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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마더. 원빈의 팬인 엄마와 함께 봤다. 엄마는 애절한 모성에 관한 영화가 아니고 단순한 범죄물도 아니라며 무척 색다르다고 좋아하셨다. 박쥐는 상을 받았다는데 자식의 일이라면 murder도 서슴지 않는 이곳의 질긴 모성을 서방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흥미로웠던 것은 낯선 두 사람이 서로 상처의 정곡을 찔러 비극에 이르는 모티브였다. 바보 같은 사랑은 많이 보았지만 이런 바보 같은 살인은 처음이다. 나는 왜 마더를 보면서 밀양이 떠올랐을까. 터미네이터도 재미있었고 요즘 영화를 많이 보았는데 보고 나면 뭔가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다. 기억력을 탓해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일상이 내게 겨를을 주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일상을 탓해보기도 하지만 기억력이 나빠진 것도 사실이다. 며칠 전 점심시간에는 축구선수 기성룡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숟가락으로 머리를 마구 쥐어박고 싶었다. 결국 그의 해사한 얼굴만 어른거리다가는 포기. 퇴근 길 운전 도중에 아! 하고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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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가 따듯하고 인간적인 곳이라면 참 좋을 텐데 요즘은 너나없이 너무 이기적이라 절로 한숨이 나올 때가 있다. 나 역시 특별히 이타적인 사람은 못되지만 적어도 낯 두꺼운 짓은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이곳도 다른 집단처럼 반반인 것 같다. 엄마는 교사인 딸에게 대놓고 “진짜 똑똑한 사람은 교사 못한다.”고 뼈 있는 지적을 하시곤 하는데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지적이다. 아이들은 인간적으로 부족하기 마련인데 교사들 또한 인간적으로 어딘가 모자란 사람들이지 싶다. 그래서 수준 맞는 사람들끼리 같이 놀라고 학교를 세웠는가 보다. 자학이 아니라 현실이다. 나이는 세월 지나면 저절로 먹는 것인데 그 당연한 세월의 힘을 빌려 아이들 위에, 또는 동료 위에 군림하려 들지 말아야겠단 생각을 한다. 정당성이 결여된 권위란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폭력이자 횡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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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든지 좋게 좋게 넘어가려는 남자와 시시비비에 목매다시피하는 여자가 한집에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내지르는 언어들은 창공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때가 많고 그는 그 날생선 같은 언어들을 갸웃거리며 받아들이곤 한다. 나는 “우리가 만약 한 직장에서 근무했다면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라고 말하고 그는 “아니지. 당신이 나한테 홀딱 빠져서 정신을 못 차렸겠지.” 느물거리며 응수한다. 이러한 농담 뒤켠으로 실은 서로를 서로에게 비춰보곤 한다. 부부는 서로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자기 자신부터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문제에 있어 내가 때때로 억지를 부린다면 그는 이따금 잘 생각나지 않는 척 한다. 논리가 아닌 막무가내 억지였다, 잘 생각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시 떠올리기 싫은 실수였다, 요렇게 자기 자신을 깔끔하게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지 정말 미혼일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부부가 된 이상, 그 상상도 못했던 유치한 행태를 꾸준히 반복하며 살겠지.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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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하고 있는 다짐.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의무를 방기하면서 수십 가지의 이유로 치장을 하는 족속은 되지 말자는 것. 안이한 구성원들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이 고생이 많다. 우아하게 포즈만 취하시는 분들 덕분에 발을 동동 구를 때도 있다. 故 노무현은 부지런하고 인간적인 어른이었다.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린 것은 그런 어른이 드물고 귀하기 때문이었다. 서른이 기점일까. 예전에는 젊은 사람들이 눈에 많이 들어왔는데 요즘은 푸릇한 젊음들이 뭉뚱그려 보이고 외려 나이 든 사람들이 눈에 더 많이 들어온다. 그리고는 저렇게 나이 들었으면 좋겠다, 계속 저리 살면 늙어서 참 한심해지겠구나, 이런 생각들을 한다. 내 머리와 가슴에 훌륭한 역할 모델로 자리 잡은 분들, 그런 분들을 거울삼아 내 삶을 다듬어가야겠다고, 기왕 사는 거 잘 살아야겠다고, 천하지 않게 나이 먹어야겠다고, 조금은 부담스럽게 스스로를 긴장시킨다. 굵어지는 허리 사이즈도 염려스럽지만 순간순간 깜짝 놀랄만큼 점점 굳은살이 붙어가는 나의 의식이 문제, 문제적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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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6-08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어머니도 원빈팬이신데 같이 보러갈 생각을 못했네요.. (어머니는 제 남자친구들을 한번도 마음에 들어해 본 적이 없으신데, 이유가 두꺼비류라서 입니다 ㅎㅎ) 저는 점점 아주머니들하고 수다 떠는게 좋아지고 있어요.. 이거 안좋은 증조인가요?

깐따삐야 2009-06-09 21:59   좋아요 0 | URL
저희 엄마는 예전 어느 드라마에서인가, 원빈이 아줌마! 하던 장면에 화악 꽂히셨다죠.^^ 저 역시 교무실 아주머니들과의 네버엔딩수다를 즐기는 중입니다. 대한민국 아줌마들은 모르는 것도 없고 못하는 것도 없어요. 안 좋은 징조라니요! ㅋㅋ

순오기 2009-06-09 0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오랜만에 들렀지요, 깐따님~~ 부부로 사는 건 때론 유치함의 연속이지요?
이젠 연민으로 사는 내겐 신혼일기로 읽혀요.^^

깐따삐야 2009-06-09 22:02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순오기님. 제가 넘 뜸했죠~
저는 아직도 멀고도 멀었나 봐요. 순오기님 경지에 이르려면.^^

순오기 2009-07-25 17:04   좋아요 0 | URL
하하~ 순오기의 경지에 이르러면 이혼하겠다고 몇 번을 길길이 뛰어야 하고~ 별로 좋은 것도 아니니까 제 경지엔 도달하지 마시라요~ ㅋㅋ

2009-06-09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09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1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와 2009-06-09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멍해지는 정신, 뉴스만 보면 또릿해집니다.
두눈 똑띠 뜨고, 단디 살아야지요. ㅎㅎ

보고싶었어요, 깐따삐야님! ^^*

깐따삐야 2009-06-09 22:07   좋아요 0 | URL
똑띠 뜨고 단디 살아야...ㅋㅋ 힘들지만 그래야겠죠. 레와님도 힘내세요.^^

2009-06-09 2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0 2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09-06-10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없으니 이제 알라딘도 뜸한 웬디 ㅋㅋㅋㅋ 와락. 반가워요. 흑.

깐따삐야 2009-06-10 20:41   좋아요 0 | URL
아우, 정말 그런 거에요? 웬디양님은 알라딘에 뜸해도 다른 곳에서 뭔가 재밌는 일을 하고 있을 것만 같아요.^^

개츠비 2009-06-10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일상을 살짝 엿보고 갑니다. 깐따삐야님의 소소한 일상에 동감과 응원의 구호를 외쳐보고 싶네요. ^^

깐따삐야 2009-06-10 20:42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나이를 먹을수록 사는 게 쉬워질 줄 알았던 게 결국 오해였나 봅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승주나무 2009-06-20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없음

안녕하세요. 승주나무입니다.
알라딘 서재지기와 네티즌들이 함께 시국선언 의견광고를 하려고 합니다.
알라디너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참여의사를 댓글로 밝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강요는 아닙니다^^;;

즐찾 서재들을 다니면서 댓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남기는 스팸성 댓글이지만 어여삐 봐주세요~~~

http://blog.aladdin.co.kr/booknamu/2916466

 

  삶에 은유가 결핍될수록 내 삶이 점점 천박해진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은 배만 고픈 것이 아니다. 때로 정신이 고프고 내면이 헛헛해오는 순간이 있다. 슬픔도 가득 차오르면 그 자체로 풍요롭다.

  나는 나로서 여기 이렇게 있지만 그 ‘나’는 내가 원하는 나도 아니고, 전적으로 나다운 ‘나’도 아니며, 그렇다고 ‘나’는 내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 라고 쓸 무렵 비보를 들었다. TV 속에서 통곡하는 사람들은 마치 제 설움에 우는 것처럼 보였다. 텐프로의 아귀들을 제외하곤 크든 작든, 너나 할 것 없이 힘든 시기 아니던가. 가까운 곳이라면 한번 가보고 싶었다.

  어제는 근방의 도시에서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고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과 재회했다. 우리는 드디어 짝을 만난 K가 그간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가를 떠올리며 그녀를 대견해했다. K는 어릴 때부터 거의 가장 노릇을 해왔다. 그녀는 고통에 묵묵하고, 작은 기쁨에 볼우물을 패이며 활짝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그래도 좋을 테니, 그녀의 든든한 반쪽에게 기대고 살았으면 좋겠다.

  말할 줄 모르면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 점점 진심보다 변죽만 좋은 인간들이 뻔뻔하게 배불리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아 화가 난다. 오늘 Look on the bright side라고 칠판에 쓰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가린다고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내가 나를 경계한다. 나와, 내 자리와, 내 직업과, 나의 나이듦에 대하여. 내가 경멸하는 사람들, 나는 그리되지 말아야지, 나는 나이 먹을수록 저리되지는 말아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다 그만한 까닭이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지난날, 꽤나 견고했던 내 안의 성찰적 자아를 상실하는 것 같다. 나 스스로에게 경종을 울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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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9-05-25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깐따삐야 2009-06-08 22:01   좋아요 0 | URL
네!

박교수님방 2009-05-28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랜만이에요. 가끔 와서 새글 있나 확인하고 했는데,, 내가 나를 경계할 것 웬지 와닿네요
어쩌면 이제 옆으로 좀 더 넓어질 수 있는 나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비슷한 나이에 직접 연락도 안하는 머나먼 알라딘 친구이지만,, 그래도 이곳에 오는 게 좋습니다!

깐따삐야 2009-06-08 22:05   좋아요 0 | URL
아, 선생님? 잘 지내셨죠? ^^
몸매만 넓어지지 말고 마음도 넓어져야 할텐데 말이죠. 그게 참 어렵네요. 이곳에서라도 가끔씩 뵈어요!
 

  아삭아삭 알싸하게 씹히는 새싹의 풍미가 그만이었다. 콩나물국과 새싹비빔밥. 남편과 나는 뚝딱 한 그릇을 비웠다. 딸은 예쁜 도둑이라지. 바리바리 빈 통을 싸들고 친정에 온 나를 보시고 위층 아주머니 말씀. 왜 아니겠는가. 계절이 오고 가는 소리를 엄마가 해주시는 먹거리 속에서 혀끝으로 듣는다.
  

  오후 수업 땐 살짝 덥기까지 했다. 창밖 운동장에서 반팔 차림으로 슛을 쏘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그들의 바람과 나의 바람, 그들의 빈틈과 나의 빈틈을 비교할라치면 지나가는 세월의 마디가 다를 뿐.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갖은 폼을 다 잡아야 한다니. 얼굴에 먹구름을 드리우는 연습을 일부러 해야 하는 이상한 직업병.  


  돌려먹는 쿠키. 휴대폰에서 울리는 상쾌한 컬러링. 매일매일 바꿔보는 노트북 배경화면. 누군가의 생뚱맞은 농담. 책장 위에서 아기자기 피어나는 봄꽃들. 교무실인지 교실인지 분간 못하는 장난꾸러기들의 도발. 반복되는 하루를 채우는 사물, 소리, 빛깔들. 나이를 먹고 있을 뿐인데 점점 어려지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마치 지금의 내가 십대 그 시절, 이십대 초반의 그 시절보다 더 답답하고 모자란 사람처럼 생각되곤 하는 것이다. 청춘을 허투루 보낸 것도 아닌데 완벽에 대한 향수는 어째 미래가 아닌 과거에 있을까.  


  봄을 놓칠까. 며칠 전에는 근처 수목원에 다녀왔다. 알록달록 도시락 가방을 든 가족들과  카메라를 둘러맨 젊은 연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내가 지나온 시간, 그리고 내가 가야 할 시간. 꽃이 꽃 자체로 군더더기 없이 아름다운 것처럼 나도 내내 그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련미보다는 자연미. 어떤 면에서는, 매우 시대착오적인 사람이고 싶다.    

 
  영어를 힘들어하는 아이들도 노래를 들려주면 얼굴에 반짝, 불이 들어온다. 그때의 나도 그랬다. 그리운 서정시대. 시를 쓰라고 하면 Love is money, Love is capability, Love is appearance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아이들. 고학년일수록 더 그렇다. 그래도 Love is heaven, sometimes hell. 사랑을 알고 있는 아이들. 언젠간 그 알고 있는 사랑을 겪어야 할 아이들. 그 달콤쌉싸름한 한 줄에 마음은 찌릿하여라.   

 


이름은 모르겠다, 수목원 온실 안에 피어있던 꽃. 초록과 분홍의 조화는 언뜻 촌스러운듯, 완벽하다.  


자전거 도로 옆, 길섶에 피어난 민들레. 나는 민들레가 참 좋다.


수목원에서 돌아오는 길. 자전거를 타고 씽씽- 두 번 넘어졌고, 넘어지는 것조차 재밌었던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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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04-18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심히도 ^-^

저 며칠전에 회사 사람들이랑 노래방에 갔는데요
정말 저 노래를 부르고 싶어 죽을 것만 같았어요- 으으.
그런데 부르지 못하고,
결국은 혼자 집앞 횡단보도에서
아무도 없는 틈을 타 가만 가만 부르곤 했지요.

깐따삐야 2009-04-21 08:16   좋아요 0 | URL
횡단보도에서 가만 가만 봄날은 간다, 를 부르는 검은 눈동자의 키 큰 아가씨.^^
뮤비 같네요.

turnleft 2009-04-18 0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위의 보라색 꽃, 꽃잎과 문양이 소용돌이에요. 신기해라~

깐따삐야 2009-04-21 08:16   좋아요 0 | URL
앗, 그러고보니 그러네요. 신기해라~!

레와 2009-04-20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촉촉하게 봄비 내립니다. ^^*

깐따삐야 2009-04-21 08:17   좋아요 0 | URL
여기는 칙칙하게 봄비 내립니다.^^;
 

  예나 지금이나 개교기념일에는 학교에 가지 않는다. 나만 노는 날. 남편을 보챘다. 점심 때 나한테 초밥을 안 사줄 테냐고. 후환이 두려웠는지 선뜻 그러겠단다. 결국 시내로 나가 초밥을 먹고 연애시절마냥 피스타치오, 엄마는외계인 등을 섞어 아이스크림도 냠냠. 차창 밖의 옷차림들은 뒤죽박죽이었다. 나 역시 청바지에 얇은 분홍색 티셔츠를 입었으나 도톰한 점퍼로 무장한 상태. 쨍하니 맑은 햇볕 사이로 파고드는 찬바람. 봄이 오락가락 주춤거리며 오는 중이었다.

  할랑한 오후를 시기하는 그를 먼저 들여보내고 오랜만에 혼자 서점엘 갔다. 이 도시에는 마음에 드는 서점이 없다. 이 도시의 서점들을 다 가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진 그렇다. 대학 시절, 정문 근처에 ‘열린 지성’이라는 서점이 있었다. 주인아저씨가 지적이었고 서점은 깨끗했고 책도 고르게 많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졸업하기 전에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에는 편의점이 들어섰다. 원체 술집과 음식점이 즐비한 골목 가운데 열린 지성은 이물스러웠다. 난 그곳에서 앤서니 기든스와 카잔차키스를 샀다.

  그나마 시내에서 가장 큰 서점이라고는 하는데 이 서점은 당최 책의 배열에 일관성이 없다. 오직 직원들의 푸른 줄무늬 셔츠만 일관될 뿐. 오늘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멸』이 역사 관련 서적들과 나란히 꽂혀 있었다.『라쇼몽』을 살까, 하다가 그래도 봄인데『점섬뎐』이 나을 것 같았다. 며칠 전 그녀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나는 예전부터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의 책과 그림을 보며 김점선 같은 어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종종 생긴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지 싶다가도 그래도 나는 선생인데, 싶어서 가책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그러고도 망각의 존재인지라 또 상처를 주고, 받는다. 내가 여전히 어른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반드시 짚고 넘어야 할 것과 그냥 지나쳐도 좋을 것을 그때그때 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한 소소한 성찰조차 허락하지 않는 분주한 일상에 한숨을 짓다가도 바쁨이 곧 핑계가 될까, 스스로를 긴장시킨다.

  어젯밤엔 눈까지 내렸는데 도청 앞에는 목련과 매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마치 뿔난 내 마음이 풀리기도 전, 얼굴에 함박웃음 지으며 다가오는 아이들 같았다. 그 꽃잎처럼 환하고 귀여운 웃음이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새봄을 부르는 것이겠지. 그들 앞에 항상 당당해야 하면서도 겸손해야 할 이유를 알 것 같다. 당신은 사랑을 많이는 아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아. 그래서 스스로 그렇게 힘들어 하는가봐요. 어제 남편이 그런 말을 했다. 흠칫 놀라지만 말고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나를 잘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는, 대체 언제 어디서 컨닝을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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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3-25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은 사랑을 많이는 아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아. 그래서 스스로 그렇게 힘들어 하는가봐요. 어제 남편이 그런 말을 했다. 흠칫 놀라지만 말고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자자 이제 역전당하신겁니다 깐따삐야님..^^

깐따삐야 2009-04-01 22:14   좋아요 0 | URL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군요. 흠흠.-_-

레와 2009-03-25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긴 목련이 다 떨어지고 벚꽃이 방울방울 피고 있답니다. ^^



깐따삐야 2009-04-01 22:15   좋아요 0 | URL
레와님이 계신 남쪽은 봄소식이 이르겠네요. 꽃구경 가고파요.^^

웽스북스 2009-03-26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허허거리는 고수와 함께 살고 계신 것 같아요 울 깐따님

깐따삐야 2009-04-01 22:15   좋아요 0 | URL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어요. 흠흠.2

2009-03-26 0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01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 다시 주말이구나. 시간은 속사포 같고 쉬고 싶단 생각이 들 때 즈음 기막히게 찾아오는 주말. 신입생들끼리의 다툼이 잦아 더듬이를 곧추세운 채 일주일을 보냈고 드디어 실장과 부실장도 선출했다. G-드래곤의 실명을 잘못 말해서 실컷 망신을 당했고 당최 컨셉불명의 급식 메뉴에 대해 함께 흥분하기도 하며 알콩달콩한 시간들을 보냈다. 아이들 때문에 힘도 들고, 또 아이들 덕분에 웃기도 하는 그런 나날들이다.

  목청 하나만큼은 타고난 덕분에 목이 아프다가도 하루 자고 일어나면 멀쩡해지는데 병원을 다니는 동료 선생님을 보고 큰 마음 먹고 기가폰을 샀다. 당신 것도 하나 사라고 했더니 남편은 자기는 아직 괜찮단다. 수학을 가르치다 보니 남편도 목을 많이 쓰는 편인데 고3 교실은 잔소리를 안 해도 아이들이 척척 알아서 하기 때문에 오히려 중학교보다 편하단다. 그 점 참 부럽다. 나는 만발하는 질문들 속에서 하루를 보낸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이들도 금방 자라겠지. 그나저나 막상 최신형의 기가폰을 사놓고는 사용을 거의 안 한다. 확실히 에너지는 절약되는데 나와 내 목소리가 인공적인 느낌이 들어 아이들과 나 사이에 불투명한 막이 끼는 것 같다.

  직장을 그만둔 Y는 다시 일을 시작했고 편지와 스카프를 보내왔다. 하늘색 편지지와 화사한 스카프 색상에서 봄을 보았다. Y의 존재와 Y의 삶은 가끔 생각날 때마다 펼쳐보는 좋아하는 소설책의 한 페이지 같다. 그녀는 소신껏 살고 있다. 소신껏 사는 척하기는 쉬워도 정말 소신껏 산다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학교도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존재한다. 그 안에서 이러저러한 잡음들에 갸웃거려질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나 스스로를 향해 상기시키는 것은 소신이다. 내 마음은 수천 평의 갈대밭이더라도 외면상으로는 항상 일관된 자세를 유지하는 것. 그리 되도록 노력하는 것. 요즘 나의 화두다. Y의 소설은 어느 문예지의 최종심에 올랐다. 더욱 반가운 소식을 기다리며 그녀의 건필을 빈다.

  옆자리 선생님의 남편은 선생님의 생일 날, 혼자 여행을 떠나고 늦게 퇴근해서는 혼자 소주를 마신단다. 너무나 심상하게 말씀하셔서 선생님은 참 무던하신가 봐요, 라고 했지만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무던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다만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같으면 사흘 낮밤 안 재워가며 바가지를 긁을 텐데, 생각하면서도 정 안 되면 어쩔 수 없겠다는 체념. 그 선생님도 왜 불만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불만해봤자 안 바뀌니 내버려두게 된 것이다. 묻어둘 뿐이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상대가 가만히 있다고 해서 정말 괜찮은 게 아니란 걸 금방 알 텐데 말이다.

  직업이 주는 보람에 대한 얘기를 하던 중에 오늘 어떤 아이가 그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보람을 느끼세요? 그럼. 언제요? 너희들이 수업시간에 활발히 참여하고 열심히 할 때지. 우리가 잘 못하면요? 잘하게끔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지. 그런데도 계속 못하면요? 아이는 마치 나를 시험해보려는 듯 집요하게 물었다. 잘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도와줘야지. 곤란할 땐 방송용어처럼 당연한 말을 하는 것이 최선이긴 한데 막상 과연 내가 그럴 수 있는가, 라고 자문하니 별로 자신이 없었다. 정작 두려운 것은, 역시 미움보다도 포기인가 보다. 무섭게 화를 내는 것보다 쉽게 돌아서는 것. 분노의 열기보다 체념의 냉기가 더 가혹하다.  

  남편과 나는 소소한 계획들을 세우고, 일상을 꾸려가고, 대수롭게 느껴졌던 것들이 점점 대수롭잖게 여겨지는 기이한 체험을 하면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틀어졌다가 화해하는, 화해랄 것도 없이 풀어지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고, 사랑한다는 말 보다는 밥 먹자, 밥 먹었어?, 밥 먹어야지, 란 말을 더 많이 하고 종종 친정에 가서 엄마한테 밥 얻어먹으며 더불어 생활지도를 받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맛난 밥은 누가 차려주는 밥이다. 그 중에서도 엄마가 차려주는 밥이다. 밥을 주며 잔소리를 하면 그것도 들을만 하다.ㅋ 그와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아직도 인생의 미숙아들이고, 서로 그것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노력한다. 누군들 성질 없는가. 다 성질 있지만, 그래도 성질보단 미덕이라고, 한번 잘 살아보기 위해 오늘도 나 스스로를 다스린다.

  아, 이번 주말은 푹 쉬고, 영화 보고, 또 등등. 만끽만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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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3-15 0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주변에 소쩍새가 울지 않던가요. 이 페이퍼 속 깐따님의 분위기는 딱 그거에요~~

깐따삐야 2009-03-20 21:32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소쩍새 울음소리는 어릴적 고향에서 들어본 이후로는 못 들어본 것 같아요. 그나저나 대체 어느 부분이 소쩍새 분위기라는 것인지...?

Mephistopheles 2009-03-24 00:11   좋아요 0 | URL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울어 재끼는 새가 무슨 새게요..

깐따삐야 2009-03-25 16:08   좋아요 0 | URL
아항. ㅋㅋ ^^

레와 2009-03-16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한 삶이예요! 네에~ ^^

깐따삐야 2009-03-20 21:33   좋아요 0 | URL
학부모 면담 끝에는 에너지 고갈로 쓰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어째 지친다 싶으니 금요일이네요.ㅠ 부디 건강해야 할텐데 말이죠.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