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하려고 나서는 길. 이따금 꽃다발을 든 아이들이 눈에 띈다. 졸업시즌인 것이다. 교복 입은 아이들도 있지만 정장을 차려 입은 남자 아이도 보이고 짧은 치마에 레깅스를 신은 여자 아이들도 보인다. 어른처럼 입을 만큼 몸은 다 자랐는데 십대는 어떻게든 티가 난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으련만 꾹꾹 참고, 혹은 참다못해 폭발해서 주위를 놀라게 했을지언정, 무사히 인생의 한 마디를 맺은 그들에게 축하를 보낸다.
<추억은 방울방울>, <귀를 기울이면>, <바다가 들린다>와 같은 서정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개봉되거나 국내에 소개될 때 그 즉시 찾아볼 정도로 열정적인 편은 못 되고 입소문을 듣고 찾아보거나, 영화정보를 훑어 본 후 괜찮겠다 싶으면 구해서 보곤 한다. 그러한 명작 애니들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내 서랍 속의 바다가 노래를 하고, 그 노래를 타고 지나간 추억이 방울방울 떠오른다. 심신이 정화되는 듯 수채화 같은 화면들에 반하는 한편, 일본 애니란 참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한다. 자극과 엽기, 그 대척점에 그처럼 오롯한 순진성과, 근사한 성찰이 있다는 것이 말이다.
그러한 명작 애니 중의 한편인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이제야 보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된 소녀 마코토의 성장기. 한 번쯤 해봤음직한 상상이다.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 그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철판구이가 먹고 싶어 며칠 전 저녁식사 시간으로 되돌아간다든가, 노래방에서 노래를 실컷 부르려고 처음 그 타이밍으로 구르고 또 구르는 모습은 압권이었다. 공감백배라서 나두나두! 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뿐인가. 새롭게 생긴 능력 덕분에 막막했던 쪽지시험은 가뿐히 백점을 기록하고 가사실습 시간에 불을 냈던 실수도 만회한다.
그러나 마코토의 타임 립은 이렇듯 귀여운 변칙에서 그치지를 않는다. 어색해질까 두려워 절친이었던 치아키의 고백을 세 번씩이나 무마하고, 또 다른 절친인 고스케와 후배를 엮어주려다가 기차 사고의 위기를 맞는다. 이후에 밝혀지는 치아키의 비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코토는 스스로의 마음에 눈을 뜬다. 갑작스럽게 치아키를 잃어야만 하는 마코토는 목놓아 엉엉 울고 치아키는 다가와 말한다. “미래에서 기다릴게.” 사랑스런 마코토. “응! 금방 갈게. 뛰어 갈게.” 이 순간 눈물은 그렁그렁. 마음은 울렁울렁. 이제 치아키는 마코토에게 설레는 미래이자, 보고 싶은 희망이 된 셈이다.
타임 립을 즐거워하는 마코토에게 어느 날 이모가 말한다. 네가 시간을 되돌리면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지 않겠냐고. 예전에 그런 콩트를 본 적이 있다. 돈이 없어지지 않는 지갑을 줍게 된 사람이 있었다. 한동안 돈을 펑펑 쓰며 행복에 겨워했는데 어느 날 잘 관찰해보니 자신의 지갑에서 만원이 나오는 순간 다른 사람 지갑 속 만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나중에 그 사람은 지갑을 어떻게 했을까. 안타깝게도 기억이 안 난다.) 마코토 역시 그렇다. 자기 편의대로 타임 립을 사용하다 보니 의외의 피해자가 생기기도 하고, 이 순간을 막으려고 돌아가면 또 다른 돌발상황이 일어나기도 한다. 타이밍을 조작한다고 해서 본래 품고 있던 마음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닐뿐더러, 생각 없이 기회를 몽땅 써버린 탓에 정말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될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리고는 신중하지 못했던 자신을 돌아보며 후회하고 통곡하는 것이다. 엉엉.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단순히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신기해하는 타임머신 류의 이야기가 아닌, 착하고 사랑스러운 성장영화였다. 언젠가는 선머슴 같은 마코토도 이모처럼 신중하고 차분한 숙녀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때로는 소중한 사람을 잃는 고통도 감수해야 한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은 진실이다. 사람이 우아하면 우아할수록 우악스런 과거를 보냈을 수도 있다. 스스로를 책망하고 아파하면서 즈믄밤을 보내 본 사람만이 마코토의 이모처럼 내용도, 타이밍도 모두 근사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건 아닐까.
잊을 수 없는 장면. 노을 지는 강가. 자전거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치아키의 프로포즈는 완전 귀엽다. 나랑 사귈래? 나 그렇게 못생기지는 않았잖아. 마코토는 이 고마운 고백을 마다하느라 그토록 정신없이 헤매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럴 땐 놀라지 말고 사겨야 한다는 게 이 영화의 중요한 교훈 중의 하나이려나. 영화 중간중간 푯말처럼 지나가는 말, Time waits for no one이므로? 하지만 그것을 안다고 해도 지나봐야만 보이는 진심이 있고 놓쳐봐야만 깨닫는 진가도 있다. 꼭 한발 늦게 찾아오는 진실이라니. 차~암 쉽졀하지 않다. 타임 립이 안 되는 우리는 그저 주어진 시간 꼬박꼬박 살아내고 무엇이 최선일까, 자신의 마음을 열심히 들여다 볼 수밖에. 혹시나... 치아키라는 꽃미래를 기다리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