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K가 아기를 낳았다. 일찍 들여다보기도 뭐해 조금 미루다 보니 방학이 다 지나버렸다. 3월이면 더 바빠지기에 다른 친구들과 시간을 맞춰 오늘 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우리는 근처 물류센터에 들러 기저귀와 아기 옷, 딸기를 샀다. 조카가 있는 S가 꼼꼼히 둘러본 후 황토 기저귀와 내복을 골랐고 뭐가 뭔지 잘 모르는 E와 나는 무조건 오케이. 배가 고픈 E와 나는 딸기가 잘 익었나, 안 익었나만 한 번 더 확인했다.
아기를 안고 우리를 맞아주는 K는 정말 어른 여자처럼 보였다. 배가 부른 모습도 무척이나 낯설었는데 이제는 저만치 한 걸음 더 낯설어졌다. 임신 중의 붓기가 빠지면서 다소 핼쑥해진 얼굴에 아기를 품에 안고 모유수유를 하는 K는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아기는 인상 좋고 성격 좋은 제 아빠를 쏙 빼닮아서 한 번 꽁알대지도 않고 방긋방긋 웃어주며 우리를 즐겁게 했다. 거실 이곳저곳에는 장난감, 가제손수건 등 아기 용품이 가득이었고 K가 드디어 사랑하는 남자를 꼭 닮은 아기를 낳았구나, 진짜 엄마가 되었구나, 싶어 흐뭇하고 대견했다.
K는 나의 결혼생활을 물어왔고 있는 그대로 얘기해줬을 뿐인데 친구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결론은 항상 남편은 더할 나위 없이 착한 남자고 나는 남편을 꽉 쥐고 사는 여편네로 귀결된다. 그이의 능글맞은 자상함과 의뭉스런 참을성을 친구들은 제대로 알 리가 없다. 하기는 나도 살아보고 확인한 바이기는 하다. 동행한 E와 S는 둘 다 미혼이다. 그러다보니 너무 많이 알고 한편으로는 너무 많이 모른다.
S는 순진하고 능력 있고 참 괜찮은 처자이긴 한데 호오의 구분이 좀 뚜렷하다. 소개팅 자리에 나갔다가 남자 손등에 난 털을 보고 기겁한다든가, 맞춤법에 부주의한 남자가 두고두고 용서가 안 된다든가, 다른 점들이 마음에 들어도 그 한 가지가 콕, 두드러져 보여서 성사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또 다른 친구 M의 예를 들면서 매사에 그토록 부정적인 남자한테 홀딱 빠져 사는 M이 이해되지 않는단다. 나이 먹다보면 그러저러한 경계가 조금은 두루뭉술해지기 마련인데 우리 가운데 아마도 가장 순진할 처자인 S는 당최 느슨해지지를 않는다. 아직 제짝을 못 만나서이기도 하겠지만 눈을 크고 낮게 뜨면 보이는 것이 많을 텐데 하는 아쉬움. 하지만 언제 결혼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와 결혼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그녀의 주장은 맞다. 빠르고 늦고는 대체 누가 정한 것이냐. ‘누구’를 만났을 때가 바로 그 ‘언제’인 것이다.
한편 E는 만나던 남자와 최근에 헤어졌다. 저번에는 동방신기 때문에 싸우더니 이번에는 학교 일로 심정이 상해 있는데 남자가 눈치 없이 객관적인 조언을 해주는 바람에 영영 틀어지고 말았다. 당시 E에게 필요했던 건 무조건적인 맞장구, 그도 아니면 그냥 가만가만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이었는데 이 반듯한 청년은 조목조목 E의 잘못을 짚어주신 모양이다. 결국 스트레스 와빵 받은 E는 저녁 식사 제안을 거절했고 그때서야 갑갑한 청년, 내가 오늘 잘못한 것 같다며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똑똑하고 잘생긴 청년이었는데 아깝다. 잘생기기만 하지 똑똑한 건 잠깐 숨기고. E는 잘난 척 하는 남자는 완전 질색을 한다. 잘나긴 잘나되 겸손해야 한다. 그런데 남자들이란 남보다 우월해 보이고 싶어 하는 본능 같은 것이 있다. 그런 고로 K의 지적처럼 남자들 앞에선 알고도 모르는 척, 기억하면서도 까먹은 척 해야 할 때가 있다? 없다?
결혼 전 K가 지금의 남편, 그녀의 남자친구를 보여주었을 때 원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K가 훨씬 더 잘나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날부터 꾸준히 그 남자를 지지해줬다. K를 정말 아끼고 좋아하는구나, 직감했고 신중한 K가 그를 공개했을 때는 그만한 까닭이 있으려니 했다. 그 결과 K의 남편은 나를 완전 신뢰하게 되었다. 맛난 것을 사주더니 이번에는 손수 찍은 사진을 액자로 제작해 결혼 선물로 주었다. 그런 것 받아먹으려고 응원한 것은 아니지만 둘이 잘 되어서 이렇게 사랑스런 아기도 낳고 열심히 사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다.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든다. K는 접을 건 빨리 접고 노력할 것은 노력하는 참으로 무던한 친구다. 그런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 그 자리에서 최선의 행복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
다들 하나같이 사람만 본다는데, 다른 것 안 보고 사람 자체만 본다는데, 그 ‘사람만 본다’는 기준이 제각각이다. 사람만 보는데 손등에 난 털 만큼은 참을 수 없다는 S나 사람만 보는데 동방신기를 놓고 다투는 E를 볼 때, 구체적 실물로 다가오는 사람이란 머릿속 개념으로서의 사람과 갭이 생길 수밖에 없는가 보다. 하지만 그녀들이 Mr. Right를 만나는 순간, 손등의 수북한 털을 쓰다듬고픈 충동과 함께 동방신기 동생들이 인식의 벼랑 끝으로 추락하는 신묘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아는 선생님 한분은 저편에서 걸어오는 남편의 키가 무려 180으로 보였단다. (실제 그 분의 키는 170이 채 안 된다.) 이 정도의 두터운 콩깍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든, 상대든 착각의 늪에 풍덩 빠지는 순간이 온다.
E는 올해 대학원에 입학했고 S는 어학 공부를 위해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렇게 자신이 하고 있는 일, 하고픈 일 열심히 하다보면 뜻이 맞는 좋은 동지를 만날 수도 있다. 더욱이 주변의 종용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매진하는 여성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래도 나의 소중한 벗, S와 E는 돌아오는 새봄에는 함께 팔짱 끼고 봄나들이 갈 미스터 라이트를 만났으면 한다. 왜냐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신혼에 깨 볶는 소리로 미화시켜 버리니 너희들도 얼른 연애하고 결혼해서 실태 파악에 임해라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