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늘 라디오를 들으셨어요. 그래? 나도 라디오를 들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더라. 그게 아니라, 할머니는 시간을 아실려고 라디오를 들으셨어요.
기억에 남는 대사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저랬을 것이다. 주말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보았다. 박찬욱 감독의 의도는 알 것 같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하는 방식은 여전히 나를 불편하게 했다. 솔직히 이번에는 다소 유치하기까지 했다. 극적이고 만화적인 상황 설정과 빨강, 파랑, 하양의 선명한 이미지들. 그의 영화는 한 번 보고나면 잊을 수 없는 장면이나 대사들이 몇 가지 뇌리에 남는다. 배우들은 몰라보게 연기를 잘하고 이 감독 천재가 아닐까, 싶은 느낌이 문득 떠오르는 순간도 있다. 그렇지만 그의 영화를 이해했다고, 반드시 챙겨보아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냥 유명한 박찬욱이고 그의 영화는 매번 나를 긴장시키거나 불편하게 하고 광고를 보면 호기심이 생긴다. 쏘우 시리즈처럼, 보기 전에도 보고난 후에도 썩 느낌이 좋지는 않은데 왠지 한 번 보고싶기는 한 그런 정도.
영화를 보면서 요양원 안의 환자들은 오히려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트라우마를 그대로 실현하며 그들만의 천국 속에서 자유를 구가하고 있으니까. 아픈 사람들, 정말로 불행한 사람들은 의식을 하든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든 내상을 억누른 채 피곤하게 생활하고 있는 나를 비롯한 내 주변 다수의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김형경의 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으며 정신분석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정신분석을 받고 나서 내가 몰랐던 나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 그다지 반갑지 않다는 게 새로운 문제거리였다. 그래서? 그런 다음엔? 내가 소설가도 아닌데. 분석과 치료를 통해 내 시야와 시선에 변화가 찾아와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고 해서 내 스스로가 더 행복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그냥 나이고 싶은, 그런 질긴 욕구에서일지도 모르겠다. 무를 먹는 쥐면 어떻고 밥으로 충전하는 싸이보그면 어때. 그들의 상상력은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 다른 것은 나쁘지 않다. 유해한 것만이 나쁘다.
예전부터 갑작스레 예민해지거나 충동적이 될 때는 내가 미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시달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 자체가 나는 완전히 미치지는 못했다, 는 증거이며 달리 생각하면 사람은 정도의 차이일 뿐 대개는 몇 퍼센트 정도 미쳐있는 게 맞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더욱이 남들이 고개를 내두를 정도로 뭔가에 사로잡혀 있거나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사실은 얼마나 근사한가, 라는 시샘까지 느꼈다. 여러가지 변수에 의해 어떤 사람들은 예술을 하게 되기도 하고 어떤 운 나쁜 사람들은 범법자가 되기도 하지만 그들의 집념은 그 원천이 무엇이었든 참 놀라운 것이다. 스스로 행복하고 사회적으로 무해한 미치광이들이 많은 사회가 어쩌면 유토피아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인간적인 애정에서 나온 관심이 아니라 스스로와 저울질 해보기 위한 통속적 관심. 비판하고 내치고 가두기 위한 관심. 그 점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