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했고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중국에 다녀왔다. 여행지는 상해, 장가계, 소주, 항주 일대였다. 현지식은 물론 한식을 시켜도 도통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 때문에 가져갔던 풋고추와 볶음 고추장 두 통을 탈탈 거덜내고, 평소엔 거들떠도 안보던 주전부리와 야밤의 컵라면으로 불만투성이인 혀를 달래곤 했던 허기진 여행이었지만 그 일정은 대체로 무탈하고 즐거웠다.
상해는 항구도시인만큼 매우 부산하면서도 역동적인 인상으로 다가왔다. 중국 정부의 정책에 따라 똑같은 모습을 한 고층 건물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고 시내 중심가로 들어서면 유명 패스트푸드점이나 고급 백화점들이 종종 눈에 띄는 소비도시이기도 했다. 사진은 동방명주타워에서 바라 본 상해시의 모습.
장가계의 천자산과 천문산 일대는 경치가 빼어나기로 유명한 곳. 이어지는 절경에 케이블카 안에서 계속 탄성을 질러대야만 했다.
중국 산수화를 그대로 옮겨다놓은 듯한 아름다운 풍광들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우리나라의 아기자기하고 소담스런 산들에 비하면 중국의 산들은 육중하고도 과감한 멋을 자랑한다. 안개 때문에 보다 선명한 사진을 찍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해질 무렵, 관람을 하고 내려오던 중 어둑어둑해지는 케이블카 안에서 우리의 엉뚱마님 곽 따꺼, 곽 선생님과 함께.
계단 오르기 힘들다고 칭얼대던 일곱살배기 박군. 결국 가마꾼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 가마꾼들. 얼마냐고 물으니 처음엔 만원, 만원, 만원, 하더니 결국 그건 만원이 아니라 삼만원이었다고 우겨대기 시작하는데 가이드의 도움이 없었으면 된통 바가지 쓸 뻔 했다. 우리 박군이 다소 무겁긴 했지만서도. 쩝.
동행했던 사서 선생님과 개구쟁이 박군. 우리는 밤마다 한 방에 모여 컵라면을 끓여먹고 다른 선생님들의 천태만상을 카메라로 고발하며 불면의 밤들을 보내야만 했다.
항주에서 보았던 송성쇼. 평균신장 170 이상의 화려한 미녀들이 한 시간 내내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중국 영화에서 익히 보았던 흥겨운 뻥들이 쇼의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갑자기 인공절벽에서 폭포수가 쏟아지고 촛대를 등에 얹고도 온몸을 자유자재로 말아대는 등, 연중 빈 좌석이 없다는 풍문만큼은 뻥이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송성쇼가 막을 내릴 무렵 배우들이 관객들을 향해 던져주었던 행운주머니. 어찌나 집중력과 완력 넘치는 점프였던지 함께 갔던 선생님들 중에 주머니를 받은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하지만 주머니를 받은 관객들은 앞으로 나와서 함께 춤을 추자고 말하는 배우들의 눈치를 보며 몰래 엉덩이 밑으로 주머니를 밀어넣은 채 숨죽이고 앉아있었다는 뒷담화. 춤을 출 걸 그랬나. 핸섬하고 늘씬한 남자배우들도 많았는데.
일정 내내 일행을 이끌며 사진을 남기며 수고하셨던 체육선생님과 서호유람 중 한 컷. 요리집에 갔을 때였다. 내가 장난을 치느라 중국인 종업원에게 우리는 모두 한국인이고 이 선생님만 동남아에서 왔다고 말하자 어려뵈는 청년 종업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고개를 끄덕끄덕. 이국적인 마스크에 썰렁한 농담을 좋아하고 직원체육날이면 직접 순대를 만들고 어묵국을 끓이기도 하는 적극적이고 재미있는 유부남이시다. 학창 시절 체육 선생님들에 대한 안좋은 추억을 싸그리까지는 아니어도 상당 부분 해소해 주셨던.
백마사, 소림사와 함께 중국에서 가장 큰 사찰 중의 하나라는 영은사의 불상. 많은 중국인들이 불상 앞에서 향을 피워놓고 절을 하며 소원을 비는 모습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도 마음 속으로 소원 하나를 빌었는데 국적차별인지 아니면 간절함이 부족했는지 내 소원은 물 건너갔다.
올라가려면 올라가셔도 좋지만 시간 맞춰 내려올 자신이 없거나 다리 힘 없으신 분들은 그냥 아래에 계셔달라는 현지 가이드의 엄포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렸던 999계단. 그러나!
남달리 튼실한 하체를 자랑하는 내가 올라가지 않는다면 내가 웃고, 남들이 웃고, 하늘이 웃을거란 자책감에 두 주먹 불끈, 두 다리 울끈하며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가파르고 촘촘하고 많긴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이제 웬만한 계단은 날아 오를지도 모른다. 올해 고3 수험생의 엄마가 되시는 선생님들 세 분도 이를 악물고 정상까지 오르셨단다. 대한민국 엄마들은 버스보다 빠르다고 하질 않던가.
세자매 바위를 뒤로 한 채 홀로 한 컷. 현지인처럼 나왔다.
중국은 듣던대로 크고 넓고 많은 나라였다. 저녁 한 끼 먹으러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가는 느낌이라고 말할 정도로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넓었고 그만큼 아직은 도농간의 격차나 지역간의 격차가 상당히 컸다. 자유화의 물결이 곳곳에서 느껴지긴 했지만 여전히 공산국가 특유의 나태함이라든가 방만함이 느껴졌고 전반적으로 아직 자리잡히지 않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끝을 가늠하기 힘든 광대한 국토와 버스를 타든, 비행기에 오르든, 배에 오르든 여기저기에 바글바글 모여있는 수많은 중국인들과 시끌벅적한 그들의 언어. 10년 남짓이면 미국을 능가할 거라는 전망이 무색하게 들리진 않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작년의 일본여행에서도 그랬고 이번 중국여행에서도 그렇고 이웃나라의 좋은 점을 우리가 제대로 캐취해서 야무지게 활용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컸다. 불리한 지리적 요건에도 불구하고 그 불리함마저 관광산업과 문화사업으로 육성시킬만큼 꾀가 많고 재기발랄한 일본인의 기질과,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중심이라는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도 의뭉스럽게 제 이익을 꾀할 줄 아는 중국인의 대범함을 배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행의 끝엔 늘상 그래도 우리나라가 제일 좋아, 라는 수수한 깨달음과 함께 귀환하곤 하지만 오감으로 느꼈던 그들만의 장점은 쉽게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고 아쉬움으로 남곤 한다. 평소 내가 생각해오는 바, 해외 여행을 떠나는 데 있어 어르신들의 관광으로서도 물론 좋겠지만 어린 학생들의 견학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도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어쨌든 여러 선생님들의 수고로움에 기대어 다른 듯 닮아 있고 닮은 듯 서로 다른 한, 중, 일 세 나라를 부분적으로나마 비교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