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뉴스에서 모래주머니를 어깨에 들쳐매고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어느 구청에서인가, 환경미화원을 뽑는 실기시험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장면이 계속 꿈에 나온다. 얼굴이 노란 사람들은 제대로 헉헉 소리도 못 내고 체육관의 끝에서 끝을 달리고 또 달린다. 출발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는 그칠 줄을 모르고 헐렁한 바지 속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감춘 채 사람들은 계속 달린다. 대신해 줄 것도 아니면서 다리 뻗고 누워서 꿈으로나 꾸고 있다니, 뉴스보다 더 처절한 꿈에 마음이 좀 거시기 했다.

  내 일상은 34%의 잡소리, 10%의 엄살, 56%의 몽상으로 굴러가고 있다. 달지도 쓰지도 않기에 다소 사치스럽다. 낼모레가 그새 입춘이고 개학이 머지 않았다. 다시 봄이 올 것이라는 별로 새롭지도 않은 사실이 언짢기만 하다. 어깨에 모래주머니를 들쳐매고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야만 할 것 같은 기분. 심정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모래주머니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걸 들쳐매고 힘겨루기, 속도전만 치르고 있는 것 같다. 입춘이 가까워오면 나는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무장해제했던 심신을 일으켜 다시 철갑상어로 둔갑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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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7-02-02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49프로의 방치, 35프로의 빈말, 16프로의 엄살로 살아가요.

깐따삐야 2007-02-02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건가요. ㅋㅋ
 
남편 고르기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제목이 많이 노골적이다. 남편 고르기. 쇼파에 앉아 이 책을 읽던 나를 향해 빗발치던 비웃음 섞인 눈총들. 약 십 년 전,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으라는 통지를 받았을 때와 흡사한 분위기였다. 가족들은 나를 아직도 어른으로 보지 않고 있다. 막내이긴 하지만 이제 그다지 막무가내는 아닌데 늘상 대놓고 어린애 취급이다. 엄마는 내가 무언가에 대해 열변이라도 토할라치면 하여간 말은 잘해, 못박아 버리시고 아빠는 더 들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는 듯 귀를 닫고 계신 듯 하며 오빠는 가끔 볼 때마다 꼭 한 두번은 머리를 툭툭 쳐대곤 한다. 작가 하 진이라면 아마 이런 상황을 기막힌 반전으로 처리하겠지. 나의 상상력은 가족들이 놀랄 만큼 진짜 멋진 남자를 데리고 나타나 나 결혼할래, 라고 외치는 것에서 진부하고 유치찬란하게 끝이 난다면, 하 진은 뭔가 아주 배꼽 빠질 듯 재미있거나 가슴이 뜨끔할 만큼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한 반전을 선사할 것 같다.

  이 책은 좋은 남편을 고르는 백 한 가지 방법에 대해서 나와 있는 책이 아니다. 우연히 모르는 이의 블로그에 흘러들어갔다가 하 진이라는 작가에 관해 대단히 호평을 해놓았기에 일단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믿고 책을 구하게 된 것은 그 블로그 주인장이 쓴 다른 글들 때문이었다. 이 정도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추천하는 책을 읽어봐도 되겠지 싶었다. 그리고 선택은 옳았다. 국내에는 <피아오 아저씨의 생일파티>와 <남편 고르기> 두 권의 책이 출간되어 있는데 두 권 모두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나 로알드 달의 <맛>을 떠올리게 하는, 군더더기 없이 상큼하게 응축되어 있으면서도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찡하고 뜨뜻한 여운을 남기는 훌륭한 단편들이었다. 작가의 손맛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나중에 옮긴이의 글을 읽어보니 작가가 스무 번 이상 원고를 수정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과연 그렇구나, 끄덕여졌다. 그 정도, 혹은 그 이상의 수공이 있었기에 이 정도의 감칠맛이 나는 것이구나 싶었다.

  책에 실린 단편의 소재들은 특별하지 않다. 마오쩌둥과 개방화 사이에 엉거주춤 서 있는 중국 변방 사람들의 이야기다. 대개는 완고한 집단과 자유로워지고픈 개인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고 일견 중립적인 톤으로 상황을 줄곧 묘사만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부조리와 모순 탓에 결정적인 순간마다 부실함을 드러내고 마는 공산주의와 집단논리를 은근히 조롱하면서 인간의 자유로운 감정과 선택에 손을 들어주는, 휴머니즘적 경향이 짙다. 과도기 속에서 빈부격차로 인해 피폐해지고 잔악해지기까지 하는 인간군상들의 모습이 족족 등장하고 그것은 우리나라의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기에 공감할 수 있는 폭도 컸다. <남편 고르기>와 <피아오 아저씨의 생일파티>는 비슷한 소재와 형식이기 때문인지 어느 단편이 어느 책에 있었는지 두 권 모두 읽고 났을 땐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각 단편들의 수준이 고르게 훌륭하며 작가가 일관성 있게 추구하고 있는 주제가 뚜렷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중국에 다녀온 덕분에 장면마다 등장하는 음식들이라든가 생활상들이 비교적 선연해서 그 재미 또한 쏠쏠했다.  

  고수가 차려놓은 맛깔스런 단편에 목마른 독자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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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07-02-0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 작가로군요..
흐음.. 그러고 보니 전, 중국 작가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어서..
일단, 보관함으로~!


하늘은 얄미울 정도로 쨍한데, 바람은 머리통 얼어버릴만큼 차갑습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깐따삐야님!! ^^*

깐따삐야 2007-02-01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처럼 햇볕은 쨍하고 바람은 찡한 날씨, 무척 좋아라 합니다. 레와님도 아프지 마시고 씩씩하게 지내세요. ^^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 - 1994 제18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임영태 지음 / 민음사 / 1994년 6월
절판


자신이 부족하다는 자각은 사고의 마비를 가져온다. 어떤 논리가 납득이 안 가거나 이해되지 않을 때, 그 논리의 모순이나 한계를 찾기보다는 자기가 부족하여 그러겠거니, 모든 걸 자신에게로만 화살을 돌린다. 반대로 자기 자신이 제법 독특한 논리나 의미심장한 사유를 전개할 때에는, 자신의 학습이 얕아서 그렇지 이쯤이야 높은 교과를 수료한 이들은 이미 아는 바이겠거니, 스스로의 사유와 논리에 금방 시들해진다. 주체적인 판단이 습관적으로 유보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그건 자격지심은 아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자기 비하감이나 과장된 피해 의식이 아니라, 자신의 배움이 부족하다는 걸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에서 오는 엉뚱한 굴레인 것이다. 물론 누구나 그렇지는 않다. 특별히 인문적 기질이 강하고 그러면서 자긍심 높은 사람들이 그런 허방다리에 빠지게 되는 것인데, 바로 우리가 그러했다.-33쪽

그 해 여름은 길고 지루했다. 어딘지 귀익은 표현이다. 그 해 겨울은 춥고 어두웠다는, 이런 식의 회상조 어투들. 그 속에는 확실히 축축하고 쓸쓸한 어떤 것이 있다. 어느 정도 감정의 부풀림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여하튼 버티어낸 자들만이 그런 말도 할 수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살아남은 자는 언제나 너무 할 말이 많은 것이다. 꾸역꾸역, 어쨌거나 살아냈으므로. -44쪽

지금에 와서야 우리는 그 이유를 안다. 어리석음이다. 연애란 마치 죽음과 같은 것이어서 경험해 보기 전에는 전혀 알 수가 없는 법이며, 알게 되는 경우란 이미 끝났을 때뿐인 것이다. 죽음과 다른 것이라면, 첫사랑은 그렇게 지나가지만 두번째 기회가 있다는 점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두번째 세번째 연애에서도 어리석음을 범하는지, 그건 첫번째 연애에서 충분히 상처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72쪽

무릎 한번 치고 대문 밖으로 나서니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경우도 있겠지만,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렬히 반성하고 나서도 세상은 여전히 아득할 수가 있다. 어뜩 자기 허물 하나를 집어올렸다지만, 세상이 달라져 보이지 않는데야 그건 멍에로나 남을 뿐이다. 결국 모두가 자기 한계 속에서만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라면 어쨌거나 그때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였다.-87쪽

한 가지 우리가 신선한 경험으로 받아들인 게 있다면 새 동거인이 보여준 인내와 끈기였다. 나중에 거듭 그 논쟁의 시간을 돌아볼수록, 우리의 반론을 받아내는 데에, 우리를 설득시키려는 진지한 노력에, 새 동거인이 보여준 인내와 끈기는 경탄할 만했다. 만약 우리 자신이 언젠가 새 동거인처럼 변모된다면, 그리하여 그 자리의 우리들처럼 완고히 도리질치는 상대를 향하여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면, 그때 새 동거인처럼 인내하고 절제하며 지침없이 자신의 신념을 피력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니 자신이 없었다. 사악한 적들에게 용기를 갖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무지 때문이건 편협 때문이건 나름대로의 소신으로 무장되어 질타해 들어오는 자들과 마주선다는 건 정말 피로한 일일 것이다. 뒤늦게 그러한 점에 생각이 미쳤을 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공연히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201쪽

차츰 세상이 유형지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누군가의 볼모였다. 우리는 무언가 자복해야만 하는 위치에 몰려 있었다. 죄목도 모른 채 어느 날 잠자리에서 체포되어 캄캄한 밀실에 던져진 카프카였다. 심판은 있는데 죄는 없다. 카프카는 죄를 찾아야 했다. 자기의 고통과 수모를 납득하기 위하여 카프카는 스스로 자기 죄를 찾아내어야 했다. 죽을 죄를 지었다고 자인하는 사형수만이 고통 없이 형장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평안해지기 위해 빨리 무언가를 자복해야 하는 것이었다. 분노나 오기 따위는 치워버려야 했다.
그것은 쉽게 되는 것 같았다. 우리의 분노와 오기는 엷어져 갔다. 그러나 내내 걷어버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어처구니없음. 무언가 어처구니없다는 그것. 기꺼이 자복할 마음이 돼 있었음에도 그 어처구니없음만은 끝내 치워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상처가 상처를 부화시켰다.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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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보고 돌아오던 길, 헌책방에 들렀고 뜻밖의 수확이 있었다. 비아트릭스 포터의 그림 이야기책 시리즈를 발견했다. 동행했던 열두살배기 외사촌은 눈을 반짝이더니 푸른 자켓을 입은 토끼가 그려진 <진저와 피클 이야기>를 집어들었다. 영화에 나왔던 그림책 속의 귀여운 주인공들이 첫번째 속지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플롭시 버니즈, 피터 래비트, 제미마 푸들 덕... 동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으며 기쁨에 겨워하던 포터(르네 젤위거 분)의 모습이 떠올랐다. 1900년대 초, 칙칙하고도 점잖은 의상 속에 가까스로 우겨넣은 듯한 르네 젤위거와 이완 맥그리거는 어쩐지 불편하고도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고스란히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옮겨오고 싶은 아름다운 자연과 소박하면서도 깜찍한 그림 속 주인공들, 앙증맞게 꿈틀대는 동화적 상상력이 알맞게 어우러져 영화를 보는 내내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 노만 워른(이완 맥그리거 분)의 죽음 이후부터 다소 밋밋하게 흘러가던 후반부와 바로 뒷줄에서 거의 에로영화를 찍고 있던 커플의 소음이 옥의 티라면 옥의 티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상상력과 그림에 대한 재능을 갖고 있었던 베아트릭스 포터는 동물 케릭터들을 주인공으로 한 책을 출판하려 하지만 1902년의 영국 사회는 그녀를 결혼하지 않고 책만 쓰는 독특한 노처녀로 바라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노만 워른이라는 편집자가 포터의 재능과 그림의 매력을 알아보고 그녀의 책을 출판하기로 한다. 두 사람은 책이 나오기까지 함께 일하며 서로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되고 결혼을 약속하지만 장사치와는 결혼시킬 수 없다는 포터의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그들의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 포터의 부모는 포터에게 여름 동안 런던을 떠나 있을 것을 제안하고 포터는 노만과의 사랑을 믿고 훗날을 기약한 후 잠시 헤어져 있기로 한다. 그러나 그녀가 떠나있던 사이, 노만은 갑자기 병으로 죽게 되고 그 충격으로 포터는 잠시 방황하지만 노만을 통해 친구가 되었던 밀리(에밀리 왓슨 분)의 응원을 받으며 다시 작품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포터는 부모님의 곁을 떠나 한적한 시골 농장에 머무르기로 하고 자신이 그림책을 팔아 벌어들인 인지세로 개발 위기에 놓여있던 땅을 사들이며, 그 과정 중에 만난 윌리엄 힐리스(로이드 오웬 분)와 동지애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된다. 결국 이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는 후일담.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발끝까지 삼십대 노처녀가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넘치도록 보여주었던 르네 젤위거는 이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사랑스러우면서도 세련되고, 다정다감하면서도 자의식이 강한, 그 때 그 시절에 놓아두기엔 너무 아깝다 싶은, 매력적인 동화작가의 모습으로 새롭게 등장했다. 살짝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수더분한 미소는 여전하다 못해 질릴 지경이었지만 자신이 그려놓은 토끼나 개구리와 넉살 좋게 대화하는 장면이 어색하지 않을 수 있는 건 르네 젤위거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영원한 <영 아담>일 줄 알았던 이완 맥그리거의 출현에는 왜 이런 도발을 하는 걸까, 갸우뚱했고 영화를 보고나서도 사실 의문이 풀릴 턱은 없었지만 오랜만에 그를 본 것은 반가웠다. 그래도 이완 맥그리거는 조니 뎁처럼 점점 더 다양한 얼굴로 등장하여 관객을 놀래키거나 즐겁게 하지 말고 계속 눈과 허리와 다리에 힘주고 살았으면 좋겠다. <트레인스포팅>에서처럼 늘상 혈기왕성할 순 없더라도 토끼 그림을 보면서 눈에 별까지 띄우면서 아름답다고 감탄한다든지, 반들반들 가지런히 빗어넘긴 머리가 왠말이며 그마저 비에 다 젖은 채로 나타나서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1902년의 영국이나 지금이나 가정주부 이상, 또는 그 이외의 꿈을 꾸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우려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남성들의 시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말이 있고 그것이 어느만치 현실이라고 인정해 오던 바였는데 밀리와 포터의 신실한 우정은 그런 면에서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팽배한 자존심이 아니라 넉넉한 자의식을 지닌 두 여성의 대화와 우정은 따스하고도 멋스러웠다. 우연처럼, 서점에서는 보봐르와 샤르트르를, 헌책방에서는 브레히트와 루트 베를라우의 이야기를 읽었다. 연인이었지만 그들의 사랑도 동지로서, 친구로서, 우정의 속성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나도 나이를 먹은걸까. 일시적인 냉소일까. 넘칠 듯 아슬아슬한 열정은 어쩐지 불안해서 더 흥미로운 장난같다. 동지애에서 싹튼 듬직한 우정을 포터와 밀리, 포터와 노만, 포터와 힐리스에게서 읽었고 성장을 위한 자양분과도 같은 그 사랑들이, 예전에는 다소 싱겁게만 보였던 그 관계들이, 이상향이라도 된 듯 벅차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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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1-26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님이 이 영화를 보여달라고 하길래 잠깐 검색해봤는데....
생각보다 러닝타임이 짧더라구요...자를 내용의 영화는 아니므로..
워낙 짧게 만들어진 영화이구나 싶었습니다.^^

깐따삐야 2007-01-27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짧은 영화에요. 스토리도 평범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심심해지는. 그래도 재미있었고 이완 맥그리거를 봐서 좋았답니다. ^^
 

#

  Loving students means giving them the ability to hurt you... it is part of the burden of being a good teacher... When I feel hurt by them that I know I'm suffering for good reasons.

  어찌어찌하여 흘러들어간 블로그에서 발견한 글귀다. 교무실 책상 앞에 붙여놓고 오며가며 새겨야 할. 새학기에 난 다른 곳에 있겠지만. 돌아와서라도 잊지 말아야 할. 좀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아쉬움도 드는.

 

#

  체중이 좀더 줄어서 바지들을 수선했다. 저주받은 하체에도 축복이 오려나. 먹음직스런 음식을 보면 군침은 도는데 식욕이 예전같지 않다. 식욕 뿐인가, 했더니 예전같지 않은 게 한둘이 아니구나. 입체감을 잃은 욕망들. 머리에 웨이브라도 줘야 할까.

 

#  

  진열장 오른쪽에 놓아두었던 동자승이 왼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다시 오른쪽으로 옮겨 놓았는데 그 다음 날 보니 또 다시 왼쪽으로 옮겨져 있고. 이상하다, 생각하고 옆으로 조금 틀어서 오른쪽으로 옮겼는데 오후에 다시 보니 왼쪽으로 다시 옮겨져 있었다. 원인은 소리 없이 강한 아빠의 고집. You Win. 먼지 닦을 생각은 안하고 쓸데없는 정리벽만 고집하는 건 아빠를 빼다박았다는 엄마의 지적. 더 정확히 말해보면 쓸데없는 걸 좋아하는 게 닮은거지. 아빠의 휴가와 나의 방학이 겹친 요즘. 엄마는 가출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셨다. 우리 부녀는 효용이니 실용이니 하는 말들과 언제쯤 화해할 수 있을까.

 

#

  '직녀에게'란 노래가 있다. 중학생이었을 때, 마방진이라는 별명을 가진 수학 선생님이 있었다. 첫 시간에 마방진이라는 숫자게임을 설명해 주었고 마방진이라는 게임 이름은 선생님의 지루하고 기다란 얼굴과 잘 어울렸다. 보다보다 너희들처럼 공부 안하는 애들은 처음 봤다며 맞는 말만 하더니 어느 날 수업을 하다 말고 굵다란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불렀다. 저렇게 청승맞은 노래를 저렇게 진지하게 부르다니, 우리는 총각선생님의 갑작스런 도발 앞에서 키득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틈만 나면 조용히 잠을 청하는 내게 특혜받았느냐 어쩌느냐 하면서 상처를 주었던 선생님. 당신도 밤새 라디오 듣고 엽서 쓰느라 고심하고 새벽까지 공부하는 척 해봐. 안 졸린가, 라고 말하진 못했고 그냥 묵묵히 미워하기만 했었다. 얼굴만 길면 다야, 그까짓 수업 안들어도 백점이다. 그만치 재수없던 여학생이 교사가 되었다는 걸 알면 인과응보란 말을 떠올릴까, 개과천선이란 말을 떠올릴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처럼 '직녀에게'란 노래가 가끔 당길 때가 있다. 더욱이 누군가 노래방에서 이 노래라도 부르는 날이면 잠시나마 마음이 방긋, 웃는 것도 같다.  

 

#

  고향 언니가 결혼을 했다. 어릴적에 헝겁을 오려서 인형 옷을 예쁘게도 만들던 언니는 이젠 옷가게를 하고 있다. 그 때 우리는 <캔디 캔디>라는 책을 좋아했다. 원래는 말랐었는데 보약을 많이 먹어 뚱뚱해졌다고 주장하던 언니의 친구는 언니에게 시리즈로 나온 그 책들을 빌려주기 시작했고 나는 언니에게서 그 책을 다시 빌려보는 식이었다. 드디어 언니가 마지막 권을 빌려온 날, 빨리 읽고 싶은 마음에 언니에게 그 책을 내가 먼저 봐야겠다고 했다. 언니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그리고는 서로 한 마디도 안하고 함께 버스에 올랐고 집으로 오는 내내 침묵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토라진 채로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언니도 동생과 함께 총총 사라졌다. 풀리지 않은 마음으로 꽁해 있던 오후, 문득 전화벨이 울렸고 전화를 받는 순간 너 먼저 읽어, 라는 말과 함께 급하게 전화가 끊겼다. 미안했다. 하지만 나는 그 길로 언니네 집으로 달려가서 <캔디 캔디>를 가져와서는 별로 재미없는 캔디의 편지들을 읽으며 먼저 읽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을 후회했다. 언니는 성씨만 다를 뿐 나와 이름이 같다. 그런데 나보다 훨씬 착했다. 진심으로 행복하길 빈다.

 

#

  오빠는 한밤중에 전화를 해서는 엄마한테 말하길, 엄마, 나 두부 넣고 끓인 김치국 먹고 싶어...란다. 언니도 옆에 있었을텐데 한 대 맞지나 않았을런지. 흔하다 못해 뻔하기까지 한 두부와 김치라니, 언니는 오빠의 만행에 두부처럼 하얘졌거나 김치국물처럼 붉어졌거나. 아니면 이젠 아예 그러려니 하거나. 결혼한 오빠가 찾는 음식들은 희한하다. 지극히 평범하다는 의미로 희한하다. 김치찜, 고사리나물, 계란말이, 김밥, 깻잎장아찌, 멸치조림... 좀더 나아가봤자 소면이 아닌 당면을 넣은 갈비탕 정도. 회식자리에서, 또는 출장을 다니며 온갖 산해진미를 다 먹을텐데도 언제나 전화기 너머로 칭얼대는 메뉴들은 간소하기 짝이 없다. 오빠의 투정을 어쩐지 이해할 것 같긴 한데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입장에서 그런 것일 뿐, 엄마의 손맛에 길들여진 입 짧은 남자는 질색이다.

 

#

  왜 깨닫기 위해선 아파야만 할까. 진부한 물음. 그럼에도 간혹 던질 수 밖에 없는 물음. 책을 읽을 시간에 좀더 사람들과 부대껴야 했을까. 과연 책도 읽고 사람들과 부대꼈던 이들은 똑고른 나이테를 지닌 채 단단하게 성숙해 있을까. 더 많이 싸우고 더 많이 연애를 걸고 더 많이 좌절했다면. 하지만 그렇듯 파란만장했던 이들도 결국엔 재테크와 다이어트와 아이들의 조기교육에 관심을 기울이는 상투적인 생활인이 되고 말텐데. 왜 깨닫기 위해선 아파야만 할까. 진부한 이 물음이 꽤 신선하게 들릴 날이 올지도 모르고 이런 싱거운 생각을 하고 있다니 겨울밤은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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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1-24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깨닫기 위해선 아파야만 할까. 그냥, 아프지 않고, 돌 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요.

깐따삐야 2007-01-24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그러게나 말입니다...

개츠비 2007-01-26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을때까지 깨달아야 하는게 사는건가 봅니다. 그러나 뭐든 많이 해보는게 중요한거같습니다. 연애도 공부도 ...마니마니..그래야 후회가 없는것도 같습니다.

깐따삐야 2007-01-26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retre7님, 저란 인간은 그래도 후회하지 않을까요?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 많이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 후회로 점철된 삶... 에고. 사람은 생긴대로 살고, 성격이 팔자 만든다는 말이 맞는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