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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쳤던 아이들이 그새 고3을 앞두고 있고 그전엔 보지 못했던 진중한 어투로 글을 남겼다. 일찍부터 신소재공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구체적인 희망을 품고 있던 아이는 사범대에 가고 싶어졌다면서 학교를 떠나있는 내게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꿈의 중량을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왜 그 아이에게서 열패감의 뉘앙스를 보았을까. 매우 현실적인 조언과 격려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짠해졌다. 공무원을 하기엔 너무 잘생기지 않았나, 하는 정말 쓰잘데기 없는 우려까지 생겨났지만 그저 일년 후에 너로부터 좋은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다, 고 선생님 같은 마무리를 했다. 아이의 홈페이지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말자'는 문구가 걸려 있었고 아무리 돌아봐도 부끄러운 일 투성이인 나로서는 고3을 앞둔 아이들의 정신상태를 닮아야하지 않겠냐는 야무진(?) 생각을 했더랬다. 참 성실하고 서글서글한 녀석이었는데. 꽃미남들의 눈부신 미소를 앗아가는 이 나라 교육현실에 대해 나 유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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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관계에 초기화 버튼이 있다면 좋겠지만 어디 그런가. 사람마다 지닌 연애패턴이란 것은, 본성의 색조와 경험의 질량과 깨달음의 밀도에 따른 개인차와 시간차를 인정하더라도, 어느만치 고정불변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잘 지내냐는 문자를 받고 생각했다. 그 마음 이해하지만, 쿨한 배려란 네 사전에 없을 거라고. 시시때때로 다정도 병인 나지만 돌아설 땐 일부러라도 냉차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표현은 오히려 독이 되고 마음으로 족할 때도 있는 법. 붙잡는 것이 친절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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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담그신 김장 김치를 지퍼팩에 옮겨담으며 생각했다. 이래 갖고 어따 쓰겠냐고. 처음엔 도와드리겠다고 나선건데 고작 두 포기 넣고 나니 소매단에 고춧가루 다 묻히고 허리마저 아파왔다. 항상 시작은 용감무쌍한데 결말이 유감무쌍이다. 그런데 참 의아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할줄 모르는 친구들은 후다닥 결혼만 잘하는데, 음식도 잘하고 살림꾼인 친구들은 여전히 혼자라는 사실. 고수는 못되고 하수라기엔 시늉만큼은 누구보다 멋진 나는 어설픈 중수 정도? 밥솥이 고장나도 별로 불편을 못 느낄 정도로 대담하게 살고 있는 친구는 이번에 결혼을 할 것 같은데, 자취를 하면서도 열다섯가지 잡곡을 섞은 밥을 내오던 그녀는 왜 혼자란 말인가. 닥치면 다 하게 되어있다, 라는 말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 입 닥치란 소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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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 와서 좀 안이해진 건 아닌가 싶다. 몸둥이가 편하니 사색의 허울을 쓴 잡념만 늘어나는 듯. 예전에 쓴 페이퍼들과 일기들을 보다보니 내가 제법 치열한 인간이었구나, 라는 생각. 나이 먹을수록 치열함은 사라지고 치사함만 끼어드는지 자문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명상록과 행복론 같은 활자화된 지혜가 아니라, 더 많이 상처 받고 더 오랜 불면의 밤 속에서, 치열한 오해와 뜨거운 이해를 반복하는 간극 속에서, 내가 보고 느끼게 되는 것들이 나를 키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 내일에 대한 희망, 내가 할 수 있는 일. 이 세 가지가 행복의 요건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랑받는 데에 신경쓰고, 내일에 대해 불안해 했으며,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욕심을 부렸던 것을 떠올리면서 나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그리하여 결론은 파워포인트로 발표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_-;; 애니메이션 효과음엔 총소리를 넣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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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독일 날씨, 같다고 중얼거렸다. 밖을 보니 곧 눈이 쏟아질 것처럼 꽁해 보인다. 그리고 그 눈의 빛깔은 흰색이 아니라 군청색일 것만 같은 날씨. 내가 왜 특히 11월과 친화할 수 없는가를 생각하다가 아름다운 샤를리즈 테론이 나오는 영화, 스위트 노벰버와 건샌로지스의 노래, 노벰버 레인을 떠올렸다. 난 그것들을 좋아하지 않는가. 게다가 사랑하는 붕어빵, 땅콩빵, 국화빵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도 10월이 아닌 11월이다. 노벰버... 갸냘픈 갈색의 갈대들이 서걱이는 11월. 악토버, 디쎔버보다 뉘앙스도 훨씬 곱고 아련하다. 11월이 없는 달력을 주문제작 하든지 해야겠다고 단순한 생각을 하기도 했었는데 가만 생각하니 11월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도 많았다. 징크스란 내가 믿기 때문에 휘둘리는 것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결국 대개의 모든 일이 그렇지 않던가.
내일은 새로 산 투톤 머플러를 하고 학교에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