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내 그림' 안에 올해 남겨놓은 몇 장의 가을이 있었다.


 우리집에서 대형마트까지는 운동 삼아 걸으면 딱 좋을만한 거리에 있다. 꽃병으로 재활용한 꿀단지에 담긴 국화들은 마트에 다녀오는 길, 인간관계에 대해 투정하는 나를 구박하며 엄마가 툭툭, 꺾어오신 것들이다. 모두가 다같이 보라고 핀 꽃인데 그렇게 마구 꺾어대면 어떡하느냐는 내 말에 엄마는 '내가 이 나이에 네 말 듣게 생겼냐'며 기어이 꿀단지를 장식하셨다.

 


 추석에 시골 큰댁에서 따온 늙은호박으로 우리집은 매년 찰떡을 해먹는다. 호박을 깎아서 말리면 호박꼬지가 되는데 대추, 밤, 서리태 등을 함께 넣고 찐 찰떡은 쫀득쫀득하면서도, 설탕의 단맛이 아닌 호박 고유의 담백한 단맛 덕분에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다.  

 


 사람은 자연을 대하면 저절로 순해지고 착해지는 것 같다. 저렇듯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란 나무 아래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남이섬을 거닐며 나는 세상을 보는 지혜 보다는, 비어 있는 마음의 호젓함을 느꼈다.

 

 올 가을에 영화 '애수'를 다시 봤다. 청초한 비비안 리와 자상한 로버트 테일러의 매력은 여전했다. 풍문으로는 비비안 리가 상대역인 로버트 테일러를 몹시 싫어해서 두 사람이 어색한 연기를 펼칠 수 밖에 없었다는데, 영화는 풍문에 비하면 지극히 애잔하지 않은가. 실제로 비비안 리가 평생을 걸쳐 사랑했다던 로렌스 올리비에는 로버트 테일러처럼 부드러운 신사도, 클라크 케이블처럼 제멋대로인 매력남도, 말론 브란도처럼 섹시한 터프가이도 아니었다. 사진 속의 그는 선이 굵으면서도 의지가 강건해 뵈는 수수한 남자였다. 히드클리프, 햄릿 등을 연기했던 그는 연기의 완벽함에 대한 노력이 남달랐다고. 그렇듯 강렬한 프로의 기운이 아름다운 비비안 리를 단숨에 사로잡았던 걸까.  

 


 향긋한 국화차. 공부를 할 때나 컴퓨터를 사용할 때, 오른 편에 마실 것을 놓아두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은 나는 커피, 코코아, 녹차를 비롯해서 점점 추워지는 이 무렵엔 대추차나 국화차 등도 심심찮게 즐겨 찾곤 한다. 남이섬의 한 카페에 들렀다가 장미차와 국화차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국화차를 주문했다. 맞은 편엔 단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친구의 코코아 잔도 보인다. 그녀는 한자리에서 칙촉을 열두 봉지나 먹어치우는 과감함을 보여주어 나를 걱정시켰다.  

 

 이번 학기엔 특히 영시 강의가 재미있었다. 학부 때 배웠던 이론을 심화시킨다는 의미에서도 좋았지만, 실제로 몇 작품 번역도 해보고 손수 창작도 해봤기에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르겠다. 과자를 우리끼리만 먹다가 노트를 찢어서 그 위에 웨하스 몇 조각을 갖다 드렸는데, 참 맛있게 드시던 교수님 모습도 떠오른다. 나른한 오후엔 가끔 고개를 활짝 뒤로 젖힌 채 하염없이 졸기도 했는데 교수님은 항상 너그럽고 상냥한 모습을 잃지 않으셨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닮아가는 모양이다.

 


 감자와 다시마를 넣고 끓인 수제비. 요즘 같은 계절이 오면 나는 감자를 넣고 수제비를 해먹자, 굴을 넣고 칼국수를 해먹자, 신김치를 쫑쫑 썰어넣은 콩비지국이 먹고싶다, 등등 갖가지 따끈한 음식 목록을 읊어대며 엄마를 부추긴다.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낸 다음 청양고추를 조금 썰어넣으면 구수하면서도 칼칼한 국물맛이 일품이다. 끓는 육수에 뚝뚝 빚어넣은 수제비, 감자, 파, 그리고 육수를 내기 위해 삶았던 다시마를 썰어넣으면 완성. 집에 있는 재료만으로도 간편하게 해먹을 수 있다. 특히 나는 국물에 고추장을 살짝 풀어 먹는 걸 더 좋아하는데 한참 먹다보면 국물의 따끈함과 청양고추의 매콤함, 고추장의 얼큰함으로 등에 송송 땀방울이 맺힐 때도 있다.

 

 소리소문 없이 가고 있는 가을이 아쉬워, 사진 몇 장을 담아 보았다. 어느 날의 페이퍼엔가에도 썼듯 나는 2월, 6월, 그리고 11월과 다정하게 조우하지 못하는 편이다. 이 곳에도 그새 첫눈이 왔고 이제는 환절기도, 간절기도 아닌 겨울인지도 모르겠다. 채비하는 시늉이 무색하도록 계절은 참 빨리도 온다. 그 부지런과 성실과 고요를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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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다예요 2007-11-22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이 나이에 네 말 듣게 생겼냐... 어머니 화끈하신대요? 멋있으세요.
첫눈은 못 봤지만, 이미 겨울이 온 듯해요. 그 전에 산이라도 한번 다녀온 걸 다행으로 여겨요. 깐따삐아님이 풍기는 가을은 담백하네요.

깐따삐야 2007-11-23 11:55   좋아요 0 | URL
화끈하신 분이죠. 제 친구는 저희 엄마와 제가 대화하는 모습이 무슨 만담 보는 것 같대요.ㅋ 나이가 들어간다는 조짐인지 담백한 것들이 끌리네요.

Mephistopheles 2007-11-22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언제나 4월이 잔인했었습니다만. 결혼과 동시에 12개월 노슬럼프가 되버렸습니다.^^
애수는 알게모르게 명장면이 꽤 많았던 영화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깐따삐야 2007-11-23 12:04   좋아요 0 | URL
4월, 참 싱숭생숭해지는 시기죠. 메피님처럼 사려깊고 충성스런 마당쇠 어디 또 없을까요? 그럼 저도 진지하게 결혼을 고려해 볼텐데 말이죠.^^ 애수의 명장면은 뭐니뭐니해도 워털루 다리 위의 장면일 거에요. 나이든 로버트 테일러가 행운의 마스코트를 쥐고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 자살을 결심한 비비안 리가 트럭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던 장면...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마음 아픈 장면들이에요.

라로 2007-11-22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박꼬지를 넘 깨끗하게 말리셨네요~. 요즘 호박들어간건 무조건 좋아라 하는데 그중에 최고가 호박꼬지 들어간 떡이라지용~흐흐
글을 읽어보니 깐따삐아님 복이 참 많네요!
저런 어머니 그리 흔하지 않답니다.
딸의 주문대로 음식 해주시는...전 요즘 반성 많이 하는데 게을러서리...^^;;;

깐따삐야 2007-11-23 12:07   좋아요 0 | URL
어릴 때 입맛은 잘 안 변하는지 호박꼬지는 제게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먹거리 중 하나에요. 아주 좋아하죠. 엄마가 솜씨가 참 좋으신데 저는 오로지 먹는 데에만 관심이 있어서 말이죠.^^;;