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 - 제1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임영태 지음 / 뿔(웅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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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생각이 나면 나는 새벽에 거리로 나간다.

깊이 잠들어 있는 거리를 혼자 걷는다.

마음은 슬픈데 쓸쓸하지가 않다. 그 새벽의 마지막 풍경들이 따뜻하게 가슴으로 들어온다. 그날, 모든 것이 좋았다. 꿈결 같기만 한 그날 새벽 거리. 바람도, 가로수도, 불 꺼진 창들도, 모든 것이 정갈했었다. 그래서 기억은 쓸쓸하지 않다.

새벽 거리를 걷고 있으면 아내를 느낀다. (p.191)


  아내를 잃고 혼자 사는 남자가 있다. 직업은 남의 인생을 대신 써주는 대필 작가. 남자는 낯선 의뢰인들을 만나 그들의 인생을 활자화하고 이따금 동네에서 마주치는 죽은 자들의 인생에 대해서도 상상한다.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써내려가는 일기장 같은 이 소설은 죽은 아내에게 ‘나 이렇게 살고 있어.’ 라고 말을 거는 고백록 같다. 무명 대필 작가의 사무실 책꽂이 한켠, 묵묵히 꽂혀 있을 것 같은 처연한 일기장.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그 심상을 담담히 읊조리는 이 작품은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에 등장했던 젊은이들의 중년을 보는 것 같다. 자의식 강했던 달변의 청춘들은 사회에 발을 딛고, 결혼을 하고, 사랑하는 대상을 잃고, 혼자 밥을 먹고, 적막한 새벽 거리를 홀로 걷는다. 더 이상 누구와도 싸울 필요 없이 잔잔한 그리움만 남은 삶. 천진한 소녀 같기도 하고 세월을 헤아리는 노파 같기도 했던 아내는 현생을 떠나서도 남자의 삶에 슬픈데, 쓸쓸하지는 않은 따뜻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또한 모든 것을 비우고 쓴 소설이란 생각이 든다. 작가는 기다란 기차 안에 혼자 탄 승객 같기도 하고 조금씩 흔들리는 다리 위를 천천히 걸어가는 여행객 같기도 하다. 다가가 말을 걸고 싶다. 내치지 않을 것 같다. 태양계 안에서 가장 맛있다는 영주 막걸리든, 편의점에서 파는 소주든, 마주 앉아 술 한 잔 하고 싶다. 그는 소설 속 대필 작가 마냥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줄 것 같고 나는 사소한 것 하나 갈음하지 않고 속내를 털어낼 것 같다. 그가 이튿날 필름이 끊겨 나를 잠시 마주쳤던 죽은 여자라고 생각해도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 편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소설을 쓰리라, 는 결의에서가 아니라 오랜 시간 말이 없던 남자가 어깨와 아귀힘을 빼고 아주 솔직하게 자신의 뒷모습을 드러내 보인 작품이란 느낌이다. 청승맞지 않은 고백, 침울하지 않은 우울이란 쉽지 않은 일일 텐데 마음 풍경과 도시 풍경이 담담히, 조화롭게 어우러져 아련한 온기를 뿜어낸다. 윤대녕만큼 세련된 멜랑콜리는 아니지만 아내에게 바치는 연가와도 같은 이 소설에서 그 이상의 진솔함을 보았다. 정갈하고 진지한 소설을 기다리는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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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y 2010-02-11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물 얻어갑니다~ 정갈하고 진지한 소설을 기다리는 1인 ^^

깐따삐야 2010-02-16 16:35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rainy님.^^

L.SHIN 2010-02-11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은 슬픈데 쓸쓸하지가 않다"

저는 그 반대의 경우는 있어봤어요. '마음은 슬프지 않은데 쓸쓸하다' 같은..^^;

깐따삐야 2010-02-16 16:36   좋아요 0 | URL
저도요. 슬프지는 않은데 쓸쓸한. 슬픈데 쓸쓸하지 않은 것보다 훠얼씬 더 춥춥한 느낌이요.^^;
 
<남자는 초콜릿이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남자는 초콜릿이다 - 정박미경의 B급 연애 탈출기
정박미경 지음, 문홍진 그림 / 레드박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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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부 때 우리 과에 편입해 온 언니 중에 소위 연애박사 언니가 있었다. 어디 하나 또렷하게 생긴 데가 없을 만큼 타고난 외모는 별로인데 후천적인 이미지 메이킹에 공들인 덕분에 자기만의 아우라를 지니게 된 케이스, 그런 사람이었다. 다 함께 근교 계곡으로 MT를 갔던 날 밤, 언니는 대개 연애 경험이 미천하기 짝이 없던 우리 동기들을 모아놓고 사랑과 연애에 대한 본격 멘토링에 들어갔다. 어떤 이야기였는지 뚜렷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남자는 초콜릿이다』처럼 직간접 경험을 바탕으로 한 몇몇 사례 분석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다. 현실에는 무지한 채 연애를 향한 환상 또는 망상만 키우고 있던 나로서는 오감을 바짝 집중한 채 재미나게 경청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는 조그만 열쇠고리 하나를 보여주며 바로 이 남자와 결혼할 거라고 했다. 사진 속 남자는 연하의 영국인이었고 조만간 함께 영국으로 떠나 공부를 계속할 예정이라고 했다. 언니는 그 남자가 자기가 찾던 이상형과 가장 부합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바글바글 넘쳐나는 순수 토종 한국인과의 연애도 버겁기만 했던 나로서는 그 언니를 벌써 외국인이라도 된 것처럼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을 읽으며 잠깐 동안 그 언니를 떠올렸다. 항상 빈틈없는 메이크업에 치마를 즐겨 입던 언니는 정박미경이라는 이 책의 저자와는 많이 다른 분위기인 것 같지만 연애를 통한 진화를 믿는다는 점에서 중첩되는 면이 있다. 그 아무리 어리석고 지질한 연애일지언정 버릴 것이 없다는 면학의 자세. 물론 숱한 언니들의 단내 나는 멘토링에도 불구하고 이십대 전반을 멍청한 연애질에 소모한 나 같은 사람도 있다. 연애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더욱 똑똑한 여자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매번 비슷한 사이클을 반복하거나 작용, 반작용의 원리마냥 역으로 방향만 트는, 좀 모자란 연애군에 속하는 사람 말이다. 어렸다는 이유로 나 스스로를 간신히 용서하긴 했지만 그렇듯 전략은 없고 감정만 있는 연애란 들어오는 패에 상관없이 파투나기 십상이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더욱이 한 가닥씩 한다는 연애타짜들이 넘쳐나는 요즘 같은 세상에 참 겁도 없는 하룻강아지였던 셈.

  이 책에는 그러한 끗발 좋은 연애타짜를 비롯하여 들어온 패가 빤히 읽히는 연애초짜의 케이스까지 일곱 가지 다양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본인의 처녀성에 회의하는 여자, 남성 혐오증 여자, 연하남에 꽂히는 여자, 네 다리를 걸치고 있는 팜므 파탈, 애인에게서 가족성을 추구하는 여자, 남자에게 구원의 존재가 되고픈 여자, 권력 있는 남자에게 끌리는 현대판 카미유 클로델... 저자는 이처럼 다양한 연애 케이스를 통해 당사자인 남녀의 심리와 사회학적 구도까지 들여다본다. 확대경 같은 세심한 성찰에 뜨끔 하는 독자들도 분명 있을 터.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지금 이 시대에 비혼의 삼십대 여성이란 고달프지만 당당한데 상대 남자들은 나이와 지위를 막론하고 왜 하나 같이 이기적이거나 비겁한 존재들로 그려지고 있는지 웃음이 난다. 세월을 먹는 동안 남자들의 구리고 후진 면을 너무 많이 간파했기 때문일까. ‘똑똑한 여자는 결혼하지 않는다’가 마치 이 책의 소제목 같다.

  나는 성찰은커녕 성질만 남은 연애에 질리거나 지쳐서 결혼이라는 제도에 안착했지만 미혼이거나 비혼인 여성들이 이 책을 읽으면 그 사례나 충고들이 다소 식상하다 할지라도 좀 더 많이 살고 연애도 해볼 만큼 해본 언니의 명징한 경고로 의미 있게 와 닿을 것 같다. 기왕 연애하는 것, 좀 잘해보자는 것이다. 피투성이, 혹은 흙투성이가 된다 해도 연애만큼 좋은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오매불망 기다리며 사나이 갈 길 방해하는 이다해에게 짜증을 내면서도 그 귀찮은 손 놓지 않는 오지호의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촌각을 다투는 대업을 앞두고도 키스할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그 징글맞은 로맨틱함이라니. 이 책을 통해 그 눈 뜨고는 못 볼 로맨틱함 이면에 연애의 어떤 얼굴이 있는가를 들여다보는 일도 가치 있으리라 본다. 타고난 기질 상 이 책 한권으로 연애타짜까지는 못되더라도 연애하지 말 걸 그랬어~ 괜히 연애했어~ 칭얼대는 일을 예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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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물고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4월의 물고기
권지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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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사랑』이나 ‘번지점프를 하다’처럼 운명적 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붐이 잠시 사그라진다 해도 운명적 사랑은 여전히 많은 작가들이 관심을 갖고 우려먹는 이야깃거리임이 분명하다. 얼마간의 편차가 있다 한들 독자들에게 꾸준히 먹히는 것을 보면 운명적 사랑이란 누구나의 마음 저변에 깔려 있는 로망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혹자는 말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무의식중에 상대에게서 아버지나 어머니의 상(像)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결핍된 모정이나 부정의 발로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렇듯 심리적 추론을 할 틈도 없이, 설사 애정에 굶주린 어린 내 모습을 마주하는 안쓰럽고 부끄러운 과정이라고 할지라도, 불가피하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니 운명 아니겠는가.

『4월의 물고기』역시 운명적 사랑의 계보를 잇는 소설이다. 처음에는 소녀취향을 채 못 벗어난 요가 강사와 겉멋 든 사진작가의 그저 그런 로맨스이려니 했다. 나는 벌써 노회한 것일까. 이렇듯 신파스런 주인공들을 만나면 공감의 맥이 툭, 툭, 끊어지며 공중 부양하는 가오나시나 좀비를 보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작가에게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보였다. 상투적인 대사와 과잉 연민에 눈살을 찌푸리다가도 그 다음이 궁금해진다. 책을 덮을 수가 없다. 시의 적절하게 배치해놓은 추리 장치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점차 읽어나가는 동안, 그 감성에 있어선 차마 신경숙을 따를 수 없고 추리기법은 정이현의 솜씨에 한창 못 미친다는 느낌.

  주인공 진서인과 강선우의 운명적 사랑에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라는 교착점이 있다. 어머니를 잃고 성폭행을 당한 상처가 있는 진서인과 쌍둥이 여동생이 죽고 나서 성격 장애를 앓게 된 강선우. 강선우는 진서인에게서 죽은 여동생의 환영을 보고 진서인은 사랑에 홀려 떠난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강선우에게 빠져 든다. 진서인에게는 할머니가 있었고 강선우에게는 신부님이 있었지만 두 사람의 기억과 내상을 온전히 치유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상대에게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던 반쪽짜리 사랑에서 점점 비밀에 싸인 베일이 벗겨지며 두 사람은 각자의 감춰진 진실을 보게 된다. 마치 몹쓸 어른들로부터 방치되고 버림받은 천둥벌거숭이 같은 소년과 소녀로 돌아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고 결말은 비극일 수밖에 없지만 운명적 인연을 통과하며 강선우와 진서인은 스스로의 진짜 얼굴을 본다.

  책을 다 읽고 나는 왜『폭풍의 언덕』에는 열광하면서 이 소설에는 마음을 줄 수 없는가, 생각했다. 어차피 허구이며 창작인 것이 소설이기에 작위가 작위인 것을 모르면 상관이 없다. 독자가 미처 느낄 수 없거나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것도 작가의 수완이자 능력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 소설엔 작위적 연민만 넘쳐날 뿐 마음을 덥혀 오는 진솔한 감동이 없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만날 사람은 만나고야 말고, 사랑할 사람은 사랑하고야 만다는, 사랑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지고지순한 명제를 사랑을 믿지 못하는 젊은 연인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었던가. 그렇다면 나는 오히려 젊은 연인들에게 피천득의 『인연』을 권해주고 싶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내게는 끈적거리는 이 긴 소설보다 담백한 저 한 줄의 문장이 몇 배의 지고지순함으로 다가온다. 『4월의 물고기』는 안타깝게도 책장을 덮지 못하게 하는 가독성이 있다고 해서 모두 다 좋은 소설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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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02-03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실은....
번지점프를 하다,를 너무 좋아해요.

결혼을 못하는 두번째 이유쯤 되려나 ㅋㅋㅋㅋㅋㅋ

깐따삐야 2010-02-03 15:48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영화 좋아해요. 영화 속 이은주가 참 예뻤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에 후광이 비치고 종소리가 들리고... 꼭 그런 것만이 운명은 아닐 거에요. 웬디양님의 반쪽은 웬디양님처럼 어딘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것 같아요. 웬디양님과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운동선수도 있잖아. 특출하지는 않은데 꾸준한 선수들. 어느 경기에서든 몇 퍼센트 이상 자기 역할 성실히 해내는 선수들. 난 그런 선수가 되고 싶어요. 어느 날은 골대를 잡아먹을 듯이 현란하게 뛰고 다른 어느 날은 모니터 속으로 돌을 던지고 싶을 만큼 형편없고... 나는 그렇게 기복이 심한, 믿을 수 없는 선수 같아요.”

  남편의 깊어진 눈동자와 마주하는 날이 있다. 내가 동굴로 숨어드는 날. 아침을 잘 차려먹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서 그러다 문득, “나 밖에 좀 나갔다 올게요.” 남편은 어디를 가냐고 했고 나는 친정에를 간다고 했다. 가는 도중에 서점에 들러 최승자의 새로 나온 시집을 샀고 무슨 변덕인지 초콜릿이 가득 묻은 아이스크림도 샀다. 다 도착했을 즈음, 공중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엄마 목소리. 엄마가 베란다에 나와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엄마, 내가 오는 걸 어떻게 알았어?” “응, 빨래 널다가 본거야.”

  그 날 하루 종일 엄마와 수다를 떨고 고기도 구워먹고 잔치국수도 끓여먹고 엄마가 대추와 마른고추를 채 썰어 너는 모습도 지켜보며, 그렇게 빈둥빈둥, 시간을 보냈다. 오후에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고 나는 좀 더 이따가 데리러 오면 좋겠다고 했다. “실은 아침에 전화 왔었어.” “뭐라고?” 남편은 내가 친정에 간다고, 무척 우울해 하는데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고, 장모님이 잘 좀 보살펴 달라고 했단다.

  얼마 후, 나를 데리러 온 남편의 얼굴이 아침보다 한 뼘은 더 핼쑥해진 것 같았다. 엄마는 내게 그만 좀 징징거리라고 했고 나는 순순히 남편을 따라 나섰다. 집에 가는 동안 그는 별 말이 없었고 나는 집에 도착해 엄마가 해주신 음식들을 풀어놓으며 저녁부터 차렸다. “얼굴이 왜 그래요? 갑자기 눈이 더 처진 것 같애.” “아까 낮잠을 자서 그런가.” 그는 묵묵히, 맛있게 밥 한 그릇을 비웠다. 나도 없는데 이것저것 반찬을 꺼내놓고 제대로 점심을 차려 먹었을 리 만무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눈빛은 밥을 먹는 동안에도 여전했다.

  다음 날, 연수원에서 시험을 마치고 온 그가 모처럼 저녁을 밖에 나가서 먹자고 했다. “그래요. 시험 끝났다고 술도 못 사주는데 간만에 외식할까.” 장소는 파마산 돈까스로 유명한 모교 중문의 레스토랑. 주차할 곳을 궁리하다가 여름에 연수 받을 때 들고 다니던 가방을 뒤져보니 옳거니, 주차권이 한 장 나온다.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단과대 뒤편에 차를 세워놓고 보송보송한 후배들을 지나치며 조금 걸었다. 학부 시절의 몇 가지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신축된 강의동, 못 보던 술집들을 힐끔거리며.

  그는 돈까스를, 나는 스파게티를 시켰다. 샐러드 바가 생기면서 본 메뉴가 시원찮아졌고 리모델링을 했다는데 스파게티 전문점인 쏘렌토와 거의 다를 바가 없더라는. 그나저나 하루가 지났는데도 남편의 깊고 처진 눈은 그대로였고 나는 그의 눈초리가 올라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별 것도 아닌 이야기에 박장대소를 하며 오버를 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 둘을 엮어준 장본인인 J의 근황을 이야기하며 그가 정말 잘되기를 바랐다.

  밖으로 나오니 저녁 바람이 꽤 찼다. 주차장까지 걸어가던 길, 잘 안 벌어지는 입을 옹송거리며 위의 운동선수 이야기를 했다. 남편은 진심인지, 위로인지,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도 자신처럼 사시사철 잔잔한 것보다는 나처럼 다채로운 감정을 가진 엄마가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글쎄, 엄마는 모름지기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나도 나를 어쩌지 못할 때가 있으니.” “당신은 아직 젊어서 그런 거예요.” 그는 금세 나이 들어 버린 노인처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래 전부터 꾸준한 사람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사람들이 행여 나를 그런 사람으로 착각하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자괴감 때문에 부끄러운 적도 많았다. 나는 미련할 정도로 고집스러운 사람이기는 해도 매사 한결같은 꾸준한 사람은 못 된다. 고집은 그저 그 사람만의 성미에 불과하지만 꾸준함은 다르다. 인내와 약속, 책임 등 많은 것들이 뒤따르는 고급한 미덕이다. 그저 고집스러울 뿐인 나는 주변의 꾸준한 사람들의 덕을 보며 산다. 그들은 고집과 변덕으로 시시때때로 생떼를 부리는 나를 큰 산과 같은 묵직한 꾸준함으로 받아준다. 아무리 잘난 척을 해봤자 그들의 수고로움 앞에서는 나는 그저 아직 어리거나 젊은, 어떤 상황에서는 결국 자기 하나밖에 볼 줄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일 뿐이다.

  학창시절에는 공부하는 테크닉을 익히고, 사회에 나와서는 능력 있는 교사가 되기 위해 새로운 테크닉을 궁리하고, 결혼해서는 갖가지 살림 테크닉을 배우고... 언뜻 보면 상당히 부지런히 살아온 것 같지만 그러한 자잘한 테크닉을 넘어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는 여전히 미숙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문득 스쳐 지나는 잔상에 몰입한다든지, 감정의 결을 건드리는 사소한 자극에 휘둘린다든지, 과거나 미래의 시간에 스스로를 두고 온다든지, 그럴 때마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주변 사람을 미궁에 빠뜨리는 안하무인의 습성. 그런 나를 마주하는 날이면 스스로가 가증스럽다.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좀 전까지 꾸준함을 가장한 채 연극이라도 했던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엄마 말씀처럼 잠깐인 듯싶다가도 멀미날 듯 긴 것이 삶이다. 별로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꾸준함 밖에는 삶과 대적할 뾰족한 도리가 없는 것 같다. 반짝이는 매력들에 눈과 마음을 뺏기느라 그 묵묵한 미덕을 닦는 데에 너무 소홀했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남편과 나는 우리 주변의 한결같은 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구를 비판하고 싶어질 때는 말이지," 하고 아버지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네가 누리고 있는 만큼 그렇게 유리한 처지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위대한 개츠비』中 그처럼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나를 향해 한결 같은 마음을 보여주곤 했다. 나는 다른 그 어떤 테크닉보다도 그 인정과 여유를 배워야 한다. 위대해지기 위해서라기보다 조금 덜 미안해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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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1-28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군요.(닥쵸!)=3=3=3=3

깐따삐야 2010-01-29 10:10   좋아요 0 | URL
앗, 그런가요? 꾸준히 약올리기의 달인.ㅋㅋ ^^

Mephistopheles 2010-01-29 10:22   좋아요 0 | URL
그것도 정말 힘든 일입니다..으쓱!=3=3=3=3

레와 2010-01-28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

깐따삐야 2010-01-29 10:10   좋아요 0 | URL
^^

2010-02-02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03 15: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창비세계문학세트>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어느 사랑의 실험 - 독일 ㅣ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알렉산더 클루게 외 지음, 임홍배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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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이야기를 읽은 지 오래되었다. 옛날에 어느 마을에 욕심 많은 장사꾼이 살았는데, 멀고 먼 옛날 어느 고을에 마음씨 착한 총각이 살고 있었는데... 그렇듯 향수 어린 동화 말이다. 이 책에 실린 열일곱 편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오래되고 슬픈 동화를 읽는 기분이었다. 촌철살인의 재기발랄한 작품들도 있었지만 한 권의 작품집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애수’였다. 또한 이 타국의 옛날이야기들은 학창시절 밤을 지새워가며 한국 근현대 단편들을 읽던 추억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현진건의 ‘빈처’, 김유정의 ‘떡’, 전영택의 ‘화수분’ 등 내가 그 시대를 살아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잊지 못할 아프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했다.

  작품집에는 괴테, 토마스 만, 헤쎄, 카프카 등 낯익은 거장들의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주로 장편으로 주목받은 작가들이지만 새롭게 소개되는 흥미로운 단편들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토마스 만의 ‘루이스헨’은 그간에 보아왔던 토마스 만의 작품과 완전히 달랐다. 미모의 젊은 아내가 소심한 뚱보 남편을 파티 석상에서 쇼크사 시키는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인데 만은 이야기 서두에 이렇게 쓰고 있다. 세상에는 아무리 대담한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도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결혼사례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경우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도리밖에 없다. 마치 연극에서 얼간이 노인네와 생기발랄한 미인이 사랑의 모험으로 결합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듯이. 스물두 살에 쓴 작품이라기엔 다소 벤자민 버튼스럽다. 오히려 나중에 발표한 ‘트리스탄’이나 ‘토니오 크뢰거’가 더 젊은 작품이란 생각이 들 정도.

  그밖에 좋았던 작품은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 그리고 알렉산더 크루게의 ‘어느 사랑의 실험’이었다. 심리소설의 대가라고 일컬어지는 슈니츨러는 그 명성답게 그리 대단하지 않은 소재를 가지고도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데에 성공했다.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은 죄책감과 사랑이라는 두 가지 감정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교묘하게 얽어놓은 수작이다. 슈니츨러의 심리학은 참으로 명석하고 현실적이면서도 감동을 준다. 한편, 크루게의 ‘어느 사랑의 실험’은 독자에게 ‘불행이 일정한 도를 넘으면 더 이상 사랑을 작동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던진다. 나치 치하에서 자행되었던 잔인한 생체실험 과정을 보여주는데 연출된 극본, 무미건조한 보고서와 같은 문장이 다소 충격적이다.

  나머지 모든 작품을 일일이 다 열거하기 보다는 문학에 관심이 있거나 재미있는 옛날이야기에 목마른 독자들이라면 직접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특별히 독문학에 대한 소양이 부족하거나 흥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 사는 보편적인 이야기로 읽힐 만큼 재미와 가치가 있다. 또한 전집 중에서 단 한권의 책만 받아보았지만 매우 정성껏 엮었다는 느낌이 든다. 깔끔한 장정에 오자, 탈자를 발견하지 못했을 뿐더러 번역체의 어색한 문장 때문에 외국 소설을 꺼려하는 독자들도 많은데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주로 숨겨진 단편들을 발굴하여 싣다 보니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깊이 있게 탐색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학전집은 아니지만 거장의 싹을 품고 있는 새롭고 흥미로운 작품들과 조우할 수 있는 즐거운 책읽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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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3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5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