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함으로써 가족 내에서 나의 입장이란 것이 생기는 한편 상대방의 입장이 결혼 전과 달리 보이기도 한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나라면 저러지 않을 텐데, 하는 상황이 곧잘 벌어지곤 한다.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되기도 하고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면 얼굴을 붉히거나 차갑게 응대해주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그것은 ‘밖’의 일이므로 고민하거나 스트레스 받는 일 자체가 낭비인 것 같아 오래 담아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정에서의 입장이란 것은 밖의 일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 같다. 결혼 전, 나는 딸이었고 시누이였다. 지금은 며느리이기도 하고 올케이기도 하다. 또한 내게는 올케도, 시누이도 있다. 성별이 같고, 같은 호칭을 쓰고 있지만 결국 모두 다른 사람들, 다른 여자들이다.

  학교 다닐 때 올케와 비슷한 부류의 여자 아이들이 있었다. 매년 같은 반이 되어도 나와는 절대 친해질 수 없는 타입. 평균적인 지성에, 말수가 적고, 욕심이 많고, 감수성이 부족한, 잘 빚어놓은 점토 인형 같은 아이. 모든 일에 결코 먼저 나서는 일이 없기에 큰 업적도 없지만, 별 실수도 없는, 고만고만한 모범생. 어느 새 누구도 거절하기 힘든 참하고 반듯한 미인으로 성장한 아이. 굳이 올케와 시누이라는 선을 긋지 않고 그냥 일대일로 놓고 보아도 서로 쉽게 녹아들지도, 섞일 수도 없는 그야말로 남남인 사람.

  스치는 만남이라면 그처럼 첫 이미지를 보고 재단한들 서로에게 마음의 짐으로 남거나 상처가 되지 않지만 가족이야 어디 그런가. 결국 나와 다른 피, 조화할 수 없는 정신이라고 해도 부단히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말고 존중이나 배려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조차도 그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사람과 평생을 나야 하는 내 핏줄을 위한, 혈육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노력.

  그랬는데, 결혼 이후 어느 시점부터 올케에 대해 묘한 양가감정을 갖게 되었다. 과거에는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점점 정이 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지만 친밀감이 들지는 않는다. 나 또한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올케가 되어보니 그 입장을 잘은 알겠는데 그 입장이 되고 보니 그에 따른 불만도 생긴다고 해야 하나. 요즘 남. 보. 원이라는 개그 코너에서 시위하듯, 먹을 밥도 안 해놓고 들어오라고만 하면 장땡이냐!

  내가 남편을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나와 같은 직업을 가졌다는 점이었다. 생판 다른 남녀가 함께 살다보면 안 그래도 부딪칠 일이 잦은데 그래도 직업이 같다보면 통하는 점도 많을 테니 자연히 대화도 많아지고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도 많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큰 부자로 살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돈을 써봤자 나 버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조언 또한 그러했고 살아보니 아직까지는 처음의 기대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올케는 서울내기라 그런지 생각이 달랐다. 본인이 교사이면서도 교사 남편은 싫다고 말하면서 내가 미혼일 적, 전문직 종사자나 대기업에 다니는 남자들과 선보라고 열심히도 권했었다.

  그런 남자와 안 살아봐서 이러는지는 몰라도 나는 현재의 삶에 자족하는 편인데 어찌 된 일인지 그런 남자와 살고 있는 올케는 뭐가 불만인 모양이다. 우리 남편이야 오가는 길, 출퇴근 시간 일정하고 짧게나마 방학까지 있지만 오빠는 일의 특성 상 그럴 수가 없다. 출장도 많은데다 중요한 자리에 있을 때는 연락이 안 될 때도 많다. 가끔은 남들 다 쉬는 연휴에 출근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쁜 만큼 많이 벌고 부지런히 움직인 만큼 승진도 한다. 하는 일이 그런데 올케는 그런 오빠만 턱 빠지게 기다리고 있으니 그것은 너무 보고 싶고 좋아해서라기보다 배려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오빠한테 제발 잘 좀 하라고 했다. 이후에 올케가 몸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오빠만 들볶았다. 하지만 그간 올케와의 대화와 꾸준한 관찰 결과, 올케의 감수성 부족, 취미 부재가 눈에 들어왔다. 오빠에게 권했다. 언니한테 재미있는 책이나 좀 색다른 취미생활을 권해보는 건 어때? 하지만 올케는 책도 좋아하지 않는데다 홀로 다양한 취미의 세계를 개척, 탐구할 만큼 적극적인 사람도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엄마는 올케에게 <좋은 생각> 정기구독권을 선물했다. 그래, 언니는 다른 사람들 사는 모습 보면서 좋은 생각을 좀 할 필요가 있어. 하지만 이제는 나 혼자 툴툴거리고 있다. 자기가 좋아서 오빠랑 결혼해놓고 이해는 못해줄망정 왜 뒤늦게 난리야!

  올케는 예쁘고, 알뜰하고, 정직하고... 장점이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가정생활의 이치를 참 나만큼도 모르는 것 같다. 오빠가 아무리 고집이 세다고 해도 남자들이란 대개 단순해서 여자가 자기 할 일 똑부러지게 해놓고 나서 잘 구슬리면 백퍼센트 까지는 아니어도 하는 시늉이라도 하게 마련이다. 나 같은 성질머리에도 이따금 마음에도 없는 입에 발린 말로 구슬릴 때가 있다. 햇볕정책은 북한한테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자칫 버르장머리가 나빠질 우려가 있으므로 발뒤꿈치 닳도록 잘해줄 필요까지는 없지만 일단은 아내의 역할을 최대한 하고나서 한두 가지, 중요하다 싶은 것을 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엄마한테 이제부터 혼낼 것은 혼내고 예전처럼 너무 많이 배려하지 말라며 화를 냈다. 그것이 오빠를 위한 일인 줄 알았는데 어째 오빠를 더 피곤하게 하는 일 같다고도 했다. 엄마가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나도 남편한테 잘해주면서 살고 있는데, 올케가 대체 먼데! 이런 생각까지 들더라는.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한 남자를 선택했다면 이익만 취할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부수적인 불편들까지 감수해야 한다고 본다. 올케는 능력 있고 돈 많이 버는 남자랑 결혼해서 좀 심심한 모양인데 나는 시간 많고 자상한 남자를 택했더니 매 끼니 차려주는 일이 곤욕이고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 눈에 사나운 와이프로 보이는 것을 감수해야 하더라는. 어떤 선택이든 일장일단이 있는 법.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앞뒤 안 재고 물불 안 가리지, 올케 같은 사람은 체면 살피고 손익 계산 따지느라 남들 앞에서 참하게 굴어야 하니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우리 시누이는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좀 무섭고, 과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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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12-29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댁대신 처가가 있는 결혼한 유부남인 저로써도 많은 공감이 가요. 우리 처형들 저와 너무 다르거든요. 월급쟁이 따분하다고 사업들하지...잘되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지.. 술을 잘 마시지도 않지...만나서 유일한 공통사항이 고스톱, 포카면 정말 말 다했죠. 그래도 사람들이 모나거나 모뙨 구석은 전혀 없어 그나마 참 다행이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죠..

그런데..나처럼 일 많고 돈 많이 못 벌고 시간도 많이 못내주고 자상한가? 한 남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

깐따삐야 2009-12-30 16:06   좋아요 0 | URL
혈육도 다른데 피 한방울 안 섞인 다른 식구야 오죽하겠어요. 결국 어우렁더우렁하다가 공존의 룰을 찾기 마련인데 올케는 늘 제자리라고 해야 하나. 처음엔 나름 고집 있어 보여 좋았는데 이제는 갑갑하네요. 그런 성격을 가진 본인이 어쩌면 가장 힘들 것도 같고.

메피님의 마님은 예술가시잖아요. 스스로 열정을 쏟아부을 무언가가 있는한 주변 사람에게 매달리지 않죠. 더욱이 메피님이 얼마나 자상하셔요!


레와 2009-12-30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별다른 취미 생활 없이 살고있는 무료한 삶을 본인 탓이 아닌, 타인 탓이라 생각해요. 더욱이 책이나 음악, 영화 보는것도 별로라 하구요. 그럼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재미가 있고 행복하다면 상관없지만, 행복하지 못해 옆에 있는 사람을 들들 볶는 경우가 있거든요.

제 경우엔 결혼한 친구가 전화를 걸어 징징 거리는데, 조목조목 따지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찌 행복하려고 하니, 라고 물으면 '그러게..'라며 전화를 끊어요.
아놔..;;

만화책도 재미있는게 얼마나 많은데, 왜 알려줘도 안할려고 할까요? ^^;

깐따삐야 2009-12-30 16:14   좋아요 0 | URL
공감해요. 혼자 즐길 수 있는 취미도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오래도록 보고 싶었던 연극 한편을 보고 난 뒤 그 힘으로 며칠을 기분 좋게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 좋은 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죠. 대개 비슷하게 흘러가는 인생인데도 그렇게 차이가 나요.

마치 우리 올케와 엄마의 통화 내용 같군요. 더욱이 서울은 얼마나 혜택 받은 도시에요. 나 같으면 여기저기 찾아다니고 구경 다니느라 바쁠텐데.

그러게나 말이어요. 게으른 사람은 하느님도 못 이길 것 같아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