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유머조차 구사할 수 없는 날이 있다. 나와 나 이외의 것들이 유리벽 하나로 분리되어 소통은 고사하고 맥없는 정적만이 흐르는, 그런 날. 수세미로 베란다를 밀어본다. 아직 차지도 않은 쓰레기통을 비운다. 두 번 털어 널던 빨래를 세 번 쯤 털어본다. 걸레를 새 수건처럼 깨끗이 빨아본다. 손을 벨 듯 빳빳하게 깃을 세워 다림질도 해본다. 그렇듯 부지런히 움직이는 와중에도 고민한다. 이 따위 잠시잠깐 도피로서의 노동이 무슨 해결책이 될 수 있으랴. 마음은 뒤숭숭한데 어쩐지 꼼짝할 수조차 없어 뚱뚱하고 기름진 도넛 안에 감금된 듯한 그런 날이 있다.

  남편은 나와 결혼함으로써 물리적으로는 편해졌는지 모른다. 나는 손발이 부지런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란 여자는 머리와 마음 또한 참 부지런해서 그를 미궁에 빠뜨리는 일이 잦다. 평소에 그는 나를 무슨 지식IN 언니쯤으로 생각한다. 지금 다른 거 하는 거 안 보이냐고 신경질을 부리면 빙글빙글 웃으며 당신은 모르는 게 없잖아, 라고 말한다. 영화는 좋아하지만 배우 이름은 늘 헛갈리고, 책을 읽으면서도 이 책 좀 누가 읽어줬음 좋겠다, 라고 느물거리는 그를 어쩌면 좋을까. 처음에는 참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 앞에서 마구 잘난 체를 해왔다. 그것도 몰라? 저것도 몰라!

  그런데 살다보니 내가 참 어리다는 생각이 든다. 이따금씩 나는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스스로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그에게 묻는다. 나 왜 이렇지? 나 왜 이런 것 같아요? 그럼 그는 각설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당신은 아직 젊고 하고 싶은 게 많아서 그래요. 노인네처럼 말한다고 구박을 하면 자기도 나 같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잘 기억도 안 난다고 심상하게 대꾸한다. 그리고는 그 조그만 머릿속에 그 숱한 생각들을 담고 살아가는 게 신기하다며 걱정스러운 듯 바라본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면서 내가 아무리 잘난 체를 해봤자 그에게는 그저 다루기 힘든, 걱정스러운 반쪽이구나 싶어진다. 종종 알 수 없는 조울 증세에 시달리고, 머릿속에 잡동사니 사념들을 그득 구겨 넣고는 안 해도 되는 고민들을 하고 사는, 아직 철이 덜 든 마누라 말이다.

  나라는 사람은 방긋거리며 일상을 잘 꾸려나가다가도 어느 날 문득, 거대 도넛 안에 갇혀버리면 그걸로 끝장이다. 중대사에 있어서는 매우 담대한 반면 아주 사소한 일로 기분이 상해서는 몸져눕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한 공간에서 그 이물스러운 공기를 함께 마셔야 하는 남편으로서는 참 황당하고 갑갑하겠지만 이제는 이골이 났는지, 아니면 그럴수록 자기가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감각 잃은 봉제인형 같은 나를 마냥 기다리고 또 기다려준다.

  영화 <카모메 식당>에 이런 말이 나온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어서 좋겠다는 말에 식당 주인인 사치에가 말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고 싫어하지 않는 일을 하는 거예요.” 생끗 웃으며 담담하게 말하는데 그야말로 간지 좔좔 흐르는 대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핀란드 헬싱키든, 베트남의 하노이든, 우리나라의 서울이든, 그 어디서든 자족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쉬다가 출근하려니까 싫지? 라고 묻는 내게 남편이 그랬다. 이게 내 일인 걸 싫다고 생각하면 되나. 아무리 책을 많이 보고 배우 이름만 외우고 있으면 뭐하나. 그는 훨씬 고수다. 까불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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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2-10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부터 남편이 온갖 잡스러운 걸 물어 볼땐 생긋 웃으면 "검색창에 ooo을 쳐 보아요" 대꾸해버리세요..^^ (좋은 것 가르쳐 준다 칫)

카모메 식당에 가면 전 환영받을 꺼에요. 우주과학닌자단갓차만(우리나라명 독수리 오형제) 노래를 다 부를 수 있거든요..다레다 다레다 다레다~~!!

댓글뱀꼬리 : 아주 잠깐 0.01초 페이퍼를 읽기 전 제목만 보고 깐따삐아님과 문근영양을 오버랩 시켜볼 뻔 했다는..=3=3=3=3

깐따삐야 2009-02-10 15:19   좋아요 0 | URL
이혼한 지 한참 된 배우가 나와서 이혼 어쩌구 하면 언제 이혼했냐고 물은 다음, 그 이혼사유를 저한테 묻는다니깐요.ㅠ

다레다 다레다 다레다... 하핫. 생각나요. 저는 거기 가면 따끈한 시나몬롤하고 코피 루왁! 하면 급맛있어지는 커피 한 잔 하고파욥.

근데요, 아사다 마오가 문근영 쫌 닮지 않았어요? 문근영+이미연 짬뽕 같애. 그래도 우리 김연아가 쵝오! 댓글은 방향을 잃고... 흠흠.

웽스북스 2009-02-10 15:23   좋아요 0 | URL
저도저도저도요!

웽스북스 2009-02-10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깐따삐야님. 저 완전 공감이요.
저는 신부는 아니지만, 가끔 저보다 연륜 있으신 분들 앞에서 좀 잘난척 하다 보면 막 자각과 반성의 물결에 마음에서 메아리치곤해요. 흑흑.

그런데 방긋거리며 살림하는 깐따삐야님은 완전 사랑스러움 ^-^
문근영 저리가라! 훠이훠이!

깐따삐야 2009-02-10 15:30   좋아요 0 | URL
그쵸! 자각과 반성의 물결이 쓰나미로 밀려오는 퐝당부끄한 경험. 웬디양님도 그랬군요. 페퍼민트의 이하나처럼 우리가 아직 쫌 어설퍼서 그래요. 그걸 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서로 토닥토닥.^^

방긋거리다가도 곧잘 할매가 뿔났다, 로 변해요. 세상 모든 것들이 둘째 며느리 고것처럼 적대적으로 보인다니깐요. ㅋㅋ

레와 2009-02-10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오니기리!!

저도 '하기싫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그 담백하게 생긴 여배우의 말에 쿵-했어요.


배고파.ㅡ.ㅜ

깐따삐야 2009-02-10 22:48   좋아요 0 | URL
레와님도 보셨군요. 근데요, 그 여배우 은근 자우림의 김윤아 닮지 않았어요? 느낌이 분명 다른데도 계속 오버랩 되는 이유는 뭘까요. 흠.

프레이야 2009-02-10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삐야님 왜 제 생각이 나며 웃음이 나죠.
충분히 사랑스러운 어린신부에요.^^
님 말이에요.

깐따삐야 2009-02-10 22:49   좋아요 0 | URL
혜경님도? ^^ 너무 사랑스러워서 막 죽이고 싶죠? ㅋㅋ

비로그인 2009-02-10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조금만 더 단단해지고, 깐따삐야 님은 조금만 더 느슨해지면 어떨까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서로가 서로가 아닌 게 되겠지요.

깐따삐야 2009-02-10 22:54   좋아요 0 | URL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면도 많아요. 우리는.^^ Jude님도 저도 자아가 견고하지만 그만큼 가슴에 사랑도 많은 사람들이라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해나갈 수 있을 거에요~

마늘빵 2009-02-10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그러니깐 '우리 신혼이에요' 라고 알리는 페이퍼에요. 숨겨도 소용없어, 그런거야, 중얼중얼.

깐따삐야 2009-02-10 22:57   좋아요 0 | URL
낯선 두 남녀가 만나 함께 살다보면 다~ 이런 겁니다. 에헴! ㅋㅋ

2009-02-11 0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1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2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2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9-02-13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수 앞에선 팍 숙이고 살아야죠~~ ㅋㅋㅋ

깐따삐야 2009-02-16 00:06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