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애는 왜 다른 애들보다 느리지. 다른 애들은 질문을 하면 또박또박 대답을 잘하는데 얘는 그냥 멍하니 있는거야. 아휴, 답답해 죽겠어. 아주."
선배 선생님의 이야기다. 선생님은 한 달 전부터 일곱살 된 아들 S를 어느 특별한 장소에 보내고 있다. S는 일주일에 두 번씩 그 곳에 가서 미술도 배우고 영어도 배운다. 예전에 동네 미술학원을 다닐 때에는 그냥 곱고 예쁜 크레파스를 가지고 마구잡이로 그려댔다면 요즘은 테이블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빛의 방향과 밝기에 따라 사과의 색깔이 어떻게 변하는지부터 배우는 등, 미술의 기초부터 탄탄히 익히고 있는 듯 했다. 영어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조잘대며 나대는 것이 아니라 알파벳 하나, 하나가 어떤 소리를 가지고 있는지부터 차근차근 배운다고 했다. S도 선생님을 좋아하고 수업을 무척 재미있어 한다고 한다.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는 이유로 나도 S를 몇 차례 만나서 함께 얘기하며 논 적이 있지만 낯가림이 심하고 싫증을 잘 내는 편이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호기심이 일었다.
S를 가르치고 있는 사람은 캐나다에서 온 원어민이었다. 대학에서는 미술을 전공했고 전에는 사설 영어학원에서 일하던 강사였는데 좋은 산을 찾아 그 곳에 왔다가 산의 근사함에 한 번 반하고, 산에 들어와 지내며 작품활동을 하던 조각가에게 두 번 반해 결국 아예 눌러앉게 되어버렸다고 한다. 남자는 물론 한국 남자고 여자보다 열 살도 넘게 나이가 많단다. 두 사람은 각자 작품을 만들면서 부업으로 S와 같은 아이들에게 미술과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었다. 자유롭게 사는 멋있는 사람들이었다. 선생님도 기초부터 꼼꼼하게 가르치는 성실한 태도도 마음에 들고, 분명 불편하고 힘든 점이 있을텐데도 항상 밝은 얼굴로 자연이 좋아 이 곳의 삶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녀가 참 좋아보였단다. 무엇보다도 아들 S가 수업이 있는 날이면 무척 즐거워하고 그림을 그리고 영어를 배우는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단다.
문제는 순수한 즐거움과는 별도로 엄마의 욕심이었다. 세상 엄마들이야 거의 다 그렇겠지만 모든 게 세상 엄마들의 욕심처럼만 된다면야 뭐가 문제겠는가. 사실 아직 미혼인 나조차도 비록 드러내놓고 내색하진 못하지만 같은 대회에 출전해서 옆반 아이가 우리반 아이보다 더 좋은 상을 받아오면 살짝 서운해지고, 정기고사나 체육대회때 우리반이 일등이라도 하면 기분이 활짝 펴지고 어깨가 으쓱해지는데 내가 낳은 내 자식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더할까 싶다. 아무리 초연하려고 해도 자식의 일 앞에서는 초연해지기 힘든 게 부모의 운명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 선생님도 평소에는 참 차분하고 올곧은 분이다. 아이들에게 크게 화내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모든 일을 합리적으로 풀어가는 가운데 늘 아이들 먼저, 다른 사람부터 배려하는 등 참 바르고 듬직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로 이 일을 어쩌면 좋겠냐는 듯한 표정으로 엄마의 욕심에 박자를 맞춰주지 못하는 아들 S를 걱정하고 있었다.
"선생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오빠는 아홉살 때까지 제 이름을 다 못 써서 매일 나머지 공부 했대요."
"정말? 영어로?"
"아뇨, 그 시절에 무슨. 우리말로요. 크크큭."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저건 사실이었다. 엄마 말씀에 따르면 오빠는 제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못 써서 늘 나머지 공부를 했다고 한다. 집에서 엄마와 같이 쓸 때는 잘 쓰는데 학교에만 가면 생각이 안 난다고 늘 스스로도 힘들어 했단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말에 갑자기 우등상을 받아오더니 겨울방학 때부터 공부에 재미를 붙여 4학년 때부터는 마치 새로 태어난 인간마냥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단다. 그 무렵의 나는 오빠의 교과서를 찢어 뜨거운 고구마를 싸먹고 네모낳게 딱지를 접어 놀고 통지표에 색깔별로 빨강, 파랑 동그라미를 그려놓고는 엄마한테 혼날까봐 사정없이 울어제끼는 말썽꾸러기였다는데 별로 기억나진 않는다.
내가 어릴 때 일찍 한글을 깨쳐 어른 뺨치게 수다를 떨고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를 불러제끼며 마구 잘난 척을 하며 나대는 아이였다면 오빠는 알아도 안다고 말하지 않고 몰라도 모른다고도 말하지 않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있으나 없으나 한 아이였다. 지금 그 시절을 돌아보아도, 오빠는 속을 잘 안 내비쳤고 말수가 무척 적었다. 엄마한테 똑같이 꾸중을 들어도 그렇게 잘해주지도 못할거면서 왜 낳았냐고 발악발악 대드는 쪽이 나였다면 오빠는 더 맞으려고 환장한 것처럼 대드는 나를 뜯어말리며 그저 묵묵히 엄마 화가 풀릴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쪽이었다. 같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오빠가 졸업했던 중학교에 내가 입학했을 때도, 선생님들이 하신 말씀은 너희 남매는 참 다르구나, 였다. 오빠는 성적이 떨어졌다고 초조해하지도 않았고 오른다고 크게 기뻐하는 것 같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거의 일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고 마음만 먹으면 성적은 얼마든지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차분한 자신감마저 묻어나왔다. 반면에 나는 이번엔 틀려먹었어, 라고 온 가족들에게 떠들고 다니며 진짜로 시험을 망쳐놓고는 결국 이 모든 게 엄마의 예민한 기질을 닮아서라고 악을 써댔으며 어쩐지 갑자기 공부하고픈 의지가 새록새록 생겨서 성적을 원상태로 복귀시켜 놓았을 땐 이게 다 나의 피눈물나는 노력의 성과라고 뿌듯해하는, 감정이 널을 뛰고 의지가 갈피를 못 잡는 들쑥날쑥한 아이였다. 사실 어릴 때만 놓고 보자면 오빠보다 내가 모든 면에서 훨씬 더 뛰어나 보이는 아이였고 뛰어나게 보이고 싶어 스스로를 드러내는 아이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무참할 정도로 평범해져갔던 반면 오빠는 사람들에게 착하네, 의젓하네, 예의바르네, 등등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고상한 칭찬들을 들어가며 착실히 내실을 쌓았다. 비록 한 뱃속에서 나왔다지만 지금도 그러한 상반된 평가는 전혀 달라질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
우리집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선생님도 내 이야기를 듣고는 공감을 표현하며 S가 느지막히라도 좀 깨이려나 믿고 있다고, 그런데 엄마 된 입장에서 그냥 무조건 참고만 기다리는 게 쉽지가 않다고 말했다. 하긴 우리 엄마도 그러셨다. 자식을 키우다보면 참을 인자를 수도 없이 가슴에 새기게 된다고. 버르장머리 없이 딴지 걸기 좋아라 하는 내가 70만청년실업시대에 오빠랑 내가 이만큼 커줬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냐고 하면, 많이 배운 자식보다 못 배운 자식이 효도는 하는거라며 가르쳐놨더니 말만 청산유수로 한다고 구박하신다. 물론 다시 시간을 되돌려도 엄마는 똑같이 반복하실 것을 안다. 저만치 앞서서 열심히 달리시면서 엄마가 달리니까 너희들도 어서 달려~ 라고 하시겠지. 공부하기 싫으면 뙤약볕에 나와서 밭이나 매라고, 엄마는 너희들이 여름엔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고 겨울엔 히터가 뜨끈뜨끈하게 나오는 데서 일했으면 좋겠고 그러려면 공부하는 수 밖에 없지 않냐고 냉정하고 무섭게 나오시겠지. 지금 와서 돌아보면 때로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때로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우리 남매를 얼렀다 혼냈다 하시던 피 끓던 엄마가 참 그립기도 하다. 시험기간엔 꼬박 밤을 새우며 새벽에 깨워주시기도 하던 꼬장꼬장한 분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9시 50분만 되면 맞춰놓은 자명종처럼 안방으로 들어가시는 엄마, 안쓰럽다.
언젠가 엄마에게 왜 어릴적에 나 잘나가던 시절에 칭찬을 한 마디도 안해줬느냐고 따지자, 내가 하도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격이라 엄마까지 덩달아 같이 춤을 추면 남들한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까봐 더 자제하셨단다. 그래서 나는 누르고, 오빠는 살리고, 하는 식으로 나름 기준을 갖고 키우셨던 모양이다. 나는 겸손해져야 하니 간간히 차디찬 말로 눌러줘야 되고 오빠는 의뭉스럽게 처신을 잘하니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하셨단다. 물론 나 자신은 성장해오는 동안 마음 속으로 "나를 몰라주는 냉정한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감수성 예민한 천재의 운명을 타고났네" 운운하며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적도 있었지만 교사가 되어서 아이들 앞에 선 지금은 엄마의 뜻을 이해할 것도 같다. 빠르다고 미리 기뻐할 것도 없고, 늦어진다고 안달할 것도 없다. 오히려 빠르면 이른 좌절을 맛보지나 않을까 불안해 하는 게 맞고 조금 늦어진다면 대기만성을 기대해 보는 여유를 가져도 좋은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실제로 나와 오빠가 전형적인 케이스였으니까. 그런데 이런 말은 나같은 제삼자한테나 가능한 말일지도 모른다. 막상 엄마가 되면 달라지는 것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아왔다. 우리 엄마만 해도 아주 냉정하고 현명하신 분이었다. 자식 머리 꼭대기에 있었으니까. 지금도 솔직히 느슨해진 척만 하실 뿐 내 머리 꼭대기에 여유만만 앉아계신 것 같아서 기분이 영 찜찜하지만. S이야기를 했더니 엄마가 하시는 말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야, 너를 봐봐. 네가 빨라서 오빠보다 나은 게 뭐가 있었냐. S도 제 엄마 닮았으면 늦게라도 잘할거야. 두고봐."
"그리고 남의 자식 가지고 어쩌니 저쩌니 말하지 말아라. 제 자식 어떻게 될지 모르고 자식은 다 커봐야 알고 인생은 끝까지 살아서 죽을 때 가봐야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