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한 음식의 향연이나 자극적인 장면 하나 눈에 띄지 않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의 풍미를 돋우는 것은 메릴 스트립과 에이미 아담스라는 걸출한 두 여배우였다. 어느 시공간, 어느 역할에 갖다 놓아도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 사람이었던 것처럼 관객의 오감에 쏙쏙 스미는 연기를 보여주는 메릴 스트립, 한편 <박물관이 살아있다>에서 용감하고 발랄한 비행사로 출연했던 에이미 아담스는 이 영화에서 매우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요리 블로거로 변신했다. 두 사람은 영화 속에서 한 번도 만나지 않지만 각자의 서로 다른 사연과 매력으로 관객에게 어필한다.
줄리아 차일드(메릴 스트립 분)는 남편을 따라 파리로 건너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다가 미국인을 위한 프랑스 요리 레시피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요리로 인정을 받고 책을 내기까지 갖가지 우여곡절을 겪지만 항상 변함없는 마음으로 자신과, 자신의 음식을 지지해주는 남편의 사랑으로 어려움을 극복한다. 두 사람에게는 아이가 없다는 아픔이 있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준비하는 줄리아와 그런 줄리아를 더욱 따듯한 마음으로 보듬는 남편의 모습은 다채로운 레시피보다 더 빛을 발한다.
한편 2천년대 뉴욕에 살고 있는 줄리 파웰(에이미 아담스 분)은 작가가 되려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매일매일 따분한 공무원으로서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 온종일 상담 전화를 받다가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다양한 요리를 만드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낙이다. 줄리의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던 남편은 블로그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고 그녀는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 레시피를 1년 동안 마스터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줄리의 줄리아 레시피 탐구 블로그는 점점 더 유명해지고 드디어 인터뷰와 출판 제안까지, 작가의 꿈을 이루게 된다.
나중에 줄리는 줄리아가 자신의 블로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좌절하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줄리아와 줄리아의 레시피를 좋아하고 도전한 덕분에 스스로 행복해졌음을 깨닫게 된다. 가재를 죽이지 못해 안달복달하고, 낮잠 때문에 스튜를 바짝 태우고, 블로그 때문에 직장 상사에게 잔소리를 듣고, 남편과 다투고... 늘 성공적인 날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요리에 대한 열정이 그녀의 일상을 구원한 것은 틀림없다.
어느 날 앨범을 펼쳐보았는데 한쪽 귀퉁이에 ‘오늘은 깐따삐야가 밤도 태우고 고구마도 태웠다’라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남편의 글씨체였고 구체적인 날짜까지 적혀 있었다. 짓궂은 사람, 웃음이 났다. 물 조절과 불 조절, 시간 조절까지 무참히 실패했던 작년 겨울의 일이었다. 냄비 하나가 아작 났고 우리는 예상치도 못한 군밤과 군고구마를 먹어야 했다. 지금은 물론 예상한 것들을 먹을 수 있을 만큼은 능숙해졌지만 그리 될 때까지 망가진 그릇하며 낭비한 양념들을 차마 헤아리기 힘들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요리는 그처럼 누구나의 일상이고, 추억이고, 사랑이구나 하는 생각. 예전에 부모님께 혼이 나거나 오빠와 다투었을 때도 엄마가 밥 먹어라, 하는 말 한 마디에 밥상 앞에 마주 앉아 수저질을 하다보면 서운했던 감정이 따끈한 된장찌개 국물에, 고소한 꽁치 구이 한 점에, 사르르 녹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었다. 잘 익은 김치 한 포기를 들고 와 계란과 바꾸어 가시던 아주머니도 있었고 아빠가 미꾸라지라도 많이 잡는 날이면 동네 아저씨들이 몰려와 생선국수 잔치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제는 급식이 보편화되었지만 가끔씩 보온도시락 속 반찬들, 김치볶음과 소시지 부침, 따끈따끈했던 물통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온정으로 가득한 음식의 효능이다.
소박한 냄비 하나에 일상과 추억과 사랑을 담아내는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메릴 스트립의 미소는 오래도록 여운이 길고 에이미 아담스의 미소는 기분 좋은 날, 무언가 소중한 것을 깨달은 날, 나의 그것과도 닮아 있었다. 쌀쌀해진 날씨, 잔잔하고 훈훈한 사랑의 레시피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픈 맛있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