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이 가장 많은 돈을 쓰는 쇼핑 품목을 보면 된다는 말이 있다. 책 위에 앉아있는 먼지들을 털어내고 묵은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나한테 이런 것도 있었나, 하는 크고 작은 물품들을 정리하면서 저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열혈 독서가라기에는 지식과 상상력이 너무 빈천하고 패셔니스타라기에는 내 옷장의 옷들은 유행과는 거리가 멀다. 그 외에 내가 꾸준히 사들이는 품목이 있었던가. 한때는 음반에 미쳐 있었고 예쁜 가방, 머그잔에 꽂힌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나마 기복 없이 사들이던 책도 아주 띄엄띄엄, 생각과 생각을 거듭해 구입하곤 한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이 짐처럼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혼할 때 온 식구들을 동원해서 내가 읽어온, 아니 쌓아온 책들을 신혼집으로 옮겼었다. 내가 책을 빼서 내려놓으면 아빠와 엄마가 층층이 쌓인 책들을 묶었다. 이런 책은 왜 가져가니. 다시 읽지도 않을 텐데. 엄마는 할랑한 에세이집이나 케케묵은 소설책 등을 가리키며 혀를 차셨다. 내가 좋아했던 작가 책이라서 버릴 수가 없어. 하지만 지금 책장을 칸칸이 차지하고 있는 그 책들을 보면 어쩐지 안쓰럽고 우울해진다. 엄마의 예상처럼 한 번도 다시 펼쳐보지 않았고 남편 또한 관심을 보이지 않기에 마치 데리고 온 자식 같은 느낌. 하지만 감흥은 덜할지언정 애정마저 변한 것은 아니다. 그래, 내 성장의 이력이야. 그래도 언젠가 애지중지하던 추억의 활자들이 지퍼로 입을 닫은 봉제인형처럼 외롭고 슬퍼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일찍이 누군가에게 주어버렸거나, 잃어버렸거나, 두고 왔다면 적어도 주인의 무심함에 잊혀져가는 짐처럼 보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언젠가 다시 입으리라 기대는 하고 있지만 허리선이 없어진 요즘 임신 전에 입던 옷들이 남의 옷처럼 보인다. 그 남의 옷처럼 보이는 옷가지들 중 다시는 입지 않을 것 같은 옷을 수거함에 버렸다. 안목이 형편없는 것인지, 당시에 무슨 바람이 들어 샀는지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요즘은 배를 감싸주는 편안한 임부복만 주구장창 입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입게 되는 것만 입는다. 내 성향이 본래 이런 것 같다. 여러 벌을 가지고 바꿔 입기보다는 마음에 드는 옷 몇 가지를 계속 입는 식. 그런데도 옷장을 쭉 둘러보면 옷이 여전히 많은 것 같다. 다시 입지도 않을뿐더러, 어쩌면 다음 쇼핑에도 방해가 되는, 이 또한 짐이다.

  그밖에도 정리하다 보니 펜과 포스트잇은 갖가지 색상별로 왜 이렇게 많고 샘플로 받은 화장품이며 기념품이나 증정용으로 받은 컵은 참 다양하기도 하더라는. 막상 내가 애용하는 것들은 0.7 포인트의 평범한 볼펜과 HB 연필, 기초화장품 두어 개, 알라딘 머그컵인데 말이다. 필요해서 갖고 있기보다는 버리지 못해 하나, 둘 쟁여둔 것들. 새해가 되어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 목록도 정리를 했는데 어제 저녁 대학원 후배한테 오랜만에 연락이 왔을 때 하마터면 누구세요, 할 뻔 했다. 연락처 정리는 이따금 그런 미안한 후유증을 남기기도 한다. 대개는 삭제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멀어지는 경우가 더 많지만.

  아기를 갖고 나서 잠도 많아지고 그에 비례하는 것인지 이런저런 꿈을 많이 꾸는데 내가 움켜쥐고 사는 기억이 참 숱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가시적인 영역에서조차 나는 무엇 하나 깔끔하게 버릴 줄을 모르는가 보다. 내게 상처를 주었던 이들과 재회해 얼굴을 붉혀가며 싸우기도 하고 학창시절로 돌아가 놓쳐버린 버스, 잃어버린 신발, 열리지 않는 사물함, 다 풀지 못한 시험지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뒤척이다 깨어보면 몸을 꽁꽁 웅크리고 이불 끄트머리를 꼭 쥔 채 힘들어하고 있다. 꿈이라서 다행이야, 안도하다가도 현실처럼 세세하게 펼쳐지는 옛 풍경들에 비만한 나의 기억 창고를 몽땅 털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나와, 뒷목덜미를 잡고 나를 붙잡으려는 내가 꿈속에서, 무의식의 시공간을 누비며 잠든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남편은 매사 선명하고 논리적인 내가 부럽다고 하면서도 그 이면에 잔걱정, 잔망스러움이 그득한 모순적인 모습을 파악하고는 나를 가리켜 갈팡질팡하다가 아무 것도 못하게 되는 인간 유형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종교적인 인간이 되기에는 회의와 의심이 많고 철학적인 인간으로 살기에는 종종 비논리적인 것에 휘둘리는. 나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꽤 적확한 지적이다.

  그래서인지 좀 덜 연연하며 살았으면 싶다. 물리적인 것이든, 그 이외의 것이든, 이제껏 바쁘게 쌓아올리고 모아온 것들이 시시때때로 짐스럽게 느껴진다. 혈혈단신이 아니기에 속세의 속성을 아예 등질 수야 없겠지만 버리지 못하면 못할수록 그만큼 심신을 묶는 고리들이, 보기 좋게 정리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점점 더 늘어가는 것 같다. 개그우먼 이경실이 아침프로에 나와 그런 말을 했다. 뭔가를 계속 사들일 때가 있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마음이 참 허했던 때라고.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사들인 책이나 옷에서 내 정체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카드 명세서를 보면서 헛헛했던 나를, 나 자신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이미 오래 전 해프닝이지만 그녀의 반성에 공감했다.

  그밖에도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이라든가, 완전히 놓아버리지 못한 꿈, 허영기 어린 계획들, 자질구레한 일상 소품들 외에도 버리고 비워야 할 것들이 참 많다. 내가 버리지 못한 것들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듯한 이 근질거리는 느낌. 반드시 갖고 가야 할, 또는 앞으로 쌓아가야 할, 소중한 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몇 안 되는데 나머지 것들은 대개 군더더기이자 허욕인 셈이다. 자칫 느슨해지거나 자기합리화에 빠지지 않고도 내내 단촐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최고의 인테리어는 말끔한 청소, 최고의 사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되도록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그렇듯 청신한 마음가짐과 생활태도로 말이다. 짐정리를 끝내고 가뿐하고 후련해진 기분, 그것 또한 내 마음이 누리는 넉넉한 호사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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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1-12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은 언제나 조곤조곤, 요란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추천을 누를 수 밖에 없는 글을 쓰시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읽다가 추천을 눌러요.
그리고 몇가지를 덧붙일까 하다 관둡니다. 제 요란한 마음에 대한 댓글을 쓰다보면, 이 페이퍼의 차분함에 스크래치를 낼 것 같아요. 방금전까지 방방 뜨는 마음이었는데, 이 글을 읽고 나니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아요. 글 내용뿐만이 아니라 분위기로도 깐따삐야님의 페이퍼는 제가 가끔 읽어줘야 할 그런 페이퍼에요.

만약 깐따삐야님이 에세이집을 내신다면, 저는 사서 여러 친구들에게 선물하겠어요.

깐따삐야 2010-01-13 11:44   좋아요 0 | URL
추천 감사합니다.^^ 저는 제 삶에서 감탄이나 환호가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고 또 아쉬운데 다락방님의 글에는 느낌표(!)가 살아있어요. 축축 늘어지기 일쑤인 제가 가끔 읽어줘야 할 페이퍼에요.

와... 적어도 세 권은 팔리겠군요! 흐흐.^^

비로그인 2010-01-12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핑이면 어지간한 스트레스는 다 풀린다는 친구가 있었어요. 책을, 옷을, 구두를, 기타 등등을 휘몰아치듯 쇼핑하는 저는 어디쯤 와있는 걸까 생각하다 이 글을 읽었습니다. 타이밍이 무서워질 지경.

전 임부복을 입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그로테스크해 보였어요. 제 모습이 늘 적응이 되지 않았던 때였던 것 같아요.

깐따삐야 2010-01-13 11:50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때가 있었고 지금도 간혹 충동적으로 질러대는 순간이 있어요. 그 묘한 충족감을 대체할만한 것이 있다면 좀 알고 싶어요.

Jude님도 그러셨구나. 정말 그렇죠? 옆모습은 더 이상해요.ㅠ 초음파를 볼 때만 잠깐 현실감이 느껴지고 대부분의 시간은 내 배가 내 배가 아닌 것 같은 느낌으로 살아요.

비로그인 2010-01-13 16:11   좋아요 0 | URL
여기저기서 들으셨겠지만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출산 후 바로 살이 빠지진 않아요. 물론 몸무게는 순간 줄어들겠지만 그 전의 체형으로 돌아오는 데에 저는 거의 1년 반은 걸린 것 같아요. 이전의 완벽한 그 실루엣은 아직, 이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은 필요한 것 같아요.

깐따삐야 2010-01-14 09:14   좋아요 0 | URL
헉! 너무 오래 걸리네요. 일년 반이라니. 과연 임신 전에 입었던 옷들을 언젠가 입을 수나 있을까요. 열심히 모유수유 해야겠어요.ㅠ

Mephistopheles 2010-01-12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페이퍼를 쓰고 있는 깐따님을 상상했어요. 불룩하니 이쁘장하게 나온 배를 젖히고 골똘히 생각하면서 키보드 치는 깐따님..^^

깐따삐야 2010-01-13 11:52   좋아요 0 | URL
불룩한 건 맞는데 과연 이쁘장하기만 할까요? ㅋㅋ 엄마가 잡념이 많아서 심란한 아이로 자랄까봐 걱정이에요.

2010-01-12 2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3 1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3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4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10-01-13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릴 걸 다 버리고 가는 건 60 정도에 하려구요. 그 전에는 할 수 있는 힘껏 최대한 짊어지고 살아보려구요. 그게 삶의 재미일 수 있고,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싶어요. 페이퍼에 안 어울리는 생뚱맞은 얘기네요. ㅎㅎ

깐따삐야 2010-01-13 12:05   좋아요 0 | URL
저는 애도 낳기 전에 벌써 조로인가 봐요. 이것저것 내다버릴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니 어째요.ㅋㅋ

레와 2010-01-13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감하게 뭔가를 버릴때 희열이 느껴집니다!! 네네!
몸무게와 상관없이 몸이 가벼워지는 .. 그런 느낌? ^^


아무리 비싼 물건을 사고 오랜시간 쇼핑을해도 허한 마음이 충족되지 않는 단계에 와 있었어요. 적어 놓고 보니 심각하네요.

깐따삐야 2010-01-14 09:22   좋아요 0 | URL
맞아요. 몸이 무거워지니 더 버리는 지도? ㅋㅋ

레와님 뿐만 아니라 특히 여자들은 그런 심각 단계가 간혹 있는 것 같아요. 후회에 몸무림치지 않으려면 조~오심 하긴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