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이 달랑, 한 장 남았다. 서운하기도 하고, 발도 시렵고, 잠은 안 오고. 논문의 향방은 여전히 첩첩산중.

 머리는 안 돌아가고, 배도 고프고, 띰띰한데 훈훈한 페이퍼나 하나 써보자궁.


 누에고치가 아니라 호빵이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적시면~ 생각나는. 간혹 급하게 먹으려다 종이까지 먹어버리거나, 뜨거운 단팥에 입천장을 데이기도 하는. 나 어릴적이나 지금이나 터미널 매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빵이 투명한 보온 유리통 안에서 돌아가고 있다. 호빵의 지존은 역시나 단팥호빵. 진한 단맛 때문에 요즘은 단맛이 덜한 안흥찐빵이 각광을 받기도 하지만, 삼립 크림빵과 함께 면면히 세대를 이어오고 있는 제빵계의 지존. 그 진득하고도 촌스러운 단맛은 따듯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마트에 가면 묶음 할인으로 팔 정도로 지금은 너무 흔해져버렸지만, 그러나 여전히 잘 팔리고 있다는 말랑말랑 호빵.  

 



 학교에 가서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따뜻하게 데워진 캔커피를 사는 일. 차가워진 손을 녹이며 한 모금 마시면 온몸에서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 위의 사진은 요즘 반응 괜찮은, 골라 마시는 원두커피. 머잖아 나오리라 기대했었고 그 기대가 현실화된 제품. 언젠가 코트 주머니 안에 캔커피를 쏘옥 넣어주고 사라졌던 귀여운 그 남자는, 알래스카에서 자판기 사업이라도 하고 있으려나 원.-_-

 



 추억의 시트콤, '남자셋 여자셋'의 번개머리 이의정에게 딱 어울릴 법한 딸기목도리. 사람이 가장 추위를 많이 느끼는 곳은 목이라고 한다. 그래서 겨울이 오면 폴로티가 유행하는 건지도. 요즘 거리에 나가보면 다양한 머플러로 멋을 낸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곤 한다. 단발머리에 어벙벙하게 생긴 나는 자칫 머플러를 잘못 두르면 성냥팔이 소녀가 따로 없다는. 마주치기 싫은 사람을 만났을 땐 잽싸게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도 사용 가능하며, 마음에 둔 남자가 있을 경우 매주는 척 하다가 묶어서 끌고 오는 용도로도 사용 가능하다. 단, 반드시 입부터 막아야 하며 힘도 더 세야 함.-_-

 


 역시 우리의 마음을 금방 따숩게 하는 동시에, 가장 보시기에 좋은 것 또한 훈남 아니겠는가. 쌀쌀한 겨울에 어울리는 타입은 고전 훈남, 그레고리 팩. 이름도 팩이네.-_- 온화한 미소와 중후한 매너를 겸비한 그를 방한용 훈남으로 강추하는 바. (화끈한 여름에는 말론 브란도 사진을 올려야지.) 그나저나 왜 나는 주로 클래식 꽃미남들에게 팍팍 꽂히는 건지. 잘 자란 그레고리 팩 하나, 열 브래드 피트 안 부럽다는.

 


 별명이 또자인 잠꾸러기 친구와 함께. 겨울엔 왠지 부지런하고 활동적인 친구보다는 몇 시간이고 한 자리에 눌러앉아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조금은 느긋하고 게으르다 싶은 친구를 만나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사계절 내내 할 일만 생겼다 하면 넘치는 에너지로 주체할 수 없는 나는, 양분이 모자라 시름시름 움츠러드는 그네들에게 묵묵히 이 한몸 다 바쳐 거름을 친다. 항상 조용하고 의젓하게 나의 수선스러움을 받아주는 친구. (눈이 부었다고 주장하며 무서븐 뿔테 안경까지 쓰고 찍은 그녀를 배려해, 대충 소프트 처리했음)

 



 결재용 카드 말고. 크리스마스 카드. 그러고보니 카드 써본지도 오래 되었다. 요즘은 빠르고 편한 e-카드를 많이 사용해서 다른 사람이 디자인한 그림에, 다른 사람의 필체로 보내곤 하지만, 학창시절 미술 시간엔 색지와 한지, 골판지 등을 이용해서 손수 카드도 만들곤 했는데. 지우개에 이름을 파서 멋지게 낙관도 찍고 말이다. 이번 연말과 새해에는 내 글씨를 꾹꾹 눌러쓴 카드를 보내봐야겠다.



 사랑? 포옹? 불꽃놀이? 이슬람 여행? 노우노우노우. 바로 '알라딘'이다. 헤아려보니 알라딘에 서재를 만들고 처음으로 글을 올린 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나와 아옹다옹하던 아이들이 졸업을 해서 벌써 고3이 된다 하고, 나는 아이들 몰래 연애도 하고 공부도 했다지 아마. 돈맛은 알아가는데 밥맛은 예전같지 않아 살이 조금 빠졌고, 그 때나 지금이나 귀찮은 건 딱 질색인 걸 보면 여전히 철이 덜 든 건 분명하다는. 리뷰의 몇 배에 해당하는 페이퍼 수에 식겁하는 중인데,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할 말만 많아지는 건 아닌가에 대해 고민 중이라는 풍문. 알라딘은 내게 있어 책 한권 끼고 쉬러 들어가는 편안한 사랑방 같은 곳이다. 이미 나를 알아온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나만의 서재인 동시에, 내가 좀 뜸하더라도 늘 거기 있어주는 변덕스럽지 않은 공간. 또 서재 3.0으로 바뀌지만 말아다오.-_- 

 

  잠이 안 와 시작한 페이퍼인데 쓰다보니 마음이 따듯해졌다. 이런 걸 가리켜 자뻑이라 한다지. 몸을 뉘여 잠을 청해야겠다. 아후, 발 시려워라. 그치만 내일은 덩치 크고 식성 좋은 손님들 덕분에 무수리 발바닥에 불날텐데 모.

 따숩은 12월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12-02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02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03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INY 2007-12-02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에는 겨울잠을 자줘야합니다. (지난 주 내내 칼출근 아아...)

깐따삐야 2007-12-02 16:12   좋아요 0 | URL
12월은 학교는 물론이고 어느 직장이나 참 바쁘죠. 저는 일단 방학하면 사흘 정도는 암껏도 안 하고 내리 잤던 것 같아요.^^

hnine 2007-12-02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페이퍼네요 ^^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적시면~' ㅋㅋ 오랜만에 들어보는 cm송이네요. 김 도향 목소리였던가요?

깐따삐야 2007-12-02 17:16   좋아요 0 | URL
김도향 아저씨 목소리 맞아요. 전 어릴 때 들었던 입에 밴 CM송이 많아서요. 가끔 심심할 때 부르곤 합니다. 손이 가요 손이 가~ 베베 꼬였네~ 둘쭉날쭉해~ 뭔지 아시겠죠? ㅋㅋ


Mephistopheles 2007-12-02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고리펙.....이라니..
하긴 남자배우나 여자배우나 저때 배우들이 활씬 더 잘생기고 이쁘고 멋졌어요..

깐따삐야 2007-12-03 13:17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레고리 팩을 닮은 포근한 핫팩인형을 갖고 시포요.ㅋ

비로그인 2007-12-03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보다는 저때 배우들이 더 좋아요. 고전적인 미인, 해서 요즘 스칼렛 요한슨을 꼽는다던데, 천만의 말씀! 고전 흉내만 슬쩍 내려다 만 격이에요. 저는 개인적으로 알 파치노를 추천합니다. dog day afternoon의 그 미모는 지금 보아도 절대적이어요.

그렇지 않아도 어제 호빵과 만두를 사서 집에다 쟁여놓았는데, 이런 호빵스러운(칭찬임) 페이퍼라니, 깐따삐야 님 글 참 좋아요. 후후훗

깐따삐야 2007-12-03 13:23   좋아요 0 | URL
칼있쑤마의 절대강자, 고전 꽃미남계의 대부, 알 파치노. 넘흐넘흐 잘생기셨죠! 또 흥분.-_-

Jude님, 맛난 거 많이 드시고 지금처럼 후후훗, 하고 웃으시면서 건강하게 지내셨음 좋겠어요. 호빵스러운 기분이 태교엔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프레이야 2007-12-03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저도 붕어빵 꼭 사먹을거에요^^
조근조근 따뜻해졌어요, 깐따삐야님..

깐따삐야 2007-12-04 18:58   좋아요 0 | URL
오늘은 붕어빵의 아삭바삭한 꼬리가 생각나는 날씨였어요. 따듯해지셨다니 다행이에요.^^

라로 2007-12-04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페이퍼는 자주 써주셔야 함`. 자뻑이든 아니든,,,
붕어빵과 더불어 호떡두 사먹구
오뎅에 오뎅국물 후루룩 마시기도 할께용~.
넘 귀여운 깐따삐아님~~~.ㅎㅎ

깐따삐야 2007-12-04 19:01   좋아요 0 | URL
nabi님 댓글을 보니 오뎅을 넣고 끓인 얼큰한 김치국이 먹고 싶어요. 아, 이 음식에의 파생력.-_-
 

  잠이 오지 않는다. 와이프 대신 염소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를 읽다가는 서서히 마음이 웅크러든다. 오늘도 온종일 트로트를 개사한 선거홍보가는 빵빵 울려퍼졌고, 산에 다녀오던 나는 하루 종일 코 앞에서 그 소음을 듣고 있어야 하는 붕어빵 장사 아저씨가 문득 안되어 보였다. 그래서 화끈하게 붕어빵을 오천원 어치 사려고 했는데 스무 개를 들고 갔다간 엄마한테 맞을 게 두려워 그만두었다. 그 아쉬움 때문인지 지금 이 시간, 따끈한 붕어빵 생각이 간절하군. 어느 날인가.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슈크림 하나를 더 얹어주셨던 아저씨. 반죽을 깔고 단팥을 넣고 다시 반죽을 덮고 구워내는 그 동작들을 가만히 지켜보며 나는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붕어빵만도 못한 선거가 얼른 끝나서 동네가 다시 조용해졌음 좋겠다.  

 발이 살짝 시렵고 잠은 안 온다. 내일은, 아니지 벌써 오늘이구나. 오빠 내외가 온다는데 또 허리가 휘어지도록 상을 차리고 수발을 들어야겠지. 오빠가 결혼하면 방을 두 개나 차지하고, 재떨이를 안 비워도 되고, 스타크래프트에서 나오는 괴괴한 소음이 사라지고, 자신이 얼마나 회사에서 내노라하는 인재인가에 대해 자랑질 하는 걸 안 들어주셔도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무수리 생활이 완벽히 종친 것은 아닌 바.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해 일찍 잠들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초저녁부터 시달렸다. 그런데 식구란 참 이상한 것 같다. 나를 아무리 부려먹어도, 따끔한 구박을 들어도, 가슴 밑바닥부터 짠하게 올라오는 느낌은 대체 뭘까. 각자 살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화악 단합되는 게릴라 근성은 대체 뭐고. 아무튼 미묘하고도 징글맞은, 영원한 탐구 대상이다. 가족이라는 관계는. 오늘은 그냥 먹던 굴비에 이쁘장한 고명이 올라갈 것이고 나는 껍질이 요만큼도 안 남도록 깔끔하게 사과를 깎겠지. 아, 난 정말 착한 시누이다.-_-   

 


댓글(7)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12-02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02 0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02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INY 2007-12-02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빠가 있다고 무조간 좋은 것도 아니군요. 흠흠흠..

깐따삐야 2007-12-02 16:23   좋아요 0 | URL
오빠는 생각도 깊고 속정도 많은데 늘 한결같이 무뚝뚝한 편이에요. 저번에 엄마는 오빠랑 통화하다가 얼떨결에 안녕히 계시라고 할뻔 했다죠.-_- 아빠도 그렇고 저희집 남자들은 차암 말이 없답니다.
월급날과 훈남을 빼놓곤, 무조건 좋은 건 없는 것 같아욤. BRINY님.^^

Mephistopheles 2007-12-02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이 아직 착한 시누이신 이유는..시댁식구의 존재가 없으시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깐따삐야 2007-12-03 13:14   좋아요 0 | URL
음... 그런가요? 오히려 결혼해서 제가 어느 집안의 며느리가 되면, 올케를 더 잘 이해하게 되지는 않을까요? ^^
 

  바야흐로 냄비요리와 뚝배기의 계절이 왔다. 교수님이 점심을 사신다길래 사람들과 함께 추어탕집에 갔다. 감자탕, 매운탕, 삼계탕 등 각종 탕들을 느무느무 사랑하는 나로서는 맛있게 한 그릇 비웠는데 몇몇 여성 동지들이 배신을 때리며 비빔밥을 시켰다. 추어탕집에 와서 비빔밥이라니 뭘 모르는군. 그러나 짬뽕을 시켜놓곤 짜장을 넘보듯 비빔밥의 고소한 참기름 냄새에 매혹당한 나는, 다음엔 반드시 아삭한 콩나물이 씹히는 비빔밥을 먹고야 말리라 다짐했다.

  우리방 사람들은 성격이 참 제각각이다. 뭐니뭐니해도 교수님처럼 특이한 양반이 없는데 남자 멤버라고 하나 있는 사람도 사고 패턴이 4차원이다. 한번은 두 사람을 마주앉혀놓고 밥을 먹은 적이 있는데 그야말로 적막강산. 결국 두 사람을 멀찌감치 떼어놓아야만 나머지 멤버들도 마음 편히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착안. 여자 멤버들 중 가장 어린 내가 제물로 바쳐졌다. 수줍음 많고 조용하신 교수님 옆좌석은 방석만 덩그러니 놓여져 있을 뿐. 아무도 넙죽 가서 앉으려고를 하지 않았고 모두의 만장일치로 그 자리는 나를 위한 고정석이 되다시피 했다. 그들의 공모에 의하면 가장 젊고 귀여운 선생님이 옆에 앉아야 교수님도 좋아하시지 않겠냐고 하는데 말이 좋아 그렇지, 나는 어리버리하게 있다가 낚인거다. 방석은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순간부터 레드카펫으로 화하여 여기저기서 번쩍이는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려오는 듯 나의 태도는 급, 돌변한다. 식사 중 나의 임무란 끊임없이 활기찬 소음을 만들어내는 일. 사람들은 대개 묵묵히 밥을 먹다가 내가 던지는 말에 다같이 웃고 그리고는 다시 침묵. 이야깃거리가 떨어지면 급기야는 교수님을 갈군다. 이젠 교수님도 적응이 되시는지 함께 좋아라 웃으신다. -_-;

  그런데 이번엔 교수님의 희한한 발언으로 다같이 파안대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어쩌다 사상체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태음인이니 소음인이니 그런 말이 오가다가 나를 향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였다. 모모모 선생님은 얼굴에 내성적인 게 보여요. 그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사람들이 까르르 웃어대기 시작했고 나는 가슴이 뭉클하다며 오버 섞인 진심을 표현했다. 나는 맞다고, 잘 보신 거라고, 역시 통찰력이 대단하시다고 주장하고 나머지 멤버들은 대관절 어디가 내성적인 거냐고 딴지를 걸어댔다. 혼자 있을 땐 항상 연구하고 사색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 우울한 기분에 휩싸일 때도 많다고 능청을 떨었더니 사람들은 반신반의한 표정을 지었고 교수님은 진지함이 물씬 밴 표정으로 한번 더 강조하셨다. 모모모 선생님은 얼굴에 그대로 써 있습니다... 내성적이라는 것이.

  문학을 하시는 분이니 교묘한 아이러니나 패러독스 같은 장치를 구사했다고 보아야 할까. 평소 모습으로 볼 때 그건 아닌 듯 싶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면을 읽어낼 줄 아는 통찰력이라고 이 연사 힘차게 주장하고 싶다. 교수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해서 듣고 있던 나마저 크크큭거렸지만 속으론 얼라리요? 라고 외쳤던 게 사실. 나도 알고보면 내성적이야, 내가 넘 내성적이어서, 난 왜케 내성적이지? 이런 말들은 내가 주변 사람들을 웃기고 싶을 때 썼던 말인데. 물론 INFJ이자 소음인인 나는 다소 내성적인 게 맞다. 그러나 대개 밖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웃지 않는 공주를 한번 웃겨보겠다고 필사적으로 망가지는 구혼자의 모습. 어찌나 필사적인지 어색한 분위기의 획기적인 전환을 위해서는 나도 팔고, 동료도 팔고, 식구도 팔고, 교수님도 팔고. 있는 거 없는 거 다 팔아치운다. 정 없으면 길 가다 마주쳤던 납작코 퍼그까지 끌어들인다. 혹자는 이런 나를 가리켜 웃음을 위한 헝그리 정신이라고 칭송하기도 했지만, 나는 단지 모든 사람이 뚝배기 국물에 익사라도 할 것처럼 묵묵히 수저질을 하는 장면을 오래 견디지 못하는 것 뿐이다.   

 진정으로 내성적이라는 것은 이런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나한테는 침묵 속의 수저질처럼 표독스러운 것도 없어 보인다. 물론 십년지기 친구와는 별스런 대화 없이도 밥 한 그릇 비우고 코털 삐져나온 것 까지도 심드렁하니 지적해줄 수 있겠지만, 수줍음이 많은 탓에 분위기 리드를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을 찾다가 상대가 너무 어렵게 보여서 포기해버리는, 그렇듯 무거운 입영열차 분위기는 용납이 안 된다. 강의 시간이나 연구 과제물 작성할 때 얼마든지 진지할 수 있는데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숙연해질 필요가 어디 있을까. 음식이 그런 우리를 보고 뭐라 하겠느냐 말이다. 전에 어떤 소개팅남과 만난 지 하루만에 급격히 마음을 튼 적이 있었는데 그와 나를 쉽사리 엮어주었던 공통주제는 웃기는 자들의 고독에 관련된 것이었다. 사람들을 실컷 웃겨주고 난 뒤 쓸쓸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미니홈피에 일기를 쓴다던 그 남자. 요즘 대한민국 어머니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고 있는 전현무 아나운서 같은 스타일의 남자였는데, 우리는 처음부터 너무 편했던 탓에 친구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었지만 그가 지녔던 삶의 애환만큼은 지금껏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쨌든 교수님의 엉뚱한 발언과 나를 제외한 기타 등등의 고약한 멤버들의 반발 덕분에 수저질이 몇번 더 오갔고 점심식사도 무사히 마쳤다. 4차원의 사나이가 불현듯 프루프록의 연가와 자크 라깡 이야기를 꺼내서 급속냉각시켜버리긴 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논문으로 운을 떼어도 농담이 되어버리고 그 사나이는 분명히 농담처럼 시작하는데도 논문이 되어버린다. 4차원의 사나이와 내성적인 나 사이엔 추어탕과 영미문학의 갭처럼 깊은 심연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그나저나 원래 생각했던 주제를 수정해야 할 순간이 오고야 말았고, 아무 생각 없이 지내던 나는 당분간 진지 모드로 돌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성적으루다가 연구와 사유에 몰두하리.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7-11-29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그방에서 깐따비야님의 위치는 "신구" 혹은 "이순재" 선생같은 존재시군요..
(혼자 있을 땐 항상 연구하고 사색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라면서 책상 속의 발은 열심히 다이아몬드 스텝을 밟고 있을 깐따비야님을 혼자서 상상하면 무지하게 낄낄거리고 있습니다.)

깐따삐야 2007-12-14 13:27   좋아요 0 | URL
가끔 교수님과 뿡뿡이를 오버랩 시켜놓고 혼자 낄낄거릴 때도 많아요.ㅋㅋ

마늘빵 2007-11-29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 나도 너무나 내성적이야.

깐따삐야 2007-11-29 14:29   좋아요 0 | URL
제가 볼 때 아프락사스님은 저희 교수님이나 4차원의 사나이 과에 더 가까우실 듯? 진정으로 내성적인 건 저라구욧.-_-

치니 2007-11-29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평소, 남을 웃겨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젤 착한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

깐따삐야 2007-11-29 21:28   좋아요 0 | URL
오훙, 뜨끔. 치니님도 통찰력이 남다르시구낭.ㅋㅋ 젤 맹한 사람이나 아니었음 좋겠어요.-_-

라로 2007-11-30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추어탕 못먹어요~.-.-;;;;

라로 2007-11-30 10:39   좋아요 0 | URL
그리구 외향적이에요~.-.-;;;

라로 2007-11-30 10:39   좋아요 0 | URL
그래두 저와 놀아주시겠어요????

라로 2007-11-30 10:42   좋아요 0 | URL
근데,,,,깐따삐아님 고수신가봐요?
저두 배우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그런 저력이???전 4차원남자 과인가봐요~.
여기서 눈물 몇방울 ㅠㅠ
농담으로 운을때도 다 진지하게 받아들이니,,,
살맛이 안나욥!!ㅜ

깐따삐야 2007-11-30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bi님, 추어탕을 못 드신다니 참 안타깝지만 우리에겐 뼈다귀 감자탕도 있잖아요.^^ 그리고 웃기자고 웃기는 게 아니라 그냥 웃기대요. 과년한 처자에게 있어 고런 이미지가 썩 좋은 것만도 아니랍니당. 첨엔 모두들 제가 조신하고 참한 줄 알았다던데 말이죠. 요즘은 일일드라마 미우나고우나에 나오는 쏘냐(에바)의 말투를 흉내내며 주변 사람들을 웃겨대고 있어요. 이래두 저와 놀아주시겠어요? -_-

2007-11-30 2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30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30 2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30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르쳤던 아이들이 그새 고3을 앞두고 있고 그전엔 보지 못했던 진중한 어투로 글을 남겼다. 일찍부터 신소재공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구체적인 희망을 품고 있던 아이는 사범대에 가고 싶어졌다면서 학교를 떠나있는 내게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꿈의 중량을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왜 그 아이에게서 열패감의 뉘앙스를 보았을까. 매우 현실적인 조언과 격려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짠해졌다. 공무원을 하기엔 너무 잘생기지 않았나, 하는 정말 쓰잘데기 없는 우려까지 생겨났지만 그저 일년 후에 너로부터 좋은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다, 고 선생님 같은 마무리를 했다. 아이의 홈페이지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말자'는 문구가 걸려 있었고 아무리 돌아봐도 부끄러운 일 투성이인 나로서는 고3을 앞둔 아이들의 정신상태를 닮아야하지 않겠냐는 야무진(?) 생각을 했더랬다. 참 성실하고 서글서글한 녀석이었는데. 꽃미남들의 눈부신 미소를 앗아가는 이 나라 교육현실에 대해 나 유감 있다.

 

#

  모든 인간관계에 초기화 버튼이 있다면 좋겠지만 어디 그런가. 사람마다 지닌 연애패턴이란 것은, 본성의 색조와 경험의 질량과 깨달음의 밀도에 따른 개인차와 시간차를 인정하더라도, 어느만치 고정불변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잘 지내냐는 문자를 받고 생각했다. 그 마음 이해하지만, 쿨한 배려란 네 사전에 없을 거라고. 시시때때로 다정도 병인 나지만 돌아설 땐 일부러라도 냉차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표현은 오히려 독이 되고 마음으로 족할 때도 있는 법. 붙잡는 것이 친절한 것은 아니다.  

 

#

  엄마가 담그신 김장 김치를 지퍼팩에 옮겨담으며 생각했다. 이래 갖고 어따 쓰겠냐고. 처음엔 도와드리겠다고 나선건데 고작 두 포기 넣고 나니 소매단에 고춧가루 다 묻히고 허리마저 아파왔다. 항상 시작은 용감무쌍한데 결말이 유감무쌍이다. 그런데 참 의아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할줄 모르는 친구들은 후다닥 결혼만 잘하는데, 음식도 잘하고 살림꾼인 친구들은 여전히 혼자라는 사실. 고수는 못되고 하수라기엔 시늉만큼은 누구보다 멋진 나는 어설픈 중수 정도? 밥솥이 고장나도 별로 불편을 못 느낄 정도로 대담하게 살고 있는 친구는 이번에 결혼을 할 것 같은데, 자취를 하면서도 열다섯가지 잡곡을 섞은 밥을 내오던 그녀는 왜 혼자란 말인가. 닥치면 다 하게 되어있다, 라는 말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 입 닥치란 소리일까.

 

#

  대학원에 와서 좀 안이해진 건 아닌가 싶다. 몸둥이가 편하니 사색의 허울을 쓴 잡념만 늘어나는 듯. 예전에 쓴 페이퍼들과 일기들을 보다보니 내가 제법 치열한 인간이었구나, 라는 생각. 나이 먹을수록 치열함은 사라지고 치사함만 끼어드는지 자문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명상록과 행복론 같은 활자화된 지혜가 아니라, 더 많이 상처 받고 더 오랜 불면의 밤 속에서, 치열한 오해와 뜨거운 이해를 반복하는 간극 속에서, 내가 보고 느끼게 되는 것들이 나를 키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 내일에 대한 희망, 내가 할 수 있는 일. 이 세 가지가 행복의 요건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랑받는 데에 신경쓰고, 내일에 대해 불안해 했으며,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욕심을 부렸던 것을 떠올리면서 나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그리하여 결론은 파워포인트로 발표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_-;; 애니메이션 효과음엔 총소리를 넣을테다.

 

#

  독일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독일 날씨, 같다고 중얼거렸다. 밖을 보니 곧 눈이 쏟아질 것처럼 꽁해 보인다. 그리고 그 눈의 빛깔은 흰색이 아니라 군청색일 것만 같은 날씨. 내가 왜 특히 11월과 친화할 수 없는가를 생각하다가 아름다운 샤를리즈 테론이 나오는 영화, 스위트 노벰버와 건샌로지스의 노래, 노벰버 레인을 떠올렸다. 난 그것들을 좋아하지 않는가. 게다가 사랑하는 붕어빵, 땅콩빵, 국화빵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도 10월이 아닌 11월이다. 노벰버... 갸냘픈 갈색의 갈대들이 서걱이는 11월. 악토버, 디쎔버보다 뉘앙스도 훨씬 곱고 아련하다. 11월이 없는 달력을 주문제작 하든지 해야겠다고 단순한 생각을 하기도 했었는데 가만 생각하니 11월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도 많았다. 징크스란 내가 믿기 때문에 휘둘리는 것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결국 대개의 모든 일이 그렇지 않던가.

내일은 새로 산 투톤 머플러를 하고 학교에 가야지~

 


댓글(7)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7-11-26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저는 건빵을 먹었사와요.
2. 저는 파워뽀인뜨의 총소리보단 캐쉬기 여는 소리를 좋아한다는.

깐따삐야 2007-11-26 17:48   좋아요 0 | URL
1. 그러셨쎄여? ㅋㅋ 붕어빵 사러 냅다 튀어갔다 올랍니당.
2. 저도 물론 요술봉, 카메라, 캐쉬기, 이런 소리들을 좋아하지만 갑자기 심술이 나서. 과제 내고 출장 가버린 교수님 미오. -_-;;

마늘빵 2007-11-28 16:37   좋아요 0 | URL
네 그러쎘쎄요. 붕어빵 혼자 드시니 맛있쓰쎘쎼요? ㅋㅋ

Mephistopheles 2007-11-26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교육제도가 좋아진들(그럴 가능성은 요만큼도 없지만) 사회생활 하면 바로 삭아버리는게 사람인지라...
#2 이제 친구 혹은 오빠 동생으로 남기로 했어요...개뿔..연애에 있어서 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관적인 생각)
#3 그나마 좌절무쌍이 아닌게 얼마나 다행입니까.
#4 총소리보단 미사일 날라가는 소리 혹은 로켓 발사되는 소리가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됩니다.
#5 스윗노멤버는 막판 그 뻘줌해진 키아누 리브스의 표정이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어랍쇼 막판 한 줄은 완벽한 돈강법일세~)

깐따삐야 2007-11-26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넘 우울해지는데요? 어서 붕어빵으로 기분을 풀어야겠어요.
#2 개뿔... 제 어록에 즐겨찾기 되어 있는 말이죠.^^
#3 엄마는 제가 좌절하길 바라세요. 할줄도 모르는 게 덤벼대긴 잘한다구.
#4 음, '폭발'이란 소리도 있던데 그건 어떨까요.
#5 뻘쭘해도 멋있는 건 키아누 리브스이기 때문!

BRINY 2007-11-27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학기초에 예고했던 과제를 뒤집어엎고 새 과제를 내신 교수님 미워요. 과제 미리 하고 있던 사람 저 하나뿐이더라구요. 에휴.

게다가 어제밤 11시부터 아침8시까지 무단지각 좀 고쳐달라고 징징대는 아이와 그 아버지에게 시달려서 완전 죽을 맛입니다. 어떻게 무단지각한 아이를 잘 봐달라고 할 수 있지요...그게 좋은 아버지의 역할인가요?

깐따삐야 2007-11-27 22:23   좋아요 0 | URL
예고가 소용 없는 대표적인 것 두 가지가 있죠. 우리나라 기상청의 일기예보, 그리고 학기초의 실라버스.-_-

잘못은 감수하기 싫고 출결 점수는 안 잃었으면 좋겠고. 완전 이기적인 부자군요. 무단지각을 고칠 게 아니라 정신상태를 고쳐야겠네요. 냉정해지세요. BRINY님.
 

  컴퓨터 '내 그림' 안에 올해 남겨놓은 몇 장의 가을이 있었다.


 우리집에서 대형마트까지는 운동 삼아 걸으면 딱 좋을만한 거리에 있다. 꽃병으로 재활용한 꿀단지에 담긴 국화들은 마트에 다녀오는 길, 인간관계에 대해 투정하는 나를 구박하며 엄마가 툭툭, 꺾어오신 것들이다. 모두가 다같이 보라고 핀 꽃인데 그렇게 마구 꺾어대면 어떡하느냐는 내 말에 엄마는 '내가 이 나이에 네 말 듣게 생겼냐'며 기어이 꿀단지를 장식하셨다.

 


 추석에 시골 큰댁에서 따온 늙은호박으로 우리집은 매년 찰떡을 해먹는다. 호박을 깎아서 말리면 호박꼬지가 되는데 대추, 밤, 서리태 등을 함께 넣고 찐 찰떡은 쫀득쫀득하면서도, 설탕의 단맛이 아닌 호박 고유의 담백한 단맛 덕분에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다.  

 


 사람은 자연을 대하면 저절로 순해지고 착해지는 것 같다. 저렇듯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란 나무 아래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남이섬을 거닐며 나는 세상을 보는 지혜 보다는, 비어 있는 마음의 호젓함을 느꼈다.

 

 올 가을에 영화 '애수'를 다시 봤다. 청초한 비비안 리와 자상한 로버트 테일러의 매력은 여전했다. 풍문으로는 비비안 리가 상대역인 로버트 테일러를 몹시 싫어해서 두 사람이 어색한 연기를 펼칠 수 밖에 없었다는데, 영화는 풍문에 비하면 지극히 애잔하지 않은가. 실제로 비비안 리가 평생을 걸쳐 사랑했다던 로렌스 올리비에는 로버트 테일러처럼 부드러운 신사도, 클라크 케이블처럼 제멋대로인 매력남도, 말론 브란도처럼 섹시한 터프가이도 아니었다. 사진 속의 그는 선이 굵으면서도 의지가 강건해 뵈는 수수한 남자였다. 히드클리프, 햄릿 등을 연기했던 그는 연기의 완벽함에 대한 노력이 남달랐다고. 그렇듯 강렬한 프로의 기운이 아름다운 비비안 리를 단숨에 사로잡았던 걸까.  

 


 향긋한 국화차. 공부를 할 때나 컴퓨터를 사용할 때, 오른 편에 마실 것을 놓아두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은 나는 커피, 코코아, 녹차를 비롯해서 점점 추워지는 이 무렵엔 대추차나 국화차 등도 심심찮게 즐겨 찾곤 한다. 남이섬의 한 카페에 들렀다가 장미차와 국화차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국화차를 주문했다. 맞은 편엔 단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친구의 코코아 잔도 보인다. 그녀는 한자리에서 칙촉을 열두 봉지나 먹어치우는 과감함을 보여주어 나를 걱정시켰다.  

 

 이번 학기엔 특히 영시 강의가 재미있었다. 학부 때 배웠던 이론을 심화시킨다는 의미에서도 좋았지만, 실제로 몇 작품 번역도 해보고 손수 창작도 해봤기에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르겠다. 과자를 우리끼리만 먹다가 노트를 찢어서 그 위에 웨하스 몇 조각을 갖다 드렸는데, 참 맛있게 드시던 교수님 모습도 떠오른다. 나른한 오후엔 가끔 고개를 활짝 뒤로 젖힌 채 하염없이 졸기도 했는데 교수님은 항상 너그럽고 상냥한 모습을 잃지 않으셨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닮아가는 모양이다.

 


 감자와 다시마를 넣고 끓인 수제비. 요즘 같은 계절이 오면 나는 감자를 넣고 수제비를 해먹자, 굴을 넣고 칼국수를 해먹자, 신김치를 쫑쫑 썰어넣은 콩비지국이 먹고싶다, 등등 갖가지 따끈한 음식 목록을 읊어대며 엄마를 부추긴다.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낸 다음 청양고추를 조금 썰어넣으면 구수하면서도 칼칼한 국물맛이 일품이다. 끓는 육수에 뚝뚝 빚어넣은 수제비, 감자, 파, 그리고 육수를 내기 위해 삶았던 다시마를 썰어넣으면 완성. 집에 있는 재료만으로도 간편하게 해먹을 수 있다. 특히 나는 국물에 고추장을 살짝 풀어 먹는 걸 더 좋아하는데 한참 먹다보면 국물의 따끈함과 청양고추의 매콤함, 고추장의 얼큰함으로 등에 송송 땀방울이 맺힐 때도 있다.

 

 소리소문 없이 가고 있는 가을이 아쉬워, 사진 몇 장을 담아 보았다. 어느 날의 페이퍼엔가에도 썼듯 나는 2월, 6월, 그리고 11월과 다정하게 조우하지 못하는 편이다. 이 곳에도 그새 첫눈이 왔고 이제는 환절기도, 간절기도 아닌 겨울인지도 모르겠다. 채비하는 시늉이 무색하도록 계절은 참 빨리도 온다. 그 부지런과 성실과 고요를 배워야 할 것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게다예요 2007-11-22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이 나이에 네 말 듣게 생겼냐... 어머니 화끈하신대요? 멋있으세요.
첫눈은 못 봤지만, 이미 겨울이 온 듯해요. 그 전에 산이라도 한번 다녀온 걸 다행으로 여겨요. 깐따삐아님이 풍기는 가을은 담백하네요.

깐따삐야 2007-11-23 11:55   좋아요 0 | URL
화끈하신 분이죠. 제 친구는 저희 엄마와 제가 대화하는 모습이 무슨 만담 보는 것 같대요.ㅋ 나이가 들어간다는 조짐인지 담백한 것들이 끌리네요.

Mephistopheles 2007-11-22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언제나 4월이 잔인했었습니다만. 결혼과 동시에 12개월 노슬럼프가 되버렸습니다.^^
애수는 알게모르게 명장면이 꽤 많았던 영화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깐따삐야 2007-11-23 12:04   좋아요 0 | URL
4월, 참 싱숭생숭해지는 시기죠. 메피님처럼 사려깊고 충성스런 마당쇠 어디 또 없을까요? 그럼 저도 진지하게 결혼을 고려해 볼텐데 말이죠.^^ 애수의 명장면은 뭐니뭐니해도 워털루 다리 위의 장면일 거에요. 나이든 로버트 테일러가 행운의 마스코트를 쥐고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 자살을 결심한 비비안 리가 트럭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던 장면...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마음 아픈 장면들이에요.

라로 2007-11-22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박꼬지를 넘 깨끗하게 말리셨네요~. 요즘 호박들어간건 무조건 좋아라 하는데 그중에 최고가 호박꼬지 들어간 떡이라지용~흐흐
글을 읽어보니 깐따삐아님 복이 참 많네요!
저런 어머니 그리 흔하지 않답니다.
딸의 주문대로 음식 해주시는...전 요즘 반성 많이 하는데 게을러서리...^^;;;

깐따삐야 2007-11-23 12:07   좋아요 0 | URL
어릴 때 입맛은 잘 안 변하는지 호박꼬지는 제게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먹거리 중 하나에요. 아주 좋아하죠. 엄마가 솜씨가 참 좋으신데 저는 오로지 먹는 데에만 관심이 있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