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이 한참 남은 줄 알았는데 라디오를 켜니 올해 마지막 날이라며 반성, 사과, 고백 등이 줄을 선다. 사람들 마음이 다 이맘때만 같으면 정말이지 온 누리에 평화가 오겠다. 먼지를 털고, 베란다 유리창을 닦고, 김치볶음밥을 하고. 내 하루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깐따삐야, 나 좋은 일 생겼어. 아침부터 문자. 결혼하니? 라고 물으니 그건 아니란다. 사귄다는 얘기는 들었어. H는 목하 첫사랑과 열애중이다. 두 사람은 십 년을 돌고 돌아 재회했다. 스무 살의 H가 연모의 대상이었던 J선배를 향해 탄성을 내지르던 모습이 아직도 선연하다. 나의 트리스탄! 내가 보기에는 바람 냄새만 쏠쏠 풍기던 그저 그런 남자였는데 H에게는 가을의 전설, 브래드 피트에 버금가는 멋쟁이로 보였는가 보다. 필시 연예인 사주를 타고난 듯한 H와 그에 버금가는 J선배는 각자 화려한 이십대를 보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만나 연애를 하고 있다니 놀라운 한편 아슬아슬하다. 얽히고설킨 인연의 그물망 때문에 두 사람의 연애가 공개되면 뒷목 잡고 쓰러질 사람도 몇은 될 것 같다. 하지만 사랑한다는데, 저리 행복하다는데, 부디 서로에게 굳건히 정착하여 고이고이 사랑하기를, 바래본다.

  남편과 나는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어서 쇼 프로그램 재방송을 보고는 “이런 축구 같은...” 이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 경상도 사투리로 축구가 바보란다. 세밑인데 서로에게 사랑과 감사의 뜻을 전하지는 못할망정 이상한 짓 해놓고 서로를 웃음거리 만들기에 바쁘다. 그러고 보니 올해 서거하신 김수환 추기경과 노무현 대통령의 별명도 바보였는데 우리에게는 참 ‘그리운 바보’들인 것 같다. 나는 살면서 나 자신이 바보는 아닐까, 바보이면 어쩌나, 전전긍긍할 때가 많은데 한 사람의 마음도 제대로 덥히거나 적시지 못하고 똑똑한 척 하면 뭐가 남는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나저나 내년에는 진짜 축구, 월드컵이 있다. 중계방송 보다가 이런 축구 같은... 경우가 안 생겼으면 좋겠다.

  친정이나 시댁이나 구정을 쇠지만 신정 지나고 곧바로 시어머니 생신도 있고 해서 방앗간에 가래떡을 맞췄다. 그냥도 먹고, 떡국도 끓여먹고, 싸드리기도 하고. 나이 한 살 더 먹는 것은 실감이 안 나는데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집중되었던 관심이 여기저기 분산되는 것을 느끼면서 예전과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 혼자였을 때나 지금이나 안온함과 쓸쓸함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나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하지만 누구의 말마따나 모든 것은 지나가리니, 둔해졌거나 혹은 담대해졌거나.

  뭔가 일을 하거나 움직일 때는 잘 모르겠는데 내 몸이 편안해지면 안에서 꼬물꼬물 아기가 운동을 한다.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하루 종일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커간단다. 지난번 초음파 검사 때는 졸리기라도 한지 눈도 비비고 하품도 하더라는. 나는 아직 씩씩한 발길질 같은 건 느껴보지 못했는데 엄마는 나를 가졌을 때 하도 뻥뻥 차대서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단다. 우리 아기는 아마 온순한 제 아빠를 닮은 모양이다. 남편은 아기에게 자꾸 말도 걸고 이야기도 해주라는데 나는 어째 그 모양새가 낯간지러워서 우리는 다 마음으로 알아듣는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눈짓만 슬쩍 해도 엄마 뜻을 바로 헤아리는 영리한 아이로 키우려면 뱃속에서부터 미리 훈육해야 한다면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 간혹 이렇게 낯설고, 어려울 때가 있다. 아무래도 내가 아기를 키우는 동시에 아기가 나를 엄마로 키워야 할 것 같다. 새해에는 그 두려운 모험을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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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09-12-31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년에는 이쁜 아가 사진을 올려주시겠네요.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
날이 많이 추운데 건강 관리 잘 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깐따삐야 2010-01-02 20:42   좋아요 0 | URL
출산의 고통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두렵습니다.ㅠ 남들도 다 하는 일이니 저도 잘할 수 있으려나요.
무스탕님도 새해엔 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