가 술 한 잔 하고 통닭을 사오는 겨울밤이 참 좋았다. 방안에 솔솔 퍼지며 깊은 잠도 깨우던 고소한 통닭 냄새.

#
  그 날, 동아리 건물 앞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었다. 기숙사 근처에서 Y와 K가 내 이름을 부르며 올라왔다. 방학 중의 만남이 반가워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신나게 이야기를 하는데 어라, 멀리서 느릿느릿 걸어오는 저 사람. D선배였다. 친구들이 먼저 알아보곤 호들갑을 떨었다. 따뜻한 캔커피를 뽑는다, 동아리방으로 올라간다, 선배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네 선배라는 남자, 하체가 너무 부실한 것 아니냐는 K의 농담에 구박을 날리며 잔뜩 붉어진 얼굴로 그 자리를 떠났다. 눈발이 폴폴 날리던 추운 날이었는데 주변의 찬 공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
  눈 오네요! 산성의 굽이진 길을 따라 올라갔다. 굳이 걷자는 이유는 뭔가. 구두창이 미끄러웠지만 그의 손을 잡거나 팔을 붙잡거나 하지는 않았다. 조심해요, 라며 내 팔을 붙잡은 건 그였다. 추위와 긴장으로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고 넘어지기라도 하면 우스울까봐 되도록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계획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고 그럼에도, 거리 한번 좁혀보겠다고 이 추운 날, 이러고 있는 남자에 대해 웃음이 났다. 눈을 기다리는 이유도 참 여러 가지다.  

#
  오늘은 올해 들어 가장 많은 눈이 내린 날. 슈가 파우더를 흩뿌려놓은 듯한 달콤한 경치 감상도 잠시. 가족의 출근길과 외출이 염려되는 날씨였다. 채 눈이 녹지 않은 오전에는 꼼짝도 안하고 집에서 김치부침개를 부쳤다. 볕이 들기 시작한 오후에는 아크릴판으로 뭔가를 제작 중인 남편이 공구를 산다길래 마트에 따라갔었다. 딸기가 먹음직스러워 보여서 한 팩 샀는데 기대보다는 단맛이 덜했다. 주말 오후라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 그나저나 요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는 듯, 어쩐지 다리로 걷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걷는 것 같은 느낌이다. 머잖아 내가 발을 떼는 순간,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서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겠지.-_- 어제는 눈도 오고 하여 <크리스마스 캐롤>을 보러 갔는데 디테일이 훌륭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전에 지나치게 충실한 것이 흠이었다. 매우 교훈적인 호러 무비라고 볼 수 있음. 관객은 딱 네 명. 아, 내 안에 한 사람 더. 이제는 오래 같은 자세로 앉아 있기도 힘들고, 눈이 와도 호젓한 기분에 젖기보다 나와 주변 사람들의 안위를 더 염려하는,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9-12-19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도 기억이 나요. 아침에 인근 초등학교에서 받는 민방위 훈련에 늦어 눈길 내리막 길을 내려가다 미끄러져 2미터 정도 공중부양했다 그냥 철푸덕 떨어졌던 기억이..2분 기절했던 기억도 모락모락...이래서 눈오는 날엔 배수구 트랜치 잘못 밟으면 비명횡사한다는 소리를 직접 체험했어요...

깐따삐야 2009-12-21 10:51   좋아요 0 | URL
상상만 해도 아찔! 눈 오는 날은 아무리 바쁘셔도 찬찬히 걸어야 해요. 저도 출근길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옷을 다 버려 다시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BRINY 2009-12-19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2000년 겨울인가 엄청난 대설이 왔을 때가 기억나요. 여기가 서울이냐 알래스카냐!하고 외치던 때요. 도로와 인도 구별도 안가고, 테헤란로에 차도 안다니고, 아파트 단지 쪽문 들어서다가 휙 미끄러져서 간신히 기둥붙잡고 살아났던 일

깐따삐야 2009-12-21 10:55   좋아요 0 | URL
어제도 대낮인데도 인적이 드물더라구요. 바람은 차고 길은 꽁꽁 얼어붙고.
항상 그런 상황에서는 창피해서 아픈 내색도 못하고 반짝 일어나곤 하죠. 저도 잘 넘어지는 편이라 그런 경험 많아요.ㅋㅋ

웽스북스 2009-12-20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육점인지 닭집인지 앞에서 기다렸다 은박 비닐 봉투에 담아와서 먹던 기름이 흥건하던 그 닭맛, 닭냄새가 막 그리워져요. 물론 요즘 굽네치킨 같은 닭들, 엄청 세련되고 맛있지만, 기다림, 설렘, 뭐 이런 것들이 그 때 그 닭을 따라올 수 있을까 싶기도 해요. 저 수많은 내용중에 먹을 거에 집착하는 웬디씨 ㅋㅋㅋ

깐따삐야 2009-12-21 10:59   좋아요 0 | URL
기름 좔좔 시장닭 맛을 어떻게 잊겠어요. 하여간 양도 되게 많았었는데. 요즘 치킨 광고들 보면 저 숱한 치킨집이 장사가 다 되긴 되는걸까, 싶을 정도로 정말 다양해졌죠. 아, 언제쯤 치킨에 맥주 한잔 할 날이 올지 모르겠어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