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급하기조차 꺼려지는 강호순 이름 석자가 인터넷이고 공중파고 도배를 할 즈음 엄마와 대화. 엄마, 어떻게 저 사람은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이고도 죄책감은커녕 반성의 기색조차 없을까? 처음에는 그랬겠지. 맨 처음 살인을 저질렀을 때는 자기도 괴롭고 죄책감도 느끼고 했겠지. 그런데 지금 와서 강호순한테 반성이니 죄책감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지. 그래서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거고 중요한 거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려운 거고, 그래서 중요한 거다. 몇 년 전 초임 발령을 받았을 때 아이들한테 절대 매를 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도 부모님과 선생님으로부터 맞으면서 자랐고 시의적절한 체벌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시의적절함에 대해 판단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리벙벙 초임 교사일수록 어찌나 권위적인지! 아이들은 그저 아이들일 뿐인데 당시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을 나는 불가피한 도전쯤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결국 매를 들게 되었고 처음에는 체벌을 하면서도 이 방법은 아닌데 싶어 고민도 많이 했다. 그러나 어느새 아이들이 반항만 할라치면 체벌로 위협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아프게 맞는 것 보다는 조용히 하는 편이 낫겠지? 매번 이런 식으로 말이다.
나 같은 교사, 다시 말해 교육경력도 길지 않은데다 일상생활에서나 학교현장에서나 감정 조절이 미숙한 교사가 체벌을 하면 맞는 아이들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때리는 스스로도 마음만 불편하고 교육적인 효과는 더더군다나 없다. 그래서 조만간 학교로 복귀하면 아예 매를 들지 않을 생각이다. 더욱이 매는 처음 들기가 어렵지 한번 들기 시작하면 강도가 점점 세어지는 특성이 있지 않던가. 우리 엄마도 처음에는 자로 때리다가 그 다음 번에 또 다시 반항했을 때는 빗자루를 들고 쫓아오셨다. 한 대 맞던 것을 두 대 맞는다고 갑자기 착한 어린이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오히려 점점 맷집만 좋아질 수도 있다.
학교 후배 중에 J라는 후배가 있다. 언젠가부터 징글징글해져서 연락을 끊고 지낸다. 그 애는 어른스러워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한 번 가까워지면 그저 보는 사람마다 자기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만날 때마다 먹구름을 몰고 오는 사람을 반기는 이는 별로 없다. 처음에 그 애가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을 때 나는 앞으로 이 딱한 아이를 잘 챙겨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J의 푸념은 습관적이었다. 처음에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였을 때는 부끄럽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점점 내성이 쌓여서 조금만 친분이 쌓이면 드러내놓고 눈물을 훔쳐대게 된 것이다. 그 아이를 만날 때마다 나는 깔때기 안의 거름종이가 된 기분이었다. 다 쏟아낸 J는 후련해졌는지 모르지만 매번 그 푸념을 걸러줘야 하는 나는 뭔가.
그러던 어느 날 참다못해 입바른 말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바꿀 수 없는 환경이라면 상황 탓만 하지 말고 네 생각을 변화시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식의 말을 돌리고, 또 돌려서 해주었는데 돌아오는 말은 예상 밖이었다. 갑자기 발끈하더니만 자기를 얼마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가, 이런 식의 만남이라면 계속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언제 만나달라고 애걸복걸했었는지를 갸웃갸웃. 지금의 나라면 조금 달랐겠지만 조용히 돌아와서 전화번호를 지워버렸다. 그 충격적인 만남에서 돌아오던 길, 절에서 나왔다는 두 여인이 내 얼굴의 수심을 알아보았는지 굿을 해야겠다고 말을 걸어왔다. 정말 푸닥거리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처음에 아이들의 손바닥을 찰싹찰싹 때릴 적엔 그 소리에 맞춰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오히려 아이들의 표정은 덤덤한데 내 표정만 들쭉날쭉했다. 카리스마라고는 쥐뿔도 없었고 그 순간 아이가 정말로 미워 보이는 찌질한 경험을 하면서 아, 나는 매를 들면 안 되는 교사 중의 하나로구나 싶었다. 별다른 실효도 거두지 못한 채 아이들 앞에서 더 찌질해지기 전에 서로에게 아픈 짓이라도 하지 말아야겠다 싶었다. 나도 한 고집 하다 보니 숱하게 맞으며 자랐고 매우 따끔하게 맞고 잘못을 비는 일이 아이들의 성장과정에 불가피하단 생각도 한다. 목이 쉬어라 호소를 해도 자꾸 엇나갈 때는 체벌에 대한 유혹도 없지 않다. 하지만 감정 덩어리인 내가 첫 발을 떼고 보니 자칫 습관이 되면 당위성을 잃고 패악질이 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항상 평상심과 냉정함을 유지할 수 없는 인간인지라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었다.
J 같은 경우는 아무리 본인의 삶을 정당화하며 눈물로 호소를 해도 사람 자체가 참 없어 보였다. J가 부끄러워하던 J의 배경은 부끄러워할 게 없었다. 선택해서 타고 나는 것도 아닌데 부정하고 부끄러워해봤자 무슨 소용이냐 말이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은연중에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자신, 그리고 습관적인 자기변명이었다. J는 얘기 중에 괴로움의 원인을 자신의 순수함 때문이라고 뜬금없는 자가진단을 내렸다. 순수하다는 말은 사전적 의미로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은 아예 힘들지도 않다. 욕심이 없는데 뭐가 힘들고 못된 생각 자체를 안 하는데 괴로울 일이 어디 있겠는가. 정말 힘들다면 덜 순수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러한 자기모순을 지적하면 변명 아니면 발끈이니 누가 과연 옳은 말을 해주겠는가. 변명도 반복하다 보면 습관이 된다. 더욱이 아무리 도도한 자세를 취해도 사람이 아주 없어 보인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말들을 종종 듣는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힘도 없고 울림도 없는 문장인지 잘 안다. 언젠가 길을 가다 무심코 사탕껍데기를 버린 적이 있다. 길옆에서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던 아저씨가 그거 누구보고 치우라고 거기다 버리는 거예요? 물으며 빤히 쳐다보셨다. 두고두고 곱씹을 만큼 창피한 경험이다. (참고로, 평소에 그러지 않던 사람은 길가에 쓰레기 쉽게 못 버린다.) 차창 밖으로 훅~ 쓰레기를 던졌다가 기어가 나가서 창문이 안 닫히는 바람에 찬바람 쏠쏠 맞아가며 집에 온 적도 있다. 그때 그 아저씨가 보셨으면 고것 참 쌤통이라고 하셨을 게다. 처음에 망설이면서 몇 번 버렸을 때 주위에 뭐라는 사람도 없고 창문도 멀쩡했으니 어느덧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주변에 쓰레기통만 안 보이면 지금도 손이 움찔거려 에비에비! 하고 앉았으니 습관이란 건 참 무섭다.
대개의 모든 습관들이 그렇다. 영 아니다 싶은 일도 처음 한 번이 어려울 뿐. 어찌어찌하여 한두 번 그러다보면 주구장창 막장으로 내달리는 건 일도 아니다. 나도 처음 꼬깃꼬깃 호주머니 속 쓰레기를 길가에 털어놓을 때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길가에 쓰레기를 가장 많이 버린 교사가 되었다. 참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이건 아니지 싶은 행동들도 점점 익숙해지다 보면 처음의 망설임이나 죄책감은 무딜 때로 무디어져 아무렇지도 않게 되어 버리는 순간이 온다. 눈앞의 욕망, 코앞의 편리 때문에 애초에 찌질한 짓을 시작하지를 말자.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삶을 향한 내공이지 몹쓸 습관에 대한 내성이 아니다. 막장으로 가는 건 정말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